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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비시 재벌과 조선인 강제 노동
([조사·조선인 강제 노동2재벌·광산편] 제1장부터
다케우치 야수토(竹内康人)
번역 이 양수
미쓰비시(三菱) 재벌은 미쯔이(三井) 재벌과 함께 일본의 제국주의 전쟁을 지탱한 콘채른이다. 미쓰비시 재벌의 주요 생산부문은 광업과 중공업에 있었으나, 그 현장에는 전시하, 수많은 조선인·중국인들이 끌려왔다. 또한 아세아 각지에서의 침략전쟁과 그로 인한 점령지 확대에 따라, 미쓰비시는 각지에서 자원 약탈을 향한 사업을 행하였다. 거기서는 현지 민중들이 전시 동원되였다.
전시하, 일본에 미쓰비시 재벌 관련으로 연행된 조선인은 10만명 이상으로 보인다. 아시아 각지에서 미쓰비시가 동원한 사람도 수많다. 연행지에서 사망했어도 아무런 연락이 없는채, 유골이 지금도 현지에 남아 있는것조차 있다. 최근에는 규슈의 미쓰비시 나마즈타(鯰田) 탄광, 홋가이도(北海道)의 미쓰비시 비바이(美唄) 탄광에서의 사망자의 미반환 유골이 발견되었다. 연행 상황이나 증언등에서 보아, 끌려 온 사람들은 강제 노동 속에 있었다. 그 상황을 노동 노예제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미쓰비시 재벌에 의한 전시하에서의 강제 노동·강제 연행에 대하여, 그 전반적 특징, 미쓰비시와 전쟁, 연행자 수, 사망자 수, 저항의 순서로 살펴 보기로 한다.
1 미쓰비시 재벌에 의한 강제노동
미쓰비시의 석탄, 동(구리)등의 광산물 자원과 군용기(비행기), 군함등의 병기는 전쟁 제국 일본을 떠받치고 있었다. 미쓰비시는 전시하의 노동력 부족 속에서 일본에서의 광업, 중공업에서의 생산, 지하 공장 건설에 있어서 조선인·중국인을 끌고 와서 노동을 강요했다.
당시 [대동아 공영]이라는 이름에 의해, [아시아 해방]을 향한 [성전(聖戦)]이 선전되고 있었으나, 그 전쟁을 위한 생산 현장은, 아시아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곳이 되었다. 연행자들을 위한 건물은 미사여구로 표현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강제 노동 수용소이며, 끌려 온 사람들은 전시의 노예 노동을 강요 당했다. 성적 노예를 사용해서의 노무 관리가 행해진 일도 있었다.
그러나 연행된 사람들은 단결해서 귀환을 요구했으며, 자유를 위해 도주했고, 민족의 독립을 향한 지하 조직을 만드는 등, 여러자기 형태로 저항했다. 연행지에서는 절반 이상이 현장에서 모습을 감춘 곳들도 많다.
패전에 따라 기업측은 연행관계 자료를 인멸했다. 연행관계 자료의 대부분을 잃게 되었다.그러나 잔존하고 있는 자료·명부부터 연행 상황을 알 수가 있다. 전쟁후, 연행 기업들은 조선인·중국인을 사용해서 손실을 받았다고 하여, 일본 정부부터 보상금을 얻었다.
1990년대에 끌려 온 사람들은 재판등에서 그 전쟁 범죄를 추궁하여, 피해자 개인에로의 배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미쓰비시 관련에서는 연행 조선인에 의한 나가사키(長崎) 조선(造船), 미쓰비시 히로시마(廣島), 미쓰비시 나고야(名古屋) 여자 근로 정신대등에서 재판이 시작되었다. 연행 중국인 관련 재판에서도 미쓰비시에 끌려 온 사람들이 포함되고 있었다. 2003년에는 미쓰비시 다카시마(高島)・사키토(崎戸) 탄광에 연행된 중국인들이 재판을 제기했고, 2004년에는 미쓰비시 마키미네(槇峰,미야자키현) 광산에 끌려 온 중국인이 재판을 제기했다.
연행 조선인 재판 속에서 미쓰비시측은, 인정 여부를 거부해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시효][제척]에 의해 불법 행위나 임금 미불을 정당화해서, 국책이나 [별도 회사]를 핑계로 그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았다. 일본 판결의 대부분이 그것에 추종했다. 한층 더하여 [강제 연행은 없었다]라는 캠페인을 역사 왜곡을 진행하는 단체들이 행하게 되었다. 국가와 자본은 전쟁 책임·식민지 책임을 회피하려고 했다. 또한 강제 연행·강제 노동을 부정하는 움직임이 강해졌다.
강제로 끌려 와 강제 노동 속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수많다. 아시아 민중의 공동작업에 의하여, 전시하에서의 연행, 사망자, 저항 상황의 실태가 해명되고, 그것들이 사료와 함께 명시될 필요가 있다. 그 작업에 의해, 끌고 온 기업측의 사회적· 역사적 책임도 한층 확실히 된다. 인간의 권리와 존엄의 확립을 위해서는 역사의 사실(史実)을 확정하여, 과거를 청산할 것이 요구된다. 그것은 민중에 있어서의 역사의 획득이며, 평화롭고 민주적인 사회 형성으로 이어진다.
