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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과 바둑 그리고 한옥 ( 4 - 2 < 구들 > )
"한 달에 오천만원을 가지고도 부족한 사람이 있고, 오십만 원을 가지고도 잘 먹고 잘사는 사람이 있다."*주1) 는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리는 그동안 '경제 논리'에 이끌려 숨 가쁘게 앞만 보며 달려가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세상은 온통 황금만능주의에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황금에 눈이 멀어 엄청난(?) 결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삼모사(朝三暮四)한 MB에게 속은 원숭이가 되어 있었다. 다윈이 기가 막힐 일이다.
우리의 신앙이 되어버린 경제논리, 다수결 원칙의 서구 자유 민주 자본주의는 그 뿌리가 그리스 로마의 아고라, 포럼 즉 토론 문화로 대변되는 광장문화이다. 이제는 신앙이 되었던 광장마저 빼앗겨 버렸다. 돈에 눈이 멀어 사이비(似而非)에 속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니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사실 광장은 한마디로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힘의 논리가 지배되는 문화이다. 광장문화는 호전적(好戰的)인 문화로 힘의 논리가 그 저변에 항상 깔려 있다. 광장에서 목소리 적은 사람의 말은 넓은 광장과 많은 군중 속에 그만 묻혀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생존 법칙은 목소리 큰 사람만 뒤따르면 된다. 이것이 다수결의 법칙인 것이다. 광장은 전쟁을 위해선 필요불가결한 장소이다. 그러므로 광장문화는 전쟁문화인 것이다.
전쟁문화가 지배되는 세상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주먹 센 놈들의 세상이다. 따지고 보면 법(法)이라는 것이 힘없고 머리 좋은 놈들이 주먹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러나 힘의 논리라는 것이 항상 비교우위가 존재하므로, 주먹 센 놈과 힘없고 머리 좋은 놈들이 야합(野合)하여 힘없고 머리 나쁜 놈들을 머슴으로 부려 먹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문화 속에서 힘없고 머리 나쁜 놈들의 생존 법칙은 무엇일까. 몰래 훔치던가 빌붙어 얻어먹던가 이도저도 아니면 가미가제식 테러 같은 방법일 것이다. 종교(宗敎)라는 것도, 삶과 죽음 그리고 사후세계에 대한 의미를 찾는 것인데, 사이비 종교인에 의해 성전(聖戰)으로 내몰아 비교우위를 위한 보다 큰 힘을 얻는 방편으로 이용된다.
잃을 것이 많은 자는 잃는 것에 가장 큰 두려움을 느낀다. 잃을 게 없는 자는 두려울 게 없다. 북한의 생존방식 - 핵개발은 죽어도 혼자 죽지 않겠다는 것이다 - 이 나름대로 통하는 이치이다. 현시대에도 북한 같은 체제가 별 탈 없이 유지될 수 있는 힘의 근원은 무엇일까. 여러 이유 중에 <언론> 통제가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이다. 그만큼 언론의 힘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갖고 있다. '알권리'를 담보로 사이비 종교와 같이 혹세무민(惑世誣民)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알권리'란 사실 사이비를 구별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여야 하지 않을까?
전쟁문화 속에서 평화는 존재할 수 없다. 끝없는 전쟁만이 있을 뿐이다. 가끔 평화로 위장된 휴전(休戰)이 있을 뿐이다. 가장 힘센 놈이 왕이다. 힘센 놈의 말이 곧 법이다. 그래서 왕은 항상 '광장공포증'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여 편하게 앉아 쉴 수가 없기 때문에 서서 전쟁을 준비하고 있어야한다. 서서 생활할 수밖에 없는 이것이 입식문화(立式文化)인 것이다.
앉아 있다가도 화가 나면 벌떡 일어난다. 화가나 싸우고자 덤비는 자를 진정시키기 위해선 일단 앉혀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마음이 가라앉는다. 이렇듯 호전적인 입식문화와 대비되는 것은 좌식문화(坐式文化)이다. 따라서 좌식문화는 전쟁문화와 대비되는 '명상(瞑想)' 또는 '참선(參禪) 문화' 이다.
감정이 격양된 사람을 달랠 때 우리 한국 사람은 우선 그 사람을 앉히고 본다. 핏대를 올리고 싸우는 사람을 말릴 때도 앉아서 얘기하자고 끌어 앉힌다. 앉는다는 것은 우리 한국 사람에게 있어 격앙된 감정을 진정시키는 효율 높은 비법이다. 마치 성난 우뢰를 피뢰침으로 접지(接地)시켜 해소하듯이 엉덩이를 접지시키면 성난 감정이 땅속으로 스며 나가버린다.
주변 도구에 대해 인간의 자세나 동작을 쾌적하게 하고 편의하게 하는 인간공학을 에고노믹스라 한다는데, 서양 사람들은 육체적 쾌적이나 편의만을 노리는 육체적 에고노믹스의 한계를 못 벗어나지만, 우리 한국 사람은 정서적, 정신적 에고노믹스에 도사들이 돼 있다. 옛날 마을에서 향약(鄕約)을 어기거나 서양에서 분부를 어기거나 하면 벽을 보고 앉혀두고 자신의 행동을 반성시키는 벌칙이 있었다. 이를 면벽좌책(面壁坐責)이라 했는데, 앉는다는 것으로 자신을 뉘우칠 수 있는 정신적 에고노믹스를 현명하게 응용한 것이다.
