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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월 10일
한국남극점탐험대 1,400여km를
걸어서 44일 만에 남극점 정복에 성공
도보로 남극점에 도달한 한국 남극탐험대
허영호 공격대장과 대원들이 감격적인
포옹을 나누고 있다.
“우리는 해냈습니다.여기가남극점입니다.”
한국인이 마침내 지구의 마지막 극지
남극점에 태극기를 꽂았다. 중간보급과
단 하루의 휴식도 없는 미증유의 대기록을
세워 한국인의 강인한 의지와 체력을
온세계에 입증했다.
주인공은 허영호, 김승환, 유재춘, 홍성택 등
4명의 한국남극점 탐험대였다.
이들은 1994년 1월 11일 오전6시30분쯤
(현지시각 10일 오전6시30분) 남위90도
남극점에 도달, 1천4백여㎞의 대장정을
성공리에 끝냈다.
탐험대는 1993년 11월 20일 서울을 출발,
25일 오전 5시쯤(현지시각 24일)극점탐험
의 출발점인 남극대륙 패트리어트 힐에
도착하여 29일 오전2시쯤 장정에 돌입,
44일간이라는 기록으로 극점 정복에 성공했다.
한국탐험대는 개썰매나 스노모빌등의
도움을 받지 않고 걸어서 극점까지 갔으며,
중간보급을 전혀 받지 않았다.
1911년 노르웨이의 아문센 탐험대가
인류최초로 남극점을 정복한 이래 남극점에
선 나라는 많지만 도보탐험에 성공한 나라는
영국, 이탈리아, 일본 등 3개국 뿐이었다.
▶2010년 존엄사 논란 김(金)할머니 201일 만에 별세
인공호흡기를 떼어낸 뒤 김 할머니를
지켜보는 가족의 모습.
2009년 6월 국내 최초로 대법원에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라’ 는 판결을 받은 ‘김할머니’(78)가 인공호흡기를 뗀 지 201일만인 2010년 1월 10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별세했다.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지로는 328일 만이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은 “김 할머니가 낮부터 호흡이 불규칙해지는 등 상태가 안 좋아져 오후 2시57분쯤 사망했다” 며 “직접사인은 폐부종 등에 의한 다발성 장기부전” 이라고 밝혔다.
김 할머니는 지난달에도 비슷한 고비를 한 차례 넘겼지만 최근 들어 병세가 급격히 악화한 것으로 전해졌다. 병원관계자는 “최근 김 할머니가 스스로 호흡할 수 있는 여력이 떨어져 공급하는 산소의 양을 꾸준히 늘려왔다” 고 했다.
김 할머니는 2008년 2월 병원에서 폐암 조직 검사를 받다가 예상치 못한 과다 출혈로 뇌 손상을 입어 식물인간(PVS) 상태에 빠졌다. 이후 가족측은 ‘기계장치로 수명을 연장하지 말라’ 는 것이 어머니의 평소 뜻이었다며 같은 해 5월 소송 인공호흡기를 제거해달라는 소송을 냈고, 약 1년 만에 ‘인공호흡기를 떼라’ 는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받아 지난해 6월23일 호흡기를 제거했었다.
김 할머니는 2009년 6월 23일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이후 세브란스병원 15층의 한 병실에서 자발호흡을 유지해왔었다. 호흡기를 제거하면 3시간을 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의료진의 예상과 달리 김 할머니는 해를 넘겨 200여일간 스스로 숨을 쉬며 생존했다.
함경도 출신의 김 할머니는 6·25전쟁 전 월남해 같은 이북 출신 남자와 결혼했다. 1남3녀 자식들은 결혼을 하고서도 부모 곁에 모여 살겠다며 경기도 과천시에 4층 집을 짓고 한 층씩을 차지했다. 지난해 2월 18일 폐암이 의심돼 세브란스병원에서 기관지 내시경을 이용한 조직 검사를 받다가 폐출혈과 심호흡 정지를 겪고 식물인간이 되기 전까지 그는 손자·손녀 일곱을 둔 평범한 할머니였다.
▶2009년 류수환 전 국회의원 별세
▶2002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추상화,
남아공서 발견됐다고 AP통신 보도
남아공에서 발견된 추상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7만여 년전의 추상화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서 290여km 떨어진 인도양 연안의 블로보스 동굴에서 발견됐다고 AP가 2002년 1월 10일 보도했다.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추상화는 프랑스의 여러 동굴들에서 발견된 3만5천년 전쯤으로 추정되는 것들이었는데, 이번 발견은 인류 추상화의 기원(起源)을 3만5천년 정도 더 앞당긴 것으로 평가된다.
