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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14. 묵상글 ( 연중 28주간 화요일. - 속 건강이 중요하다.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직 / 04:5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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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14. 연중 28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10.14 04:43
- 속 건강이 중요하다
오늘 어떤 바리사이가 주님을 식사 초대합니다.
우리는 아무나 식사 초대를 하지 않지요.
존경하거나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을 초대합니다.
그런데 이런 바리사이를 주님은 호되게 비난하십니다.
주님께서 식사 전 정결례를 행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그가 비난한 것도 아니고 그저 놀라워했을 뿐인데
이것을 주님께서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비난하십니다.
이렇게 호의를 싹 무시하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듯한 주님을 보면
주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너무 모질다는 생각이 들어
주님을 초대한 바리사이를 꼭 집어 비난하신 게 아니라
바리사이를 일반화하여 비난하신 거라고 변호도 하지만
어쨌거나 주님께서는 겉과 속이 다름을,
아니 겉치레를 거의 신경질적으로 싫어하시고 배격하십니다.
그것은 속 건강이 너무 안 좋아 피부에 뭐가 계속 나는데도
속병을 고치려 하기보다 화장을 통해 감추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피부가 깨끗하고 아름다우려면 속병을 고쳐야 하고,
속병을 고치려면 몸에 해로운 걸 먹지 말아야 하며,
해로운 것을 먹지 않으려면 해로운 것에 대한 욕구가 없어야 함을.
그런데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속병은 무엇이고,
무엇이 영혼에 해로운 것들입니까?
제 생각에 이 세상의 만족이 그것들입니다.
칭찬과 명예와 같은 좀 더 고차원적이고 고상한 만족에서부터
권력이나 부나 지식과 같이 이 세상에서 힘을 발휘하게 하는 것과
옷이나 먹는 것과 같이 저차원적이고 사치스러운 만족에 이르기까지
우릴 천상으로 향하게 하지 않고 이 세상에 안주케 하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 것으로 만족하려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이런 것들에 대한 탐욕 대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우라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 것들에 대한 탐욕은 우리를 미움, 시기 질투, 분노 같은 것으로 채워
우리 안에 평화라고는 하나도 없고 오직 화가 가득 차게 할 뿐이니
이것들의 원인이 되는 탐욕은 비워내고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케 하라 하십니다.
우리는 누구나 가진 것을 줄 수 있습니다.
없는 것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미움밖에 없는 사람은 미워할 수밖에 없고,
하느님 사랑이 없는 사람이 자비를 실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하면
우리는 그때 우리가 가진 것으로 자비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의 뜻일 것입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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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14. 연중 28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쿨(cool)한, 지혜롭고 자유로운 삶
“무지에 대한 답은 자선과 나눔의 사랑뿐입니다”
“멋지다”라는 말을 들으면 모두가 좋아할 것입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좋은 기분일 것입니다. “멋지다”라는 참 좋은 우리말 표현은 영어로 하면 무엇일까요? 표현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얼마전 “쿨(cool)하다”를 “멋지다”로 해석한 글을 읽으며 참 적절한 표현이라 무릎을 쳤습니다. “쿨(cool)”을 찾아보니, <1.시원한, 2.차분한, 침착한, 3.냉담한, 쌀쌀맞은>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그래도 쿨하면 멋진으로 알아듣고 싶습니다. 그러니 “멋진 사람”을 “쿨한 사람”으로 표현하고 싶어집니다.
오늘 복음의 영문주석을 읽다가 “훌(fool)”이 나와 찾아보니 형용사로 “바보같은”, “어리석은”으로, 명사로는 “바보”로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쿨(cool)과 훌(fool), 비슷한 발음 같은데 극단적 대조를 이룹니다. 쿨한 사람은 멋진 사람을, 훌한 사람은 바보같은 어리석은 사람을 뜻합니다. 쿨한 사람이라 하면 누구나 좋아할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동방영성에서 강조하는 마음의 고질적 병인 무지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불가의 탐진치(탐욕, 성냄, 어리석음)라는 삼독이 무지의 내용입니다. 이런 무지에 눈멀면 제모습, 제정신을 잃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이나 재앙은 무지의 병에서 기인합니다. 무지의 병, 무지의 죄, 무지의 악이라고 합니다. 무지의 신비요 무지한 사람에게는 백약이 무효입니다.
무지의 광신이나 맹신에 빠지면 답이 없습니다. 바로 극단적 이념이나 신념에 빠지면 그러합니다. 바로 극우와 극좌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이 모두가 무지의 소치입니다. 정말 무지의 병에는 답이, 약이 없어 보입니다. 무지한 사람은 알려줘도 모릅니다. 주변에서는 다 자기를 아는데 본인만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래서 저는 미사시작하자마자 바치는, 끝기도 시작하자마자 바치는 참회 기도문중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 대목을 참 좋아합니다.
인도의 성자 간디가 훌륭한 것은 “I was wrong”(내가 잘못했다)의 명수였기 때문이란 말을 잊지 못합니다. 다윗의 감쪽같이 우리아를 죽게하고 그의 아내 바세바를 찾이했을 때 책임을 추궁하던 나탄 예언자에게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다윗의 고백은 얼마나 쿨한지요! 제 잘못을 뉘우치는 참된 회개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겸손에 자기인식입니다. 이런 회개의 여정과 함께 겸손하고 지혜로워지고 자유로워짐으로 무지의 치유요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 누구도 멋지고 지혜롭고 자유로운 쿨한 사람이 되고 싶지, 어리석고 무지한 훌한 사람이 되고 싶어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대조를 복음과 제1독서에서 발견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쿨한 멋지고 지혜롭고 자유로운 분이라면, 바리사이는 꽉 막힌 훌한 어리석고 무지하고 자유롭지 못한 사람을 대표합니다.
예수님께서 식사전에 손을 씻지 않는 것에 놀랐다는 사실에 그가 얼마나 무지에 눈먼 근시안적 사람인지 감지됩니다. 예수님의 답변이 무지를 깨고 깨달음의 지혜에 이르게 하는 참 쿨한 명품답변입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예수님 말씀에 지혜와 사랑이, 자유로움이 가득담겨 있습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 질 것이다.”
속의 탐욕과 사악은 그대로 놔두고 아무리 겉을 깨끗이 해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물론이고 사람도 결코 속일 수 없으니 결국은 드러나고 알아챕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최고의 지혜의 스승입니다. 과연 나는 예수님쪽에 속한 쿨한 멋진 사람인지, 혹은 바리사이쪽에 속한 훌한 어리석은 사람인지 거울처럼 비춰줍니다. 표리부동의 위선의 어리석은 삶이요, 겉과 속이 같은 진실하고 정직한 삶이 진정 무지에서 해방된 지혜롭고 자유로운 삶입니다.
부단한 사랑의 나눔으로, 탐욕과 사악을 비워내는 청소로 속을 깨끗이 할 때 겉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속이 깨끗하면 겉은 저절로 깨끗해지니, 좋은 옷 입지 않고, 화장하지 않아도, 성형수술 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을 닮아 내면의 참됨과 선함과 아름다움은, 내면의 그윽하고 은은한 향기는 겉으로 표현되기 마련이며 기품있는 모습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속과 겉이 같이 깨끗할 때 자존감 높은 삶에,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삶, 행복한 삶, 내적 부요의 삶을 살것입니다. 무지한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참으로 쿨한 사도 바오로의 열화와 같은 설교 로마서 일부만 소개합니다.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거나 그분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였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
세상에 똑똑한 바보들은 널려 있습니다. 지식과 지혜는 함께 가지 않습니다. 곳곳에 유혹은 널려 있고 무지의 탐욕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봅니다. 지혜로운 멋진 삶을 살 것인가? 무지의 어리석은 탐욕의 삶을 살 것인가? 역시 삶은 선택입니다. 저절로 참나의 성인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도 무지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광야인생 참나의 성인이 되느냐, 세상것들의 탐욕에 중독되어 악마가, 폐인이, 괴물이, 짐승이 되느냐? 순전히 은총과 더불어 내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참 좋은 수행의 의식적 선택과 노력의 훈련, 습관화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하고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정말 필요한 평생공부인 하느님을 알고 참나를 아는 공부가 깊어갈수록 주님을 닮아 찬미와 감사, 기쁨과 평화, 겸손과 온유, 지혜와 자비, 순수와 자유의 사람이 되어 갈 것입니다. 주님의 날마다의 참 좋은 선물인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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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14. 연중 28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떤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에 일어난 일을 전해줍니다.
그런데 당혹스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루가 11,38). “왜 그렇게 놀랐을까요?”
