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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돌, 연하남, 그 녀석
12
“우리 그냥 헤어지기도 뭐한데, 영화 한 편 볼래요?”
밥을 먹고 나서 계산하고 나오니 마땅히 들어갈 데가 없었다. 만난 목적도 다 해결된 마당에 더 이상 함께 있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어제 술자리로 많이 편해졌다고는 하나 아직 도훈씨랑 수다를 떨며 얘기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니 커피숍에
가서 커피를 한 잔 하자고도 제안을 하지 못하겠다. 그래서 그냥 여기서 헤어지자고 하며 내일 보자고 하려고 했는데,
내가 입을 떼기도 전 도훈씨는 앞에 있는 영화관을 가리키며 내게 말을 건넨다.
“네?”
“주말인데, 지금 이렇게 들어가기 아쉽잖아요.
이 선생님 따로 약속 없으시면 영화 한 편 같이 봐요-
저도 어차피 집에 가면 저 혼자고 재미없거든요.”
“아... 네, 그럼.”
“저 영화 재밌다던데, 저거 볼래요?”
포스터 하나를 가리키며 말하는 도훈씨. 포스터에 있는 주인공을 보니 여자주인공이 많이 익숙한 얼굴이다.
뭐, 재밌다고 말하니 나는 별 생각 없이 그러라고 했고. 영화 표를 사 오겠다고 잠시만 기다리라고 한 후 도훈씨는 매표소를 향해 뛰어갔다.
띠리리띠리-
“응, 아직 일본 안 갔어?”
- 이제 비행기타려고. 공항이야.
지정해놓은 익숙한 벨소리에 발신자 확인도 안하고 핸드폰을 연 나는 어제보다 이성적인 오늘, 좀 더 다정하게 대해야 겠다는
생각에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받았다.
“조심히 다녀와. 가서 밥 꼬박 챙겨먹고.”
- 또 밥. 너 때문에 굶고 싶어도 못 굶어.
“그러니까 굶지 말고 잘 챙겨먹어. 거기서 맛있는 거 많이 먹고.”
- 내가 먹으러 일본 가냐? 이은호 말 하는 것도.
“너랑 두 번 얘기하면 입 아파- 됐네. 공연 잘 하고.”
- 응, 나 없다고 울지 말고 기다려. 선물 사갈께-
“내가 애냐? 선물 안 사와도 되니까 너무 무리하다 오지 마.”
- 나 핸드폰 로밍 안 해서 가니까 가서 따로 전화할...
“영화 시간이 딱이에요. 바로 들어가면 될 거 같아요-”
- 누구랑 같이 있어?
전화에만 신경쓰다보니 표를 끊으러 갔던 도훈씨를 깜빡하고 있었다. 갑자기 들려오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정태웅은 다시 날카로운 소리로 내게 묻는다. 나는 도훈씨에게 ‘잠시만요-’라고 하고는 다시 통화로 관심을 돌렸다.
“응, 친구랑 영화 보러.”
- 남자 목소리던데.
“응, 남자애들도 있어. 같이 왔거든. 영화 시간 다 됐대. 조심히 다녀와-”
- 그래, 알았어. 이은호! 뭐 할 말 없어?
“할 말 뭐?”
- 이은호, 사랑해.
“갑자기 왜 안 하던 소리하고 그래-”
- 빨리 너도.
“지금 친구들 옆에 같이 있다니까.”
- 나도 옆에 매니저랑 코디랑 애들 다 있는데 한 거야. 얼른.
“정태웅, 너 자꾸 장난칠래? 영화시간 늦는다니까. 얼른 끊자.”
- 이은호가 말해주기 전까지 안 끊을 거야.
또 갑자기 왠 고집을 부리는지. 난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 도훈씨 때문에 얼른 끊으려고 하지만 정태웅은 막판에 이렇게 고집을 부린다.
자기 고집 못 이기는 나를 뻔히 알면서.
“장난 그만 해- 너 자꾸 그러면 그냥 끊는다?”
- 장난 아니야. 그냥 끊기만 해봐.
“왜 갑자기 안 부리던 고집이야. 한 번만 봐줘, 응?”
- 빨리. 사랑해, 이은호.
“아, 알았어. 나도.”