2 미쓰비시와 침략 전쟁
미쓰비시는 1874년의 일본에 의한 대만 침략에서 무기,군사들을 수송했고, 1875년 강화도 사건 때에도 군사를 수송했다. 1880년대에는 정부부터 나가사키 조선의 경영권을 획득해서, 다카시마 (高島)·나마즈타(鯰田)등의 규슈의 탄광 경영을 했다. 1890년대에는 군함 건조를 비롯, 사도(佐渡, 니이가타(新潟)현)나 이쿠노(生野, 효고(兵庫)현)의 광산의 경영권을 정부로부터 물려받았다.
1911년에는 조선 겸이포에서 경영을 시작했고, 1910년대에는 비바이나 오오유우바리 (大夕張)등 홋가이도의 탄광 경영에 들어섰다. 1918년에는 미쓰비시 광업이 설립 되었다. 미쓰비시계 탄광에서는 일찍부터 조선인을 사용했다. 1917년에는 비바이・다카시마 ・가미
야마다(上山田)에서 사용하기 시작하고 있다. 병기생산의 면에서는 고베(神戸)조선에서 잠수함 건조를 시작했고 나가사키 병기에서는 어뢰생산을 시작했다. 1920년대에는 사하린 남부에서 석탄개발을 진행시켰다. 1928년에는 미쓰비시 항공기가 설립되어 일본 군용기의 주요 생산기업으로 되어 갔다.
1930년대에는 조선 각지에서 광산 개발에 들어선다.1934년에는 조선(造船)과 항공기 부문이 합쳐져 미쓰비시 중공이 성립했다. 미쓰비시 나가사키에서 군함, 미쓰비시 나고야 에서 군용기, 미쓰비시도쿄에서는 전차(戰車)가 제조되였다. 나아 가 중국 동북지방에 미쓰비시 기기(機器)공장, 대만 에 선거(船渠)등의 건설을 추진했다.
아시아 태평양에서의 전쟁 확대에 더불어 각지에서 자원을 수탈하여 현지 민중을 혹사 했다. 국내의 다른 자본하에 있는 광산등을 자기의 자본 아래 편입시키면서 1940년대 전반 군수용으로 미쓰비시 제강·도쿄 금속·미하라(三原) 차량·나고야 발동기·미즈시마(水島)
항공기・가와사키(川崎) 기기(機器)・히로시마 조선 기계・교토(京都) 발동기・시즈오카 (静岡) 발동기・구마모토(熊本) 항공기・나고야 기기・이바라키(茨城) 기기・미쓰비시 화성(化成)의 공장들이 연이어 건설되었다. 이 공장 건설이나 공장 노동, 더욱이 지하 공장 건설에 있어서 조선인 연행이 판명되어 있는 곳들도 많다.
미쓰비시중공의 자본금은 1934년에 5500만엔이였으나, 1945년에는 10억엔이 되고 있다. 군수에 대응해서 거대한 독점 자본이 된 것이다. 1942년에 조선(造船) 통제회가 설립되였으나, 그 회장은 미쓰비시에서 나왔다. 광업 부문을 보면 미쓰비시의 전시하의 석탄 생산은 년 700만톤을 넘게 되고, 전국 생산비의 16%정도가 되였다.
이와 같이 미쓰비시는 일본의 침략 전쟁의 확대와 함께 그 자본을 성장시켜 갔다.
미쓰비시의 광업과 중공업은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수행에 없어서는 안되는것이였다. 그 자본의 의사는 국책의 일익이 되어, 조선이나 중국에서 민중을 끌고 와 강제노동에 의해 떠받침되고 있었. 이들 현장에서의 저항은 미쓰비시 자본뿐만 아니라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를 뿌리부터를 뒤흔드는 일이 되었다.
3 미쓰비시에의 조선인 연행의 상황
①미쓰비시의 광업에로의 조선인 연행
조선인이 연행된 미쓰비시 계렬의 광산・광산을 들면, 탄광에서는 규슈의 신뉴(新入),호죠
(方城),나마즈타,가미야마다,이이즈카(飯塚),가쯔타 (勝田),다카시마,사키토,홋카이도의 오오유
우바리, 비바이,모지리(茂尻) ,유베츠(雄別) ,샤쿠베츠(尺別) ,우라호로(浦幌)등, 광산 으로는 사도, 이쿠노, 아케노베(明延), 나카세(中瀬), 오비라(尾平), 마키미네, 호소쿠라 (細倉),
데이네(手稲), 신시모카와(新下川)등이 있다.
1946년에 정부・후생성은 공탁금 관계로 조선인들의 명부 제출을 각 현(縣)에 지시하고 있다. 이 일부가 발견되고 있다.([ 조선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 이들 조선인 명부에서 이하 미쓰비시 계렬의 광산·탄광에로의 연행을 알수 있다. 명부에는 이름·본적지가 기입된 것들이 많다.
효고의 이쿠노 광산 명부를 보면 1340인분(1939~45년)이 있다. 이 명부는 오든 연행자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1340인중 823명이 도망치고 있다. 사망자는 16명. 연행 당초에는 경남 산청, 창녕, 합천, 함안, 충남 홍성, 공주등에서의 연행이였다.1944년에는 경기 용인, 안성에서의 연행이 되었고, 1945년에는 강원 녕월에서 연행하고있다.
