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남북조 시대 남조의 진나라 선제의 딸이며 수문제와 수양제의 후비인 선화부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선화부인 진씨(宣華夫人 陳氏, 577년 ~ 605년)는 남조의 진 선제(宣帝)의 딸로 施姬 소생이며 저원공주에 봉해졌다. 공주는 천성이 총명하고 자색이 뛰어났으나 陳나라가 隋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자 수나라 궁궐에 보내졌다. 그녀의 나이 13살이었다.
수나라 궁중에 들어간 진씨는 수문제 양견의 눈에 들어 그의 후비로 봉해졌다. 이 무렵 수문제의 정실 독고황후는 질투가 심하여 수문제가 궁녀들과 가까이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이 낳은 다섯 아들은 물론 신하들도 첩을 두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진씨는 수나라의 궁중에서 몇년을 지냈다. 후에 독고황후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수문제는 그때서야 궁녀들을 비빈으로 책봉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진씨는 선화부인으로 책봉받고 또다른 미인 채씨는 용화부인으로 책봉받았다.
이때 수문제는 이미 늙어서 모든 국가대사를 태자인 양광에게 맡기었다. 양광은 본래 문제의 차남으로 겉으로는 효도와 예절을 지켰지만 속은 엄청 교활한 사람이었다. 그는 먼저 어머니 독고황후의 환심을 산 후 이간질로 독고황후가 태자 양용에 대해 불만이 커지게 하였다.
후에 계책을 써서 문제와 독고황후로 하여금 태자 양용이 자기를 암살하려는 것으로 알려 양용을 태자 자리에서 쫓아냈다. 그래서 양광이 태자 자리에 앉게 되었다. 양광은 급히 황제자리에 앉으려 했을 뿐만 아니라 부친의 두 애첩에 대해여도 눈독을 들였다.
서기 604년, 문제가 중병으로 위태롭게 되자 선화부인과 용화부인은 밤낮으로 수문제 옆에서 시중을 들었다. 수문제는 그녀들이 자기를 시중드느라 휴식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얼마간이라도 휴식하라 하였다. 선화부인이 문제의 침궁을 떠나 거처로 가는 도중에 태자 양광을 만났다. 양광은 아버지의 병이 위태롭고 또 앞에 이렇게 눈부신 미녀가 있자 대담하게 겁탈하려 하였고, 양광은 결국 선화부인을 범하였다. 문제는 이소식을 듣고 그자리에서 '독고가 짐을 망쳤구나'라며 탄식을 했다.
여기서 독고란 죽은 황후인 독고씨를 말한다. 문제는 병부상서였던 유술을 불러 폐태자하였던 양용을 다시 태자에 앉히려 했지만 양광의 손이 더 빨랐다. 참모인 양소가 그를 잡는 바람에 일이 어긋났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양광이 아버지가 자기를 태자에서 폐해버리겠다는 소식을 듣고 선수를 써서 병석에 누워있는 아버지를 죽였다고 한다.
문제가 죽은 그날에 양광은 금으로 만든 함을 선화부인에게 갖다주었다. 선화부인과 궁녀들은 독주인 줄 알고 혼비백산하여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함을 열자 독주가 아니라 사랑을 상징하는 동심결(同心結)이 들어있었다. 선화부인은 안도하였다.
태자였던 양광이 제위에 올라 수나라 2대 황제 수양제가 되었다. 선화부인도 정식으로 진귀비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양제의 후궁이 된지 1년만에 병으로 죽으니 그녀의 나이 겨우 29살이었다. 양제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미인의 팔자는 기구하다. 가만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로가 좋지 않다. 중국의 4대 미녀 운명이 다 불행했다. 양귀비는 목매 죽었고 서시는 오월의 전쟁에 미인계로 이용당했으며 초선은 여포를 잡는 미끼로 쓰였다. 왕소군은 막북으로 끌려가 오랑케 땅에서 살다죽었다.
선화부인은 공주의 신분이었지만 나라가 망하자 적국 황제의 후비가 되었다가 그 아들에게까지 능욕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