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핵 치료의 메카' 마산, 그리고 '산장의 여인'>
지금은 코로나19로 온 국민이 온 세계가 고통을 받고 있지만, 예전엔 한 때 결핵으로 고통을 많이 받았다.
결핵 퇴치 기금 마련을 위해 크리스마스 때면 '결핵 씰'을 팔았고, 카드나 연하장에 우표와 함께 붙여서 부쳤다.
‘결핵 치료의 메카’ 마산
한 때 대한민국은 ‘결핵왕국’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가졌다. 대부분 폐결핵이었다.
결핵은 가난에 의한 비위생적인 생활습관이 주요 원인으로 선진국과 후진국을 구별 짓는 기준 중 하나였다.
변변한 치료약조차 없었던 시절, 폐결핵에는 맑은 공기가 최고였다. 때문에 물 좋고 공기 좋기로 유명한 가포 등지의 마산에 결핵 환자를 위한 시설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특히 가포에는 일제 시대부터 좋은 기후 조건과 천혜의 자연 환경을 살려 1941년에 결핵요양소가 세워졌다.
해방이 되자 신마산에서 의사로 활동하던 제길윤 박사가 마산시 의사회장 위임으로 일본인 요양소장으로부터 시설과 인원을 접수하고 운영 책임을 맡았다.
당시 병원에 근무하던 한국인 직원들은 자치위원회를 조직하여 신축 병동 재건에 최선을 다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상이군인 요양소 건물을 보수하고 일부 건물을 신축하여 1946년 6월 1일 200병상 규모의 ‘국립 마산결핵요양소’가 개설 되었다.
요양소가 위치한 곳은 나지막한 부용산 자락 일대로 삼면이 울창한 송림으로 싸여 있고 동쪽으로는 호수와 같이 잔잔한 바다가 위치해 있다. 따뜻한 기후, 맑은 공기, 깨끗한 물, 울창한 숲이 있는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가포유원지도 있어 연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후 마산 지역에는 도립 마산병원, 마산 교통요양원 등 결핵 환자를 위한 시설들이 줄줄이 들어선다.
반야월 노래에 흐느낀 여인
권혜경의 '산장의 여인'은 결핵과 관련이 많은 노래다.
‘산장의 여인’에는 가수이자 작사가인 반야월이 공연 도중 만난 한 여인의 가슴 아픈 사연이 담겨 있다.
반야월은 6·25전쟁 당시 고향인 마산으로 피난을 갔다. 그는 마산방송국 문예부장으로 일하며 서울의 가요인들을 모아 ‘방송국 위문단’을 만들어 활동하다가 국립 마산결핵요양소로 위문 공연을 갔다. 반야월은 무대에 올라 요양소의 환자와 의사, 직원들 앞에서 대표곡인 ‘불효자는 웁니다’를 열창하고 있었다,
무대에서 열심히 노래를 부르던 그의 눈길이 어느 순간 관중석 맨 뒤쪽에서 멈췄다. 아름다운 얼굴에 창백한 그림자를 드리운 젊은 여인이 노래를 들으면서 계속해서 흐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후에 반야월은 회고록 ‘나의 삶, 나의 노래’에서 “그 여인을 보는 순간 아련한 쓰라림 같은 게 가슴에 와 닿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때의 인상이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던 반야월은 요양소 직원에게 그 여인이 울고 있었던 이유를 물었다. 그의 짐작대로 여인은 사랑에 상처를 입고 결핵에 걸려 소나무 숲 우거진 산장병동에 요양 중이었다. 폐결핵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도록 격리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얘기를 들은 반야월은 태평레코드사에서 같이 일했던 작곡가 이재호도 폐결핵을 앓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반야월은 바로 노랫말을 만들어 이재호에게 곡을 붙여달라고 요청했다. 가사를 받은 이재호는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곡을 완성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노래가 가수 권혜경에게 전해졌고, 음반으로 제작되어 널리 사랑받게 된 ‘산장의 여인’이다.
‘산장의 여인’처럼 살다간 가수 권혜경
삼척에서 태어났지만 세무공무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의정부에 정착한 권혜경은 서울 동구여상을 졸업했다. 서울대 음대 성악과를 졸업했다거나 중퇴했다는 기록들이 있으나 확인이 되지는 않는다.
조흥은행을 다니다 1956년 서울중앙방송국(현 KBS)에서 모집한 신인가수 오디션에 합격해 전속가수가 되었다. ‘사랑이 메아리칠 때’를 부른 안다성이 이 때의 입사 동기생이다.
