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 왕을 참하라 (3)
1. 콩가루 집안의 태조 이성계
요동정벌과 위화도 회군
친원파의 거두인 간신 이인임(李仁任)의 횡포가 극에 달하자 최영과 이성계가 정변을
일으켜 군권을 양분하였는데, 최영(崔瑩)은 당시 이성계보다 나이가 스무살쯤 많았다.
(이인임)
1387년 원의 군벌인 나하추의 항복을 받은 명나라에서 '철령 이북의 땅이 원래 원나라의
땅이었으니 이를 요동에 귀속시킨다' 라는 조치를 알려왔다. 다른것은 몰라도 국토를 떼어
달라는 요구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고려는 수차례 사신을 보내고 별짓을 다했으나 명은 요지부동이었고, 1388년 드디어 우왕
은 최영(崔瑩)과 이성계를 시켜 5만의 병력으로 요동을 정벌케 하였다.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던 이성계(李成桂)가 4불가론을 내세우며 반대했으나 최영이 강력히
주장하여 요동정벌은 그대로 시행하게 되었다.
이성계(李成桂)가 반대하면서 내세운 4가지 조건은
첫째, 소로써 대를 거역함이요.
둘째, 여름철에 출군함이요.
셋째, 온 병력이 요동정벌에 나서면 왜구가 침입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요.
넷째는 더운 장마철이라 궁노(弓弩)가 풀리고 군중에 병이 돌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위의 4가지 불가론을 살펴보면
첫째, 명나라가 우리 국토의 약 4분의 1을 그냥 먹겠다는데 무슨 빌어먹을 아래위가 있고,
둘째, 당시는 음력 4월로 군의 여름철 원정이 불리하지만 당시 사정이 군을 움직이기 좋은
계절을 기다릴 수 없는 형편이었다.
셋째, 왜구들의 큰 침입은 이미 지나갔을 때였고,
넷째는 병력을 징발하는데 싸움도 안 해보고 물러나자는 것이었으니 지나친 걱정이었다.
즉 이성계(李成桂)는 명을 상대로 애초부터 싸울 생각이 전혀 없어 헛소리를 한 것이었다.
그러면 요동정벌에서 애당초 이성계를 빼 버렸어야 하는데 당시 고려에는 이성계만한 무장
이 최영(崔瑩) 빼고는 없었던것이 문제였다.
당시 명은 북원을 상대로 싸움을 계속하고 있어서 고려군이 요동을 친다 해도 전 국력을 동
원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최영(崔瑩)의 이 계획은 우리가 고구려의 옛 땅을 찾
을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고, 해볼 만한 도박이었다.
요동정벌군의 배치는 최영(崔瑩)이 총사령관으로 팔도도통사로 중군을 이끌었고, 이성계(李
成桂)가 우군도통사, 조민수가 좌군도통사를 맡았다.
최영(崔瑩)은 정벌군과 동행해야 했으나, 당시 24세의 덜 똑똑한 우왕이 자기 곁을 못 떠나게
최영(崔瑩)을 만류함으로써 정벌군에 사령관이 부재했고, 그것이 위화도 회군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니 역사는 한 순간의 선택이 중요하다니까~)
4월20일 의주에 도착한 정벌군은 4월이 지나도록 움직이지 않았고, 최영은 진군을 독촉했으나
이성계(李成桂)는 사령관 최영이 오기를 기다린다는 핑계로 군대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여름에 들어서면서 비가 오기 시작했다.압록강 물이 불어나고
사망자가 생기자 이성계(李成桂)는 회군을 요청했으나 조정에서는 진군을 독촉했다.
비가 멎자 고려군은 압록강을 부교로 건너 강속에 있는 위화도(威化島)에 상륙했다.
좌군도통사 조민수는 이성계의 설득에 넘어갔고, 드디어 이성계(李成桂)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다음에는 (4편)이성계의 반란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