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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4장 11-13절의 은사자 연구
(목사직을 중심으로)
엡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회복역 ; 그분께서 직접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신언자로, 어떤 사람들은 복음 전하는 이로, 또 어떤 사람들은 목자 및 교사로 주셨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여 그 사역의 일을 하게 하려는 것, 곧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믿음에서의 하나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온전한 지식에서의 하나에 이르게 하고, 또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되게 하여, 그리스도의 충만의 신장의 분량에 이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1. 들어가는 말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지칭할 때 “λαος(라오스)”란 단어가 사용된다. 이 단어는 ‘성직자’도 ‘평신도’도 아닌 '한 백성'을 의미한다. 또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들 / 회복역 ; 왕들인 제사장 체계”(벧전2:9)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신약경륜을 이루심으로써 우리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중보(中保)하는 제사장이 필요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δια) 성령 안에서(εν) 하나님께(προς)” 나아갈 수 있습니다.(엡2:18)
그러나 종교개혁을 기치로 출발하였던 개신교계의 오늘날 형편은 어떠한가? 과연 모든 성도들이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온전히 그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목회자(목사)들이 구약의 제사장처럼 역할을 하고, 성도들은 그 기능이 제한된 채 방관자로서 머물고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 자신 있게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기 쉽지 않은 것이 적어도 내가 알고 있고 또한 경험했던 현실이다.
과연 성경은 무엇이라 하고 있으며,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이 글은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 폴 스티븐스 저, IVP간, 2004 의 내용을 중심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2. 신약 교회의 리더십은 무엇인가?
신약에 나타난 교회는 지금 교회들이 보이는 평신도와 성직자들이 실질적으로 구분되는 계급 계층 제도도 아니며 그렇다고 민주 제도도 아니다. 신약의 교회는 유일한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몸인 신정(神政) 제도가 그 기반이다.
여기에서 리더십은 “교인(laos) 중 장로들”에게서 나왔으며, 장로들의 리더십이란 성령께서 교회 전체에게 주신 사역을 위한 은사들을 구비(具備)시키며 격려하는 것이었다. 장로들 중 몇몇은 재정을 보조받으며 전문적으로 봉사했으나, 항상 이들은 복수였다. 또한 이 지도자들은 평신도들과 분리된 계층이 아니었고 또한 대부분이 자신의 직업을 통해 생활비를 벌었다.
3. 에베소서가 말하는 은사자(사역자)들의 내용과 성격(현재적 관점에서)
에베소서에 열거된 사역자들은 기능에 있어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는 말씀의 사역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들은 말씀을 전함으로써 새로운 교회를 세웠으며, 선지자들은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였으며, 전도자들은 복음(말씀)을 전했고, 목사-교사들은 지역교회를 말씀으로 양육했다.
- 사도들 ; 사도들은 엡2:20(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에 의하면 주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기초와 같은 선물이라고 비유되고 있다. 그러면 교회의 기초가 세워진 후에는 사도들이 더 이상 필요치 않으므로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인가?
물론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직접 임명하고 사명을 준 점에서 그들은 독특한 위치에 있지만, 사도라는 칭호는 신약 성경이 형성되어 가는 기간 동안조차 벌써 좀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사도로 칭(稱)함을 받은 사람 ; 맛디아, 바울, 바나바(행14:14, 바울과 함께 두 사도로 불리움) / 사도로 여김을 받은 사람들 ; 디모데와 실루아노(살전1:1, 2:7) 그리고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롬16:7)는 열두 사도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같은 일을 하면서 사도들의 범주에 실질적으로 포함되었다.
그러므로 사도의 역할은 예수님의 참된 증인(證人)이 되는데 그 핵심이 있다. 지금 이 역할은 우선적으로 성경이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참된 증인이 된다면 우리도 사도적 은사를 계속 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선지자들 ; 선지자들 역시 신약 성경이 형성되기 전에 교회 안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었다.(엡3: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 ”) 구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하는 그들의 권위 있는 구약 해석은 신약 교회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성령의 직접적인 감동을 받은 예언 말씀은 신약 성경이 형성되었을 때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 성령의 시대(행2:17)에는 주님의 종들은 남자든 여자든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받고 성경의 진리를 삶에 적용시키는 일을 계속한다.