- 다시. ‘나도’로 얼버무리지 마. 정확히 말해줘.
“정태웅.”
- 나도 지금 비행기 시간 늦었어. 빨리.
더 이상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나를 빤히 쳐다보는 도훈씨를 향해 한 번 웃어보이고는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나도 사랑해, 정태웅.’이라고 말하고는 그 녀석의 반응을 듣기도 전해 민망해서 그냥 끊어버렸다. 얼굴이 화끈거려 죽겠다.
“정태웅씨에요?”
“네? 아, 예...”
“어제 화 많이 냈죠?”
“아, 아니에요. 영화 시간 늦었죠? 얼른 들어가요-”
다시금 나온 정태웅 얘기에 나는 지금 정태웅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 도훈씨의 팔을 이끌어 얼른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영화관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으니, 바로 영화 예고편이 시작하고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했다. 요즘 잘 나가는 영화라고 해서
영화 제목도 제대로 안 보고 들어왔는데, 이런... 공포 영화다. 나는 공포 영화 자체를 즐겨보지 않는데다가, 귀신 나오는 공포는
참을 만 해도 피가 튀기는 공포 영화는 정말 기절초풍인데, 이 영화는... 으, 미치겠다. 시작부터 피다. 하지만 내가 들어오기 전에
영화 제목을 보고도 아무 말 안 하고 들어왔으니, 여기서 도로 나갈 수는 없다. 그래서 이를 악 물고 소리를 참으려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아, 공포 영화 못 보는 거 였어요?”
아, 나이가 어린 사람들은 다 이러는 것인가. 자기가 좋다고 들어와 놓고 나한테 이제 와서 못 보는 거였냐고 묻는다.
이미 영화는 중반부에 들어섰는데 말이다. 나는 괜찮다고 애써 웃어 말하며 다시 스크린에 시선을 돌렸지만, 다시 나오는 끔찍하고
잔인한 장면에 눈을 다시 감아버렸다. 끼익끼익-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에 이젠 귀도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 나는 손을 올려 귀를
막으려 하는데, 다른 누군가의 손이 내 양 귀를 막는다.
“그렇게 공포 영화 못 보는 사람이 바보같이 왜 그냥 따라와요.”
옆에서 소곤소곤하게 들려오는 도훈씨의 목소리에 정신이 든 나는 괜찮다며 내 양 귀에 얹혀있는 도훈씨의 손을 내려놓았다.
민망해진 나는 더 이상 도훈씨쪽을 바라볼 수가 없었고, 애써 화면에만 집중하는데, 아까 포스터에서 보았던 익숙한 얼굴이
스크린에 나온다. 누구였지...
아,
내가 누군지 알아채자마자 다시 스크린을 가득 메우는 피. 나는 결국 다시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고, 옆에 앉아 있던 도훈씨는
결국 내 손을 잡고는 밖으로 나간다.
“그렇게 못 보면서 싫으면 싫다고 말하시지.”
“하하... 제가 원래 귀신 나오는 공포 영화는 잘 봐도, 피에 약하거든요.”
“제가 포스터 가리키면서 보자고 할 때도 아무 말 없으셔서
공포 영화 잘 보시는 줄 알았잖아요.”
“하하하... 죄송해요. 저 때문에 영화 다 보시지도 못하고...”
“괜찮아요. 대신에 이 선생님이 커피 사셨잖아요-”
나를 끌고 나오는 도훈씨에게 미안한 마음에 나는 옆에 바로 보이는 커피 전문점으로 들어가 커피를 사들고 나왔고,
그 커피를 들고 우리는 공원에 앉아 아까 영화 속의 내용을 까먹기 위해 대화를 나누었다.
“아무튼 어제부터 오늘까지 여러모로 폐 끼쳐 드려서 죄송해요.”
“폐라니요. 아니에요.”
“주말에 저 때문에 쉬지도 못하시고.”
“제가 말했잖아요. 저 혼자 살아서 주말에 할 일도 없다구요.
집에 있으면 심심하기만 하고. 그래도 이 선생님 덕분에 오늘은 즐겁게 보냈어요.”
“그렇게 생각해주면 감사하구요.”
