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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열두 번째 소극적 표지: 타인에 의한 구원의 확신
사람들이 밖으로 표현한 감정이 참된 성도들의 마음에 들고
호응을 얻을 만큼 크게 감화력이 있고 기쁨을 준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신앙감정의 본질이 어떠한지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참된 성도들에게는 누가 참되게 믿는 자들이고 누가 아닌지를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는. 영이 없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은 신앙을 내면화시킴으로써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체험적으로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느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167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내면에 있는 것을 볼 수 없고, 단지 외적인 표현과 겉모습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성경은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불확실하며 속기 쉬운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한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오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사 11:3). 168 사람들은 보통 판단력이 흐려서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를 너무 성급하게 결정하며 중대한 일일수록 자기의 특별한 판단력과 변별력을 자랑하기 때문에 영혼의 문제를 다루는 상담자가 되기에는 위험하다. 그들은 마치 모든 것이 자기들에게 열려 있고, 분명한 것처럼 생각한다. 그들은 아마도 다음의 세 가지 경우 가운데 한 가지에 속할 것이다. 그들은 체험이 거의 없거나, 판단력이 흐리거나, 너무 교만하고 자신감이 넘쳐서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지혜롭고 신중한 사람들은 틀림없이 매우 주의 깊게 이런 일을 다룰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많은 개연적인 신앙의 모습을 발견할 때,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형제로서 진심으로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성도의 의무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사람들의 사랑을 얻고,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아주 아름답고 밝아 보일 때에는, 제일 수준 높은 사람들도 속을 수 있다. 확실하게 신앙을 고백하여 탁월한 성도라고 인정받던 사람들이 신앙에서 떨어져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일이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흔하게 일어난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내용을 생각한다면, 이런 일에 놀랄 필요가 없다. 전혀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이런 일들이 나타나게 된다. 이 모든 일들이 사람들 속에서 일어나더라도, 그들의 심령에는 작은 은혜의 섬광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들은 많은 신앙감정을 함께 경험할 수도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과 매우 비슷한 감정을 체험할 수 있다. 그리고 형제들에 대한 일종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고 하나님의 완전성과 사역을 찬탄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 또한 그들은 죄에 대한 슬픔, 경외감, 복종, 자기 비하, 감사, 기쁨, 신앙적 갈망을 체험할 수 있고 신앙과 영혼을 유익하게 하는 데 열정적으로 관심을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큰 각성과 양심의 자각이 있은 후 이런 감정들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고 겉으로 보기에 겸비해지는 역사를 경험하는 듯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는 참된 회심자들의 거룩한 감정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모조품인 사랑과 기쁨과 다른 감정들이 위의 감정들을 바로 뒤따라 나올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신앙감정은 높이 고양될 수도 있으며, 엄청나게 눈물을 흘리게 할 수도 있으며, 그 감정들을 체험하는. 사람들의 죄 된 본성을 이기게 할 수도 있고, 신적인 일들을 감동적으로 열렬하고 유창하게 말하게 할 수도 있고, 그런 일을 풍성하게 행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할 수도 있고, 그런 일을 풍성하게 행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감정들은 많은 달콤한 성경의 본문들을 동반할 수도 있고, 약속들을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박히게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감정들은 많은 달콤한 성경의 본문들을 동반할 수도 있고, 약속들을 사람들의 마음에 깊히 박히게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의 입으로 아주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할 수도 있다.
또한 자신들의 무가치함을 크게 외치고, 값없는 은총을 높이며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열렬하게 요구하게 할 수도 있다. 더욱이 이런 감정들은 기도와 설교 말씀듣기와 찬양과 신앙 집회와 같은 외적 의무를 더 많이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할 수도 있다. 한편 이런 감정들은 성도들이 모든 어두움과 의심을 넘어서 독수리의 날개에 오를 때 경험하게 되는, 그리스도인의 확신이 최고로 고양된 상태와 매우 비슷한 확신을 동반하게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분명하게 입증된 것은 이런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곳에 하나님의 성령의 일반적인 사역이 사단의 속임수와 사람의 사악하고 기만적인 심령과 섞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거기에 더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 모든 일들이 부드러운 본성과 훌륭한 교리적 지식, 성도들이 대화하는 방식과 자신들의 감정과 체험을 표현하는 습관, 자신들의 표현들을 잘 조절하는 자연적 능력과 정교함, 청중들의 성향과 이해력에 맞추어 말하는 방식 그리고 훌륭한 교육을 통해 형성된 표현들과 모습에서 위선자와 참된 성도가 얼마나 비슷한지! 당연히, 양과 염소를 잘 구별해 낼 수 있는 것은 심령을 온전히 감찰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스런 특권이다. 따라서 가련하고 연약하며 무지몽매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누가 진정으로 신실하며 바른 사람이고, 누가 그렇지 않은가를 분별할 수 있는 체하는 것은 얼마나 무례하며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교만한 것인지!
