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원주교구 사제인사명령이 있었습니다.
미사때 이곳 런던에 계셨던 신부님들 부임지를 알려드렸습니다.
오래전부터 계셨던 분들은 대부분 신부님들을 아셨고
나중에 오신 분들은 모르시는 신부님 이름이었습니다.
주일미사 때마다 오던 베트남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웬반 흐엉 뜨억이고 세례명은 바오로, 자기 집안에 신부님도 계신다고 했습니다.
혼인한 그는 아내보다 두살된 딸아이가 더 많이 보고 싶다며 사진도 보여주었습니다.
딸의 사진을 보여주며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이 빛이 나보였습니다.
그는 제천 바이오밸리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한국에서 벌어 베트남으로 송금을 하는 외국인 노동자입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열심히 미사에 오는 그가 너무 대견해서
후견인도 붙여주고, 어려움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 후견인은 본인이 베트남 말을 배우고, 바오로에게는 한국말을
가르쳐주며, 손짓 발짓으로 언어소통을 했습니다.
그가 받는 품삯은 한국 노동자들보다 작지만
베트남에서 버는 것보다는 훨씬 낫기 때문에 잘 참아견디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딱 하루 쉬는데, 주일이면 어김없이 성당에 와서 함께 성체성사를 합니다.
인력사무소 앞에서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을 자주 만났습니다.
이제 힘든 일들을 하는 것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이 한국사람들의 일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일할 한국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없으면 공사현장이나
농촌의 들녘이 제 때에 수확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인력수급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입국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어려워졌습니다.
저 역시 이곳에서 낯선 사람으로 살기에
그들이 겪는 어려움이 무엇인지 잘 압니다.
일자리를 찾아서 이곳을 떠나는 식구들을 보내며
다시 시작해야하는 그 시간들을 잘 견디내길 바래봅니다.
꼭두 새벽 인력시장에 나가서도
일하러 가지 못하고 발걸음을 되돌리는
그 사람 어깨에 달린 가족들
그 가족을 생각하면
그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이
필요함은 당연한 것입니다.
선한 포도원 주인의 이야기는(마태20,1-16)
세상 논리로는 답이 되지 않는
예수님만의 계산법입니다.
일찍와서 노동했으면, 그 만큼 더 받아야 마땅하나
아흔 아홉마리 양을 그대로 두고 한마리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와 같이, 늦게 온 그 한 사람에게도
똑같은 품삯을 제공하십니다.
이 계산법에 항의해 보지만
애초부터 품삯은 한 데나리온으로 정해졌으니
주인의 처사는 당연한 것입니다.
평생 신앙안에 산 사람이나
악하게 살다 죽기 전에 회개한 사람에게나
같은 대접을 하신다면
굳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겠지만
땀흘려 수고한 사람이 받는 한데나리온과
거져 받게되는 한데나리온의 가치는 다르게 다가올 것입니다.
수고의 흔적이 담긴 한데나리온이 훨씬 더 그 가치가 빛을 발할 것입니다.
너무 일찍 시작했다고 억울해 할일도,
늦게 부름받았다고 덜 억울해 할 일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했다고 자랑할 것도
반대로 짧게 했다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 목소리에 응답하여 변화된 삶을 살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마태오. 20,15)
이 말씀은 직역하면 '내가 선하다고 해서 당신의 눈이 악한 것이오?' 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째려보는 것을 말합니다.
먼저왔든, 나중왔든
모두그분 기준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분의 선하심처럼
우리도 너그러워지길 바래봅니다.
평안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