“앞으로 자주는 무리겠지만, 심심하면 가끔 만나서 영화도 보고 같이 놀아주실 수 있죠?”
“네?”
“남자친구만 없으면 자주 놀자고 할 텐데, 그러면 남자친구가 싫어할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자주는 말구요, 가끔 이렇게 놀아요.”
“아, 예...”
그러자고 말하는 도훈씨의 말에 매몰차게 굴 수 없다는 생각이 든 나는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러자 환하게 웃는 도훈씨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도착하자마자 갈게!
“그럴 거 없어. 그냥 숙소 가서 쉬어.”
- 어차피 저녁부터 바로 연습 다시 들어가야 해. 그 전에 잠깐.
“연습 가기 전까지 쉬어. 피곤할텐데.”
- 이은호 보고 싶어 죽겠단 말이야.
“보고 싶어 죽을 일까진 없으니까, 참고 너 쉬는 날 보자.”
- 앞으로 콘서트 때까지 쉬는 날은 없단 말이야.
“너 피곤하잖아. 너 피곤한 거 보기 싫어.”
- 나 안 피곤하다니까? 너 말대로 일본에서 너무 잘 먹고 지냈더니 하나도 안 피곤해!
일주일동안 일본에 가 있는 동안 최소 아침저녁으로 하루에 2번씩 전화를 해대는 정태웅 탓에 얘가 일본에 있는 건지,
한국에 있는 건지 별로 못 느꼈다. 그런 정태웅이 일본에서 하는 마지막 전화가 될 통화를 하고 있다. 이제 곧 비행기를 탄다며
도착하자마자 나를 봐야겠다는 정태웅. 피곤하니 오지 말라고 해도 고집을 부린다. 여긴 자기 연습실과도 꽤 먼 곳인데,
이 곳을 왔다 연습실로 직행하겠다니... 사서 고생이다. 지금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을 녀석이. 그래서 나는 보고 싶기는 해도
괜찮다고 하며 그냥 쉬라고 하는데, 이게 끝까지 고집을 부린다.
“그럼, 내가 너네 연습실 근처로 갈께.”
- 앗싸!
“그렇게 좋아?”
- 그럼 일주일 만에 이은호 얼굴 보는데 안 좋냐?
“그래, 좋아해라. 좋아해.”
- 밥 먹지 말고 와! 나랑 저녁 먹자.
“알았어,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비행기에서라도 좀 자고 와. 알았지?”
- 이은호 볼 생각에 두근거려서 잠도 안 오게 생겼어.
어? 이제 수속 밟아야 된다! 이따 도착하면 바로 연락할께!
기분 좋아져서 자기 할 말만 해버리고 뚝 끊어버리는 애 같은 정태웅. 미처 내 말을 전하지 못한 채 끊어진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앉아있던 화장대의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보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는 다시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다.
“아, 이은호 감동이야!”
“가서 제대로 못 먹고 왔을 거 같애서 오늘만 신경써주는 거야.”
“아, 진짜 맨날 외국 나갔다 와야겠네? 그럼 이은호가 맨날 이렇게 해줄 거 아니야?”
내가 이 녀석을 만나러 나오기 전까지 정신없이 준비한 도시락을 보고 크게 감동받았는지 정태웅의 표정은 세상을 다 가진 듯 하다.
이건 음악프로에서 1위했을 때만큼의 기쁜 표정이다. 그런 녀석의 표정을 보자 나도 뿌듯해지고, 나는 정태웅의 손에 얼른 젓가락을 쥐어주었다.
“맛은 보장 못해. 그냥 먹어-”
“보기에도 맛없어 보여.”
“뭐? 이게- 그럼 먹지마!”
내 말에 한 번 휘휘 도시락을 둘러보던 정태웅은 먹지 말라고 성을 내는 내 모습에 자기가 음식쓰레기를 처리해 줘야 한다며
젓가락을 정신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난 번 숙소 왔을 때 우연히 잘하는 건 줄 알았는데,
이은호 생각보다 음식은 조금 하네?
애들 가르치는 거 말고는 잘하는 거 하나 없는 거 같더니.“
“지금 칭찬이지, 태웅아?”
“그럼, 칭찬이지- 설마 내가 욕하는 거겠어?”