... 하체 부분을 가장 많이 접지시키는 앉음새로써 얻어진다는, 만상만법(萬象萬法)이 귀일하는 선(禪)의 세계도 이 정신공학이랄 수 있다. 이교도들이 석가모니에게 `불(佛)'이 뭐냐고 물었을 때 바로 자신이 앉아 있는 자세를 가리키고 이것이 `불'이라 했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출처 ; 한국의 좌식문화 http://blog.daum.net/kadosu/2294689
우리의 단군신화가 '좌식문화'와 '입식문화'의 분기점임을 시사(示唆)하는 것은 아닐까? 호전적인 호랑이 토템인 입식문화와 좌선(坐禪)적인 곰 토템의 좌식문화가 분리되는 사건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한단고기'의 시대구분으로 살펴보면, 단군왕검시대 이전의 한인 한웅 시대까지는 흔히 말하는 '제정일치(祭政一致) 시대'로서 종교와 정치, 다시 말하면 종교의 참선[명상] · 좌식 문화와 정치의 힘[전쟁] · 입식 문화가 서로 일치하던 사회였다. 그러다가 단군시대를 기점으로 <제(祭)>와 <정(政)>이 분리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호랑이 토템족의 일부가 한족(漢族)의 조상으로 남고, 일부는 서쪽으로 이동해 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근거로 '복희(伏犧)와 여와(女蝸)'가 한족의 조상신이 되었고, 유대교의 조상신 '여호와'와 '여와'의 관련성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여와'가 '여호와'로 변질된 이면은 힘의 논리에 의한 당연한 귀결이다. 여호와신은 매우 호전적인 신이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호전적인 입식문화와 육식주의자인 호랑이 토템족은 쑥과 마늘만으론 견딜 수 없었을 것이며, 서서 생활하는 사람에게 가부좌는 참기 어려운 조건이었을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우리처럼 앉을 수 없다. 무릎 구조가 입식으로 굳어져 억지로 앉는다면 무릎 꿇고 앉는 자세만이 가능하다. 뛰쳐나갈 수밖에 없는 당연한 귀결이다.
명상문화는 좌식문화와 마당문화를 낳았다. 전쟁문화는 입식문화와 광장문화를 낳았다. 그리하여 좌식문화는 '마음공부'가 발달한 음(陰)의 문화이고, 입식문화는 '힘공부 - 힘을 얻는[기르는] 공부'가 발달한 양(陽)의 문화이다. 광장도 큰 마당인데 마당문화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는 대소의 문제가 아니라 소통의 문제이다. 광장문화는 힘의 논리에 의한 소통문화이고, 마당문화는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마음에 의한 소통문화이다.
좌식문화는 느림의 문화이고, 입식문화는 빠름의 문화로 달리기를 못하는 사람은 속도전에서 숨이 막혀 견디질 못함은 당연하다. 좌식문화는 '구들문화'를 낳았고, 입식문화는 '벽난로문화'를 낳았다. 혹자는 구들이 좌식문화를 낳게 했다고도 하지만, 입식문화 속에도 구들이 있고, 일본처럼 좌식문화에서도 구들이 없듯, 더욱이 구들 탄생 시기가 인류의 문화역사 이후로 미루어 좌식문화의 산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그러나 탄생의 선후를 떠나 상보(相補) 관계로 서로 더욱 발전하며 고착시켰을 것이다.
구들이 다른 나라에도 많이 있었던 흔적으로 *주2) 우리 겨레만의 소산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남방계의 마루문화와 북방계의 구들문화를 하나의 집에 공존할 수 있게 합일한 한옥의 특성만을 우리의 것으로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벽난로와 구들의 시초는 다르지 않다고 본다. 또한 그 시대에도 서로 문화교류는 있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화롯불이 있지 않은가. 화로불은 좌식문화 식의 벽난로로 생각된다. 하여 입식문화는 벽난로로 발전시켰고, 좌식문화는 구들로 발전시켰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단군신화를 입식과 좌식문화의 분기점으로 이해하고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들은 우리의 것이다.