식사 전에 손을 씻는 의식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위생상의 관습이나 예의였을 뿐 아니라, 나아가 세상과 접촉함으로 인하여 생기는 불결을 제거하기 위한 ‘정결례’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라는 바리사이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루가 11,39-40)
이는 진정한 ‘정결례’는 겉을 씻는 일이 아니라, 속을 씻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음식에는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루카 11,39)고 하십니다.
이는 단지 ‘속을 씻는 일이 겉을 씻는 일보다 낫다’는 것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속에 담고 있는 것’을 정당하게 취득한 것인지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곧 불의와 착취, 부정과 탐욕, 이기와 사악함을 질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속이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지, 또 그것들을 어떻게 채웠는지, 왜 채웠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이러한 사실을 깨우쳐주시는 것만이 아니라, 깨끗해지는 방법도 말씀해 주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그렇습니다. ‘깨끗해지는 길’, ‘더러움을 비워내는 길’은 형제와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입니다.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 채운 속을 비우는 방법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이는 ‘정결법’이라는 율법의 본래의 정신이 ‘사랑’에 있음을 밝혀줍니다. 곧 ‘정결법의 정신’은 깨끗하게 씻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습니다. 그러니 속에 있는 것을 비워낸다고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면 비워지고 깨끗해지게 됩니다. 바로 ‘우리 마음 안에 부어주신 하느님의 사랑’(로마 5,5) 으로 말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그러니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 안에 그분의 사랑이 담겨 있음을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놀랍고 신비로운 것은 사랑을 베풀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주님!
제 속을 들여다보게 하소서!
탐욕으로 채운 것을 사랑으로 나누게 하소서!
제가 온전히 깨끗해지고, 당신 얼굴 뵙게 하소서!
제 속에 당신의 뜻을 품고, 당신의 향기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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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14. 연중 28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침 산책길에 제게 큰 위로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길을 따라 한 시간쯤 걷다 보면 의자가 하나 나옵니다. 그 의자는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 같습니다. 잠시 앉아 물도 마시고, 숨도 고르고, 새 소리도 듣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이 흘러가고, 동쪽에서는 해가 막 떠오릅니다. 그 순간 저는 비로소 제 몸과 마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느낍니다. 단순한 나무 의자 하나가 제게는 쉼터이자 위로의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인문학적으로 보자면, 의자는 단순히 앉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 쉼을 배우고, 서로를 만나고, 자기 자신을 성찰하게 하는 자리입니다. 서 있는 것은 긴장이고, 앉는 것은 이완입니다. 그래서 의자는 노동과 노동 사이에 놓인 쉼의 상징입니다. 또한 의자는 관계를 만들어 줍니다.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면서 공동체가 생겨납니다.
성경에서도 ‘자리’는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앉으셔서 제자들을 가르치셨고, 부활하신 후에는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자리는 권위와 사명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봉사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앉아야 할 자리는 단순히 편안함의 자리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 힘을 얻는 자리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면 왼쪽에는 요한의 자리를, 오른쪽에는 야고보의 자리를 주십시오.” 요한과 야고보에게 의자는 권력과 명예의 자리였습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다른 열 제자 역시 예수님을 따르면서 원했던 것은 권력과 명예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리는 희생과 헌신의 자리였습니다. 겸손과 나눔의 자리였습니다.
역사 속에는 지친 이들에게 의자가 되어 주신 분들이 계십니다. 성녀 마더 테레사는 길에 버려진 병든 이들의 곁에 다가가 그들에게 쉼과 위로를 주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의 의자가 되어 주었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아프리카 톤즈에서 의사요 교사요 친구가 되셨습니다. 병든 이들을 고쳐주고,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 주며, 외로운 이들을 쉬게 해주신 분입니다. 그분은 톤즈 사람들의 의자가 되어 희망을 선물했습니다. 오웅진 신부님은 꽃동네를 세워서, 버려진 이들이 쉴 수 있는 의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세상에 자리가 없던 이들에게 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원했던 의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요? 의자는 우리를 잠시 멈추게 하고, 내면을 돌아보게 하고, 다시 걸어갈 힘을 주는 곳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십니다.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의자에 앉는 것은 겉으로는 단순한 행위지만, 그 순간 우리는 마음을 비우고 속을 정화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의자는 우리를 성찰로 이끄는 자리입니다. 아침 산책길의 의자가 저에게 쉼과 힘을 주듯, 우리도 누군가에게 의자가 되어 줄 수 있습니다. 가족에게, 이웃에게, 교우에게 잠시 앉아 쉴 자리를 내어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우리 삶은 복음의 자리가 되고, 믿음의 자리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도 복음 위에 앉아 다시 힘을 얻고, 지친 이들에게 의자가 되어 주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주님, 우리 삶의 쉼터가 되어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아침 산책길의 작은 의자가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하듯, 우리도 이웃에게 의자가 되어 잠시라도 위로와 힘을 줄 수 있게 하소서.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을 깨끗이 하며, 복음 위에 앉아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 믿음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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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14. 연중 28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예언자 예수!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10월 13일 월요일- 마흔두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예수님의 예언자적 사명
예언자들은 사제들만큼 인기는 없지만, 우리는 둘 다 필요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리처드 신부는 강론에서 사제의 직무와 예언자의 직무 사이의 긴장에 대해 설명합니다. - 건강한 종교에는 이 둘이 꼭 필요합니다.
유대교에는 두 가지 주요한 영적 스승의 계보가 있는데, 사실을 말하자면 이는 모든 종교에도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전통을 반복함으로써 체계를 유지하는 사제적 계보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에게 덜 익숙한 계보가 있는데, 그것은 예언자적 계보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은 사제들이 유지하는 바로 그 체계를 비판합니다.
이 둘이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일종의 온전함과 진실성을 갖추게 됩니다. 사제만 있을 경우, 우리는 기존의 입장을 반복하게 되고, 모든 것이 충성과 순응, 규칙 준수에 초점이 맞춰지며—그것이 종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제와 예언자가 함께 있을 경우, 그 체계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정화하고 바로잡는 기능을 갖추게 됩니다. 이 두 계보가 함께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우리는 모세에게서 그 예를 봅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모으는 역할을 하면서도 자기 민족을 가장 강하게 비판한 인물입니다. 또 우리는 예수님에게서도 그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민족과 유대교를 사랑하셨지만, 위선과 환상, 기만에 대해서는 치명적으로 비판하셨습니다 (마태 23장, 루카 11:37–12:3 참조).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의 하나인 촉토 부족 원로이자 성공회 주교인 스티븐 찰스턴(Steven Charleston)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예언적 비전에 어떻게 초대하는지를 성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비전을 보셨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도록 초대하는 계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정의와 치유, 그리고 구원의 약속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과 억압받는 이들을 위한 영적 쇄신의 예언자적 스승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비전을 받아들이는 이나 비전을 전달해 주는 이 이상의 어떤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이 특별한 분이신 이유는, 그분께서 자신의 영적 비전 여정의 모든 요소들을 그 누구도 이전에 시도한 적 없는 방식으로 하나로 통합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이는 내 몸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는 내 피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에게 있어 당신 비전의 정점은 단지 당시을 예언자로 믿는 구세주의 직무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통해 사람들에게 단지 당신의 비전을 바라볼 기회를 주신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 참여함으로써 그 비전의 일부가 되도록 초대하신 것입니다. [1]
리처드는 종교 체제에 있어 예언자들의 역할을 존중합니다:
악이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을 선으로 위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이 가장 효과적으로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위장 중 하나는 종교입니다. 어떤 이는 인종차별적이고,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며, 이민자들을 혐오하고, 돈과 물질주의에만 집착하면서도 매주 주일마다 성당에 나가고, 종교의 눈에는 "의롭게 된"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지적하는 이들이 바로 예언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사제들만큼 인기가 있지는 않습니다. 사제들은 기존의 입장을 반복하지만, 예언자들은 이 둘을 다 수행합니다. 현대적 표현을 빌리자면, 이들은 보수적인 것의 장점과 진보적인 것의 장점을 통합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그 전통 안에 있는 허위와 위선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으로 성숙한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밸러리 코르(Valarie Kaur)의 매일 묵상(daily meditation) 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의 지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하신 요한 복음 14장 2절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많은 종교가 예수님의 “길”을 실천하고 있다고 믿습니다—그들이 인식하는 방식대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 사랑의 길은 특정 종교의 경계를 넘어,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를 향한 보편적 여정입니다. 예수님의 육화는 모든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초대이며, 그분께서 마련하신 거처는 단 하나의 모습이 아니라, 다양성과 존엄을 포용하는 공간입니다. 하느님의 집에는 우리 모두를 위한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Bill W.