사람들이 믿을 만하게 이야기를 할 뿐만 아니라 아주 대단한 모습과 방식으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 이야기에 감동하는 그 때가 다른 사람들의 참된 신앙을 판단할 수 있는 때라고 생각하면서, 그 때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즉 이런 때는 그들의 이야기가 자신의 체험과 조화를 이루는 듯하고, 그들의 이야기로 자신들의 마음이 감동되고, 감화되고, 기쁨을 느끼며, 그 이야기에 끌려 그들을 깊이 사랑하게 되는 때를 의미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확실하거나 완전히 믿을 만한 것이 아니다. 참된 성도는 거룩함을 크게 즐거워한다. 성도들의 눈에 거룩함은 아주 아름다운 것이다. 이전에 가련하게 멸망하고 있던 영혼을 구원하여 새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고 복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참된 성도에게 매우 영광스러운 일로 보인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자기 마음에서 이루어진 일을 그럴 듯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때 그리고 그 사람 안에서 그럴 듯한 거룩함의 모습들을 발견할 때, 그런 겉모습이 실제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성도의 마음이 감동되고 크게 감화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만일 그 사람이 참된 성도들이 감정을 표현할 때 보통 사용하는 것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듣는 사람 자신의 체험에 일치하는 순서대로 많은 것을 하나씩 이야기하고, 확신 있는 자세로 자유롭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때, 듣는 성도가 말하는 그 사람의 체험이 자신의 체험과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외에 그 사람이 많은 감정을 품고 이야기하고, 무엇보다도 듣는 그 사람에게 갈라디아 교인들이 사도 바울에게 그랬던 것처럼 많은 애정을 가지고 말할 때, 듣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강한 영향을 받아, 마음이 감화되고 끌리게 되며, 사랑으로 그를 향해 마음 문을 활짝 열게 된다. 다윗은 아히도벨의 이야기에 감동했고, 한때 그것을 달콤하게 즐겼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히도벨이 넘어져쓸 때, 다윗는 극도로 놀라고, 극도로 실망했다. “나를 책망한 자가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롭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시 55:12-14).
하나님이 성령을 부으시는 때에 신앙을 고백하던 사람들을 봄에 핀 꽃들에 비유할 수 있다. 170 나무에는 수많은 꽃들이 피어 있고, 그들은 모두 아름답고 탐스러운 과실을 맺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 중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 잠시 있다가 시들어서 떨어지는 나무 밑에서 썩을 꽃들도 대부분은 잠시 동안 다른 것들과 같이 아름답고 화려하게 보인다. 그 뿐만 아니라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향기로운 냄새를 낸다. 그래서 안에 숨겨진 힘 때문에 얼마 후에 과실이 되고, 속이 튼튼하고 강해서 뜨거운 여름 태양으로 익은 열매가 될 꽃들과 말라서 비틀어질 꽃들을 우리 눈으로는 구별할 수가 없다. 우리는 꽃의 아름다운 색깔이나 향기가 아니라, 나중에 나오는 익은 열매로 판단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회심자들(스스로 고백에 따라)이 믿음을 이야기할 때, 그들은 아름다워 보이고 매우 향기나 보일 수 있으며, 성도들은 그들이 감동적으로 이야기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성도들은 그 새로운 회심자들의 이야기를 즐길 수 있고 그 이야기 속에서 신적인 향기와 맛을 느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끝나 버릴 수도 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원리와 말씀들에 좀처럼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들에게 더 좋아 보이고 더 지혜로워 보이는, 스스로 고안해 낸 다른 원리를 따르려고 하는데, 이것은 이상한 일이다. 