먼저 구들의 명칭을 집고 넘어 가자. 우리말 구들을 한자로는 온돌(溫突)이라 표기하는데, 온돌(溫乭)로 오해하면서 기인된 선입견에 의해 구들을 '구운 돌'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 우리말에서 모음의 전환이 자유롭게 이루어지지만, 돌(石)은 '들'로 변환된 예를 찾기 힘들뿐더러 '들'에는 어디에도 '돌'의 뜻이 남아 있지 않다. '들'은 '들판'에서 보듯 평평한 땅을 뜻하는 말이다. 구들장 또는 구들돌이라는 구들 구성요소의 단어가 있듯, 구운 돌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구들은 무슨 뜻인가. 별로 어려울 것도 없다. 굴뚝에서 보듯 그냥 '굴들'이다. '굴 + 들'로 '굴로 된 평평한 땅'이라는 뜻이다. '굴들'에서 'ㄹ'음이 탈락되어 '구들'이 된 것이다. 아마도 처음에는 '불굴들'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불굴들 > 불구들 > 구들의 변천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구들 시스템에서 당연한 불은 생략되어도 의미전달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
한자어 溫突을 살펴보자. 溫은 이해가 되는데 突은 의아하다. '突'字는 穴(혈)과 犬(견)이 모두 의미 부분인 회의자로 개[犬]가 구멍[穴] 속에서 갑자기 뛰쳐나온다는 뜻이라 한다. 그래서 ① 부딪칠 (돌) ② 갑자기 (돌) ③ 내밀, 우뚝할 (돌) ④ 굴뚝 (돌) ≒ 돌( 土변의 突 ) 등의 字解가 있다. *주3) 穴은 이해가 가는데 犬과는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구들 구성요소 중 '개자리'에 대한 용어 설명을 보면, 불타고 남은 재가 모이는 자리 또는 추울 때에 강아지나 개가 들어가 잠을 잔다고 하여 개자리라고도 한다. 무거운 분진을 모으고 열기의 확산과 순환을 위한 골자리로 볼 수 있으며 부넘기 뒤에 있는 구들개자리와 고래가 끝나는 곳에 있는 고래개자리( = 회굴, 머리골 ) 그리고 굴뚝 밑에 있는 굴뚝개자리가 있다.*주4)고 되어 있다. 이상의 설명을 보면, 따뜻한 穴에 있던 개가 불을 땔 때 깜짝 놀라 뛰쳐나온다는 '突'자가 이해가 될 뿐 아니라 우리나라 구들에서 만들어진 한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아울러 구들이 '굴들'의 뜻임이 확신되어질 것이다. 구들의 시스템으로 미루어 단순히 지엽적인 구운 돌(구들장)이 아니라 시스템 전반을 아우르는 '굴들'이 보다 훨씬 타당할 것이다.
의식주(衣食住) 중 주에서 중요한 실내 난방으로 우리민족은 바닥난방법( underfloor heating system ) 기술인 구들을 유산으로 계승하여 왔다. 바닥난방법은 사람에게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특히 구들난방은 아궁이에 열을 가하여 바닥 아래의 공간(고래)을 따라 열이 이동하면서 바닥에 열에너지를 저장하고, 이 에너지가 서서히 방열하면서 실내를 따뜻하게 유지한다. 이는 복사와 전도, 대류의 열전달 3요소를 모두 갖는 독특한 방법으로, 인류 역사적으로 초과학화된 현대에도 우리 민족만의 독자적이며 독창적인 가장 뛰어난 난방법이다.
- 온돌 그 찬란한 구들문화, 김준봉 · 리신호 · 오홍식 지음, 청홍, p.38
우리는 흔히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 졌다고 한다. 집도 소우주로 몸과 마음이 존재한다. 집의 몸은 당연히 집채이며, 마음은 성조신과 집주인이다. 집의 성조신과 집주인이 하나가 되어 온전한 집의 마음이 되고 몸과 마음이 하나 되어 천지와 하나로 통한다. 자연과 하나 되는 이치이다.
집 자체가 독립적인 생명체가 되어 '생체주기(life cycle)'처럼 자생능력을 가지고 유지해 나간다. 이러한 자연생태계의 순환 원리로 지어진 집을 친환경 생태건축이라 한다. 생태건축은 불과 30년 전인 1979년부터 시작된 운동이지만,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이미 자연과 공생하는 풍수사상으로 지어진 집일뿐이다.
우리의 '몸'은 자체적으로 면역력과 자가 치유력의 시스템이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집의 몸채도 자생능력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집의 심장이며 순환계인 구들시스템이다. 구들은 집의 근육과 피부와 같은 황토와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不可分)의 관계가 있다.
황토의 우수한 습도 조절 능력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황토의 높은 탈취율(脫臭率)은 실내 음식냄새나 기타 악취를 흡입하여 쾌적한 공기환경 조성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주5) 그러나 무엇보다도 황토의 우수성은 표면온도 40℃에서 92% 이상으로 측정되는 원적외선 방사율이다. 이러한 황토의 특성을 알아보자.
다량의 산소를 함유하고 정화 능력 및 탈취 성능이 뛰어나며 열을 받아 40℃로 되면 인체에 유익한 원적외선 방사에너지(8~12㎛)가 92% 이상 방출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원적외선은 인체의 수분을 알맞게 유지시키는 건습작용을 가지고 있으며, 성장 및 대사와 배설을 촉진시키고, 체온 유지 기능과 냄새 중화 기능 등의 작용으로 세포조직의 활성화를 돕고, 숙면과 통증 완화 등 생명 활동을 증강시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흙 속에서 활성이 이루어지는 효소는 50여 종이 있으며, 이들 중 프로테아제의 경우를 보면 동물성 폐기물을 가수분해하여 무기질로 분해시키고, 체세포 중에서 암, 종기같이 부패한 세포를 파괴하는 것으로 연구되었다.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의서(醫書)인 동의보감, 본초강목, 향약집성방, 증류본초, 명의별록, 신농본초경, 양청내관 등에 의하면 황토는 그 약성이 크고 우수하며 독을 해독하는 해독제로 사용되어 왔다고 적혀있다.