효고의 아케노베 광산에 대해서는 898인분(1942~45년)이 있다. 아케노베에는 협화회 사료에 의하면 1942년 6월까지 약500명이 연행되고 있다. 명부의 인원에게 이 초기의 연행자수를 더하면 약1400명이 된다. 도주는 522명(그 중 해방전의 도주는 425명)이며, 이쿠노와 마찬가지로 절반수 이상이 도망하여, 자유를 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망은 7명으로 되고 있다.
효고의 나카세 광산 181 인분(1944~45년) 명부도 있다. 그 중 도주는 70명이다. 나카세 광산에 대해서는 [건강보험 후생연금 보험·피보험자 자격상실 신고]가 발견되고 있으며, 이 사료부터도 이름을 알수 있다.
미야기의 호소쿠라(細倉) 광산 명부를 보면, 광산측에 의한 통계로서는 932 인분, 그 중 도망 582명·사망 9명이라고 있다. 명부의 실수는 963인분이며, 그 중 도망 527명·사망 9명으로 된다. 처음은 전북 임실, 그 후는 경북 군위, 영양, 안동등에서의 연행이 많으나, 1944년9월부터는 강원 녕월, 춘천부터의 연행이 행해졌다.
아키타(秋田)의 오사리자와(尾去沢) 광산 명부에는 682인분(1944년~45년)이 있다. 명부는 관알선·징용 뿐이며, 연행자는 경기 부천, 가평, 김포, 이천, 양평, 광주등에서 연행 하고있다. 이 명부는 연행자의 일부만을 나타내고 있다. 해방후 조선인 연맹과 광산측 사이에서 수교된 [급여금]에 대한 [각서]가 남아 있다. 오사리자와 광산내 이토구미(伊藤組)의 34인분 명부도 있다.
아키타의 고마끼(小真木) 광산 165 인분도 1944년부터 45년에 걸친 것이며 경기 수원, 안성, 고양등에서의 연행을 알수 있다.
탄광에 대해서는 후쿠오카(福岡)의 나마즈타 탄광 3051 인분이 있다. 나마즈타에는 전북 익산, 김제, 부안, 정읍, 순창, 전남 구례, 경북 상주, 충북 보은, 경기 여주, 이천, 용인, 양주, 강원 양구, 강릉, 인제, 황해 은률등에서의 연행이 많다. 도망은 1421명, 사망자는 53명이다. 이 명부에는 연행자 천명 정도가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이만 탄광에로의 연행상황을 잘 알 수 있는 명부이다.
나가사키의 다카시마 탄광에 대해서는 1299인분이 있다. 이것은 1945년 현재 인원 것이며 사망자나 도주자는 포함되지 않다. 명부에는 미불금의 표가 있고, 1299인분 약 22만5천엔이 미지불러 되고 있는 것을 알수 있다. 이 다카시마(다카시마갱과 하시마(端島) 갱)에로의 연행자는 4천명 정도로 보인다.
나가사키의 사키토 탄광에 대해서는 약 2899인 정도의 명부가 남아 있다. 또한 539 인분의 통장 명부가 있다. 다카시마와 하시마에 대해서는 매화장(埋火葬) 관계서류가 발견되여 연행기의 사망자의 일단이 밝혀지고있다.
여기서 보고 온 후생성 명부 외부터도 연행상황이 밝혀지고있다.
사도광산에는 1200명이 끌려 왔다. 연행지는 충남이 중심이고, 전북부터도 연행되였다. 1945년에는 사도부터 219명이 후쿠시마(福島, 나카지마 비행기 지하 공장 건설), 189명이 사이타마(埼玉)의 지하공장 건설로 전송 되고 있다.
가가와(香川)의 미쓰비시 나오시마(直島) 제련소에 대해서는 보험자 명부부터 131인분
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 또 연행 상황이 「모집 일지」부터 알 수 있다.
대일본 산업 보국회가 작성한 「순직 산업 인명부」부터는 1940년부터 42년에 걸친 노동 재해 사망자의 일부를 알 수 있다.
이즈(伊豆)에서 보크사이트 대체광으로서 채굴된 명반석 광산에, 나고야 미쓰비시부터 조선인이 전송 된 케이스도 있다.
여기서 미쓰비시의 탄광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내고 있는 홋카이도 이시카리(石狩) 탄전의 비바이 탄광에 대해 살펴 보려고 한다. 미쓰비시 비바이 탄광에는 1942년 6월까지 2150명이 연행되어, 1945년 6월 현재 2,817명이 재적하고 있었다. 연행 상황부터, 미쓰비시 비바이에로의 연행자는 6천명 정도로 보인다. 또한 비바이에는 미쓰이의 비바이 탄광도 있었다.
비바이의 사망자에 대해서는 매화장 관계 서류부터 작성된 사료가 있다. 이 사료는 정리 되어,시라토 히토야스(白戸仁康) [비바이정 조선인 사망자 명부]라고 해서, [전시 외국인 강제연행 관계 자료집]Ⅲ 조선인 2 상에 수록되고 있다. 전기(転記)되어 잔존하고 있는 매화장 사망자 명부를 참조함으로써, 미쓰비시 관계자를 색출할 수가 있다. 미쓰비시 관련 사망자 수는 270명 정도가 된다. 1944년 5월 사고의 조선인 사망자는 70인에 이른다. 비바이 탄광에는 철도 공업, 구로다구미(黒田組), 지사키구미(地崎組)등이 갱내 하청의 형태로 들어 가, 거기에도 연행 조선인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조에서의 노동은 감옥방(낙지방)에 감금된 노예 노동이었으며, 사망후 유골이 방치된 것들도 있다. 본원사(本願寺) 삿포로(札幌) 별원(別院)에서 발견된 미귀환 유골의 일부는, 이러한 하청의 조 것이었다.