이 추상화는 철광석의 일종인 `오커(ocher)`의 표면을 평평하게 한 다음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해 균등한 간격으로 대각선 여러 개를 긋고 다시 반대방향으로 대각선을 그어 마름모꼴과 삼각형을 표현한 것이다. 동굴에서는 또 8000여개의 적토 조각이 발견됐는데, 철광석 형태인 이들 적토는 10만년 미만의 석기시대 지층에서 자주 발견되는 것으로 몸치장이나 장식을 위한 안료로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크리스토퍼 헨실우드 미국 뉴욕주립대 교수는 “인류의 근대적 행동양식은 약 4만년 전부터 발전되기 시작했다는 게 정설이었으나 이번 발견으로 시기가 더 거슬러 올라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에 발견된 초상화는 매우 복잡한 기하학적 형태로서 하나의 체계로 돼있다”며 “지금 그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해될 수 있는 어떤 상징들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동굴에서는 또 8000여개의 적토 조각이 발견됐는데, 철광석 형태인 이들 적토는 10만년 미만의 석기시대 지층에서 자주 발견되는 것으로 몸치장이나 장식을 위한 안료로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BBC방송은 전했다.
▶2000년 미국 타임워너-인터넷그룹 AOL의 합병으로 세계최대 미디어 업체 `AOL 타임워너` 탄생
스티브 케이스 아메리카온라인(AOL)
회장(왼쪽)과 제럴드 레빈 타임워너 회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합병안을 발표했다.
▶ 1994년 한국남극점탐험대(허영호씨등 4명) 1,400여km를 걸어서 44일 만에 남극점 정복에 성공
“우리는 해냈습니다. 여기가 남극점입니다.” 한국인이 마침내 지구의 마지막 극지 남극점에 태극기를 꽂았다. 중간보급과 단 하루의 휴식도 없는 미증유의 대기록을 세워 한국인의 강인한 의지와 체력을 온세계에 입증했다. 주인공은 허영호, 김승환, 유재춘, 홍성택 등 4명의 한국남극점 탐험대였다. 이들은 1994년 1월 11일 오전6시30분쯤(현지시각 10일 오전6시30분) 남위90도 남극점에 도달, 1천4백여㎞의 대장정을 성공리에 끝냈다.
도보로 남극점에 도달한 한국 남극탐험대 허영호 공격대장과 대원들이 감격적인 포옹을 나누고 있다.
탐험대는 1993년 11월 20일 서울을 출발, 25일 오전 5시쯤(현지시각 24일) 극점탐험의 출발점인 남극대륙 패트리어트 힐에 도착하여 29일 오전2시쯤 장정에 돌입, 44일간이라는 기록으로 극점 정복에 성공했다.
한국탐험대는 개썰매나 스노모빌등의 도움을 받지 않고 걸어서 극점까지 갔으며, 중간보급을 전혀 받지 않았다. 1911년 노르웨이의 아문센 탐험대가 인류최초로 남극점을 정복한 이래 남극점에 선 나라는 많지만 도보탐험에 성공한 나라는 영국, 이탈리아, 일본 등 3개국 뿐이었다.
탐험가 허영호
3극점과 7대륙 최고봉 모두 오른 인류 최초의 탐험가
탐험가 허영호 대장은 한국탐험계에서 별과 같은 존재다. 그가 극지에서 이뤄놓은 업적은 조용히 빛나는 북극성에 비교된다. 두 발로 이룩해놓은 탐험 업적들은 하나의 붙박이 좌표로 한국 탐험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허영호 대장은 1987년 겨울에 에베레스트를 올랐다. 에베레스트 동계 등정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에서는 시도조차 되지 않는 쾌거다. 봄가을에 몰리는 에베레스트 등정자는 세계적으로 이미 수천 명을 넘고 있다. 한국 역시 등정자를 백 명 넘게 보유하고 있다.
허영호 대장은 에베레스트를 네 번이나 오른 기록의 산악인이자 탐험가다. 2010년 5월에는 허영호 대장이 아들 재석 군과 함께 처음으로 부자가 나란히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는 기록도 세웠다. 탐험가 허영호 대장은 산악계에서도 스타임엔 틀림없다.