우리나라 황토에서 자란 산삼, 인삼, 은행잎 등 각종 농임산물은 그 약성과 맛의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또한 전 세계에 널리 사용되어 왔던 페니실린도 흙 속의 페니실륨에서 얻은 것이다. 아궁이 불목을 황토로 하여 산에서 자란 나무만을 태우면 그 흙이 바로 한방 약재(복룡환)가 된다. 대게 양지쪽의 황토는 쓴맛이고 음지쪽의 황토는 단맛일 경우가 많다. 우리조상들이 오래 전부터 사용하던 황토는 건축재료, 요업 원료, 토양 개량재로 활용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황토방이나 황토침대, 화장품, 토담집, 의약품 등 그 용도가 다양해지고 있다.
황토는 건축 현장에서 나온 것을 모아서 사용하면 되고 모자라면 가까울수록 좋다. 그 황토 속에 남아있는 미생물의 개체수와 종류 등이 다른 미량원소들과 마찬가지로 동일하므로 건축 현장의 자연과 충돌이 없고 조화를 이루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 순조롭게 되어 자연으로부터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다. 흙마다 고유의 맛과 냄새가 있을 뿐 아니라 그 흙 속에 섞여있는 여러 가지 유기물질과 무기물질 등이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 앞 책, p.115 ~ p.116
집에 사람이 살지 않으면 죽은 집이다. 마음이 없는 몸이 어찌 살아있다 할 수 있겠는가. 폐가를 보라. 사람이 살지 않으니 쉬 망가진다. 구들은 집안에 사는 사람을 따뜻하게 하며, 기운을 북돋우어, 건강하고 활기차게 한다. 항상 따뜻한 정(情)이 넘쳐나며 기운이 솟아나는 사람이 사는 집, 이런 마음을 가진 집은 어떠한 집일까?
구들은 황토와 나무 그리고 불의 앙상블(ensemble)에 의한 '불 삼중주(三重奏)'이다. 인류가 불을 발명한 이래 불을 예술로 승화시킨 문화가 구들인 것이다. 과학을 예술로 승화(昇華)시켰다고 할까? 불을 종교화한 일명 '배화교(拜火敎)'라 불리는 '조로아스터교'도 있다. 우리도 '불씨'를 소중히 하던 전통이 있었지만, 불의 모든 것을 이용한 구들을 탄생시켰다.
문명은 물을 다스리면서 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는 물의 양면성이 주는 극명함 때문이라 생각된다. 우리 몸의 80%가 물이듯 그 중요성은 생명현상의 대부분 모든 것이다. 물이 넘쳐 수마(水魔)가 되면 모든 것을 한순간에 앗아 간다. 그리고 물이 없으면 또한 살 수가 없다. 하여 물의 저장과 범람을 다루면서 문명이 시작되었다.
불도 물과 같다. 어쩌면 물보다 불을 다스리기가 더 어렵다. 하여 새로운 불 기술의 발명이 그 시대의 주인공이 되었다. 석기시대 이후 불 기술에 따라 청동기, 철기 시대로 발전되었다. 청동기, 철기의 구분은 당연히 불의 강도에 의한 무기 제작 기술에 다름 아니다. 불은 강도에 따라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우리 문화는 그 강도에 따라 에밀레종의 주조술과 고려청자의 도자기 그리고 구들 등으로 꽃 피웠다. 이렇게 불을 다스림에 있어 능수능란했다.
우리가 가장 편하게 느껴지는 불의 세기는 어느 정도일까. 아마도 모닥불 정도 이지 싶다. 모닥불에선 불의 느낌보다는 정감(情感)이 먼저 느껴진다. 만져도 뜨겁지 않을 것 같은, 만져 보고 싶은 그런 불이다. 그러면 벽난로 불은 어떨까. 왠지 닿으면 데일 것 같은, 불타는 정염(情炎)으로 다가온다. 구들의 아궁이 불은 모닥불 정도의 불 세기이다. 그리고 벽난로 불보단 조금 약하다. 불기운이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불 삼중주를 들어 보자. 아궁이에 장작을 놓고 모닥불을 피우듯 불을 지피면 이내 곧 그 따스함이 다가온다. 먼저 환상적인 무대 연출을 위해 연기는 가랫굴을 통해 안개를 뭉게뭉게 띠운다. 불꽃은 점점 펴지며 유혹한다. 차마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이내 화르르화르르 신음한다. 훨~ 훨~ 불 길 소리에 쿵타닥 장작 타는 소리가 장단 맞춘다. 절로 흥에 겨워 어느덧 클라이맥스(climax)로 치달으며, 밥 익는 냄새로 김을 빼며 절정(絶頂)을 음미(吟味)한다 …… . 그리고 조용히 아쉬운 듯 수줍은 듯 숯으로 뜸 들이며 갈무리한다.