일본에 가기 전 술김에 내가 짜증내고 화냈던 게 미안했던 나는 갑자기 문득 도시락을 싸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정태웅을 만날 생각도 안했고, 또 갑자기 생각난 터라 집에 있는 재료로 정신없이 준비한 터라 맛과 질이 그다지 좋지 않을 텐데,
맛있게 먹어주는 태웅이가 고마워서 나는 보온병에 준비해온 보리차를 함께 건네며 먹으라고 했다.
“너가 얼굴 알려진 유명한 사람만 아니면 저 풀밭에 돗자리 깔고 앉아서 먹을 텐데.
좁아 터지는 차안에서 먹여서 미안해.“
“그게 왜 너가 미안하냐. 내가 미안해야지. 내가 유명한 사람인 거 싫어?”
“싫지 않아. 지금 정태웅 모습 보기 좋으니까.”
오랜만에 오빠의 차를 빌려 나온 나는 마땅히 갈 데가 없어서 연습실에서 가까운 공원으로 데리고 왔는데, 아직 해가 비치는 시간이라
무방비한 상태의 풀밭에 가서 나란히 앉아 도시락을 먹을 수 없었다. 그래서 좁은 차안에서 어떻게 다 꺼내어 겨우 먹이고 있는데,
저 앞에 풀밭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하고 있는 커플을 보니 태웅이에게 그냥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는데,
오히려 태웅이가 더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어 내가 더 미안해졌다.
“나 그냥 이은호 남자친구나 할껄. 괜히 가수 한다고 해가지고.”
“거기서 괜히 소리가 왜 나와. 너가 그렇게 꿈꾸던 가수해서 지금 행복하면서.”
“가수하는 건 좋지. 근데 너랑 손잡고 밖에도 못 데려 나가는 거 싫단 말이야.”
“난 괜찮아. 그러니까 그런 소리 다시는 하지마.
난 너가 좋아하는 일 하고 즐겁게 지내는 게 가장 중요해.”
“이은호.”
밥을 다 먹었는지 내가 따라준 보리차를 다 마시고는 보온병을 닫으면서 정태웅이 진지하게 내 이름을 부른다.
저 녀석이 저렇게 진지하게 부를 때는 늘 무시무시한 소리가 나와 긴장을 하게 되어 버린다.
“왜 또? 너 이상한 소리하려거든 아예 꺼내지를 마.”
“이상한 소리 아니야-”
“뭔 데?”
“나 그냥 언론이랑 팬들한테 애인 있다고 다 말해버릴까? 속 시원히-”
“뭐?”
“요즘에 연예인들 많이들 말하잖아. 여자친구나 남자친구 있는 거. 나도 그냥...”
“됐어! 미쳤니?”
“뭐?”
“내가 신경 쓰지 말랬잖아. 지난번에 다신 이런 말 안하기로 했잖아.”
“나는 너 생각해서...”
“그런 걸로 배려해달라고 한 적 없잖아. 왜 이렇게 어린 애처럼 굴어?”
“이은호, 이게 어린 애처럼 구는 거야? 너 배려하고 싶은 건데, 그게 애 같은 거야?”
이런 적이 한 번 있었다.
태웅이가 갑자기 뜨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전처럼 마음 편히 밖에서 돌아다닐 수 없었고 그래서 우리가 가는 곳을
늘 정해져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없는 곳이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 그렇게 6개월을 가까이 지내다보니 우리 둘 모두 약간 지
쳐있음을 서로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난 그게 불만인 적은 없었다. 태웅이가 하는 일의 특성을 잘 알고 있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태웅이와 몰래 만나는 일이 싫거나 힘들지 않았다. 단지 그냥 우리보다 남을 신경써야 한다는 생각에 가끔 지칠 때도 있던 것이었다.
