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이후 중국 조선족, 중국 정착 과정에서의 슬픈 역사-7]
반면에 국민당정부는 조선인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면서 사회적, 경제적으로 탄압했다.
국민당정부는 조선인을 한교 또는 조교라고 불렀는데 이는 중국에 정착할 사람이 아니라 한반도로 돌아가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실제로 국민당정부는 남한의 한독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가운데 조선인을 남한으로 송환하려는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에 딸 해방 초기 국민당이 장악하고 있던 동북지역의 심양과 장춘 등 서부권의 대도시와 남부권 지역에 거주하던 조선인은 국민당정부 세력으로부터 적지 않은 탄압을 받았다.
국민당정부 세력의 영향 하에 있던 요녕성과 길림성 지역에는 원래 조선인이 20여만 명에 이르렀으나 중국공산당이 점령한 1948년 무렵엔 1만여 명도 남지 읺았다.
일제는 만주국을 세운 이후 동북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분리와 지배’의 기술을 이용해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질했다.
즉 조선인을 2등 국민으로, 만주국과 한족을 각각 3등과 4등 국민으로 칭하고 중국인(한족)으로부터 빼앗은 토지 등을 조선인에게 나누어 주었다.
따라서 중국인인 조선인을 일제의 앞잡이라고 부르면서 일본인 못지 않게 미워했는데 해방이 되고 국민당정부가 통치권을 행사하면서 이런 감정이 드러나게 됐다.
국민당정부는 특히 조선인의 재산을 일제로부터 받은 것으로 취급하여 압수 및 몰수함으로써 생활기반을 박탈하는 등 갖가지 방법으로 탄압했다.
국민당정부가 조선인을 차별하고 억압한 이유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동북지역 거주 조선인들은 이곳에 거주하는 자체가 불법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그리고 조선인이 동북지역에서 형성한 재산은 대부분 일본의 비호 하에 한족 지주로부터 약탈이나 강탈한 것이라는 인식에서 원주인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정부의 조선인에 대한 이러한 입장 차이는 조선인의 정치적 위상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중국공산당은 동북항일연군 또는 조선의용군으로 중국공산당과 함께 활동한 조선인들을 해방 후 요직에 앉혀 중용했다.
특히 조선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연변지역의 행정책임자 전원은 조선인이 맡았으며 조선의용군 출신 지도자들은 중국공산당 세력내 군대에서 지휘관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국민당정부는 한국독립당과의 관계를 위한 자리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조선인을 배제했다. 해방의 기쁨으로 날마다 축제를 벌이는 중국인들(한족) 사이에서 적지 않은 조선인들은 번민과 불안으로 밤을 지샜다. 고국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이곳에 살 것인가는 이들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이곳에 정착하기로 결심한 사람들도 새로운 질서에 대한 불확실성과 그로 인한 두려움으로 편할 날이 없었다.
중국 동북지역의 조선인은 일제하에서 상대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중국인들보다 우월한 지위에서 생활했다.
일제가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며 조선인을 동북지역 통치에 이용하기 위해 일본인에 이은 2등 민족으로 우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부 조선인들의 경우는 일제의 통치로부터 해방된 것이 반드시 좋지많은 않았다.
중국인들로부터 보복을 염려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현실적인 문제는 동북지역에서 날뛰던 토비들의 횡포를 견디는 일이었다.
당시 동북지역에서는 치안이 혼란한 틈을 타 곳곳에서 토비들이 발호했다. 해방 이전에는 그나마 일제에 의해 치안이 유지되어 그럭저럭 살 수 있었지만 권력 공백상태에서 토비들의 준동은 조선인의 가장 큰 걱정거리 중 하나였다.
조선인들이 토비들의 주된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토비들이 장악하고 있던 동북지역 북부권의 조선인들 중에는 이들의 등살에 못 이겨 추수도 포기하고 살길을 찾아 대도시로 이주하는 경우도 흔했다.
해방 무렵 중국 동북지역의 조선인 경제사정 역시 그다지 여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동북지역 조선인의 경제사정과 관련해 미국에서 발행한 자료는 조선인 대다수가 조국에 있을 때보다 경제사정이 좋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참고서적
조선족, 그들은 누구인가
곽승지 지음, 인간사랑 출판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