References
[1] Steven Charleston, The Four Vision Quests of Jesus (Morehouse, 2015), 72–73.
Adapted from Richard Rohr, “Lots of Priests, Not So Many Prophets,” homily, January 28, 2018.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Elijah Hiett, untitled (detail), 2017,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예언자이신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오늘의 시대라는 땅을 딛고 서서, 고통을 고립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탄식으로 인식합니다. 그리고 육화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성찰하고, 증언하며, 치유의 길을 선택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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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14. 연중 28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루카 11,39)
육신의 잔
이어지는 내용을 볼 때,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요한 18,11 )는 주님의 말씀에서 잔이 육신의 고통을 가리킨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루카 22,42 참조). 영적 사랑으로 육신의 단점을 삼키고 그것을 마음과 영 안에 쏟아 부어 안이 거죽의 나약함을 말려 버리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육신을 마시는 사람입니다. 잔이나 접시의 거죽이 아니라 안이 우리를 더럽게 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훌륭한 스승께서 우리에게 육신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 내는 방법을 일러 주셨습니다.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모든 것이 깨끗하다“(사도 10,14-15 참조)고 하였습니다. 깨끗해지는 방법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겠습니까? 자비가 우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요한 15,3)고 쓰여 있습니다. 이 구절 말고도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 말해 주는 성경 구절이 많습니다.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준다”(토빗 12,9)는 말씀도 있고, “네 곳간에 자선을 쌓아 두어라. 그것이 너를 온갖 재앙에서 구해 주리라.”(집회 29,12)는 말씀도 있습니다.
-암브로시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엑카르트는 이 인용문을 활용하여 우리의 낳음이 참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표지를 두 개 더 제시한다. 첫째 표지는 기쁨, 끝없는 기쁨이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다면, 거기에는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기쁨이 자리하게 마련이다. 이론적으로는 물론이고 실제로도 실현된 종말론이 경험된다. 영생이 시작되고, 이와 더불어 신적인 기쁨이 시작된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 영생에 이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삶에서다. 엑카르트는 죽기 전에 이루어지는 이러한 영생의 약속을 받아들이고. 사후의 삶에 대한 억측을 뿌리친다. 그는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적절하게 말한다. 하늘이 이미 임했는데 굳이 하늘에 이르겠다고 힘을 소모할 이유가 있으랴?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참모습을 보게 될 때”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성령의 열매이자 표지인 기쁨이야말로 엑카르트가 대단히 좋아하는 주제다. 황홀한 기쁨은 죽음에 가깝다. “어떤 사람이 치명적인 일격을 받기 전에, 살인이 일어나기 전에 불안에 떨다가 죽을 수 있듯이, 우리는 기쁨에 겨워 지래 죽을 수도 있고, 기쁨을 기다리다가 죽을 수도 있다. 영혼 역시 하느님에게로 넘겨지기 전에 즐거이 영원한 행복을 바라다가 지레 죽을 수도 있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신적인 기쁨을 함께 나누는 일이다.(486)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거룩한 성심에 대한 묵상, 요셉 맥도넬 신부
성심에 대한 묵상
첫 번째 시리즈
첫 금요일 신심
IX.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을 거슬리는 것들에 대하여
제3 묵상: 죄
자기 성찰을 위한 포인트
세속의 정신에 대하여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의 일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은 본질적으로 세속의 정신과 반대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일에 있어 우리 자신을 낮추고 가장 낮은 자리를 찾으라고 가르치십니다;
1.세상은 모든 면에서 사람들의 존경과 평가를 추구하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역경 속에서도 인내하고 모욕을 용서하라고 가르치십니다;
2. 세상은 고통을 피하고 도망치며, 모든 일에서 자기애를 만족시키고, 원수에게 복수하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3. 세상은 부를 축적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으며, 가난한 이들에게는 가능한 적게 주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정의를 찾으라고 명하십니다;
4. 세상은 무엇보다 먼저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잊고 다른 이의 선익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5. 세상은 모든 일에서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라고 부추깁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일들 안에서 행복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6. 세상은 세속적인 것들과 감각적 향락에서 행복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영향력을 더 많이 받고 있는가—그리스도의 정신인가, 세속의 정신인가?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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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8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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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14. 연중 28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창의적 사고를 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고정관념을 지워야 창의성이 나올 텐데, 고정관념의 틀에 갇혀 있게 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본당 미사 후에, 종종 “신부님, 죄송해요.”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해설에 문제가 있었다고, 독서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미사 준비에 미숙한 부분이 있었다고, 때로는 미사 시간에 스마트폰 울린 것을 사과하십니다. 솔직히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의외의 상황이 오히려 습관적인 전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런 실수로 미사에 집중한다면 그게 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이 복사들이 참 예쁩니다. 특히 미사에서 실수할 때가 더 예쁩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복사는 미사 내내 울상입니다. 틀리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틀렸다는 것도 별것 아닙니다. 오른쪽으로 가야 하는데 왼쪽으로 잠깐 방향을 잡은 것, 조금 늦게 포도주와 물을 가져온 것, 종을 늦게 친 것…. 이렇게 틀린 것이 전례의 근본정신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은 과거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희망을 볼 수 있게 하며, 이로써 지금 사랑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게 합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바로 인간적인 고정관념에 쌓여 있어서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어떤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받아 가셨습니다. 그런데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신 것입니다. 유다교에서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단순히 위생의 문제로 손을 씻은 것이 아니라, 부정한 것과의 접촉으로 더러워진 자신을 정화하는 정결 예식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생각을 꿰뚫어 보시고 그들의 닫혀 있는 마음을 지적하십니다.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루카 11,39)
겉으로 보이는 율법 조항 지키는 것을 누구보다 열심히 지켰지만, 이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쓸데없는 고정관념뿐입니다. 그보다 진정으로 깨끗해질 수 있는 길은 ‘자선’이라고 하십니다. 즉,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루카 11,41)라고 말씀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은 그들의 소유와 재물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쌓아둔 재물을 가난한 이웃에게 자선으로 베풀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깨끗해질 수 있다고 하시지요.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단순히 고정관념으로 외적인 종교적 ‘열심’이나 ‘형식’만을 강조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해서 하늘 나라에 가깝게 하는 것은 자선, 즉 사랑의 실천뿐입니다.
오늘의 명언: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행복을 더 많이 가지려는 자가 아니라, 더 많이 주려는 자들이다(H. 잭슨 브라운 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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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14. 연중 28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여전히 부족하지만, 진솔한 삶을 향해....
속과 바깥! 내면과 외면!
마음 속 깊은 의도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영적인 삶에서는 내면의 정화와 비움을 통해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총을 의식하고 감사의 마음으로 수용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외적인 행위, 즉 기도와 성사 거행은 물론이고 일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토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마태오 복음 6장이나 오늘 우리가 듣는 루카 복음의 말씀을 성찰하다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삶의 자세는 기도나 전례, 성사 거행 때만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안에서도 의식적으로 견지되어야 할 자세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함의 삶은 단순한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깊은 인격적 관계 맺음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마태 5,48)이 될 수 있고, 또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루카 6,36)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처럼 완전하고 자비로울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부족함을 겸허하게 인식하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그런 완전하고 자비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삶의 여정을 곁에서 함께 걸어가 주시는 주님을 의식하고 인식하고자 할 때 우리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룩함과 자비를 드러내신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속과 바깥! 내면과 외면!
인간은 내면과 외면 사이에 깊은 단절을 만들어낼 수 있는 불행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제와 다른 모습을 드러내고, 허구의 세계 속에 숨어 살며, 타인을 속이고 결국에는 자신까지 속이는 삶, 즉 거짓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점에서 하느님께서 창조해 주신 모든 피조물 중에서 인간은 참 독특한 존재입니다. 세상의 다른 피조물들은 진실을 살아갑니다. 물론 몇몇 생물들이 위장하거나 회피 행동을 보이는 것은 일종의 기만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정당한 자기방어이며 위기가 지나면 사라지는 일시적인 반응이요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본능입니다. 또한 대부분의 종에서 수컷들이 짝을 얻기 위해 치장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 역시 기능적이며 일시적인 것이고 또한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본능일 뿐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거짓 속에 머물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내일 우리가 기념하게 될 위대한 성인 아빌라의 데레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 영적 여정의 시작이다."라고요!