나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신실함을 판단하는 데 그리스도께서 우리게에 주신 다음 원리보다 더 명백한 지침이나 조언은 알지 못한다. 즉 그 원리는 나무를 그 열매로 판단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지, 더 분별력 있고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다른 방법들을 고안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지혜보다 사람의 지혜를 높이는 이런 교만의 결과는 통탄할 정도로 해로운 것이었다. 나는 이 점에서 많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길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들 가운데 일부는 채찍과 전갈로 징계를 받고서야 다시 그리스도께로 돌아왔다. 최근에 일어났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많은 일에서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잘못된 길로 멀리 나간 사람들, 자신의 분별력을 너무 자신만만하게 믿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를 아주 대담하고 성급하게 순간적으로 판단해 버리는 사람들은 참된 믿음을 전혀 알지 못했던 위선자들이었다는 점이다.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주님은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마 13:26)이라고 말씀한다. 플레이블 목사는 곡식과 가라지는 잘 구별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곡식과 가라지는 너무나 비슷해서 곡식에서 싹이 날 때까지는 둘을 구별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제롬(Jerome)의 진술을 인용한다. 171 그리고 나서 플레이블 목사는 덧붙인다. “곡식과 가라지를 구별하는 것이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육신의 눈으로 그들을 구별하는 일은 가장 예리하고 날카로운 사람의 눈으로 특별 은총과 일반 은총의 차이를 구별하는 것보다는 훨씬 쉽다. 위선자들은 성도들이 경험하는 모든 구원하는 은혜의 역사를 모방한다. 위선자들에게서 우리는 영적이고 매우 현명한 눈으로 봐도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구원하시는 참된 은혜라고 쉽게 오해하게 만들 법한 비슷한 역사들을 발견한다.
곡식과 가라지를 구별해 주는 것이 싹 또는 열매인 것처럼, 요단 강을 통과하는 문 앞에 서 있는 심판자가 요단 강을 건너 진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사람과 그 문 앞에서 죽임을 당해야 할 사람을 구별할 때 사용하는 참된 기준도 싹 또는 열매다. 히브리말로 ‘십볼렛(Shibboleth)’이라는 말은 곡식의 싹을 의미한다. 입다의 친구들이 십볼렛을 더 정확하게 발음하면, 그것은 그 안에 과실이 들어 있는 온전한 싹을 뜻하는데, 이것은 입다의 실체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친구들이 맺을 열매를 예표한다. 그리고 입다의 적인 에브라임 사람들의 어설픈 발음은 그들의 텅 빈 싹을 뜻하는데, 이것은 내용이나 열매가 없는 위선자들의 외면적 신앙을 예표한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많이 말씀하는 내용과 일치한다. 즉 죽음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분은 그들이 하늘의 가나안에 들어갈 권리가 있는지 아니면 그들이 죽임을 당해야 하는지 아닌지를 그 사람의 열매로 판단할 것이다.
우리는 제사장이 문둥병을 구별하는 의식에서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많은 경우에, 그 사람의 몸에 나 있는 환처를 아주 면밀히 조사하고서도 제사장은 그 사람이 문둥병 환자인지 아니면 깨끗한지를 구별하기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7일 동안씩 금고하면서 그 환처가 어떻게 되는지를 보고서야 판단할 수 있었고, 그 환처에서 자라나는 털을 통해 문둥별의 유무를 구별할 수 있었다. 그 털은 마치 문둥병이 맺은 열매와 같았던 것이다.