44일간 1천4백 킬로미터 걸어서 남극점 도달
허영호 대장이 극지나 히말라야에서 도전한 탐험엔 ‘최초’라는 수식이 많이 붙는다. 1993년 에베레스트 횡단 등반. 1994년 남극점 도착. 1995년 북극점 도보 횡단. 소위 세븐 서밋이라 불리는 7대륙 최고봉 모조리 오르기. 어지러울 정도로 탐험이나 등반의 모든 행위에 ‘최초’라는 이름이 맨 앞에 붙는다.
당연히 허영호 대장은 7대륙 최고봉과 남극점, 북극점에 도달한 인류 최초의 탐험가로 기록되었다. 허영호 대장은 높은 산을 오르는 수직 탐험과 혹한의 북극해와 남극대륙에 도전하는 수평 탐험을 결합시킨 최초의 한국 탐험가다.
그 중 가장 큰 탐험으로는 남극점 도보 정복일 것이다. 1911년 12월 14일, 남위 90도 남극점에 인간의 발자국이 새겨졌다. 탐험가 아문센이었다. 남극점에 태극기가 꽂힌 것은 1994년 1월 11일이다. 탐험가 허영호 대장과 대원 3명이 도전에 성공한 것이다. 44일간 1천4백 킬로미터를 걸어서 도착한 남극점. 허영호 대장 이전에 남극점을 도보로 걸어 정복에 성공한 나라는 영국, 이탈리아, 일본뿐이다.
영하 30〜40도의 혹한과 초속 40미터가 넘는 폭풍설과 싸우며 1백20킬로그램의 짐이 실린 썰매 끌며 이룬 쾌거였다. 허영호 대장은 중간보급 한번 없이 남극점에 도달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1999년에 허영호 대장은 다시 한 번 무보급으로 남극 횡단에 도전했다.
허영호 씨가 끝없이 펼쳐진 북극의 난빙을 넘어서고 있다.
지난번 남극점 정복 때처럼 맨몸으로 썰매를 끌며 1백10여일에 걸친 남극 횡단을 마친다는 기획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아쉽게도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 극한의 탐험을 해낸 허영호 대장은 멀쩡한 몸을 가지고 있다. 손가락 발가락 어느 한 곳도 잘라 낸 곳이 없는 것이 오히려 신기하다.
“남극 대륙 빈슨매시프를 등반할 때였습니다. 등반 중 방송용 비디오를 찍는데 워낙 춥다보니 연결선 하나가 끊어졌어요. 정상에 올라 스틸 사진으로 찍고 내려왔는데 방송사 관계자가 죽을 표정을 짓는 거예요. 이대로는 귀국 못 한다고. 그래서 다시 올라갔지요. 생각지도 않게 그 산을 두 번이나 올랐습니다.”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인데 1995년 12월 12일. 허 씨는 남극대륙 최고봉인 빈슨매시프 정상에 올랐고, 3극점과 7대륙의 최고봉을 모두 오른 인류 최초의 탐험가가 되었다.
소위 어드벤처 그랜드슬램을 이룬 것이다. 어드벤처 그랜드슬램이란 지구 3극점+세계 7대륙 최고봉 완등을 말하는데 그가 세계 최초로 달성했다. 지구 3극점은 에베레스트, 남극점, 북극점을 말한다. 1995년 12월 11일 남극대륙의 빈슨매시프를 오름으로써 허영호 대장의 7대륙 최고봉 등정이 완성된다.
죽지 않는 한 탐험은 끝나지 않아
그런 대 탐험의 공로를 인정한 정부는 체육훈장 기린장(1982년), 거상장(1988년), 맹호장(1991년), 청룡장(1996년) 등 4개의 훈장을 수여했다. “나의 탐험에 대한 열정은 지금도 진행형입니다. 은퇴는 없어요. 내 자신의 탐험을 위해 만든 ‘드림 앤 어드벤처’를 운영하며 밀리는 강연 일정을 소화하고 있지만 늘 생각은 새로운 탐험을 모색하고 있지요.”
북극점을 횡단하기 위해 블리자드를 뚫고 전진하고 있다.
그가 무언가 큰 탐험을 기획하고 있다는 소문은 익히 나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원래 나는 어릴 적부터 파일럿을 꿈꾸었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초경량 비행기 조종에 관심을 가지고 조종면허를 받았지요. 나머지 탐험은 경비행기를 이용 세계 일주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꿈이 꾸는 자의 것이라면 그걸 이루는 것도 멋지잖아요.”