사실 참된 자아로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의 기준이나 타인의 시선보다 하느님 앞에서 벌거벗겨진 '나'를 진솔하게 바라보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는 것일 겁니다. 이런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때로는 우리에게 불편하고 고통스럽기까지 하지만, 결국에는 우리에게 참된 평화와 자유를 가져다 주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은 우리를 고립시킵니다. 거짓이 일정한 경계를 넘어서면, 우리는 고립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이 우리를 하느님의 진리를 살아가는 피조물 공동체로부터 단절시키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거짓말하지 않고, 산과 강도 거짓말하지 않으며, 동물들조차 거의 거짓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거짓을 비극적이고 부조리한 수준까지 끌고 갈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속과 바깥을 완전히 같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사랑과 자비와 용서이신 하느님을 만나고자 한다면, 즉 이런 턱없이 부족한 "나"와 한 순간도 예외 없이 '내' 삶의 여정에 함께해 주시는 주님의 현존을 의식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과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채워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꿋꿋이 우리 삶의 여정을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솔한 삶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 진솔한 삶은 완벽한 삶이 아니라 부족함을 스스럼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용기 있는 삶이고,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사랑의 하느님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삶인 것입니다.
요즘 저는 가끔씩 이런 묵상이나 기도 안에 있을 때의 저 자신과 일상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계산하며 그 계산과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저 자신 사이의 괴리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때가 속과 겉이 다른 불편함을 느끼는 때입니다. 그때마다 다시, 또 다시 저의 무의식을 깨워 하느님 현존 의식 속에 있고자 합니다. 물론 매번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괴리감이 저를 불편하게 한다는 사실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겉치레를 중요시하는 바리사이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속에 담긴 것'이란 자신의 부족함을 진솔하게 받아들이면서도 하느님께서 우리 존재 가장 깊숙한 곳에 심어 주셨고, 또 계속해서 심어 주시는 사랑할 가능성을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마음이리라 믿습니다.
주님, 오늘도 저는 많은 생각 속에서 말하고 표정을 지으며 하루를 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외면 너머, 당신께서는 제 마음 깊은 곳을 바라보십니다.
제가 감추려 했던 불안, 제가 외면했던 상처, 제 생각이 만들어낸 억울함의 착각 등...
이 모든 속의 것이 당신 앞에서는 모두 드러나게 되어 있음을 저는 압니다.
그 드러남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진실한 마음으로 당신 앞에 서게 하시고,
내면의 고요 속에서 당신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은총을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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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14. 연중 28주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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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116401&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서하”를 찿아 들어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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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14. 연중 28주간 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겉모습은 드러나지만
속모습은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속모습보다는 겉모습에 집중하기도 합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면
속보다는 겉을 먼저 선택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좋게 평가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좋게 보여서 나쁠 것은 없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겉모습에 집중하다보니
속모습을 놓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겉모습을 어느 정도 신경 쓰고 속모습도 신경 쓴다고
방향을 바꾸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겉모습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 즉각적으로 오는데
그 반응에 맛을 들이다보면
점점 더 겉모습에 신경을 쓰게 됩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라는 식으로 접근하다보면
결국 속모습에 신경 쓸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겉과 속의 차이가 커지고
내 모습은 점점 위선자같이 변해갑니다.
내가 일부러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은 아닌데
결과는 그렇게 되었습니다.
정작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겉과 속의 차이가 생겼다는 것을 아는 순간
나의 행동이 위선적임을 눈치 채는 순간
나는 어떻게 행동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나의 속모습은 이렇다'라고
자신있게 드러낼 수 있는 용기가
우리 안에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겉모습을 통해 쌓아온 것이
하루 아침에 무너질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더 겉모습에 집중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점점 거품처럼 커지고
나의 속모습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드러나게 될 때
나는 더 당황하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겉모습이 나를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겉모습만 내 모습은 아닙니다.
속모습도 내 모습이라는 것을 잊으면
속모습이 언제 드러날까 걱정되어
삶은 살얼음판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속모습을 생각만큼 신경 쓰기는
물론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둘의 균형을 잘 잡을수록
내가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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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14. 연중 28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1,37-41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떤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를 받으시어 함께 식사를 하십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밖을 돌아다녀 더러워진 손을 씻지 않고 바로 음식을 드시지요. 그 모습을 보고 그분을 초대한 바리사이는 깜짝 놀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참된 예언자이자 스승이라며 칭송하길래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알아보기 위해 자기 집에 초대했는데, 독실한 유다인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식사 전 손씻기’조차 거르는 모습에 크게 실망한 겁니다. 그런데 식사 전 손씻기는 절대 어겨서는 안되는 ‘율법’규정이 아닙니다. 어떤 이유 때문에,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조상 대대로 실천해온 ‘관습’일 뿐이지요. 그들의 조상들이 손을 씻은 이유와 목적은 아마 위생일 것입니다. 식사 전에 몸을 청결하게 하지 않으면 질병에 걸릴 수 있음을 경험으로 알았기에, 그런 상황을 방지하고자 꼭 손을 씻으라고 강조했겠지요.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는 그 이유와 목적은 잊혀지고 손을 씻는 행위만, 그 관습을 꼭 지켜야 한다는 당위성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관습을 철저히 지킨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는 강박이, 남들 눈에 자기 모습이 안좋게 보일까봐 걱정하는 두려움이 점점 심해졌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남들 눈에 비치는 겉모습에만 신경쓰는 바리사이의 형식주의를 강도높게 비판하십니다. 그리고 그가 그런 형식주의에 빠지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도 분명하게 지적하시지요.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사람이 형식주의에 빠지는 이유는 그의 마음 속이 탐욕과 사악한 뜻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커먼 속내를 남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겉으로 더 깨끗한 척, 더 올바른 척 오버액션을 취하지요. 그러면서 남들보다 덜 깨끗해보이는 사람, 더 부정해보이는 사람을 타겟으로 삼아 비난의 화살을 날립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주의를 다른 쪽으로 돌림으로써 자신의 허물과 잘못이 부각되지 않고 조용히 잊혀지게 만들려는 심산입니다.
그런 형식주의에 물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나 행동보다 마음에 집중하면 됩니다. 내 마음 속에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뜻인 사랑과 자비를 가득 채우면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랑과 자비가 밖으로 흘러넘쳐 나의 행동과 삶에서 드러나지요.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참된 자선은 겉으로만 자비로운 척, 선한 척 하는게 아니라, 먼저 내 마음 안에 자비와 선을 가득 담고 그것을 적극적인 행동으로 드러내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했던 그 바리사이의 마음 속에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자비와 사랑이 있었다면, 그는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놀라며 실망할 게 아니라, 저러다 나중에 아프시면 어쩌나 하고 걱정부터 했을 것입니다. 그분께 물을 떠다드리고서 함께 손을 씻자고 적극 권유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가 진심으로 실천한 자비와 사랑을 통해 예수님의 몸은 물론이고 마음까지, 더 나아가 그분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한 자기 마음까지 참된 기쁨과 보람으로 깨끗해지고 거룩해졌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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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376
10월14일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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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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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곤벨뚜알 프란치스코수도회 최문기 마티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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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줍니다!>
저는 오늘 복음 말미에 주님께서 강조하신 대목,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라는 말씀을 묵상해봤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 교부의 해석이 제 마음을 크게 요동치게 합니다.
재물을 희사하는 것만이 자선이 아닙니다. “지친 사람의 짐을 져주고, 슬퍼하는 이를 위로하고, 길 잃고 헤매는 이에게 바른길을 알려주는 것도 자선입니다. 어쩔 줄 모르는 사람에게 조언해 주고,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도 아주 좋은 자선입니다.”
암브로시오 교부의 해석도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크나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깨끗해지는 방법이 참 많습니다. 자비가 우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특별히 자선이 우리를 깨끗하게 정화시킵니다.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줍니다.”
결국 우리 죄의 정화는 자선과 자비,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완성됩니다.
지금 저희 공동체에 살레시오회 몽골 지부장 신부님께서 비자 발급차 머물고 계십니다. 올해부터 몽골 지부는 저희 한국 관구 소속으로 이관되었습니다. 신임 지부장으로 전 관구장이셨던 최원철 티모테오 신부님이 임명되셨습니다.
몽골 지부는 3명의 한국인 사제(최원철 티모테오 신부, 이호열 시몬 신부, 강훈 바오로 신부)를 비롯해 열 명 남짓한 다국적 살레시오 회원들이 사목하고 있습니다. 회원의 숫자에 비해 저희 살레시오회가 운영하는 사업체 숫자와 직원, 청소년들의 수효는 엄청납니다.