미쓰비시 계열의 광산이나 탄광에는, 홋카이도를 보면 철도 공업, 하라다구미(原田組),
구로다구미, 단구미(団組), 지사키구미, 마츠무라구미(松村組), 이데구미(井出組), 즈치야구미(土屋組)등이 갱도 공사를 하청받고 있었다. 그 중에도 연행 조선인이 있었던 것이다.
이시카리 탄전에 있는 미쓰비시 오오유우바리에도 4천명 정도가 끌려 온 것으로 보인다. 미쓰비시 계열의 유베쓰 탄광에도 수천명이 연행되고 있다.
미쓰비시 계열의 큰 탄광은 10군데 이상에 이른다. 거기에는 3~4천명 규모로 조선인이 연행되고 있다. 이러한 연행 상황부터 미쓰비시 탄광에는 약5만명의 조선인이 끌려 온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금속 광산에로의 연행자를 더하면 미쓰비시 광업에로의 연행자수는 6만명 가까이 된다고 추정할 수 있다.
②미쓰비시 중공(조선·비행기·병기공장)에로의 조선인의 연행
나가사키 조선에는 후생성 명부의 나가사키현 몫 표에 의하면 1944년에 3474명, 45년에 2501명, 합계 5975명이 끌려 왔다. 이 나가사키 조선에로의 연행자에 대해서는 수치만을 알 수 있다. [나가사키시 조선인 피폭자 일람표]부터는 나가사키 조선 후꾸다 기숙사의 황해도 장연등부터의 연행자 약80명분의 이름을 알수 있다. 또 김순길 작성 명부부터 부산에서의 연행자 부터의리성바이·모지리·유베쓰기·이바라기기기·미츠일부를 알수 있다. 나가사키의 미쓰비시 원폭 비석에도 열수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나가사키 제강에로의 연행자에 대해서는 143명분이 있다. 명부에 의하면 1945년 경북 영일 (포항시)부터의 연행자 중, 29명이 배치받기 전에 도망쳤다. 나가사키 전기(電機)에로
의 연행도 있었던 것도 알 수 있다.
원폭에 의해 전멸한 나가사키 병기에는 조선인 여자 근로 정신대가 연행되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있다.
나고야 미쓰비시(항공기 생산)에도 연행되고 있었다. 13부터 15세정도의 조선 소녀들 약300명이 연행된 곳은 도오토쿠(道徳) 공장이다. 재판에 의해 연행자의 일부가 판명되고 있다. 당시의 지진에 의한 사망자들 이름도 알려졌다.
히로시마의 조선·기계 공장에는 약 2800명이 끌려 왔다. 히로시마에 대해서는 재판 속에서 공탁 명부(경기 평택10인분), 히로시마 히가시(東)사회 보험소에서의 연금 가입자(32명)등이 확인되고있다. 공탁은 1948년 9월에 1951인분이 되였다고 한다. 1946년에 서울 태점사에서 246인분의 위령제가 차려졌다. 이 때 자료나 동지회등의 명부부터, 연행자 명부를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후카가와 소오슌(深川宗俊) [바다에 사라진 피폭 조선인 징용공]의 권말 에는 미쓰비시 히로시마의 사망자·생존자의 명부가 수록되어 있다.
고베의 조선 공장에로의 연행에 대해서는 후생성 명부에 1996인분이 있다. 이것은 1944년9월과 10월 것이며, 그 중 도망은 627명, 사망 12명, 출신이 북쪽의 평남 중화· 강서·순천·강동·대동·용강·평양등인 것을 알수 있다. 증언에서는 이 명부에 기록되였던 시기 외에도 연행이 있었다는 것이 있고, 이 명부는 연행자의 일부로 보인다. 연행자는 3000명을 넘었지 않을까.
야마구치(山口)의 히코시마(彦島), 기타큐슈(北九州)의 와카마츠(若松), 요코하마(横濱) 에도 미쓰비시의 조선 공장이 있었다. 정확한 연행수는 불명하다. 미국에서의 소송 원고에는 미쓰비시 요코하마 조선소로 연행된 자가 있다.
기타규슈의 미쓰비시 화성(化成) 마키야마(牧山), 화성 구로사키(黒崎) 공장, 효고의 미쓰비시 전기 이타미(伊丹), 미쓰비시 화성 이호(伊保) 공장에 대해서는 후생성 명부가 있다. 마키야마는 전북 완주・옥구85인분, 구로사키는 본적 불명427인분이다. 구로사키의 경우, 도망이 263명으로 많다. 이타미는 전북 금산 중심의 76인분(그 중 징용은 50명・도망은 4명), 이호는 경기 부천등의 48인분(그 중 도주는 10명)이며, 이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44년부터 45년에 걸친 연행자의 명부이다.
기타 가와사키 기기, 교토 발동기(지사(知事) 인계서에 227명이 재적·1945년 6월), 도야마 소개 (疎開) 공장등에로의 연행이 밝혀지고있다.
미쓰비시 중화학 공업 관련에로의 연행자는 나가사키 6000, 고베 3000, 히로시마 3000, 기타 조선 공장, 화성·전기, 비행기 공장등을 합치면 연행자 수는 2만명 가깝게 보인다.