굴뚝을 세우지 않고 건물의 기단 사이로 성글게 구멍을 내어 연기가 빠져나오게 하는 '가랫굴'이 있고, 아니면 낮은 키의 '앉은뱅이 굴뚝'이 있다. 이런 집 마당이나 뒤꼍에는 대개 자그마한 연못이나 우물이 있었고 그 주변의 땅위에는 습기가 있게 마련이다. 바람 없이 조용한 아침저녁에 불을 때어 나오는 연기는 땅바닥으로 깔리고, 점차 안개처럼 구름처럼 모여 마당을 덮으면 마치 구름 위에 앉아 있는듯하니 시쳇말로 '엔돌핀'이 팡팡 쏟아져 내리지 않겠는가! 신선놀음이요 귀족문화다. 바닥을 훑는 연기가 유해한 곰팡이나 병균들을 청소해 주는 것쯤이야 내버려 두어도 알아서 해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동서양을 막론하고 구름 위는 신선들의 공간이고 천당이며 꿈속의 세상이다. 환상적인 무대연출을 위해서도 인공안개를 뿜어 흘린다. 이 정도까지 오면 차원이 다른 예술적 수준이라는 말이다. 송강 정철을 위해 지었다는 송강정(松江亭)을 보면 굴뚝을 밖으로 뽑지 않고 마루 아래에 숨겨 놓았다. 솜털 같은 연기가 감싸고 있는 정자 위에 앉아 있다고 상상해보라!
- 앞 책, p.51 ~ p.52
이쯤 되면 가히 종합예술이다. 이제는 꿈에서 깨어나 현실적인 구들의 과학 세계에 들어가 보자. 먼저 의학관에 가보자. 동양 의학에서 가장 이상적인 건강 상태인 '두한족열(頭寒足熱)'과 반신욕의 원리인 '수승화강(水昇火降)'이 있다. 아랫목에 앉아 반식욕을 하고, 잠 잘 때는 머리를 윗목에 두고 다리를 아랫목으로 뻗어 잠을 잔다. 그래서 혹 시원한 곳을 윗목이라 하는 것이 아닐까?
옛날 허름한 한옥은 위풍이 세서 한겨울 추위에 떨었던 아픈 기억으로 우리는 아파트를 그렇게 좋아하는 지도모르겠다. 그러나 이제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집안의 모든 창문을 숨 쉴 틈도 없이 막아 한겨울에도 반바지, 반팔 옷을 입고도 따뜻하게 생활할지는 모르나 탁한 공기에 숨이 막힐 일이다. 자주 환기를 시켜 줘야 하지만 그것도 귀찮아 공기 청정기 같은 것을 설치한다. 허나 자주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 시켜줌만 못할 것이다. 하기야 밖의 오염된 공기나 별반 차이가 없으니 오히려 청정기가 나을 수도 있겠다.
적당하게 위풍이 있는 한옥은 아랫목과 윗목의 온도차에 의한 대류현상이 일어난다, 이로 말미암아 구들방은 두한족열의 건강조건상태와 습도 조절 기능 및 통풍으로 항상 쾌적한 환경이 조성된다. 제대로 숨 쉬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덧붙여, 겨울은 겨울답게, 여름은 여름답게 지내야 우리 몸의 면역력도 키울 뿐만 아니라 보다 건강한 삶이 되는 것이다.
구들방 위에 서 있으면 발바닥이 따뜻하고 앉으면 아랫도리의 혈액순환을 촉진시키면서 심리적으로도 쾌적함을 느끼게 하여 기분을 좋게 한다. 의학용어로 '피부혈관 반사'가 잘되어서라고 한다. 기분이 좋으면 뇌에서 엔도르핀이건 도파민이건 몸에 좋다는 홀몬을 위시한 화학물질을 넉넉히 만들게 해주어 면역력이나 병균 퇴치력을 강화시키고 건강을 유지하게 한다고 되어 있다. 또 앉은 상태로 아궁이에 불을 피울 때에는 아랫도리가 원적외선에 쪼여져 부인병의 예방이나 치료에 좋다는 말은 이제 상식이 될 정도다.
구들방의 복사열은 공기 중 수분 함량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므로 가습장치가 따로 필요 없다. 복사열의 전달과정에서 먼지와 진드기가 공기를 타고 순환하는 것을 줄여주므로 천식환자에게는 특히 유리하다.
구들방 아랫목에는 이불 같은 것을 한 장 깔아 놓아 보온적 측면에서 다양하게 활용한다. 그 밑에는 잘 묻어놓은 밥그릇이 주인을 기다리고, 추운 날 방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거의 다 누구나 이불 밑에 손을 넣어보고는 슬며시 그 속으로 들어가 앉는다. 많이 춥다 싶으면 아예 들어가 눕기도 한다.