그런 나를 눈치 챘는지, 태웅이는 그냥 다 말하고 마음 편히 지내는 게 낫겠다며 회사와 팬들에게 모두 말하겠다고 했고,
나는 그런 태웅이를 극구 말렸다. 연예인 얘기를 잘 아는 나는 아니지만, 내 남자친구가 연예인인 만큼 예전보다 관심을 두고 있던 나는
연예인이 자신의 연인을 발표했을 때 얻게 되는 긍정적인 반응보다 부정적인 더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나랑 태웅이는
나이차이도 조금 나는 연상연하 커플이고, 내가 선생님의 신분에 있는 만큼 그다지 좋은 소리가 오갈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안 좋은 소리가 하나 둘 나오다보면 앞으로 계속 이 일을 해야 하는 태웅이 입장에서는 불이익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마구잡이로 발표하겠다는 태웅이를 나는 겨우 말렸고, 그 사이에 우리는 서로의 감정까지 상처 입히며 싸웠고, 그 이후에
다신 이런 얘기를 꺼내지 말자고 했다. 나는 괜찮으니 절대 그런 소리 꺼내지 말자고. 그런데 그 때 이후 처음으로 태웅이가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낸 것이다. 이 녀석이 이렇게 말하는 데까지는 속으로 다 생각을 해 결심이 섰을 때 하는 만큼
나는 정태웅의 이 말에 기가 막힐 수 밖에 없다.
“누가 배려해 달래?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그 때도, 지금도 괜찮다고.”
“내가 안 괜찮아. 내가 싫어. 이은호 몰래 만나는 것도 싫고,
너 만날 때마다 이렇게 답답하게 막힌 공간에서 만나야 하는 것도 싫고,
인터뷰할 때 애인 없는 척 구는 것도 싫어. 왜 이래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싫어.
그냥 마음 편히 애인 있는 거 공개하고 나 하고 싶은 데로 너랑 지내고 싶단 말이야.”
“정태웅, 지난번에도 얘기했지. 내 생각 변함없으니까 허튼 생각 다시는 하지 말아.”
“왜 이게 허튼 생각이야?
내가 애인 있다고 해도 너한테 피해가는 일 절대 없도록 할 거니까 그런 거라면 걱정 마.”
“누가 내가 피해 입을까봐 그렇대? 너가 나 때문에 그러는 거 싫다고.”
“너 때문이 아니라니까. 나 때문이라고.”
“태웅아. 그래도 그냥 참으면 안돼? 내가 싫다는 데 그냥 이렇게 지내면 안돼, 응?”
이 녀석과 더 이상 맞대응을 해봤자 소용이 없을 거라 생각이 든 나는 태웅이의 눈을 마주치고 어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태웅은 그런 내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 같다.
“이은호, 혹시... 온 동네방네 소문 다 내놓고 나랑 헤어진 뒤가 걱정 되서 그러는 거야?”
“정태웅! 너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해?”
“그런 거 아니야? 솔직히 말해봐, 맞잖아.
너 나이도 나이인데, 나랑 깨지고 나면 결혼할 사람 만날 거 아니야.
그 때 타격 입을까봐 그래? 응? 그런 거야?“
“하, 너 정말 생각을 해도 어떻게...”
“그럼 나랑 결혼할 꺼야?”
“태웅아.”
“대답 못 하네. 그래, 이은호 너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그렇게 생각한다니. 무슨 말 하려고 또 그래?”
“나랑은 적당히 만나다 헤어질 생각하는 거 아니야?
그래서 지난번부터 내가 공개한다고 하니까 그렇게 극구 말린 거 아니야?
나랑 좀 만나다 헤어지고 더 잘난 놈 만나서 결혼할 생각하고 있는데,
내가 자꾸 소문내고 다니려니까, 그거 싫어서 하지 말라는 거잖아.
나랑 사귀는 거 전국에 소문나면 나랑 깨지고 나서 너 앞길 망쳐질 까봐 그런 거잖아.
이은호, 아니야?”
“너 진짜 어리다.”
“그래, 나 어려. 너 그래서 맨날 나한테 어리다 소리 하는 거 아니야?”
“난 너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 상상도 못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야. 이은호가 그런 계획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 못 했어.”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어리다, 어리다 하지만 저렇게 생각 없을 줄은 몰랐다. 어떻게 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거지?
그것도 남도 아닌 너가? 나를 가장 사랑한다는 정태웅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난 정말 섭섭함과 충격에 할 말을 잃었다.
“말 못 하는 거 보니까 맞나보네, 이은호.”