놀라운 것은 만일 예언을 감동된 말씀을 타인에게 전하는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면, 예언의 은사는 오순절 강림 시대부터 모든 사람이 잠재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성경이 우리 손에 있는 상황 아래서는 누구든지 믿음의 형제자매에게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회복역 ; 건축하고 격려하며 위로하는”(고전14:3) 말씀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회복 안에서 우리가 행하고 있는 신언(申言)은 지극히 성경적이며 가장 합당한 실행이며 교회 건축의 핵심임을 알 수 있고, 또한 우리 모두는 마땅히 신언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 복음 전하는 자들 ; 이 말은 신약 성경에서 단 3회만 사용(행20:8, 엡4:11, 딤후4:5)되었지만, 복음 선포란 주제는 '누가'가 애용한 것이며 또한 '요한'의 글 중 “증거”라는 개념과 가깝다. 그러므로 복음 전하는 자를 대중 전도자나, 단지 개인 전도자에게만 제한시키는 것은 신약 성경과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어떤 형태의 방법을 취하든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를 소개하는 것은 필수적이며 누구나 복음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 목사들과 교사들 ; 이들은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돌보며, 성경 말씀으로 하나님의 양들을 돌보고 양육하는 자들이다. 에베소서 4장에 열거된 은사자들(구비시키는 자들) 중 목사와 교사들이 목회서신(바울서신 중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를 일반적으로 ‘목회서신’으로 분류함)에 소개되어 있는 장로들과 감독들과 가장 비슷하다. 이들은 지역교회에 상주하면서 사역했으며, 또한 복수로 사역했다. 그들의 자격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잘 가르치는 것이었다.(딤전3:2 “그러므로 감독은 ~ 나그네를 잘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 원문의 문법 구조상 이들은 가르침이 중심인 한 부류의 은사자에 속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목자와 교사는 말씀을 중심으로 지역교회에서 성도들을 섬기는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이 한 부류인 목자와 교사가 지금은 목사와 교사로서 계층구조가 되었다는 것은 말씀의 심한 왜곡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문분석 참조)
※ 평가 ; 에베소서에 언급된 교회 시대의 은사자들을 통해서 우리는 모든 성도들이 예수의 증인과 신언자의 역할과 복음증거자와 그리고 가르침과 돌봄을 위한 목자와 교사로서의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에베소서에 언급된 이들 은사자들은 교회의 공식적인 직분이라기보다는(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초기 교회의 기초가 놓이는 때에 특별하게 권위를 인정받은 은사자였으며,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의 은사와 신언하는 것으로 그 역할이 이전되었음) 그리고 사실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별도로 없는 것처럼,
목사직(원어 상으로 ‘목자’가 정확하며 ‘목사’로 번역한 것은 본문의 은사자들을 직임자로 번역하려는 시도에서 그리고 기독교 역사에서 유래된 제도적 관습에 따라 인위적인 명칭을 부여하기 위해 주어진 것으로 저는 판단합니다.)과 교사직은 은사에 따른 분류 명칭일 뿐, 목회서신에서 언급된 3직분 곧 집사, 장로, 감독직과 같이 지역 교회의 직분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성도를 목양하는 것에 관한 牧會書信에서 유일하게 이 세 직분이 언급되었다는 것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그런데 현대 기독교는 성경적으로 은사자에 속하는 목사직을 성경에서 권위를 인정받은 직위인 것처럼 여기고 제도적 장치(신학교육과 안수제도)를 통해 특별하고 신성한 직분으로 여기도록 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그로 인해 성직자 계급과 평신도 계급으로 사역이 나누어지고 있다는 것이다.('목자/ ποιμην ,포이맨'이 '목사/pastor'로 번역된 곳은 성경에서 엡4:11절 한 곳 뿐임.)
4. 은사자들의 기능과 목적
엡4:12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사도들, 선지자들(신언자들), 복음 전하는 자들, 목사들(목자들)과 교사들을 주셨는데 이는 성도들이 사역(διακονια/디아코니아)을 하게끔 그들을 구비(καταρτισμος/카탈티스모스)시키는 자들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의 최종적인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은사자(사역자)들은 모든 지체들을 말씀과 여러 가지 교통과 도움을 통해 잘 구비되도록 돕는 것이 그들의 가장 큰 기능이며, 이런 기능의 최종적인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있으며, 지체 개인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하는 것임을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사역자들 역시 일반 성도와 분리되는 것이 아니며, 일반 성도로서 다만 그런 은사를 받았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선택함을 받았기 때문이다.”(벧전2:9) 이것은 교회 전체가 하나의 제사장적 백성이라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은사자로서 이런 구비하도록 돕고 섬기는 역할을 벗어나서 그들 스스로 평신도와 구분되는 어떤 특별한 직위를 갖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그렇게 실행하는 것은 성경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은사자들은 모든 지체들이 서도록 섬기는 것이지 자신이 서는 것이 아님을 본문은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곧 은사자(사역자)들의 할 일은 오직 몸의 각 지체가 머리와 스스로 관계를 맺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성도들을 구비시키는 일은 교회 지도자들의 최우선 사명이 되어야 하며, 또한 성도들 자신들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새 언약은 우리와 같이 약하고 자격 없는 자를 모두 하나님의 일의 사역자가 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종된 백성이요, 하나님 왕국의 백성이며, 또 다양한 은사와 은혜를 선물로 받았기 때문에 봉사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 일이 문자에 속해 있지 않고 그 영께 속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을 받은 모든 성도는 이제 누구나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 고후3:4-6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해 이런 확신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우리 자신에게서 난 것같이 여겨, 스스로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충분한 자격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언약의 사역자들이 되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게 하셨습니다. 사역자들은 문자에 속해 있지 않고 그 영께 속해 있습니다. 왜냐하면 문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지만, 그 영은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5. 왜 은사자들은 돕는 자이어야만 하는가?