허영호 대장은 2007년 1월 1일 경기도 여주 비행장에서 이륙했다.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까지 왕복 1,100킬로미터의 단독 비행에 나섰으나 전라남도 청산도 해상에서 추락했다. 경량비행기는 가라앉고 그곳을 지나던 가스운반선에 허영호 대장은 구조되었다. 5개월 후인 2008년 4월 18일, 같은 기종의 경량비행기로 같은 코스에 재도전하여 비행에 성공했다.
허영호 대장은 그가 1993년에 쓴 「걸어서 땅 끝까지」라는 책에서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치고 있다. “나는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간다. 그게 내 인생이다. 인생에서 은퇴하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다.”
▶1994년 삼성전관, 세계두번째로 와이드TV용 평면 브라운관 개발
▶1991년`재일 한국인의 법적지위와
처우에 관한 각서` 체결
▶1989년 재불화가 이응로 사망
▶1985년 다니엘 오르테가,
니카라과 대통령에 취임
▶1980년 충주 다목적댐 기공
▶1978년 박동선사건을 처리하기 위한
한미법무회의 개최
▶1975년 구미대교 개통
▶1971년디자이너 샤넬 사망
20세기 패션의 대명사 가브리엘 샤넬이 1970년 1월 10일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샤넬은 단순한 패션 디자이너가 아니었다. 그는 패션 혁명가였다. 모조보석을 귀부인의 목에 걸게하고 남자옷과 여자옷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장례식에서나 쓰는 검정옷을 처음으로 일상화시켰다.
1883년 8월19일 프랑스 르와르 강변마을 소뮈르에서 행상인의 딸로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 샤넬은 그나마 12살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언니와 함께 고아원에 맡겨졌다. 고아원 시절의 검정 유니폼과 베이지색 복도, 성당의 중후하고 화려한 장식들은 감수성 강한 그녀의 뇌리에 깊이 각인돼 후에 샤넬 패션의 기본색상을 이뤘다.
1915년 그는 파리에 ‘샤넬’ 디자인 부티크를 개설했다. ‘간결할 것, 감촉이 좋을 것, 낭비가 없을 것’이란 기본 철학을 갖고 단순성을 강조한 디자인을 발표했다. 한낱 장식에 불과했던 단추나 포켓까지도 실용성을 주장했으며 모조 보석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샤넬은 남녀 양성적이고 단순화된 독특한 스타일을 세련되게 표현했다. 그녀는 자신의 갈색 머리를 잘라 버리고 단순하고 입기 쉬운 드레스, 소매없는 파티 드레스, 앙증맞은 검은 드레스, 2가지 색의 구두 등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는 제1차세계대전의 영향으로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1939년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 중 샤넬은 독일 군인을 사랑하게 되어 전쟁 후 스위스에 잠적하면서 1954년 회사가 문을 닫았다. 15년 만인 71세의 나이로 다시 파리에 부티크를 연 샤넬은 그곳에서 그 유명한 장식끈을 단 트위트 투피스를 만들었고 이 투피스는 코코샤넬의 명성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마스코트인 동백꽃이 그녀가 만든 모든 상의의 안쪽에 부로치로 부착됐고 누비식 속을 넣은 핸드백이 만들어졌다. 1955년에는 C자가 서로 교차한 모양의 핸드백 잠금쇠가 만들어져 샤넬의 로고가 됐다.
여성들을 위해 기발하고 독창적이며 단아한 스타일을 창조해 낸 디자이너 샤넬. 살아 있을 당시 신화적인 인물로 칭송을 받았으며 미디어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기도 전에 미디어의 총애를 받았고, 사후에도 샤넬의 신화는 계속되고 있다.
파리패션을 이끌었던 디자이너 샤넬(1883∼1971)이 눈을 감은 날도 오늘이다. 샤넬이 자른 치마의 길이에서 유래한 ‘샤넬라인’은 아직도 가장 아름다운 치마의 길이로 통한다. 사람은 가도 이름은 남는다.