자연스레 몽골 지부 운영을 위한 경제적 어려움이 만만치 않습니다. 비자 발급을 위해 잠시 입국한 지부장 신부님과의 대화 중에 깜짝 놀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부장으로서 경제 상황을 점검해보니 잔고가 아슬아슬하다는 것입니다. 빡빡 긁어 모아 보니 향후 세달치 운영비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몽골 정부가 수도회와 청소년 사목터 진출을 위한 장을 제공해주고, 터를 마련해주며, 청소년 사목을 수행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지만, 제반 운영 경비는 수도회가 자체적으로 충당하고 있다 보니, 재정 상황이 암담하다는 것입니다.
자연스레 지부장 신부님께서 몽골 살레시오회 전체를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너무나 큰 부담에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랍니다. 그래서 함께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해맑고 순수한 몽골 청소년들을 위해 용기를 내야 한다. 후원금을 모금하는 과정에서, 보다 적극적이고 당당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후원에 참여하는 분들에게 부담을 드릴 수도 있지만 큰 선물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분들에게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참여할 수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드리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지금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여러 측면에서 열악하고 호의적이지 않은 선교지에 나가 기쁘게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 해외 선교사들, 참으로 감사한 분들입니다. 그분들의 영적 육적 건강을 위해 기도하고, 함께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실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세례 성사를 통해 선교사로서의 징표가 우리 영혼에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제약으로 인해 몽골로, 아프리카로 건너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먼 곳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지 않더라도 선교에 동참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작은 액수라 할지라도 매월 꾸준히 해외 선교사들의 그 소중한 선교 사업에 후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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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몽골 지부 선교 사업 후원회 가입 및 기부금 영수증 신청
살레시오회 선교국 02)828-3524
후원 계좌
국민은행 090-01-0323-505
(재) 천주교 살레시오회 선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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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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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함이란? 생각보다 강력한 자선의 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위선을 꾸짖으시며 “속에 든 것을 자선으로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라고 선포하십니다. 이 말씀은 자선이 단순히 남을 돕는 행위를 넘어, 우리 영혼의 문을 열고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깨끗한 공간’을 만드는 가장 강력한 열쇠임을 알려줍니다.
과연 깨끗함이란 무엇일까요?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서 깨끗함이란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깨끗한 집에라야 귀한 손님을 맞이할 수 있지요. 사제로서 집 축복을 다니다 보면, 집이 지저분해서 사제를 들이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스스로 판단하며 축복을 거부하는 신자분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깨끗함이란 객관적인 상태이기 이전에,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는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판단하는 ‘양심’이 있습니다. 이 양심이 “너는 죄로 가득 차 있다. 너는 더러운 집이다.”라고 판결을 내리면, 우리는 하느님이라는 가장 귀한 손님이 문을 두드리셔도 차마 그 문을 열어드리지 못하게 됩니다.
아서왕 전설의 기사 랜슬롯은 성배를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하고 쓰러집니다. “나는 왕을 배신한 죄인이다. 이런 더러운 몸으로 어찌 감히 거룩한 성배를 마주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양심이 스스로를 ‘합당하지 않다’고 판결했기에, 가장 큰 은총 앞에서 스스로 문을 닫아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미사 때 성체를 영하기 직전,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특히 제 안에 ‘주는 사랑’이 메말라 있음을 느낄 때 더욱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다 주시는 주님, 저는 주님께 무엇을 드렸습니까? 아무것도 드리지 못한 제가 어찌 감히 주님을 받아 모실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받기만 하는 나’와 ‘다 주시는 주님’ 사이의 불균형이, 제 양심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입니다.
이 무거운 양심의 짐을 어떻게 가볍게 할 수 있을까요?
가수 박진영 씨가 가수 비에게 했던 조언에 그 실마리가 있습니다. “나한테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대신에 너와 함께 일하는 스태프나 후배들에게
잘해라. 그러면 네가 나를 볼 때 빚진 마음 없이 편안하고 떳떳하게 볼 수 있을 거야.”
우리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베풀어준 높은 분에게 직접 보답하기 어려울 때, 그 사랑을 다른 이들, 특히 우리보다 낮은 곳에 있는 이들에게 흘려보낼 때, 우리의 양심은 비로소 평화를 얻고 그분을 떳떳하게 마주할 힘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자캐오가 바로 이 원리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시기 직전, 군중을 향해 외칩니다.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제가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신 ‘자선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런데 자선을 한 번도 행하지 않은 이기적인 내가, 어떻게 감히 ‘자선 자체’이신 분을 내 안에 모실 수 있단 말입니까? 자캐오는 자신의 ‘속에 든 것’을 이웃에게 나누는 행위를 통해, 비로소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한 깨끗한 집을 마련한 것입니다.
미국 금융가 조지 피바디는 명성을 얻으려는 세속적인 동기로 런던의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한 주택 사업에 막대한 돈을 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지은 아파트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가족들과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보면서, 그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순수한 기쁨을 체험합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시작했던 나눔이, 도리어 그의 영혼을 정화시켰습니다.
그는 더 이상 외로운 이방인이 아니었습니다. ‘런던의 아버지’로 불리며 진심으로 사랑받았습니다. 그의 이기적인 행동이, 그의 양심을 “너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도록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데는 거창한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꾸준히, 매일같이 자선을 베푸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역사상 가장 미움받던 부자, 존 록펠러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 기계적으로 거액을 기부했지만, 마음의 평화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병원에서 수술비가 없어 죽어가는 소녀를 위해 마지못해 돈을 내주었고, 그 소녀의 감사 편지를 받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평생 처음으로 자신의 돈이 한 생명을 살리는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는 그날 이후 ‘주는 기쁨’에 눈을 떴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선 자체’이십니다. 그분을 우리 안에 깨끗하게 모시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작은 오세올라가 되어봅시다. 내가 마실 커피 한 잔 값을 아껴 더 어려운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작은 습관을 시작해봅시다. 그 작은 나눔이 우리의 양심을 씻어주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기쁘게 머무시는 가장 깨끗하고 거룩한 성전으로 우리를 빚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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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침 산책길에 제게 큰 위로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길을 따라 한 시간쯤 걷다 보면 의자가 하나 나옵니다. 그 의자는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 같습니다. 잠시 앉아 물도 마시고, 숨도 고르고, 새 소리도 듣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이 흘러가고, 동쪽에서는 해가 막 떠오릅니다. 그 순간 저는 비로소 제 몸과 마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느낍니다. 단순한 나무 의자 하나가 제게는 쉼터이자 위로의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인문학적으로 보자면, 의자는 단순히 앉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 쉼을 배우고, 서로를 만나고, 자기 자신을 성찰하게 하는 자리입니다. 서 있는 것은 긴장이고, 앉는 것은 이완입니다. 그래서 의자는 노동과 노동 사이에 놓인 쉼의 상징입니다. 또한 의자는 관계를 만들어 줍니다.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면서 공동체가 생겨납니다.
성경에서도 ‘자리’는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앉으셔서 제자들을 가르치셨고, 부활하신 후에는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자리는 권위와 사명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봉사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앉아야 할 자리는 단순히 편안함의 자리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 힘을 얻는 자리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면 왼쪽에는 요한의 자리를, 오른쪽에는 야고보의 자리를 주십시오.” 요한과 야고보에게 의자는 권력과 명예의 자리였습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다른 열 제자 역시 예수님을 따르면서 원했던 것은 권력과 명예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리는 희생과 헌신의 자리였습니다. 겸손과 나눔의 자리였습니다.
역사 속에는 지친 이들에게 의자가 되어 주신 분들이 계십니다. 성녀 마더 테레사는 길에 버려진 병든 이들의 곁에 다가가 그들에게 쉼과 위로를 주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의 의자가 되어 주었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아프리카 톤즈에서 의사요 교사요 친구가 되셨습니다. 병든 이들을 고쳐주고,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 주며, 외로운 이들을 쉬게 해주신 분입니다. 그분은 톤즈 사람들의 의자가 되어 희망을 선물했습니다. 오웅진 신부님은 꽃동네를 세워서, 버려진 이들이 쉴 수 있는 의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세상에 자리가 없던 이들에게 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원했던 의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요? 의자는 우리를 잠시 멈추게 하고, 내면을 돌아보게 하고, 다시 걸어갈 힘을 주는 곳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십니다.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의자에 앉는 것은 겉으로는 단순한 행위지만, 그 순간 우리는 마음을 비우고 속을 정화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의자는 우리를 성찰로 이끄는 자리입니다. 아침 산책길의 의자가 저에게 쉼과 힘을 주듯, 우리도 누군가에게 의자가 되어 줄 수 있습니다. 가족에게, 이웃에게, 교우에게 잠시 앉아 쉴 자리를 내어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우리 삶은 복음의 자리가 되고, 믿음의 자리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도 복음 위에 앉아 다시 힘을 얻고, 지친 이들에게 의자가 되어 주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주님, 우리 삶의 쉼터가 되어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아침 산책길의 작은 의자가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하듯, 우리도 이웃에게 의자가 되어 잠시라도 위로와 힘을 줄 수 있게 하소서.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을 깨끗이 하며, 복음 위에 앉아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 믿음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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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이찬우 다두 신부님]
여러분은 어떻게 식사합니까? 인상을 쓰거나 울면서, 아니면 짜증 내면서 식사합니까? 사실 먹는 것은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그로써 우리의 생명을 얻고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먹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누군가를 초대하는 것은 그와 함께 생명에 활기를 불어넣겠다는 뜻입니다. 나의 밥, 나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음식을 나누는 것은 생명을 나누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바리사이가 예수님을 초대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초대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과 식사하는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께서 손을 씻으시지 않는 것을 보고는 놀랍니다. 그에게는 예수님과 함께 생명을 나누는 식사보다도 율법이 더 중요해 보입니다.