고대의 의사들은 뇌를 도시 속에 있는 성채(城砦) 즉 몸의 최고의 힘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심지어 신경 조직을 뇌에서부터 자라 나오는 나무라고까지 비교를 했다. 1) 그러나 바울은 반대로 몸이 머리에까지 자라난다고 했고, 몸의 영양섭취와 성장은 머리가 각 연결 부분 혹은 마디를 통해서 공급한다고 한다.(엡4:16)
1) Barth , Ephesians , p.450.
하지만, 엡4:16에서 언급되는 ‘마디’(αφη/합헤)는 어느 특정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원래 이 단어는 ‘만지다’ ‘~에 붙다’ ‘접촉하다’ 의 의미를 가진 απτω(하프토)에서 유래된 말이다. 따라서 바울이 이 단어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도 각자가 다른 성도들과 접촉하면서 몸의 기능을 유지한다는 것이며, 자라나게 하는 직접적인 공급자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반드시 항상 명심해야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자라게 하는 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직임자들, 그것이 목사가 되었든 장로가 되었든 감독이 되었든 자신들이 자라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심한 착각이요 욕심이고 진리를 모르는 것이다. 아마 오늘날의 목사 제도의 근저에는 이런 사고방식이 깔려있는지도 모른다.
- 고전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또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 대한 마지막 선교명령에서 모든 사람들이 지키도록 그들을 가르치는 것 곧 돕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사역은 모든 사람들 스스로가 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 마28:19-20 “그러므로 여러분은 가서 모든 민족을 나의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안으로 침례를 주고, / 내가 여러분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그들을 가르치십시오. 보십시오. 나는 이 시대가 종결될 때까지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따라서 에베소서에서 언급된 은사자들이 할 일은 모든 성도들이 사역자가 되도록 구비시키는 일이지, 스스로 사역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6. 오늘날 기독교계가 성직자와 평신도로 실질적으로 구분된 원인과 문제점
기독교는 원래 초대교회의 시작에서는 평신도 운동으로 시작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자 “평신도”라는 단어가 이류 계층을 지칭하는 말로 전락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장적 특권이 교회 전체에 부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제사장 지도 체제를 신약 교회에 적용시키려는 경건주의자들의 영향 때문이었다. 특별히 성례주의(sacramentalism)의 영향이 컸다.
또 세상의 지도체제를 모방하여 그것으로 교회를 이끌어가려고 하는 세속주의의 영향도 있다. 이의 근본적인 원인은 소수 사람의 지배욕구와 교회가 무엇인지를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지금 기독교계의 소위 성직자들의 더 큰 문제는 그들의 직위와 같은 구조에 있다기보다는 그들의 정신에 있다. 곧 그들은 교회를 위해 비전을 제공하고, 교회를 이끌고, 교회를 운영해야 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느끼는 의식구조이다. 물론 그들이 선의로 이렇게 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을 불가결한 존재라고 느낄 때 교회의 모든 일의 책임자이신 머리되신 예수님을 제쳐놓고 자신들이 교회를 운영하려 하는 것이다.
이제 기독교계는 소위 소명 받은 소수의 사역자와 또 자타 공히 열심 있다고 하는 직분자들을 빼고 모든 평신도들은 그저 방관자로 관람자로 아웃사이더로 실질적으로 전락했다고 하는 말에 진실로 그렇지 않다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을까?
만일, 하나님을 향해 삶의 전부를 바치도록 평신도를 구비시키지 못한다면 기독교는 단순히 껍데기만 남게 될 것이다.
안수제도를 역사적 성경적 그리고 신학적인 측면에서 연구한 마조리 와켄틴(Marjorie Warkentin)은 “리더십과 관련된 신약의 용어들은 피라밋 형태의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말들이다.... 안수제도는 오히려 이 수평적인 관계를 방해한다. 왜냐하면 장벽이 없는 곳에 장벽을 세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안수 제도는 그리스도인 상호간에 벽을 세우며, 서로서로 섬김으로써 교회를 세우는 일을 방해한다.” 2)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목사에 대한 안수 제도가 비전문적인 사역자들을 등한시하고 직업적인 사역자들을 선호하는 비성경적인 행습을 계속 조장하는 이 현실 앞에 오늘날의 기독교는 겸허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2) Marjorie Warkentin, Ordination : A Biblical-Historical View (Grand Rapids : Eerdmans, 1982), p. 187.