공장 건설에도 수많은 조선인들이 동원되었다. 나고야 중공 정지(整地)공사, 나가사키 병기 오오하시(大橋) 공장 건설, 미즈시마 항공기 공장 건설에서는 오오바야시구미(大林組)
에 의하여 1942년 6월까지 각각 214명, 177명, 136명이 현장에 연행되고 있다. 나가사키 조선의 독크 굴착이나 구마모토의 겐군(健軍) 항공기 건설, 후쿠시마의 제강 히로타(広田) 공장 건설에도 동원되고 있었다는 조사 보고가 있다.
전쟁이 계속하여 미군에 의한 일본 각지에로의 공습이 시작하자, 주요 군수 공장의 지하 공장화가 촉진된다.미쓰비시의 군수공장의 이전도 진행되였다. 당시 이 지하공장 건설을 많은 토건 자본이 하청받았다. 지하공장 건설은 국책으로 추진되였다. 대규모 지하공장 건설에는 2~3천명이라는 수의 조선인들이 동원되였다.
미쓰비시의 나가사키, 구마모토, 히로시마, 구라시키(倉敷), 나고야, 요코하마등의 공장에서는 대규모 지하 공장화가 촉진되여, 특히 나고야의 비행기 공장을 중심으로 한 미쓰비시 공장군의 소개·지하 공장화는 가까운 현인 기후(岐阜), 도야마(富山), 나가노(長野
)현까지 이르렀다. 후생성 명부 자료부터 나고야의 미쓰비시 중공의 나가노 니코타(仁古田) 지하공장 공사에 약 1000명(니시마쯔구미(西松組)·도다구미(戸田組)·마루끼구미(丸木組)),
사토야마베(里山辺) 공사에 약 600명(구마가이구미(熊谷組))이 연행되고 있었던것을 알 수 있지만, 실제로는 각각 3천명 정도가 연행된 것으로 보인다. 또 미쓰비시 중공 나가노 건설부가 조직되여, 거기에도 연행 조선인이 배치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아이치(愛
知)의 가쿠덴(楽田), 기후의 구구리(久々利), 히라마키(平牧)에도 미쓰비시 발동기 관련의 거대한 지하공장이 건설되어 조선인들이 끌려 왔다.
이러한 공사에로의 조선인의 동원수는 수천명 규모이며, 그러한 현장에도 연행된 조선인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미쓰비시는 석탄을 탄광부터 항구까지 수송했다. 그 때문에 수송·창고·항만 노동을 많은 노동자가 담당했다. 거기에도 수많은 조선인이 포함되고 있었다. 전시하 항만업의 통제에 의해 각 항만에서 현지의 유력 기업을 중심으로 항만업이 재편되였다. 무로란(室蘭), 고베, 도쿄, 오사카, 기타 주요 항만에는 연행된 조선인·중국인들의 모습이 있었다. 그들은 미쓰비시의 화물도 운송했다. 무로란의 조사에서는 연행자에 의한 운송이 밝혀져 있다.
조선인 여성이 성적 노예를 강요 당한 곳들도 있다. 비바이·오오유우바리·호죠·다카시마 ·사키토, 기타 탄광의 대부분이 그러한 시설을 갖추어, 구마모토의 겐군 공장 건설 공사에도 [위안소]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보고 온 바 같이 탄광·광산에서의 약6만, 중공업에서의 약2만, 지하공장 건설에서의 수만명의 수자부터, 미쓰비시 관련 조선인 연행자 수를 약 10만명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것은 일본 본토에서의 노무관계의 연행 조선인의 10%정도를 차지한다.
여기서 미쓰비시에로의 중국인 강제 연행에 대해서도 살펴 보기로 한다.
외무성 보고서의 수치에 의하면, 탄광에서는 비바이289명〔그 중 사망29〕, 비바이 철도 공업 415명〔사망90〕, 오오유우바리 292명〔사망85〕, 오오유우바리 지사키구미 388명 〔사망 85〕,가쯔타 352명〔사망 87〕, 이이즈카 189명〔사망 20〕, 다카시마 하시마갱 204명 (사망 15), 다카시마 신갱 205명(사망 15), 사키토 436명(사망 64), 광산에서는 오사리자와 498명(사망 83), 마끼미네 244명(사망 70)의 중국인이 연행되었다. 미쓰비시의 광업 부문에로의 중국인 연행자 수는 계3765명이 되며, 그 중 711명이 사망하고 있다.
아이치의 미쓰비시 오오부(大府) 비행장의 확장, 나가노의 사또야마베와 기후의 가와베 (川辺)에서의 미쓰비시 지하공장 건설에도 중국인을 끌고 왔다. 고베의 조선소에도 항만에 연행된 중국인이 파견되고있다. 미쓰비시 재벌 관련의 중국인 연행자수는 4천명을 넘어, 연행 중국인 총수의 10%이상이 된다. 전쟁후, 미쓰비시 광업은 정부부터 이러한 연행에 의한 [손실]을 받았다고 하여, 보상금 약2 87만엔을 획득하고 있다.