살다 보면 자신만의 원칙들이 생겨납니다. 이 원칙들은 자신을 보호하기도 하고 올바른 삶을 꾸려 가도록 도와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원칙이 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을 때는 문제가 생깁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는 음식을 함께 먹는 일을 생명을 나누는 일로 소중히 여기기보다 율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오늘 하루 자신이 가진 삶의 원칙들을 살펴봅시다. 그리고 그 원칙이 사랑에 기초한 것인지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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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1,37-41: 겉은 깨끗이 닦아도 속에는 착취와 사악이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전통적 정결례에 집착하면서도 마음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 차 있음을 지적하신다. 이는 외적 종교 행위와 내적 회개 사이의 불일치를 드러내는 말씀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잔과 접시의 겉을 닦으면서 속을 더럽힌다면, 그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외식일 뿐 하느님께 드리는 경배가 아니다.”(Hom. in Matth. 72)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속’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인간의 중심인 마음(καρδία, 카르디아)이다. 성경에서 마음은 하느님께서 사시는 자리이자, 사람이 진정 누구인지 드러나는 곳이다.(마태 5,8 참조)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안에 있는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해질 것이다.”(41절) 말씀하신다. 성 암브로시오는 “자선은 외적 정결례보다 훨씬 강력한 정화의 힘을 가진다. 왜냐하면 자선은 마음을 정화하고, 그 마음에서 다시 모든 행위가 흘러나오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했다.(Expositio in Lucam VII, 115) 교회는 전통적으로 자선을 영혼의 씻음으로 이해해 왔다. 토비트서와 집회서가 말하듯이, 자선은 단순한 돈이나 물질의 나눔을 넘어,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총의 길이다.
성 가이사리우스는 “자선을 단지 가난한 자에게 빵을 나누어 주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라. 형제를 용서하는 것도 자선이고, 죄인을 훈계하는 것도 자선이며, 기도 중에 다른 이를 기억하는 것도 자선이다.”라고 가르쳤다.(Sermo 25, 4) 성 아우구스티노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큰 선행도 무익하다. 그러나 사랑이 있으면 작은 행위도 위대하다.”(Sermo 34)고 말한다. 즉, 자선은 사랑의 구체적 표현이다.
교리서는 “자선은 영적 자선과 육적 자선으로 구분된다.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이에게 옷을 입히고, 죽은 이를 묻는 것은 육적 자선이다. 무지한 이에게 가르치고, 의심하는 이에게 조언하며,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고, 죄를 용서하고, 불의를 참아내며, 적을 사랑하는 것은 영적 자선이다.”(2447항)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자선 행위를 가르치며, 이것이 신자의 삶을 정화하고 성화로 이끈다고 강조한다.
오늘 복음은 신앙인의 삶이 단순한 형식이나 외적 의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내적 정화와 사랑의 행위로 드러나야 함을 일깨워 준다. 나는 겉으로는 신앙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내 마음속에는 탐욕과 자기중심성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 나는 ‘자선’을 단지 물질적 나눔으로만 한정시키지 않고, 용서, 위로, 훈계, 기도와 같은 영적 자선으로 확장하고 있는가?
결론적으로, 가장 큰 정화의 힘은 자선(사랑)에 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선을 통해서 우리는 참으로 깨끗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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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께서 내게 담으셨으니>
루카 11,37-41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꾸짖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당신께서 내게 담으셨으니>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0-41)
당신께서 내게
믿음을 담으셨으니
그 믿음 움켜쥐지 않고
넉넉히 베풀렵니다
나 오롯이 믿음이도록
당신께서 내게
희망을 담으셨으니
그 희망 움켜쥐지 않고
넉넉히 베풀렵니다
나 오롯이 희망이도록
당신께서 내게
사랑을 담으셨으니
그 사랑 움켜쥐지 않고
넉넉히 베풀렵니다
나 오롯이 사랑이도록
당신께서 내게
기쁨을 담으셨으니
그 기쁨 움켜쥐지 않고
넉넉히 베풀렵니다
나 오롯이 기쁨이도록
당신께서 내게
착함을 담으셨으니
그 착함 움켜쥐지 않고
넉넉히 베풀렵니다
나 오롯이 착함이도록
당신께서 내게
섬김을 담으셨으니
그 섬김 움켜쥐지 않고
넉넉히 베풀렵니다
나 오롯이 섬김이도록
당신께서 내게
살림을 담으셨으니
그 살림 움켜쥐지 않고
넉넉히 베풀렵니다
나 오롯이 살림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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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겉으로나 속으로나 똑같이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37-41)
1)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셨다는 말은, ‘식사 전의 정결예식’을 행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그 ‘정결예식’은 ‘율법’이 아니라 ‘바리사이들의 규정’이었고, 대단히 복잡한 예식이었습니다.(마르 7,3)
그리고 그 예식은 ‘마음은 씻지 않고 몸만 씻는’ 위선이었고 거짓 예식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 예식을 무시하셨고, 제자들도 예수님을 본받아서 그 예식을 무시했습니다.(마르 7,2)
여기서, 예수님께서 정결예식을 행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바리사이가 놀랐다는 말은, 그 바리사이가 예수님을 자기들과 같은 부류에 속하는 랍비나 율법학자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이 우리 편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라고 생각해서 놀란 것입니다.>
2) ‘깨끗함’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참 행복’ 선언에 연결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하느님을 본다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마음이 깨끗하지 않은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깨끗함’은 ‘거룩함’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더러움 속에서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셨습니다.”라고 말하면서(1테살 4,3.7), 그 부르심을 무시하는 자는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1테살 4,8)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말은, 당신의 나라로 들어오라고 부르셨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거룩한(깨끗한)’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셨다는 말은, 거룩하게(깨끗하게) 살아서 하느님 나라로 들어오라고 부르셨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생활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추려고 노력하는 생활이고, 거룩한(깨끗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3)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라는 말씀에서 ‘탐욕’과 ‘사악’이라는 말은,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20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율법학자들을 경계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기를 즐기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며,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좋아한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욱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루카 20,46-47) <율법학자들은 대부분 바리사이파에 속해 있었습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라는 말씀에서 ‘속에 담긴 것’이라는 말은, 힘없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해서 모은 재물을 뜻하고, “자선을 베풀어라.” 라는 말씀은, ‘빼앗은 것’을 돌려주라는 명령입니다. <돌려주는 것으로 그칠 일이 아니고, 그 이상의 손해 배상을 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회개하여라.”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탐욕’과 ‘사악’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면 회개해야 하는데, ‘빼앗은 것’을 돌려주지 않고 가지고 있으면서 회개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려면 겉과 속이 똑같이 거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겉으로만 거룩하고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한 것은, ‘위선’이라는 죄를 짓는 일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또 속이 거룩하면 겉으로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속이 거룩하다고 자처하면서 겉으로 아무렇게나 막 행동하는 것은 ‘교만’이고, 그것도 ‘위선’입니다. 겉과 속이, 또는 속과 겉이 똑같이 거룩해야 합니다.>
4) “자선을 베풀어라.”라는 말씀을 단순하게 생각해서 사랑을 실천하라는 명령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거룩함’이란, ‘거룩하신 하느님을 닮는 것’입니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4)
그런데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기 때문에(1요한 4,8), 거룩하신 하느님을 닮으려면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근엄하고 엄숙한 것을 ‘거룩함’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착각입니다. 사랑 없이는 거룩함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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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짱을 추구합니다>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사랑하면 사랑이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때문에 예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음의 깨끗함은 사랑을 실천함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의 깨끗함은 겉모양을 깨끗이 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 즉 자선을 베풀게 됨으로써 깨끗해집니다. 자선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선은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 위에 내리게 하는 힘이고, 우리 구원의 확실한 표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자선을 되도록 많이 해야 합니다. 성베드로 솔로그는 “자선으로 씨를 뿌릴 때 거기서 거두는 열매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속에 담겨 있는 탐욕과 사악은 자선을 통해서 정화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정결례는 바로 마음속에 있는 탐욕과 사악함을 씻는 것입니다. 올바른 지향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선을 베풀어 마음을 거룩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외적인 더러움을 씻는 것입니다. 그리고 먹거나 마시는 그릇을 깨끗이 씻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외적인 깨끗함보다는 내면의 정결이 더 소중합니다. 모든 불의와 부도덕한 행위에서 정화될 때 그 사람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깨끗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외적 정결함을 강조하고 중요시하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은 잘 가꾸지 못했습니다. 사제는 미사 중에 예물 준비를 하면서 손을 씻으며 기도합니다. “주님,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 거짓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들, 안 보이는 속은 내버려 두고 겉꾸미는 사람들, 말과 행실이 다른 사람은 그릇을 닦는 일보다 마음을 닦는 일이 우선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하늘의 그물은 누구도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외적인 규정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혼자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고, 주 하느님은 속마음을 들여 다 보시니 여러분의 마음이 하늘을 향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선을 숨겨 두기 바랍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마태6,4)
얼굴도 이쁘고 말도 잘하면 금상첨화, 둘 중의 하나가 부족하면 천만다행, 둘 다 부족하면 설상가상이랍니다. 그러나 고쳐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에 도금을 입히지 않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얼짱, 몸짱을 추구하지만 우리는 마음짱을 추구합니다. 마음을 잘 가꾸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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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한 바리사이를 꾸짖으시는 장면을 중점적으로 다룹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서 어떤 바리사이의 초대를 받고 그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끝나고 새로운 사건이 시작됨을 알려 줍니다.