7. 온전하게 구비된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에베소서 4장을 보면 1절은 산 위에 있는 저수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이 정상 지점에서 우리의 신분이 무엇인가를 다룬 1-3장을 돌아보고, 또한 우리의 신분에 걸맞게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다룬 4-6장을 바라보고 있다. 즉 1-3장은 케리그마(kerygma)의 선포이고, 4-6장은 디다케(didache) 즉 가르침이다. 사도 바울은 존재에서 행위로, 은혜에서 활동으로 움직이고 있다. 곧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의 삶으로부터 세상으로 흘러들어가는 복음사역에 부름을 받은 것이다.
교회의 한 몸 됨은 성도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일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다양함 때문에 이상적인 일치가 교회에 존재한다는 놀라운 사실에 우리는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오히려 성도들의 다양하고 상이한 점들이 오히려 성도의 온전한 연합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우리는 사역을 가진 것이 아니다. 우리 자체가 사역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사는 사역을 위해 그리스도로부터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 자체라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역은 존재의 표현이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어느 성도도 소외됨이 없이 자유롭게 그들의 생명이 기능을 발휘하도록 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조화시키는 것은 특정한 사람도 아니고 조직도 아니고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그 분의 생명에 의해서 조화되고 성장하는 것이다.
획일화하고 통제하려는 유혹을 버려야 한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개성을 존중해야 한다. 설혹 부족한 것이 있다 할지라도 부족한 것 바로 그것 때문에 귀한 것임을 알고 어떤 지체도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 부족함은 생명의 성장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교정되고 아름답게 조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체 그 자체를 귀하게 여겨야지 그의 기능이나 능력에 집중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구비하는 일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하는 것이며, 궁극적인 구비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라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8. 구비(具備)에 합당한 교회
모든 성도가 구비되어 사역자가 되는 시도를 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은 소규모의 가정 모임이다. 따라서 예를 들어 '성남교회'가 실시하는 지역별 집회(10명~20명 수준)는 그 집회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구비되는데 이상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물리적 수준의 제한을 받기 때문에 너무 적은 수나 너무 많은 수의 모임은 적절치 않기 때문이다. 서로 간에 가르침과 온전한 교통과 서로의 형편을 알 수 있으며 서로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가 전제되어야 구비를 위한 훈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성도를 구비시키며 때로는 기대도 안했던 사람들을 통해서 그렇게 하신다. 또한 우리의 천연적인 생각과는 달리 우리는 더 약해 보이는 지체를 통해서 더 큰 공급을 받을 때가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고전12:22 “그럴 뿐만 아니라 몸 가운데서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교회의 참된 모습은 움직이는 모습이다. 매일 혹은 매주 모이고(ecclesia ,에클레시아 ), 흩어지고(diaspora , 디아스포라) 또 모이고 흩어지는 이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이다. 우리의 움직임 자체가 사역이고, 또한 복음전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이며 유기체인 교회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각자의 삶의 현장과 모이는 곳, 모두가 교회가 되어야 하고 사역의 현장이며, 전도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
9. 궁극적인 구비자
부르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오(엡4:1),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 개개인에 은혜를 베푸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엡4:7), 사역을 맡은 자들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몸된 교회를 성장시키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신다.
예수님은 사역을 위한 은사들과 은혜들을 공급하시는 분이시다. 엡4:8-11은 승전한 왕이 포로들을 석방시키고 그의 백성들과 승리의 전리품들을 나누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그 전리품으로 온 우주를 채우시기 위해 그 전리품을 지니시고 “승천”하셨다.
- 엡4:8-11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 "
이 구절들에서 나타나는 이미지는 완전히 종결된 전쟁과 전능하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물들이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경륜은 우주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통일하는 것이며, 그의 영광으로 채우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버리면서 싸운 우주적인 싸움에서 얻은 전리품들을 그의 백성들에게 주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성령의 은사들은 섬김을 위한 은혜의 은사(charismata)인 반면에 에베소에서의 은사는 바로 사역을 위한 여러 종류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 자체이다.
10. 나가는 말
신약시대의 교회에서 부르심에 계층차별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부르심은 머리되신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성도에게, 그들이 처한 상황 속에서 직접 개별적으로 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 상황 가운데서 모든 성도가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에서 한 사람이 카리스마적인 사역의 은사들을 다 지니고 있어서 그 교회의 목자라고 칭함을 받는다는 개념은 실질적인 이단일 뿐만 아니라, 또한 교회의 머리되신 궁극적인 구비자의 의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어떤 지도자도 지역교회의 머리가 아니다. 머리는 오직 그리스도만이다. 머리는 손을 통해서 발에게 지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니고 神政主義다.