식민지였던 대만부터더 소년공이 고오자(高座) 해군 공창에 연행되여 그 중 일부가 나고야 미쓰비시 공장(오오에(大江)·도오토쿠)에 전송되고 있다. 연합군 포로들도 연행되어, 미쓰비시의 호소쿠라 광산, 오사리자와 광산, 이쿠노광산, 아케노베 광상, 고베 조선, 나가사키 조선, 요코하마 ·고베의 미쓰비시 창고에서의 노동을 강요당했다.
4 아시아 각지에로의 사업 확대
미쓰비시는 침략 전쟁의 확대와 함께 아시아 각지에서 이권을 얻었다.
한반도에서 미쓰비시 광업은 김제, 청암, 우익, 해주, 연화, 월전, 화전리, 보생, 삼광, 철령, 감덕, 대동, 대보, 무산, 하성등 광산이나 조선 무연탄, 청진 제련, 겸이포 제철등에서 활동했다. 1930년대에 활발해진 이러한 광업에 대한 현지에서의 동원 상황은 불명하다.
사할린에서는 남화태(南樺太) 탄광 철도를 지배하여 나이호로(内幌), 도우로(塔路), 기타코자와(北小沢)의 탄광을 소유했다. 사할린에 끌려 간 조선인은 1만명 이상이며, 미쓰비시 계렬의 연행은 하청 현장에 동원된 조선인까지 포함하면 2천명을 넘는다. 전쟁 말기에는 미쓰비시 계렬의 탄광부터 약 1000명이 규슈로 전송되였다.
중국에서는 石咀子, 八面通, 招遠, 南支第一의 광산, 太文口, 准南, 新泰의 탄광등을 지배했다. 일본 알루미늄 다까오(高雄) 공장을 건설하여 대만이나 강남의 조선소도 소유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싱가폴에 사무소를 두고, 쇼난(昭南) 조선을 설립, 태국의 고브께브 광산[주석], 인도네시아의 로가스 탄광, 딘브렌 광산, 반까 광산, 바렌반·바리끄빠반의 석유, 버마의 다보이 광산[탄그스텐], 말레이의 바로아란 탄광·내화 연와, 필리핀의 바라까래 광산, 마란가스·브라라까오·마나트의 탄광, 산마라리시오의 동·아연, 미네라르리조세즈 광산, 마리따오 광산등을 개발하여 군의 지배하에로 수탈을 하여, 현지의 노동자들을 혹사했다. 수탈한 자원의 수송에도 많은 노동자들이 동원되였다.
5 조선인 사망자 수
다음으로 미쓰비시 관련 사업소에서의 조선인 사망자에 대하여 살펴 보자.
후쿠오카의 탄광에 대해서는 후쿠오카현 [노무동원 계획에 의한 노무자 사업장별 조사표]에 1944년 1월까지의 사망자수가 기록되고있다. 거기에 따르면 신뉴 20, 나마즈타 27, 호죠 20,가미야마다 44, 이이즈카 11, 가쯔타 12가 된다. 나마즈타에 대해서는 후생성 명부부터 53명분의 사망자의 이름을 알수 있고, 1944까지 43명이 사망하고있다. 나마즈타의 명부는 불충분한 것이며, 사망자 수는 다 한층 많은 것으로 보인다. 가이지마
(貝島) 자본의 오오노우라(大之浦) 탄광을 살펴 보면 약1만명이 끌려 왔고,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밝혀지고있다.
이러한 사망자들의 상황부터 3천 내지 4천명 규모의 연행이 있었던 지쿠호오(筑豊)의 미쓰비시계 탄광에서의 사망자는, 하나의 탄광에서 50명이상 존재했다고 보아도 좋을것이다. 그 중 사망자들의 이름이 매화장 사료나 사찰 조사에 의해 일정하게 알려지고 있는 것은 이이즈카의 96명, 나마즈타의 53명, 호죠의 47명등이며, 가미야마다에 대해서는 만령탑에 아이를 포함한 50여명의 이름이 있다. 후쿠오카의 다른 미쓰비시계 탄광인 신뉴, 가쯔타 에 대해서는 몇명 안되는 수 밖에 알 수 없다. 후쿠오카의 미쓰비시계 탄광에서의 사망자수는 300명을 넘을것이다.
그 중에는 사망후에도 유골이 반환되지 않았던 것들이 있다. 전후 조사가 되어 한국에 반환된 유골도 있지만, 이름은 불명하다. 이이즈카 시내의 사찰에 방치되고 있었던 유골을 안치하는 추도당(무궁화당)이 건설되는 속에서, 미쓰비시 나마즈타의 명부부터 유족의 연락처를 알게 되고 최근에 되어 반환된 예도 있다.
나가사키의 다카시마(하시마갱), 사키토의 탄광에 대해서는 매화장 관계 서류부터 사망자의 일부가 밝혀져 있다. 미쓰비시 사키토에서는 중국인이 저항하여, 27명이 검거되고 형무소에서 피폭,사망하고있다.
홋가이도의 비바이에 대해서는 사망자의 거의 모두인 약 270명분, 오오유우바리에 대해서는 수명만, 모지리에 대해서는 순직자 명부나 아까비라(赤平)시사(市史)등에 32명분, 유베쯔에 대해서는 1941~42년분으로 18명분이 밝혀지고 있다. 홋가이도의 미쓰비시 계렬의 탄광에서의 연행기의 사망자는 500명을 넘는 듯 하다. 전쟁후에도 방치된 유골들이 있다.