1957년 데뷔곡 '산장의 여인'으로 일약 스타가 된 그녀는 불과 2년 뒤 28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판막증에 걸리고 이후 후두암까지 얻었다. 그 와중에도 KBS 라디오 드라마 ‘호반에서 그들은’의 주제가인 ‘호반의 벤치’, 1959년에 개봉된 신상옥 감독의 영화 주제가인 '동심초', 작곡가 박춘석과 손잡고 발표한 '물새 우는 해변' 등을 히트시키며 병마와 사투를 벌였다. 그러나 병은 재발을 거듭했다.
유년 시절, 대문을 세 번이나 열어야만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고 좋은 직장을 다니며 부러울 것 없던 그에게도 가혹한 '운명'의 벽은 높았다. '산장의 여인' 작사가 반야월을 찾아가 "선생님은 하필 왜 내게 슬픈 노래를 주어 이렇게 힘들고 외로운 인생을 살게 했느냐"며 심경 토로를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그녀의 노래 '산장의 여인'의 끝부분 한 구절처럼 홀로 ‘재생의 길’을 걷겠다는 의지로 종교에 귀의하기도 했다. 본래 수녀가 되고 싶어 했던 그녀는 절에서 목숨을 건진 후 불자가 된다. 가톨릭에서 불교로 개종하면서 도선사의 청담 스님으로부터 하루 5000배씩 절을 하라는 권유를 받고 힘든 고행을 자처하기도 했다.
가수는 노래따라 간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권혜경은 남은 인생 모두를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 스스로 위로하며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봉사활동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50여 년 간 전국 교도소와 소년원을 돌며 사형수, 무기수, 10대 범죄자 등 재소자들을 격려한 그녀는 수인들 사이에서 ‘어머니’라는 칭호를 얻었다. 교도소 위문공연과 강연만도 4백여 차례에 이른다. 이러한 공로로 권혜경은 인권옹호 유공 표창을 비롯해 500여 차례 표창을 받았다.
노래 가사처럼 권혜경의 삶은 외롭고 쓸쓸했다. 권혜경 외에도 '가사의 굴레'가 시련이 됐던 가수는 많았다.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의 차중락은 낙엽이 지는 11월에 29살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고, ‘0시의 이별’을 부른 배호는 안타깝게 29살에 세상과 이별했다.
애절한 선율의 '내 곁을 떠나가던 날 가슴에 품었던 분홍빛의 수많은 추억들이 푸르게 바래졌소'(사랑하기 때문에)라고 노래했던 천재 음악가 유재하는 불과 25살에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이 밖에도 돌연사한 가수 김성재는 '마지막 노래를 들어줘'를 남겼고 '하늘에 편지를 써'(내 눈물 모아)를 부른 서지원은 20살 나이에 하늘 여행을 떠났다.
결핵요양소에서 꽃핀 사랑
결핵은 ‘글쟁이들의 직업병’이라고 불릴 만큼 많은 문인들이 결핵으로 고생했다. 마산에도 결핵 때문에 많은 문인들이 거쳐 갔고 글 자취뿐만 아니라 많은 이야기를 남기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요양하려 마산에 왔던 문인은 나도향·임화·지하련 등이었고, 해방 후에는 권환·이영도·김상옥·구상·김지하 등이 요양소에서 치료를 받았다. 임화와 지하련은 요양소에서 사랑을 꽃피웠다. 지하련은 임화를 온갖 정성으로 간병했고, 임화는 지하련의 애틋한 사랑에 감화되어 결혼까지 했다.
재야 정치인이었던 계훈제, 영화인 최백산 등도 한때 마산 요양원에 머물렀다. 또한 함석헌·김춘수·서정주 등 유명 문인들이 결핵을 매개로 마산을 다녀갔다.
나도향은 가난과 방랑으로 떠돌다 1925년 요양 차 마산에 와서 3개월 동안 노산 이은상의 집에서 식객노릇을 하며 염상섭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단편 소설 ‘피 묻은 편지 몇 쪽’을 남겼다.
그 해는 ‘물레방아’ ‘뽕’ ‘벙어리 삼룡이’를 발표한 나도향 소설의 절정기였다. 다음 해 그는 스무 넷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노래 ‘산장의 여인’의 모티브가 되었던 그 여인에 대한 후일담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몸은 완쾌됐는지, 어디서 살고 있는지,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궁금하다. 작사가 반야월의 말처럼 혹시나 캄캄한 밤하늘 어느 별 아래서 이 ‘산장의 여인’ 노래를 들으며 슬피 울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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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장의 여인' 노래 듣기
https://www.youtube.com/watch?v=EgHIQ2sT6HU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채곡채곡 떨어져 쌓여있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나 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풀벌레만 애처러이 밤새워 울고 있네
행운의 별을 보고 속삭이던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어 적막한 이 한밤에
임 뵈올 그날을 생각하며
쓸쓸히 살아가네
- 권혜경의 '산장의 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