사건의 발단은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손 씻기를 규정으로 명시하지는 않지만, 유다교 전통에서 중요한 관습 가운데 하나입니다. 손 씻기는 공동체 사이의 경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표지이자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손을 씻는 관습을 벗어나는 행동은 손님을 초청한 주인에 대한 모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바리사이는 손을 씻지 않는 예수님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리사이의 반응에 예수님께서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 응답하십니다. 예수님의 눈에 바리사이들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들은 손 씻기와 같은 제의적 정결에 관심을 쏟았지만, 외적 행위를 내면의 상태와 일치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사용하는 잔과 접시는 깨끗할 수는 있지만, 그들의 속은 탐욕과 악으로 가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릇의 겉을 씻는 정결 예식을 강조하고 내면의 더러움을 감추려는 바리사이의 위선을 비판하십니다. 이제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선의 실천입니다. 가난한 이를 위한 자선 행위로 탐욕과 악을 씻고 하느님 앞에서 정결한 이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율법 규정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되돌아보도록 요청합니다. 바리사이의 율법 이해와 적용은 우리에게 부정적 본보기입니다. 우리는 율법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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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 인간은 수많은 법률과 규정 안에서 살아갑니다. 이는 곧 사람은 관계 안에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려면 서로 간에 지켜야 할 규범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규범은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을 규정한 것이지 어떤 권력이나 권한을 상징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 시대의 율법이나 오늘날의 종교적 법률들은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까지 규정합니다. 하느님께도 사랑과 예의를 올바르게 표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법이 우리 인간들이 숨조차 쉴 수 없도록 세세하고 장황하게 규정되어 있다면, 그것은 분명 우리와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바리사이들처럼,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권력을 탐하는 이들의 욕심일 따름입니다.
“가장 완벽한 법은 가장 완벽한 불의이다.”(Summum ius, summa iniuria)라는 로마의 법률 격언이 이야기한 것처럼, 그 중심에 하느님과 인간이 빠지고, 법 자체만을 위한 법률은 오히려 불의가 되고 폭력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자신의 온 마음을 담아서 사랑을 실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모든 율법을 넘어서는 그리스도인의 지침입니다. 법률은 인간의 외면적인 관계들을 정해 주지만, 그 진짜 본질은 인간의 마음 안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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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나의 밥상이 정당한 노력의 대가인가?>
시간이 갈수록 예수님의 목소리가 격앙되어 가고, 격앙된 목소리는 가르침의 비중과 비례한다. 이제 루카복음에서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단도직입적인 책망과 불행선언이 서서히 준비되고 있다.(루카 11,37-54)
이 대목에서 예수께서는 백성들의 지도자로 위치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표리부동함을 경계하고 책망하시면서, 그것 때문에 그들이 불행과 화를 입게 될 것임을 예고하신다. 마태오도 복음의 23장에서 비슷한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오늘 복음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불행선언의 서막 역할을 담당한다. 장소는 어느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이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저녁식사에 초대를 받아 그 집에 들어가 식탁에 앉으신다.(37절)
예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식사초대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루카 7,36; 14,1) 그분은 세리와 죄인과도 함께 식사를 하셨다.(루카 5,29-30)
문제는 예수께서 손을 씻는 예식을 치르지 않고 음식을 드신 데서 발생한다. 호스트인 바리사이파 사람은 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38절) 다소 과장된 반응인 듯하지만 그가 놀란 만큼 예수님의 말씀도 놀랄 만큼 단호하다.
“너희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속에는 착취와 사악이 가득 차 있다.”(39절)는 것이다.
마태오복음은 ‘잔과 접시의 겉만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그 속에는 착취와 탐욕이 가득 차 있다.’는 단언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다섯 번째 불행선언(마태 23,25-26)의 범주에 넣어 다루고 있는 반면, 루카는 이 대목을 불행선언을 위한 서막으로 다루고 있다.
마태오는 여기서 ‘이 눈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먼저 잔의 속을 깨끗이 닦아라. 그래야 겉도 깨끗하여 질 것이다.’는 말을 붙여 외적인 정결보다 내적인 정결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루카는 그릇 속에 들어 있는 내용물에 더 관심을 보인다. 물론 이 부분은 루카가 의도적으로 개작한 부분임이 틀림없다.
통상 맨손으로 음식을 먹어야 하는 유대인들의 풍속(風俗)을 감안하면, 식사 전에 손을 씻는 일은 위생상으로도 꼭 필요한 것인데, 유대교는 이를 정결예식에다 묶어 꼭 치러야 하는 규정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규정의 참뜻은 손, 접시, 잔, 항아리 등을 씻어 겉을 깨끗하게 함으로써 속까지 깨끗하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속까지 보시는 예수님의 눈에 그들의 속은 착취와 사악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즉,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먹기 위해 잘 닦은 그릇 속에 담긴 음식은 그릇의 정결함과는 달리 부정함으로 만들어진 음식이라는 것이다.
담겨진 음식이 깨끗해야 잘 닦은 그릇도 빛나는 법이다. 이와 같이 사람의 마음속이 더럽다면 겉으로 보이는 행세가 아무리 옳고 멋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거짓이 되고 위선이 되고 마는 것이다.
착취와 사악으로 가득 차 마음은 오직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자선과 봉사로 정결함을 되찾을 수 있을 뿐이다.(41절) 하느님의 눈에 이것 말고 다른 정결함의 방법은 없다.
그릇을 잘 씻어 음식을 담고, 그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함은 유다교의 율법이 규정이기 전에 위생상 필요한 과정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염려해야 하는 것은 그릇에 담겨 있는 음식이다. 바로 내가 먹을 음식 말이다. 그 음식이 착취와 사악으로 만들어졌는지, 아니면 정당한 노력의 대가로 만들어진 것인지를 살피는 일이다.
오늘 복음의 가르침과 같이 그릇은 사람의 마음을 담는 도구요, 그 그릇에 담긴 음식은 마음 씀씀이를 말한다. 그릇을 아무리 깨끗이 닦는다고 해도 제대로 된 음식이 담겨 있지 않다면 그릇의 깨끗함은 아무 소용이 없다. 매일 내가 먹든, 남이 먹든 음식은 깨끗해야 하고, 먹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생명을 주는 음식이어야 한다.