할 말이 없었고, 기분이 상했다. 그래서 더 이상 정태웅과의 대화를 이어가기 싫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정태웅은 비꼬기 시작했다.
“오늘은 더 얘기해선 안 되겠다. 연습실 데려다 줄께.”
더 이상 이야기 했다간 서로의 감정만 더 상하고 정말 큰 싸움으로 이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 나는 차에 시동을 걸며 말했지만,
그런 내 행동을 바라보던 태웅이는 차에 꽃혀 있는 키를 다시 돌려 시동을 꺼버린다. 그런 정태웅의 행동에 기분 상한 나는
그 녀석을 쳐다보았고, 그 녀석 역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피해? 진짜 사실인가 보네, 이은호.”
“하, 정태웅.”
“그래, 나 같이 어린 놈 데리고 살 생각하면 끔찍하겠지.
딴따라 짓이나 하고 내세울 거 하나 없는 정태웅이랑 결혼한다는 거, 생각조차 하기 싫겠지. 하지만 너무 한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을 가지고 나를 아무렇지 않게 만난다는 거.”
“너 지금 너무 흥분했어. 피곤하면 원래 사람 감정 예민해져.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나중에? 넌 꼭 맨날 나중이라고 얘기하더라. 왜 피하는 건데?
일본 가기 전에도 나중에 얘기하자며. 지금이 그 때 나중이잖아. 근데 왜 딴 소리해?”
갑자기 일본 가기 전 살짝 다투었던 일을 태웅이가 꺼내었다. 사실 그 때의 일이 미안해서 오늘 나름대로 신경 쓰고 있던 건데,
그런 내 노력을 한 번에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리는 정태웅이 정말 밉게 느껴졌다. 그 때 제대로 풀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는 것과 동시에 말이다.
“이은호, 나랑 헤어지고 싶냐? 헤어져 줘?”
“정태웅, 너 어린 거 알고 그거 알고 사귀는 거지만
그런 말 아무렇지 않게 하지 말아야 할 말인 거 같다는 생각 안 들어?”
정말 최악이다. 태웅이와 사귀면서 헤어진다는 소리가 나온 적은 처음이다. 지금 감정이 격해진 녀석이 흥분해 하는 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울컥한 마음이 든다. 가볍게 생각한 건 내가 아니라 정태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너 요즘 주변에 남자들이랑 잘 어울리고 나한테 짜증내는 거 늘었어.
그거 다 나한테 질려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래서 그러는 거 아니야?”
“하... 정태웅, 내가 너한테 일일이 설명해야해?
내가 하나하나 표현하지 않아도 그냥 넘어가줄 수 없어?”
“응, 없어. 왜 나한테 짜증이 부쩍 늘었는지,
왜 남자들이랑 어울리는 지 난 설명 들어야 해.”
내 말에 딱 잘라 말하는 정말 미운 정태웅.
그래, 정태웅이랑 사귀면서 나보다 어린 녀석이랑 사귄다는 생각에 늘 내가 배려의식이 먼저 앞섰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생겨도
정태웅이 어려서 그런 거니까 라고 그냥 넘어가야 했고, 정태웅의 고집도 투정도 다 받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태웅이 어리니까.
그건 어린 녀석과 사귀기로 마음먹은 후부터는 그렇게 해야 한다 생각했기 때문에 난 늘 그래왔다. 더군다나 정태웅은 남들 이목으로
먹고 사는 연예인이다. 그래서 난 이 녀석과 마음 편히 싸울 수도 없었다. 불같은 성격이 정태웅이 혹시라도 나와 싸우고 나서 방송을
펑크 내지는 않을까, 사고를 치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서 정태웅이 뜨고 나서는 더욱더 내 감정을 참아야만 했다. 그래서 그것에 지친 것일 수도 있다.
아무리 나이 어린 남자친구라고 해도, 나에겐 남자다. 그래서 나는 내 남자에게 투정을 부리고 싶은데 마음껏 그러지 못하고
이렇게나 투정을 부려본 것이다. 일본을 가기 전의 일도 별 거 아닌 일이지만, 술김에 그리고 그냥 오랜만에 정태웅 앞에서
투정 부린 것이다. 하지만 정태웅은 그렇게 받아드리지 않은 것 같다. 내가 내 감정을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날 사랑하니까 나를 이해해주길 바랬다면 내가 너무 큰 욕심을 내었던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이제야 하게 된다.