과연 오늘의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이제 스스로를 돌아볼 때가 되었다. 혹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고 말은 하면서도, 영국의 여왕이 헌법적으로는 군주이나, 실제로는 다스리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상징적인 존재로 대우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미 많이 늦었지만, 늦은 것을 깨달은 때가 최선의 때이다.
모든 성도들이 얼마나 개별적인 고유의 사역자로서 움직이고 있는지? 아니면 소외된 채 그저 방관자로 남아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무서운 영적 죄악이 될 수 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늦추는 행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성도들을 복음서에 나오는 중풍병자처럼 기능을 발휘 못하는 사람들로서 방치해선 안 된다.
저는 올 초에 이름만 대도 누구나 알만한 유명한 교회의 예배에 참여한 일이 있습니다. 교회는 소위 중산층 지식인들 그리고 청년들이 많이 참석하는 유수의 교회로서 예배는 그야말로 첨단을 달렸습니다. 옛날과 같은 長의자가 아니고 개인별로 앉을 수 있는 의자였으며, 더 이상 성경책도 찬송가도 필요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프로젝션을 통해 제공되었습니다. 또한 모든 진행은 현대 문명의 시청각 利器가 총동원되었고, 찬양은 웅장하고 수준 높았으며, 예배의 진행도 끊어짐이 없이 물 흐르듯이 흘렀고, 목사님의 설교도 혼을 자극하고 만족시키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배를 마치고 나올 때 제 느낌은 그저 한편의 훌륭한 영화를 보고 온 느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계의 현 주소입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이 없어도 잘 유지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는 잘 교육받고 엘리트 코스를 거친 자식이 대물림하던지 아니면 최고의 교육을 받고 높은 지식과 카리스마가 있는 목사를 영입하면 되고, 교회의 경영은 이미 대기업의 경영과 맞먹는 수준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도들의 의식도 주일날 예배 참석하고 은혜 받고, 적당한 부서에서 봉사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하고 헌금하는 것으로 의무를 다했다고 만족하는 것이 오늘 한국 교회의 현실입니다.
과연 이것이 주님의 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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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원문은 「The Greek New Testament 제3판(1975)」의 원문임.
4:11 και / 카이 αυτος / 아우토스 εδωκεν / 에도켄 4) τους / 투스 5)
단어분해 ; (대등접속사) (대명사/주격) (동사/직설법/부정과거/능동태) 6) (지시대명사/직접목적격/복수)
KJV ; And he gave some
한글KJV ; 그리고 그가 주셨으니 혹은
μεν / 멘 7) αποστολους / 아포스토루스 8) , τους / 투스 δε / 데
(대등접속사) (명사/직접목적격/복수) (지시대명사/직접목적격/복수) (대등접속사)
indeed apostles some and
진실로 사도로 혹은 그리고
προφητας/ 프로페타스 9) , τους/ 투스 δε/ 데 ευαγγελιστας/ 유앙겔리스타스 10) ,
(명사/직접목적격/복수) (지시대명사/직접목적격/복수) (대등접속사) (명사/직접목적격/복수)
prophets some and evangelists
선지자로 혹은 그리고 복음 전하는 자로
τους / 투스 δε / 데 ποιμενας / 포이메나스 11) και / 카이
(정관사/직접목적격/복수) (대등접속사) (명사/직접목적격/복수) (대등접속사)
some and pastors and
혹은 그리고 목사 와
διδασκαλους / 디다스카루스 12) ,
(명사/직접목적격/복수)
teachers
교사로
4) 기본형은 διδωμι 이며 ‘주다’ , ‘위탁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
5) 여기서 ‘혹은’의 의미는 소수의 특정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 대상의 범위는 모든 성도이며, ‘그 중에 누구는' 으로 해석되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6) 부정과거는 과거에 일어난 단순한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과거시재와 거의 동일하다고 보면 됨.
7) 어떤 사실을 단언하거나 매우 강조할 때 쓰이는 말로서, ‘참으로’, ‘진실로’ 등의 의미가 있으며, 뒤에 나오는 동일한 접속사 δε 와 연계하여 연속하여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 / 어미나 어형변화가 없는 불변사임.
8) ‘사람을 보내다’의 의미를 가진 동사 αποστελλω에서 유래되었으며, ‘사절’, ‘사자’라는 일반적 의미와 특별히 그리스도의 全權大使로서의 ‘사도’라는 특별한 용도가 있는데, 여기서는 사도로서 사용되었음.