사람의 모든 경제적, 사회적, 생물학적 활동은 그 근본이 먹고 사는데 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남을 등쳐먹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남이야 굶든, 먹고 죽든, 어찌되든 간에 자기만 잘 먹고 살면 끝난다는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자의 밥상은 결코 정당한 밥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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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창의적 사고를 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고정관념을 지워야 창의성이 나올 텐데, 고정관념의 틀에 갇혀 있게 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본당 미사 후에, 종종 “신부님, 죄송해요.”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해설에 문제가 있었다고, 독서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미사 준비에 미숙한 부분이 있었다고, 때로는 미사 시간에 스마트폰 울린 것을 사과하십니다. 솔직히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의외의 상황이 오히려 습관적인 전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런 실수로 미사에 집중한다면 그게 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이 복사들이 참 예쁩니다. 특히 미사에서 실수할 때가 더 예쁩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복사는 미사 내내 울상입니다. 틀리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틀렸다는 것도 별것 아닙니다. 오른쪽으로 가야 하는데 왼쪽으로 잠깐 방향을 잡은 것, 조금 늦게 포도주와 물을 가져온 것, 종을 늦게 친 것…. 이렇게 틀린 것이 전례의 근본정신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은 과거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희망을 볼 수 있게 하며, 이로써 지금 사랑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게 합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바로 인간적인 고정관념에 쌓여 있어서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어떤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받아 가셨습니다. 그런데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신 것입니다. 유다교에서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단순히 위생의 문제로 손을 씻은 것이 아니라, 부정한 것과의 접촉으로 더러워진 자신을 정화하는 정결 예식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생각을 꿰뚫어 보시고 그들의 닫혀 있는 마음을 지적하십니다.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루카 11,39)
겉으로 보이는 율법 조항 지키는 것을 누구보다 열심히 지켰지만, 이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쓸데없는 고정관념뿐입니다. 그보다 진정으로 깨끗해질 수 있는 길은 ‘자선’이라고 하십니다. 즉,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루카 11,41)라고 말씀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은 그들의 소유와 재물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쌓아둔 재물을 가난한 이웃에게 자선으로 베풀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깨끗해질 수 있다고 하시지요.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단순히 고정관념으로 외적인 종교적 ‘열심’이나 ‘형식’만을 강조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해서 하늘 나라에 가깝게 하는 것은 자선, 즉 사랑의 실천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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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사랑을 베풀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라는 사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떤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에 일어난 일을 전해줍니다. 그런데 당혹스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루가 11,38) 왜 그렇게 놀랐을까요? 식사 전에 손을 씻는 의식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위생상의 관습이나 예의였을 뿐 아니라, 나아가 세상과 접촉함으로 인하여 생기는 불결을 제거하기 위한 ‘정결례’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라는 바리사이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루가 11,39-40)
이는 진정한 ‘정결례’는 겉을 씻는 일이 아니라 속을 씻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음식에는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루카 11,39)고 하십니다. 이는 단지 ‘속을 씻는 일이 겉을 씻는 일보다 낫다’는 것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속에 담고 있는 것’을 정당하게 취득한 것인지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곧 불의와 착취, 부정과 탐욕, 이기와 사악함을 질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속이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지, 또 그것들을 어떻게 채웠는지, 왜 채웠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이러한 사실을 깨우쳐주시는 것만이 아니라 깨끗해지는 방법도 말씀해 주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그렇습니다. ‘깨끗해지는 길’, ‘더러움을 비워내는 길’은 형제와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입니다.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 채운 속을 비우는 방법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이는 ‘정결법’이라는 율법의 본래의 정신이 ‘사랑’에 있음을 밝혀줍니다. 곧 ‘정결법의 정신’은 깨끗하게 씻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습니다.
그러니 속에 있는 것을 비워낸다고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면 비워지고 깨끗해지게 됩니다. 바로 ‘우리 마음 안에 부어주신 하느님의 사랑’(로마 5,5) 으로 말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그러니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 안에 그분의 사랑이 담겨 있음을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놀랍고 신비로운 것은 사랑을 베풀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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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주님!
제 속을 들여다보게 하소서!
탐욕으로 채운 것을 사랑으로 나누게 하소서!
제가 온전히 깨끗해지고, 당신 얼굴 뵙게 하소서!
제 속에 당신의 뜻을 품고, 당신의 향기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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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속 건강이 중요하다>
오늘 어떤 바리사이가 주님을 식사 초대합니다. 우리는 아무나 식사 초대를 하지 않지요. 존경하거나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을 초대합니다.
그런데 이런 바리사이를 주님은 호되게 비난하십니다. 주님께서 식사 전 정결례를 행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그가 비난한 것도 아니고 그저 놀라워했을 뿐인데 이것을 주님께서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비난하십니다.
이렇게 호의를 싹 무시하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듯한 주님을 보면 주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너무 모질다는 생각이 들어 주님을 초대한 바리사이를 꼭 집어 비난하신 게 아니라 바리사이를 일반화하여 비난하신 거라고 변호도 하지만 어쨌거나 주님께서는 겉과 속이 다름을, 아니 겉치레를 거의 신경질적으로 싫어하시고 배격하십니다.
그것은 속 건강이 너무 안 좋아 피부에 뭐가 계속 나는데도 속병을 고치려 하기보다 화장을 통해 감추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피부가 깨끗하고 아름다우려면 속병을 고쳐야 하고, 속병을 고치려면 몸에 해로운 걸 먹지 말아야 하며, 해로운 것을 먹지 않으려면 해로운 것에 대한 욕구가 없어야 함을.
그런데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속병은 무엇이고, 무엇이 영혼에 해로운 것들입니까?
제 생각에 이 세상의 만족이 그것들입니다. 칭찬과 명예와 같은 좀 더 고차원적이고 고상한 만족에서부터 권력이나 부나 지식과 같이 이 세상에서 힘을 발휘하게 하는 것과 옷이나 먹는 것과 같이 저차원적이고 사치스러운 만족에 이르기까지 우릴 천상으로 향하게 하지 않고 이 세상에 안주케 하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 것으로 만족하려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이런 것들에 대한 탐욕 대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우라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 것들에 대한 탐욕은 우리를 미움, 시기 질투, 분노 같은 것으로 채워 우리 안에 평화라고는 하나도 없고 오직 화가 가득 차게 할 뿐이니 이것들의 원인이 되는 탐욕은 비워내고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케 하라 하십니다.
우리는 누구나 가진 것을 줄 수 있습니다. 없는 것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미움밖에 없는 사람은 미워할 수밖에 없고, 하느님 사랑이 없는 사람이 자비를 실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하면 우리는 그때 우리가 가진 것으로 자비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의 뜻일 것입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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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11,41)
<자선의 힘!>
오늘 복음(루카11,37-41)은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는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예수님을 초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그 바리사이가 놀랍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십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11,39-41)
유다인들이 목숨처럼 여기며 지켜야 율법의 근본은 모세 오경(창세기.탈출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과 십계명입니다. 그 근본을 바탕으로 해서 613개나 되는 세부 율법 조항들이 있는데, '식사 전 먼저 손을 씻어야 한다.'는 율법은 그중 하나입니다.
지겨야 할 모든 율법(계명)의 핵심은 신성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곧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십니다."(1요한4,16) 따라서 예수님도 사랑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났습니다. 온전한 내어줌의 사랑인 아가페 사랑이 드러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기쁜소식)입니다. 그리고 그 완전한 표지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미사참례와 기도와 말씀필사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아가페 사랑으로 드러나야 하고, 아가페 자선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예수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듣게 될 것입니다.
"주님, 주님의 넘치는 은총으로 언제나 저희와 함께하시어, 저희가 끊임없이 좋은 일을 하도록 이끌어 주소서."(본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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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예수님께서는
마음 깊은 곳의
깨끗한 사랑을
바라보십니다.
자선을 통해
이루어지는
내면의
정화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깨끗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깨끗한 마음은
가장 깊은
우리의
신앙입니다.
우리의 노력만으로
깨끗해질 수 없으며,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마음을 정화할 때
가능합니다.
신앙의 본질은
깨끗해진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이며
만남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또한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자선을 통해
우리는
이기심의
먼지를
털어냅니다.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곳은
우리의
깨끗한
마음입니다.
사랑과 나눔을
실천할 때,
우리의 마음은
자연스레
깨끗해집니다.
하느님의 형상을
닮아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겉이 아닌
속을 정화하는
참된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서로를 비추는
하느님의
빛입니다.
참된 사랑으로
하느님을 닮는
맑은 날 되십시오.
마음의 정화는
사랑과 자비의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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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방 성지순례 중이여서 7시 이후 올리기로 했던 추가 묵상글 등은 공유하지 못합니다.
평화와 선
지방 성지순례후 귀가하였기에 25년 111월 14일자 추가 묵상글 등 공유힙니다.
2025. 10. 14. 22:15.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