두한족열(頭寒足熱)의 가장 이상적인 건강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물기운은 내려오고 불기운은 올라가야 생명력이 활성화 된다는 말이다. 수승화강(水昇火降)이다. 거꾸로 되면 노인화 현상이다. 봄, 여름 한창일 때 나무는 뜨거운 태양열을 뿌리로 내려 아래에 열을 주고 뿌리에서 흡수한 물기를 나무 위로 올려 성장하게 한다. 가을이 되어 그 뜨거운 기운이 아래로 내려오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머리의 더운 기운이 아래로 못 내려오면 그대로 낙엽이다. 백발이 퍼석하게 성성해 진다. 따라서 머리가 시원해야 스태미나가 왕성하다고 한다.
온돌은 또한 실내에서 재나 먼지 등이 발생되지 않아 폐기관의 건강에 문제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으며 최근 유럽의 몇몇 병원에서는 중환자실에 구들을 응용해 사용할 만큼 그 효과도 뛰어나다고 한다.
근래 들어서 현대 질병 중 왜 폐암 같은 질병에 걸리는 이가 많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 앞 책, p.242 ~ p.244
다른 과학관으로 가보자. 열역학 분야는 처음 예문을 살펴보았듯이, 구들은 열전달 3요소를 모두 이용한, 유례(類例)를 찾기 힘든 우리의 독특한 바닥난방시스템이다. 복사, 전도 그리고 대류의 열전달 3요소에 의해 이루어지는 실내 온도는 좌식뿐만 아니라 입식 생활도 아우르는 조건을 충족시켜준다.
쾌적한 온도 범위를 살펴보면, 좌식생활에서 방바닥 표면온도는 체온보다 1~2℃ 높은 38℃, 실온(방바닥에서 1,5m 높이)은 18℃에서 20℃ 정도이고, 입식생활의 경우는 각각 24℃, 18℃이다. 구들방의 각 위치별 온도를 측정해 보면(한옥 흙집), 바닥표면온도(표면 매설 센서)는 38℃에서 40℃ 범위이고, 표면과 5mm 떨어진 상부의 온도는 24℃에서 26℃ 범위, 실온은 15℃에서 18℃(1.5m 이상은 거의 변화 없다) 범위이다. 따라서 좌식생활과 입식생활 모두 적합하다.
- 앞 책, p. 64
구조 역학 쪽을 살펴보자. 아궁이에서 부뚜막, 고래를 지나 굴뚝개자리와 굴뚝에 이르는 구들의 구조는 연기의 열까지도 남김없이 최대한 이용하는 시스템이다. 음식과 난방을 동시에 해결하는, 다시 말해 열효율을 극대화시킨 구조이다.
생태건축으로 구들을 보자.
불은 꺼지고 나서도 혜택을 준다. 바로 '식은 재'다. 잿물 들인 옷을 입고 있으면 들뜨거나 삿된 마음이 들지 않는다 하고, 이름 하여 '뒷간' , '헛간' , '잿간' 으로 불리는 재래식 화장실에서는 고통스런 냄새를 없애주며, 잘 삭은 거름으로 땅심을 키워주는 일석삼사조(一石三四鳥)의 물건이 바로 재다. 불 피우기의 뒤풀이로 나오는 숯이야 더 말할 나위 없겠다. 목초액은 또 어떤가! 천연농약이며 방부제로도 쓰이고 약재로도 쓰인다.
연기가 맵다고? 고추도 맵다. 적당히 매우면 맛이 있지만 과하면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을 그 맛으로 전해주는데, 시시한 세균이나 벌레가 범접 못하게 해주는 연기를 무조건 기피할 일은 아니다. 게다가 나무 연기와 공장의 매연, 분진은 그 종자부터가 다르다. 성분이 다르다는 말이다.
- 앞 책, p.46 ~ p.47
구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버리는 것 하나 없이 환경폐기물 하나 남김없이 자연 생태계의 순환 원리와 완벽하게 일치되어 흐르는 시스템이다. 서양의 어느 건축에서 이처럼 완벽한 생태건축을 찾을 수 있겠는가?
발효과학 쪽은 어떤가.
항암물질이 상당량 들어 있는 것으로 밝혀진 된장, 청국장 등의 발효 음식의 기본이 되는 메주는 바로 구들방 아랫목에서 만들어져 왔던 음식이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러한 발효과학을 간직할 수 있게 하여준 원동력이 바로 구들이다. 콩나물을 키워 한겨울에도 신선한 채소를 먹고 부족하기 쉬운 비타민 등을 공급받을 수 있었던 것 또한 이 구들문화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따뜻한 아랫목 없이 식혜를 만들 수 있었겠는가?