▶1966년 샤스트리 인도 수상이
소련 타시켄트에서 사망
▶1965년 수필가 전혜린 사망
▶1964년 파나마 운하지대서 파나마인
반미폭동에 미국 경찰의 발포로 200여명 사상
▶1963년 공화당 발기대회
▶1962년 문화재위원회 설치, 문화재보호법 공포
▶1962년 군내반혁명사건으로 장도영에 사형선고
생애 초기
장도영은 1923년 1월 23일에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평안북도 선천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 대학교에 입학하여 1944년 졸업했다.일제의 패망을 맞아 선천으로 돌아와 모교인 신의주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후배 양성에 주력하던 1945년 11월 23일 신의주 반공 학생 의거가 발생한 이후 소련 군정과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반공인사 탄압이 강행됨에 따라 피신하여 월남을 결행하고 서울로 내려왔다.
초기 활동
그는 일제 강점기 무렵 일본군 장교였으며 광복 후 국군에 입대하였다. 당시 그는 당시 미 군정청 군사고문으로 있던 이응준으로부터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라는 권고를 받고 1946년 2월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1946년 3월 졸업한 후 육군 참위로 임관했다.
약 1개월의 교육훈련을 마치고 1946년 3월 23일 군번 10080을 부여받은 뒤 국방경비대 육군 참위로 임관하여 대구에 주둔 중이던 국방경비대 제6연대 1중대 소대장에 보직되었고, 그해 가을에는 중위로 진급하여 이리의 제3연대 2중대장으로 진급한 후, 제3연대 제3대의 신설에 참여한 뒤 신설 3연대 3대의 초대 대대장으로 부임하였다.
1947년 9월 태능의 국방경비사관학교로 전보되어 제5기 생도대의 중대장이 되었으며, 1948년 7월에는 부산의 육군 제5연대장으로 부임하였다. 1948년여순 육군 제14연대 반란 사건 당시 반란 가담자였던 박정희가 무기징역을 언도받자 도움을 주었다는 설이 있다. 백선엽 등에 의해 박정희 구명운동이 있자 그는 적극 호응하였다. 1949년 6월 육군 수도사단 제9연대장으로 승진하였고 이어 그 해(1949년) 11월 육군본부 정보국 국장으로 부임하였다.
한국 전쟁 이후
1950년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고 김종오 대령의 후임으로 6사단장으로 부임한다. 6사단장으로 부임한후 사창리 전투에서 패배하였으나 병력을 수습한뒤 후퇴하였다. 이후 용문산 전투에서 중공군 3개 사단, 3만명을 막아내며 대승을 거두었다. 휴전 이후 1953년 6월 육군 제8사단장, 1954년 2월 육군 제2군단장 등을 거쳐 그해 10월 육군 중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1955년 5월에 육군본부로 돌아와 기획참모부장, 행정참모부장, 참모차장 등을 역임한 후 1956년 육군참모차장에 취임했고, 1957년 7월 다시 육군참모차장에 연임되었으며 육군 제2군사령부 사령관을 거쳐 5.16 군사 정변 이전에 제2공화국 출범 이후 장면 국무총리에 의해 발탁되어 육군참모총장으로 재직했다.
1960년 국무총리 장면이 그를 육군참모총장으로 발탁하자 내부의 반발에 봉착했다. 국회의원 이철승은 그가 겉과 속이 표리부동하다며 참모총장 인준을 반대했고, 민주당 신파에서는 그가 쿠데타를 일으킬 위험이 있는 인물이라며 부정적으로 봤다. 외무부 장관 정일형은 이한림 중장과 최경록 중장 중에서 고르는 것이 어떻느냐며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그러나 각계의 반대를 극복하고 참모총장에 등용되었다. 장면 역시 그의 선대가 평북이므로 서북계로 분류되어,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5.16 군사정변
5월 20일, 박정희와 함께 구 서울시청앞에서
5·16 군사 정변, 국가재건최고회의 문서도 참고하십시오.
1961년 5월 9일 5·16 군사 정변 일주일 전 장면은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당시의 육군 참모 총장인 장도영을 불렀다. 장면이 입수한 정보는 박정희(朴正熙) 소장을 주동으로 한 일부 군인들이 쿠데타 모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장면은 자신이 입수한 정보를 장도영에게 전하고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라고 물었다. 내 말을 들은 장도영은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한다.
장면에 의하면 “참모 총장이 먼저 알아서 나에게 보고해야 될 성질의 사건을 반대로 내가 참모 총장에게 지시하고 있으니 책임 지고 내사해 보시오.” 이러한 내 말에도 “알아는 보겠습니다만, 그럴 리가 없습니다” 라는 대답이 반복될 뿐이었다는 것이다.