잔존 자료부터 광산으로는 이쿠노, 아케노베, 나카세, 사도, 오비라, 마끼미네, 호소쿠라, 오사리자와등에서의 사망자 약50명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사망자의 일부를 나타내는 것이다.
공장관계에서는 나가사키·히로시마에서 원폭 피해를 받고있다. 기타 사업소에서도 사망자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명부가 발견 된 곳 외는 불명하다.
6 연행된 사람들의 저항
연행된 사람들에 대한 저항에 대해 살펴 보기로 한다. 광산,탄광 관계는 후생성 명부로 나마즈타, 이쿠노, 아케노베, 호소쿠라의 연행 상황과 도주 실태를 알 수 있다. 이들의 명부에서는 연행자의 절반 이상이 도주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탄광에서는 사고나 학대에 의한 사망이 많고, 목숨 걸고 도망을 시도할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생산 현장부터의 이탈은 전쟁 수행력의 저하에 이어졌다.
연행된 사람들을 포함한 쟁의나 독립 운동도 각지에서 일어났다. 홋가이도의 예를 중심으로 본다.
조선인의 연행은 1939년5월에는 석탄 광업 연합회가 연행을 요구했고, 6월에는 홋가이도 석탄 광업회가 미쓰비시 900명, 호쿠탄(北炭)과 미쯔이 2800명등 합계 5810명의 「집단이입」을 후생성에 요구하여, 7월에는 노무동원 실시계획 강령이 책정되어 추진되었다. 연행 노동자의 통제·감시를 위한 협화회協和会)도 조직화 되어 간다. 9월말에 충북도청이 모지리 200명, 경북도청이 비바이 700명, 오오유우바리 250명, 유베쯔 1000명의 연행을 승인, 10월에 들어서니 각 탄광·광산으로 끌려 갔다.
연행된 사람들은 당장 저항하고 있다. 10월말 데이네 광산에서 파업·귀국 요구, 비바이 에서는 입갱 거부, 11월 데이네에서 로재사(労災死)를 계기로 항의 행동, 12월에는 유베쯔 우라호로에서 개선요구 파업, 1940년 1월에는 비바이에서 취로 거부, 대우개선 요구, 낙반에 의한 죽음에 대해 파업, 2월에는 구타에 항의해서 파업, 3월에는 오오유우바리에서 구타 항의·노무계 경질요구 파업등이 각지에서 쟁의가 일어나고 있다.
탄광측은 1940년 9월말, 오오유우바리에 [위안소]를 만들어 12명의 조선 여성을 연행하고 있다. 이러한 [위안소]가 각지의 탄광에 설립되었다. 2년이 지난 해인 1941년 에는 [정착장려]라는 이름에 의한 계속 노동을 강요 당해 황민화가 한층 강화되였다.
탄광 하청 기업에 연행된 조선인의 저항도 강해지고있다. 예를 들면 1942년 3월에는 비바이 철도공업 단조(団組)에서 구타를 계기로 도주를 계획, 8월에는 유베쯔 철도 공업에서 구타에 항의, 10월 모지리 즈치야구미에서 계약 위반에 대해 개선요구 파업등, 끌려 온 사람들이 폭력적 관리나 열악한 생활 환경에 대해 저항해 간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인이 대량으로 연행되고 있던 유우바리 지구의 탄광을 중심으로, 조직적인 독립운동 도 전개되였다. 활동의 중심이 된것은 미쓰비시 오오유우바리의 이데구미에 연행된 집단과 함께 일본에 건너온 안재호(平山昌成)였다. 그는 1943년10월에 검거되었으나, 11월 조사중에 도망쳐서 11월에 데시오(天塩)에서 재검거되였다. 전에는 원산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나 이데구미 연행자의 통역으로 소개되여, 오오유우바리에 왔다. 그는 이데구미의 조선인이나 오오유우바리의 연행자 기숙사의 통역, 조선 식당(별의 집)배인등을 조직하여
거기를 거점으로 해서 유우바리 지구에 저항 조직을 넓혔다. 호쿠탄 유우바리의 남정(南
亭)영업주나 유우바리 탄광의 통역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 갔다. 또한 삿뽀로(札幌)등에
서 조선 식당을 경영하여 아들이 독립운동과 관련하고 있었던 손방주(孫邦柱)와 연계
하여 스나가와(砂川),비바이,이쿠슌베쯔(幾春別)에도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고 한다. 권력은
조직적인 조선 독립 운동으로 간주하여 1943년부터 1944년에 걸쳐 관계자들을 검거해
갔다.
안재호들은 연행자를 위한 통역을 조직하여, 연행자용의 식당(위안소)을 저항의 거점
으로 하면서, 많은 연행자들의 해방과 조선 독립을 목표로, 채탄의 휴업등을 진행시켰다. 호쿠탄의 사료부터 이런 저항이 조직되어 간 것을 알 수 있다. 자유와 해방을 요구한 활동
이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해방후 10월 중순, 홋가이도에서 조선민족 통일동맹이 결성되지만 그 위원장은 10 월초
에 석방된 안재호이며, 그와 함께 손방주나 김흥곤(金興坤)들 모습이 있었다. 현장의 조선인·중국인은 궐기하여 귀국이나 생활조건의 개선, 배상등의 요구를 해 갔다.10월말의 조선민족 통일동맹 대회에서는 「강제이입 노동자」를 혹사한 일본 자본가에 대한 위로금
의 요구가 제출되었다. 그러나 점령군과 기업은 배상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거부하는 자세를 취했다.