- 앞 책, p.62
여기서 우리는 콩나물의 발명을 무심히 간과해서는 절대 안 된다. 요즘은 온실이 발달되어 사시사철 싱싱한 채소를 먹을 수 있고, 콩나물이 너무 흔하고 싸구려 같아 간과하기 쉽지만, 먼 옛날 겨울철 야채 하나 볼 수 없는 혹한지대 사람들을 상상해 보라. 콩나물 발명의 위대함이 더욱 더 새롭게 느껴질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구들문화는 우리 사회 의식주(衣食住) 전반에 스며져 있다. 한복이 구들방에 어울리게 만들어 졌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어디 한복뿐이랴. 좌식생활로 인한 우리 민족의 인체 생리 구조는 물론이고 놀이 문화 등 제반 문화 활동에 서로 좋게 든 나쁘게 든 소리 없이 영향을 주고받았다. 일례로 좌식 생활에 따른 상체의 발달과 상대적으로 하체의 발달 저하(低下)를 들 수 있다. 이는 또한 젓가락 사용에 따른 섬세하고 정교한 기능을 요하는 곳의 발달을 가져왔다. 당연한 것이 우리의 삶은 구들방에서 시작해서 구들방에서 끝난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 <중략> … 우리 주거생활은 전체 공간에 대한 인식능력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입식 생활에서는 전체공간이 정해지면 자신이 움직이는 공간만을 인식하면 된다. 하지만 좌식생활을 하는 우리는 전체 공간에 대한 움직임을 늘 파악하지 않으면 일상 생활에 대처하기가 어렵다. 방은 침실이고, 거실이며, 공부방이다. 따라서 한국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선 종교만 해도 다양한 종교가 들어와 어우러지는 나라는 극히 드물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특별하다. … <중략> … 구들은 이런 한국인의 심성과 문화를 만들었다. 구들은 하나의 불로 부엌일과 난방을 섞었고, 계절적으로 겨울과 여름을 섞었고, 계층적으로는 양반과 상민을 섰었고, 공간적으로는 전 한반도를 섞었다. 구들 탄생의 비밀인 마당에서 자연과 인간이 만났다. 이런 만남이 사회를 다양하게 했고, 다양성을 포용하게 했다. 이런 포용문화가 자유분방한 민족성을 낳았다. 이는 불확정 문화와는 조금 다르다. 예를 들어 방에서 몇 사람 잘 수 있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머릿속으로 헤아린다. 그리고 '다섯 … 아니 한 예닐곱명 정도 … ' 대답한다. 다섯 명이 자면 편하지만 여섯이나 일곱명도 잘 수 있다는 말이다. 침대라면 이런 답이 어렵다. 이 불확정 문화 역시 구들에서 나온 것이다.
한옥의 특징 중 하나로 비대칭성을 꼽는 이가 많다. 이 비대칭성에 가장 영향을 준 것 역시 구들이다. 우리 문화의 비대칭성은 사상적으로 산신사상, 샤머니즘 등 여러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디자인에서 대칭성은 가장 손쉽고 무난한 방법이다.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상적인 측면에서만 이를 설명하려는 건 무리다. 건물에 구들이 들어가면 건물은 대칭성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대칭성이 없는 부엌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 <중략> … 그러나 구들이 있는 한옥에서 대칭은 비대칭만큼이나 부자연스럽다.
전면구들의 등장이 한옥에 준 가장 큰 영향은 아무래도 거주공간의 확장이다. 첫째가 물리적 공간의 확장이고, 두 번째가 쓰임 공간의 확장이다. 먼저 물리적 공간의 확장은 겨울을 날 수 없던 정자에 구들을 들여 겨울을 날 수 있게 하면서 나타났다. … <중략> … 공간 쓰임새의 확장을 살펴보자. 입식 집에서 침대는 식탁자리가 결정되면 사람이 쓰는 공간도 같이 정해진다. 그러나 좌식 집에서 공간은 자유롭다. 자다가 이불을 걷고 앉아 밥상을 받고 그 자리에서 손님도 맞는다. 이불 밑에 음식을 넣어 밥통이 되는 것이 구들이다. 이렇게 하나의 공간을 여러 가지 용도로 돌려쓰는 것을 학자들은 공간의 전이성이라고 한다.
구들은 그밖에도 다양한 형태로 우리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부뚜막은 우리 음식문화를 독특하게 발전시켰다. 한국인은 끓이고, 찌고, 볶고, 썩혀서 음식을 만든다. 이는 지금도 여전히 이어져 솥뚜껑에 굽는 삼겹살은 값도 비싸다. 당시 열효율을 생각하면 어느 나라 국민도 해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 밥짓기가 난방과 함께 이루어지는 우리 부엌문화에서만 가능했다. 가난한 겨울과 수많은 외부의 침입에서 우리가 우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든 삶아 소화시킬 수 있는 가마솥과 부뚜막이 있어서 였다. 곡식 보관에 여름에는 바람이 잘 통하는 마루방이 쓰였고, 겨울에는 구들방 끝에 작은 방을 만들어 곡식을 보관했다. 우리는 아주 옛날부터 냉장고를 사용한 셈이다. 또 우리 민족처럼 고집스럽게 흰 옷을 입는 민족은 아마 없었던 것 같다. 만약 방안에서 재가 계속 날린다면 흰 옷을 입을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흰 옷이 양민의 옷이라는 점에서 그 가능성은 크다. 한동안 양민만이 쓰던 구들이지만 양반도 구들방을 하나씩 만들어 썼다. 몸이 안 좋은 사람을 위해서다. 지금도 여전히 신경통, 관절염, 냉, 소화불량, 몸살에 민간요법으로 사용된다. 구들을 온실에 사용한 예도 있다. 조선 초 의관이 지은 <산가요록>에 의하면 구들을 이용해 온실을 만들었다. 유럽에서 16세기 초 온실이 만들어진 것을 생각하면 150년 이상 앞선 것이다.