9) 전치사로서 장소나 시간에 대해 '앞'을 의미하는 προ와 말하다, '언명하다'의 뜻을 가진 동사 φημι 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미리 말하는 자’의 의미이나,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代言하는 선지자로 사용되며, 성경에서 대언하는 말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뜻이지만, 특별한 경우 장래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도 포함된다. 우리는 마땅히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말해 냄으로써, 곧 신언(申言)함으로써 교회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
10) ‘좋은 소식을 전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 ευαγγελιξω 에서 유래
11) 원형은 ποιμην 이며 양을 치는 목자를 의미함.(성경에서 17회 사용됨. 소문자15회, 대문자 2회) 상징적으로 ‘목사’란 뜻으로 사용된 곳은 성경에서 이 구절 한 군데 뿐임. 번역을 일반적인 이미지가 있는 목자의 뜻으로 하지 않고, 특정한 직임을 강조하기 위해 ‘목사’로 한 것으로 보임.
12) ‘가르치다’란 의미의 동사 διδασκω 에서 유래, 교사, 선생을 의미함.
※ 원문해석 ; 본문에서 우리를 은사(사역)자로 주신 것이 과거동사로서 하나님의 영원한 뜻 안에서 예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본문은 “그리고 하나님께서 실로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주셨고, 어떤 사람들은 신언자로, 어떤 사람들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자(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로 해석할 수 있다.
- 여기서 일반적으로 목사로 번역하는 “ποιμην/ 포이멘”은 원래 양을 치는 목자를 가리키는 단어이지만 여기서 번역본들이 ‘목사’란 단어로 번역한 것은 이 구절이 직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오해하고, 일관성 있는 표현을 위해 새롭게 ‘목사’(pastor)란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목사란 직임이 표상하는 의미와 원래의 목자의 의미와는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에 오히려 ‘목자’로 번역하는 것이 합당하며, 또한 본문이 직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은사자 곧 사역자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도 더욱 그렇다고 볼 수 있다.(직임은 목회 서신에 나옴)
- 또한 목사와 교사를 문법적으로(쉼표분류기준) 함께 놓음으로써 한 부류에 속하는 은사 있는 사람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기독교계에서 목사와 교사는 신분 계급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 13)
13) 회복역 엡4:11절 각주2번 참조.
- 참고로 회복역은 ‘목자’로 번역하고 있음
4:12 προς / 프로스 14) τον / 톤 καταρτισμον / 카탈티스몬 15) των / 톤
(전치사/직접목적격) (정관사/직접목적격) (명사/직접목적격) (정관사/소유격/복수)
하며 그 온전케 그
For the perfecting the
αγιων / 하기온 16) εις / 에이스 17) εργον / 엘곤 18) διακονιας /디아코니아스 19) ,
(대명사/소유격/복수) (전치사/직접목적격) (명사/직접목적격/단수) (명사/소유격/단수)
성도를 하게하며 일을 봉사의
of saints for the work of the ministry
εις / 에이스 οικοδομην / 오이코도멘 20) του / 투 σωματος / 쏘마토스 21)
(전치사/직접목적격) (명사/직접목적격) (정관사/소유격) (정관사/소유격/중성/단수)
for the edifying the of-body
이는-하심이라 세우려 그 몸을
του / 투 Χριστου / 크리스투 ,
(정관사/소유격) (명사/소유격/남성/단수)
the of Christ
그 그리스도의
14) 전치사로서 방향을 나타냄 ; 목적격과 함께 쓰여서 “ ~ 향하여”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본문은 문맥상 “~하도록 하여”가 적절함.
15) 원형은 καταρτισμος 이고 ‘정돈하다’, ‘원상 복구시키다’의 의미를 가진 동사 καταρτιξω 에서 유래하였다, ‘완전한 공급’, ‘완전케 함’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 / 나아갈 길을 알려 주다는 의미도 있음.
* 이 단어는 명사로서는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에는 고대 헬라어의 재미있는 의학 역사가 담겨있다. “구비시킨다”는 것은 몸의 모든 부분들이 완전하게 건강하도록 뼈나 마디마디마다 또 부분 부분마다 잘 맞추는 것을 뜻하며, 탈구한 수족을 교정시키는 것을 뜻한다.
16) 원래 ‘두려운 것’을 뜻하는 'Hagos' 에서 유래하였으며, 형용사로서 ‘하나님께 봉헌된’, ‘거룩한’, ‘순수한’ 등의 의미로, 명사로서 ‘거룩한 것’, ‘거룩한 자들’, ‘성도’를 말한다.
17) 전치사로서 도달되거나, 들어가는 지점을 지적하는 ~에로, ~앞으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봉사의 일을 위해서’로 번역할 수 있다.
18) 노역, 행위, 수고, 일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
19) ‘종’을 의미하는 명사 ‘διακονος’에서 유래, 종으로서의 ‘시종’, 공무상의 ‘봉사’, 상징적으로 자선적인 ‘도움’ 그리고 관리, 사역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는 단수로 사용되어 11절의 사역자들이 단 하나의 사역 곧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단일한 사역임을 암시하고 있다.