이 논의를 마치기 전에 최근에 일부 사람들이 오도했던 이상한 주장에 대해 몇 마디 하고자 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사람들의 사랑이 특이한 방식으로 자신들에게 흘러나오는 것을 통해 마치 하늘에서 직접적인 계시가 떨어지는 것처럼, 그 사람들이 영적으로 좋은 상태에 있는지 어떤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다른 사람들의 사랑이 매우 크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 사랑을 느끼는 사람은 그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라면, 사랑을 주신 분은 분명 하나님의 성령일 것이고,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를 확실하게 아시며, 진리의 영이신 성령은 그 사람들에게 특이한 영향을 주셔서 그들의 사랑이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흘러 나가도록 하는 것을 기뻐사힌다는 것이다. 아무도 속이지 아니하시는 거짓이 없으신 성령은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분명히 알고 계신다. 비록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이 당신의 자녀가 아님을 아시지만, 사람들이 그들 속에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한다면 마땅히 그들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 의무인데 이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지 아닌지를 다지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논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면, 그것은 선한 일이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확실히 사랑을 이루시는 분이시므로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의 성령은 그런 경우에 그 사람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도록 도우심으로 그가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지키실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있는 사랑이 특이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흘러나온 것인데 만일 성령께서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모르셨다면 하나님의 성령이 자기에게서 사랑이 흘러나오도록 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심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님을 아신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근거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그런 경우에는 그들을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되는 모든 사람들을 훨씬 더 친밀하게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의 온 힘을 기울여서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와 친밀하고 소중한 사람들을, 그리스도 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매우 친밀한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다라서 우리가 그들을 그렇게 사랑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령으로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우리의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만 한다. 그러면 어떤 특별한 경우에, 하나님의 성령은 거짓 없이 우리 기도에 응답하셔서 우리의 의무를 다하도록 힘을 주실 수 있을까? 만일 성령께서 그렇게 하실 수 없다면, 하나님의 성령은 어떤 경우에는 당신의 백성 스스로 의무를 다하는 것을 돕지 않으셔야만 한다. 왜냐하면 거짓을 행하지 않고서는 그렇게 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실히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에 주권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당신이 기뻐하시는 때에 그리고 당신이 기뻐하시는 경우에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다하도록 힘을 주실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람들을 매우 친밀하게 사랑하도록 하시는 데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기에 앞서 다른 목적이 있으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무를 다하고, 무한히 두려운 죄악에 빠지지 않게 하시려는 자비로운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비를 나타내시지 말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일 내가 집을 멀리 떠나 있는데, 내가 없는 동안 집에 화재가 났지만, 가족들은 놀랍게도 모두 화염을 피했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고 하자. 내가 들은 그 이야기의 모든 정황이 매우 믿을 만하다면 비록 그 이야기가 진정 사실이 아닐지라도, 내가 하나님께 크게 감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가 죄를 짓는 것이다 따라서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만일 기뻐하신다면 그런 경우에 나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내가 옛날보다 더 힘있게 나의 의무를 다하도록 힘을 주시면서도, 거짓되게 속이지 않으실 수는 없으신가?
아주 분명한 것은 오류나 실수가 은혜가 역사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고 그것이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로마서 14장 6절은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고 말씀한다. 사도는 잘못되고 불필요한 규정 때문에 율법적으로 부정한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지만 매우 분명한 것은 잘못된 판단과 행위로도 참된 은혜가 역사하는 기회를 삼을 수 있고, 주님에 대한 참된 존경심을 나타내는 기회가 될 수 있고, 특별히 주님께 참된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무오하신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참되고 거룩한 역사들이 일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의 성령이 이런 거룩한 역사를 어느 정도로 크게 이루실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확실히 우리의 영역 밖의 일이다.
그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사랑으로 그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이성이나 성경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닐 뿐더러, 반 성경적이고 성경의 말씀들과 정반대 된다. 성경은 다른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를 그렇게 판단하라는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않고, 주로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열매들로 판단하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사랑으로 그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단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다른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우리는 알 수 없다고 명백하게 가르치는 성경에 배치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장 17절은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고 말씀한다. 로마서 2장 29절은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말씀한다.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는 마지막 구절에서 사람이 내면적으로 유대인인지 아닌지(겉으로 드러나는 표지로 쉽게 알 수 있는 것처럼)를 판단할 때 사람의 무능력함을 지적하고, 결정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일임을 보여 준다. 이 사실은 같은 사도의 고린도전서 4장 5절 말씀으로도 학인된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사도는 이전의 두 구절에서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다시 사도는 로마서 2장에서 특별히 자신이 거룩하다고 크게 자만하면서 하나님을 자랑하며, 자신들의 분별력을 확신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다른 것들을 시험하는(롬 2:18의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에 대한 해석) 사람들을 향해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위의 사실을 한 번 더 확증해 준다. 그들은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면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었다(롬 2:1, 17-20).
위대한 사도인 베드로도, 비록 실루아노가 그 당시에 매우 탁월한 그리스도의 종이요, 전도자요, 하나님의 교회에 유명한 별이며, 사도들과 친밀한 동료였음에도 불구하고(고후 1:19; 살전 1:1; 살후 1:1), 실루아노에 대해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이라는 말 이상은 하지 않았다면(벧전 5:12),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그들의 생각은 얼마나 교만한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