좌식 생활 때문에 한국인의 하체가 서양인에 비해 약하다고 한다. 구들이 우리 문화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 면도 있다는 의미다. 특히 공간의 전이성이 주는 이중성이 우리 문화의 이중성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 … <중략> … 이는 공간이 중첩되면서 생기는 마음의 중첩으로 무언가를 감추려하는 이중적인 마음을 형성 시키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러나 구들에 불 넣으면서 밥도 하는 즉, '무엇을 하면서 무엇을 하는' 이런 동시 행동성은 윈도우를 여러 개 열어 놓고 일을 하는 현대 생활에 여전히 유리한 행동양식임에 틀림없다.
- 즐거운 한옥 읽기 즐거운 한옥 짓기, 구물코, 이상현 지음, p. 079 ~ 082
구들문화는 모든 것을 아우르고 주어 담아 숙성시키는 발효문화이다. 이러한 구들도 마당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구들문화와 마당문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아니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다. 우리에게 마당은 몸의 혈(穴)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당이 없으면 기가 막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마당이 멸종되어 가고 있다. 도심 속의 마당은 모두 정원으로 바뀐 지 이미 오래된 일이다. 마당과 정원의 차이는 마당은 비워 놓은 것이고 정원은 채워 놓은 것이다. 시골 마을도 전원주택의 범람으로 마당이 아닌 정원이 들어서고, 기존의 시골집들에 있던 마당도 점차 정원으로 텃밭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마실'의 의미가 바뀌었고*주6) 거실과 TV에 자리를 빼앗겼다. 마당이 없으니 마을이 죽어가고 있다. 마당이 없으니 이웃이 없고, 마당이 없으니 마음이 막힌다. 마음이 막히니 양심이 없다. 양심이 없으니 상식이 없고 심심해서 사람을 죽이는 세상이다.
지금 세상은 온통 자본주의 힘으로 들끓고 있다. 양(陽) 문화의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달도 차면 기운다. 이제 음(陰)의 시대가 도래 할 때이다. 이것이 음양의 원리이다. 우리 문화는 음의 문화이다. 다가오는 미래를 우리가 선도(先導)해야 할 이유이다. 그동안 무심했던 잃어버린 우리문화를 발굴 육성해야 할 것이다. 음의 문화, 좌식문화의 총화(總和)가 바로 구들문화이다.
참살이 열풍으로 그나마 구들이 살아나고 있다. 방 한 칸은 전통 구들방으로 짓고자픈 사람들이 늘고 있다. 다행스런 일이다. 사실 우리는 편의성을 얻은 대신에 잃은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다. 건강을 위해 비싼 돈을 지불하고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그 시간과 비용으로, 산에서 산림욕을 하며 나무를 줍고, 장작패기 운동을 하는 것이 더 효과가 있지 않을까! 더불어 모닥불 피우는 낭만까지 덤으로 얻을 것이다.
이제는 마당을 살려내야 한다. 정원을 비워야 한다.
십 년을 경영하여 초로 삼 칸 지어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다.
조선시대 사람인 김장생의 시다.*주7) 우리의 한옥을 이야기 할 때, 누구나 한 번쯤 인용하는 시다. 우리 한옥을 잘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옥의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겠으나, 필자에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은 마당의 의미이다. 마당이 있기 때문에 달도 청풍도 칸칸에 맡겨 둘 수 있고, 강산도 둘러 두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그 모두를 마당에 담을 수도 있겠으나 마당은 비워 놓아야 또한 채울 수 있다는 역설이 성립된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마당을 통해 자연과 집이 하나 되고, 자연과 집과 내가 하나 되는 것이다.
다음에는 다시 바둑과 집의 관계를 바둑의 규칙으로 정리 해 보기로 한다.
*주1) ; 어느 여성 택시기사분이 한 말이라며, 어느 TV 강연에서 어느 여성 강사가 소개한 말이다.
*주2) ; 로마의 '하이포코스트', 중국의 '캉' 등
*주3) ; 동아 現代活用玉篇 제4판 두산동아
*주4,5) ; - 온돌 그 찬란한 구들문화, 김준봉 · 리신호 · 오홍식 지음, 청홍 (메모해둔 페이지를 분실함)
*주6) ; 마실은 마을의 방언으로 이웃에 놀러 가다는 뜻-동아 새국어사전 제4판 두산동아. 필자는 여기서 마을(마실)을 이웃의 마당을 의미한다고 생각함.
*주 7) - 즐거운 한옥 읽기 즐거운 한옥 짓기, 구물코, 이상현 지음, p.22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