20) 집, 거처를 의미하는 οικος 와 지붕, 집 꼭대기를 의미하는 δωμα 의 합성어로서, ‘건축’을 의미하며, 상징적으로 ‘건축물’, ‘확정’을 뜻하기도 한다.
21) 보전하다, 해 받지 않게 하다의 뜻을 가진 동사 σωζω 에서 유래하였으며 동물이나 사람의 신체적인 몸을 말하며, 비유적으로 ‘종’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 원문해석 ; 본문에서 전치사 προς는 방향을 나타내며, εις는 도달점을 나타낸다. 곧 봉사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고(각 지체가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 따라서 본문은 “이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는 것, 곧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는 것입니다.”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참고로 킹제임스 성경에는 12절이 “For the perfecting of the saints, for the work of the ministry, for the edifying of the body of Christ:”로 번역되어 있으며, ‘성도를 온전케 하며’와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사이에 원문에 없는 쉼표( , )를 넣음으로써 마치 교사나 목사가 직접 봉사의 일을 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는 잘못된 번역을 하고 있다. 원문에서 봉사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성도들이며, 사역자들은 단지 그들을 구비시키는 일에 쓰임 받는 자들로 삼으셨음이 본문의 원래의 뜻임을 알아야 한다.
- 여기서 몸을 원문상으로 “그 그리스도의 그 몸”으로 표현함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이 새 창조물임을 암시하고 있다.
4:13 μεχρι/ 멕크리 22) καταντησωμεν / 카탄태소멘 23) οι / 호이 παντες/ 판테스 24)
(종속접속사) (동사/가정법/부정과거/능동태/3인칭/복수) (정관사/주격/복수) (대명사/주격/복수)
Till we-come the all
까지 우리가-이르니 그 다
εις / 에이스 την / 텐 ενοτητα / 에노테타 25) της / 태스
(전치사/직접목적격) (정관사/직접목적격) (명사/직접목적격/단수) (정관사/소유격)
in the unity the
되어 그 하나가 그
πιστεως / 피스튜스 26) και / 카이 της / 태스 επιγνωσεως / 에피그노쑤스 27) του / 투
(명사/소유격) (대등접속사) (정관사/소유격) (명사/소유격) (정관사/소유격)
of-faith and the of-knowledge the
믿는 것 과 그 아는 일에 그
υιου / 휘우 του / 투 θεου /데우 , εις / 에이스 ανδρα / 안드라 28)
(명사/소유격) (정관사/소유격) (명사/소유격) (전치사/직접목적격) (명사/직접목적격/단수)
of-Son the of-God unto a-man
아들을 그 하나님의 이루어 사람을
τελειον / 텔레이온 29) , εις / 에이스 μετρον / 메트론 30) ηλικιας / 헬리키아스 31)
(형용사/직접목적격) (전치사/직접목적격) (명사/직접목적격/단수) (명사/소유격)
perfect unto measure of the stature
온전한 까지 분량이 장성한
του / 그 πληρωματος / 프레로마토스 32) του / 투 Χριστου / 크리스투 ,
(정관사/소유격) (명사/소유격) (정관사/소유격) (명사/소유격)
the of-fulness the of Christ
그 충만한데 그 그리스도의
22) ‘길이’를 의미하는 μηκος에서 유래, 정도를 나타내며 ‘~하는 한’, ‘~까지’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23) A. 가정법은 실재하지 않는 것을 추측하는 개연성(蓋然性)의 법을 나타내는 형식으로서,
- 독립절에서 권고나 권유, 금지, 강한 부정 등을 표현하는데 사용되며(예; 마6:13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목적이나 계획을 나타내는 절에서 ~하기 위해, ~하려고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예; 마2:8 “나도 가서 경배하도록 내게 알리라”) 그리고 실현 가능성이 강한 가정을 나타낼 경우 εαν과 함께 관용구로서 ‘만약 ~한다면 또는 만약~하지 않는다면’으로 사용되며, ‘누구든지’ ‘어느 때에도’ ‘어느 곳에도’ ‘~까지는’ 등의 말 뒤에도 가정법이 온다.
- 가정법의 시상은 현재 가정법과 부정과거 가정법이 있는데, 둘 사이에 시간적 차이는 없고, 동작의 차이만 나타낸다. 현재 가정법은 동작의 계속 또는 진행 곧 선(線)적인 (동작을 나타내며, 부정과거 가정법은 일회적인 동작 곧 점(點)적인 동작을 나타낸다. (예; πιστευωμεν εις αυτου 우리는 그를 (계속적으로) 믿읍시다. / πιστευσωμεν εις αυτου 우리는 그를 (지금) 믿읍시다.)