“너한테 짜증났던 적 없어. 그리고 남자들이랑 어울린 적도 없어.”
“맨날 다 없대지. 내가 오버해서 그런 거래지.”
“너 정말 왜 그래? 오늘따라 왜 그러냐고.”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리 노력해도 나 요즘 이은호를 이해할 수가 없어.
일본 가서 반성하겠다고 하고는 내내 생각해 봤는데,
내가 잘못한 일보다 이은호 너가 요즘 나한테 짜증냈던 일들이 더 먼저 생각나.
갑자기 남자들하고 잘 지내는 너 생각하면 갑자기 화 나고 짜증나.“
이래서 연하가 힘든 걸까. 결국은 내 탓이라고 돌려버리는 정태웅의 행동에 난 정말 지쳐버렸다.
게다가 오늘은 지난 번 일로 미안한 마음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는데, 그런 내 마음에 재를 뿌리는 듯한 이 녀석의 행동에 난 더욱 지쳤다.
“알았어, 그러니까 그만해.”
“나 이은호 이해하려고 노력하는데, 그게 도저히 안돼. 안 되겠어.”
“그래! 알았다고!! 너 어린 거 아니까, 그만 하자고. 됐어?!”
결국 화를 냈다. 여태까지 싸우면서 큰 소리 한 번 안 내던 내가 소리를 확 질러버렸다. 속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심정에 소리를
지르고 나니까 멍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는 정태웅이 눈에 들어왔다. 갑작스런 내 행동에 놀란 건지 정태웅은 할 말을 잃은 듯 해 보였다.
나는 얼른 이 녀석을 연습실에 데려다주고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시동을 다시 걸었고, 그런 내 행동을 보고 있던 정태웅은
문을 열더니 밖으로 나가버린다.
쾅-
하고 문이 닫히고 창문 넘어 정태웅의 등만 보인다. 평소에 다퉜던 것 같으면 어르고 달래서 정태웅을 연습실까지 바래다줬을 텐데,
오늘은 정말 나도 내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런 정태웅을 내버려두고 차를 출발시켰다. 차를 출발시키면서도 마음에
정태웅이 걸려 백미러를 통해 봤지만, 그 녀석은 무엇에 홀린 듯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그런 정태웅을 보자 마음은 약해졌지만,
이제와 차를 세우기엔 내 기분이 오늘 너무나도 많은 상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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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주말입니다.^^
아, 지난 댓글을 보니 독자분들이 써준 인물 중에 제가 이미지로 잡고 있는 사람은 없었어요~
전 딱 한 사람을 잡아 이미지화시키지 않고 둘셋을 겹쳐서 인물의 이미지를 잡는데, 그 둘셋 중 한 사람도 언급되지 않았어요-
그래도 태웅이의 이미지가 어떻게 잡혔는지는 대충 이해가 가요~ 앞으로 소설 전개해 나가는데 염두해둘려구요.^^
이번엔 은호와 태웅이의 2라운드가 시작됐습니다-
1라운드는 그냥 흐지부지 넘어갔지만, 2라운드를 화해하는 과정에선 화끈한 일이 벌어질지도...??? ^^;;
은호와 태웅이의 사이가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지 기대해주시고, 재밌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첫댓글 아ㅠㅠㅠ 싸우면 안되는데 얼른 화해했음좋뎄어요!!! 재밌엉요!1
안돼~ 그러면;;;
아..은호가 마니 힘들겠어요..ㅠㅠ
그러지마태웅아..................에휴 같은여자입장이라 왜이리태웅이만나빠보이는지. 은호도 솔직히 너무 태웅이를 어리게만보는것같은데...........ㅠㅠ어서 화해모드!!!!!!!!!!!1
아 딘땨 정말 재밌어요 은호가 태웅이마음몰라주는것같아서 제가 다 속상합니다.
아~왜 싸워요ㅋㅋㅋ 얼른 다시 알콩달콩모드로 돌아가게 해주세요~ㅋ감사합니다, 작가님ㅋ
태웅이는 참.....멍청하네요....우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