11월 3일 기타호로나이(北炭幌内) 탄광에서의 교섭 때, 안(安)이 가혹하게 취급 당한
자에 대한 대상의 지불을 요구하자, 조선인이 배후에서 갱내 작업이 가혹한 것을 과대
하게 설명해서 왜쳤다고, 호쿠탄측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과대]한 설명이 아닌 진실이며 당연한 요구였다. (홋가이도의 조선민족 통일동맹등의 활동에 대해서는,
김흥곤씨 자전이나 구와하라 마사토(桑原真人)씨, 모리야 다카히코(守屋敬彦)씨의 조사 기사에 의함)
여기서는 홋가이도에서의 저항의 상황을 살벼 보았으나, 이와 같은 연행 조선인의 저항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보고 온 바 같이 미쓰비시 재벌은 전쟁시기 광업, 중공업, 공장 건설로 많은 조선인·중국인을 사용하고, 또 아시아각지에서 현지노동력을 써서 자원을 수탈했다.
기업으로서의 전쟁책임을 자각한다면, 미쓰비시는 미쯔이와 함께 피해자 개인에 대한 배상을 위하여 기금을 솔선해서 설립할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독일에서의 기금 설립은 그 선례가 될 수 있겠다. 기업측은 그 사회적 책임을 지기 위해서도, 기업 스스로의 활동에 의하여 후생 연금 명부나 공탁금 명세서등 잔존 자료부터 연행자 이름이나 미불금등 그 실태를 밝혀야 한다.
미쓰비시 관련 재판에서 미쓰비시가 취한 대응을 정리하면, 사실을 인지하지 않고, 배상
을 시효라고 해서, 연행은 국책이며, 책임 없다고 하여, 더욱이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으로 다 해결되었다는 것이었다. 여태까지의 미쓰비시측의 대응은, 강제 연행과 안전의 경시, 강제 노동하에서의 죽음, 연행 사료의 은폐, 유골의 방치, 사실의 불인지, 국책에로의 책임 전가, 책임 회피등이었다. 이들 대응은 연행 기업으로서 그 사회적 책임을 지려고 하는 자세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었다.
한편, 방치된 유골은 지금도 있다. 2003년10월에는 미쓰비시 나마즈타 탄광에 끌려 와 사망한 김장성씨의 유골이, 시민 단체의 노력에 의해 유족 품으로 반환되었다. 2004년 5월에는, 미쓰비시 비바이 철도 공업에 의해서 연행되어 사망하여, 그 유골이 방치되어 있던 구연철씨의 유족이 판명되었다. 지금도 남아있는 유골들은 이 문제 해결을 계속 호소하고 있다.
미쓰비시 산하 기업 속에서 가장 많은 조선인을 연행한 것으로 보이는 미쓰비시 광업은 전쟁후, 석탄 부문과 금속 부문이 분리하여 별도의 회사가 되었다. 석탄 부문을 계승한 미쓰비시 광업은 시멘트 부문을 통합해서 1973년에 미쓰비시 광업 시멘트가 되어, 이 미쓰비시 광업 시멘트는 분리하고 있었던 금속 부문의 미쓰비시 금속 광업과 합병해서1990년에 미쓰비시 메터리얼이 되었다. 이 미쓰비시 메터리얼은 자본금이 990억
엔을 넘는 다국적기업이 되어, 한국・중국에도 관련 회사를 갖고 있다.
미쓰비시 메터리얼은 그 창업을 홈 페이지에서는 1871년으로 해서, 기업 이념에 글로벌 스탠다드 경영을 내걸고, 스스로의 사업 활동을 시대를 영도하여 시대의 요구에 응할 것으로 하고 있다. 국제적인 관점에 서서, 미쓰비시 광업이 1939년부터 1945년 사이에
약6만명의 조선인을 강제 연행한 사실을 인정하여, 선행하는 과거의 강제 노동의 청산에 관한 사업에 배우면서, 그 책임을 취하기 위한 활동을 진행시킬 것은, 시대를 영도하여 그 요구에 답하는 일이 될 것이다.
2004년, 미쓰비시 자동차의 리콜을 둘러싸고, 기업 전체로서의 은폐, 안전성 경시, 기업내 윤리의 결핍, 무사 안일주의, 사회적 무책임등이 문제시 되었다. 미쓰비시 후소오(대형차 트럭,버스 제조 회사)는 이 사건에서 [사과와 맹세]에 있어서, 회사내에 품질 자문위원회・기업 문화 변혁 추진 위원회를 창설할 것을 표명했다. 기업 문화 변혁 추진 위원회에서는 [통풍 좋은 개방적인 기업 문화의 창조]를 진행시킨다고 하고 있다.
미쓰비시는 강제 연행과 그 피해자에로의 대응에 있어서도, 이 리콜 문제에서 볼 수 있었던 바 같이, 그 사실과 책임을 인정해서 미쓰비시 그룹 내에 조사와 배상 기금 설립을 위한 특별 위원회를 설립하여, 피해자의 존엄 회복을 향해, 국제적인 움직임에 배우면서, 개방적인 활동을 개시해야 한다.
연행 피해자의 권리와 존엄의 회복은 제일의 과제이며, 이 과제의 해결을 향한 기업 문화의 형성과 행동이 미쓰비시에게는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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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