B. 이 단어는 ‘이르다’ ‘도착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상징적으로 ‘얻다’ ‘오다’ 등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C. 여기서는 ‘우리가 ~에 이르도록’ 즉 ‘어떤 수준(지점)에 이르도록’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
24) 주격으로서 앞의 우리를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음. 곧 ‘우리 모두가’의 뜻을 가지고 있음.
26) ‘확신을 가지게 하다’의 뜻을 가진 πειθω 에서 유래, 설득, 신용, 확신, 믿음 등의 의미로 사용됨.
27) 알다, 이해하다, 인식하다의 뜻을 가진 επιγινωσκω 에서 유래. ‘인식’ ‘인정’ ‘승인’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
29) 끝, 결말을 나타내는 τελος 에서 유래, ‘완전한’, ‘온전한’의 뜻을 가지고 있음.
31) ‘얼마나 큰’을 의미하는 ηλικος 와 동일어에서 유래, ‘성숙’ ‘나이’ ‘키’ 등을 의미함.
32) ‘충만’ 혹은 ‘완성’을 의미함. 내용물이 가득 찬 것을 의미함.
※ 원문해석 ; 동사 καταντησωμεν 와 관련하여, 우리가 도달할 3개의 방향과 지점이 “εις / 에이스”라는 전치사로서 나타나고 있는데, 첫 번째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 되는 것이며, 두 번째는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며, 세 번째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장성함의 분량에 이르기까지가 그것이다.
- 따라서 이 구절은 11절에서 우리들 모두에게 사역이 주어졌음을 말한 것과 12절에서 그 사역의 목적은 모든 성도들을 온전케 하여 새 창조물인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임을 말한 것과 관련하여, 13절에서는 그러한 사역의 결과 내지는 도달의 수준을 가리키는 구절로서
- “그리하여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과 아는 것에 하나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장성의 분량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 여기서 “이르도록”은 가정법 부정과거로서 우리 모든 사람들은 언젠가 모두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시점이 있음을 가리키고 있으며,
- 또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각자 성장하고 있으며 또 성장의 수준도 서로 다르지만, 그 도달 시점에 이르러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믿음과 지식에서 "하나(ενοτητα)"와 "온전한 사람(ανδρα)" 그리고 "장성한 분량(μετρον)" 이 될 것인데, 이 모두가 '單數'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장차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새 예루살렘'으로 하나로 통일될 것임을 계시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댓글 예..역시 감사드립니다..제 사이트에 놓고 한번더 참조토록하겠습니다..^^
요즘 'upper cervical chiropractic' (경추 1번 뼈 치료)라는 것을 받고 있습니다. 이 치료법은 즉 머리를 받쳐주는 첫번째 뼈가 틀어지면(어떤 이유로든) 그 척추 안으로 흐르는 신경을 포함한 모든 전달체계에 이상이 생기고 그러다보면 어깨 골반 등도 비뚜러지고...머리 아프거나 목이나 어깨가 뻐근해지거나 허리가 아프게 되는 경우가 있다... 경추 1번뼈를 제대로 맞춰주면 우리 몸 안에는 '자가치유력'이 있어서 머리가 다 알아서 치료한다는 이론에 근거합니다. 저는 목과 어깨가 늘 묵직해서 이 닥터에게 가게 되었는데...우리 몸의 이런 구조가 영적인 몸과 머리의 관계와도 많은 유사성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지금은.. (영적인)머리와 몸의 존재와 둘 간의 관계에 대한 이론체계 자체가 온전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다보니 그 체계에 기초한 실행이 정상과 다르게 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흐름이 다수를 이루다보니, 제대로 성경대로 인식하고 실행하는 쪽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계급적인 목사가 없다는 것이 심증적으로 문제있는 단체로 인식되는 것이 현실임) 매우 흥미로운 것은 위 '경추 1번 치료법'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그야말로 효과를 보았음에도 미국에서 조차 이런 치료법은 주류 의료계(병원, 약국)의 심한 견제를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찌하든 바른 이론을 근거로 백성들(지체들)이 건강하
게 잘 살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몸을 진짜 위하는 봉사이고, 또 그것이 머리이신 그분에게도 기쁨과 영광을 돌려드리는 길인 것은 분명합니다. 진리 위에 견고하게 서서 머리이신 그분의 갈망인 한 몸의 건축의 역사에 모든 것을 다 드리기 원합니다.
매우 영감있는 형제님의 글에 감사드립니다. 진리 위에 견고하게 서서 그분의 갈망인 한 몸의 건축에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선지자에 대한 해석을 집회에서 신언하는 신언자로 하셨는데, 분명한 것은 선지자 혹은 예언(미래의 일을 미리 알리는 것)하는 일들은 지금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메세지로 주어지는 미래의 일에 대한 혹은 각 사람의 숨겨진 죄에 대한 예언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으로 그 분의 유익을 위함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