5월 16일 민주당 정권하에서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박정희 소장이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자 이에 대해 적극적인 반대나 찬성을 하지 않는 모호한 태도를 보여 사실상 군사정변을 방조하기도 했다는 의혹이 있었지만 본인은 당시 쿠데타 음모를 하루전에야 알았고,쿠데타 세력에 대해 방첩대를 동원해 조사를 실시했으나 거짓보고로 실패했고 쿠데다 동조 세력이 아니였다고 주장했다.
5월 19일 밤 박정희와 장도영은 청와대를 찾아와 윤보선의 사퇴를 만류했다. 그러나 그 만류는 시늉이었다. 장도영에겐 윤보선이 좀더 필요했던 것 같으나, 박정희는 윤보선의 사퇴를 속 시원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5월 20일 상오 외무부 차관 김용식이 윤보선에게 “유일한 헌법기관인 대통령의 이 시점에서의 하야는 국제법상 새 정부의 승인문제를 복잡하게 할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김용식은 이 점을 박정희에게도 설명했다. 5월 20일 오후 2시 윤보선, 박정희, 장도영, 김용식 4자 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용식은 다시 “만일 각하가 사임한 뒤 이북이 남침하면 외국과 유엔에 호소하려 해도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호소할 기관이 없다며 사임재고를 요청했다. 재고 요청에 박정희와 장도영도 가세했고, 미국의 만류도 있었다.
노태우에게 연행되는 장도영.
6월 6일 대통령 윤보선을 수행하여 현충일 행사에 참석하였다. 현충일 행사에서 그는 제2공화국을 비판하였다.
국민의 희망과 기대속에 제2공화국은 탄생하였으나 여전히 부패와 부정에서 탈피 못하고 쟁파만을 일삼고 권력쟁탈에 급급함으로써 구악의 독소는 오히려 조장되어 국민의 기대는 수포로 돌아가고 절망과 기아에서 허덕이게 되는 현실을 피안히 대와처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혁명의 봉화를 들고 국민이 선두에서 궐기하였고...(이하 중략)...새로운 광명을 시작하는 혁명을 이룩하였습니다...(이하 생략)...
1961년 군사정변이 성공하자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계엄사령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내각수반, 국방부장관으로 추대되었다. 같은 해 6월 정변 주체세력에 의해 해임되고 8월 22일 중장으로 예편되었다.이후 박정희의 중앙정보부에 의해 '반혁명'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 때 장도영을 체포 연행한 대위가 노태우였다.
1963년 3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5월 형집행면제로 풀려났다.
미국행과 사망
1963년 미국으로 건너가 1969년 위스콘신 대학교교수를 지냈고 1993년까지 교수로 재직하였다. 2011년 5월 무렵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알츠하이머병과 파킨슨병의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지병으로 2012년 8월 3일 89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1962년 페루, 눈사태로 3,000여명 사망
▶1961년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의 모태인 한국경제협의회 발족
▶1960년 흑산도 해상에서 해안경비정 701호가 중국무장어선에 피격.
▶1959년 충북선 철도 개통
▶1957년 제1차 금융통화운영위원회 개최
▶1956년 엘비스 프레슬리 히트곡
`브레이크 호텔` 녹음 시작
▶1951년 미국 작가 싱클레어 루이스 사망
▶1950년 현대건설(현대자동차-현대토건사 합병) 설립
▶1949년 독일 지리학자 드리갈스키 사망
▶1946년 제1회 유엔총회 런던에서 개최
▶1941년 독일, 소련이 신우호협정 체결
▶1937년 국내 첫 어린이 신문 소년조선일보 창간
▶1931년 조선어연구회가 조선어학회로 개칭
▶1929년 에르제의 만화
`소련의 탱탱`첫회가 벨기에 잡지에 게재
- 2010년 벨기에 브뤼셀의 한 경매장에서 에르제(1907~83)의 풍자만화 『소련에 간 탱탱』 원본이 2만8800유로(한화 약 4462만원)에 낙찰됐다.
▶1926년 조선일보에 연재됐던 한국
최초의 신문연재만화 `멍텅구리 헛물켜기`,
영화로 제작돼 조선극장에서 개봉
▶1922년 와세다대학 건립한 일본의
정치가 오쿠마 시게노부 사망
▶1920년 국제연맹 발족
▶1913년티베트 독립선언
▶1910년 소련 최초의 최고 수석
발레리나 울라노바 출생
▶1906년 통감부 통신관리국 설치
▶1901년 미국 텍사스주 대유전(大油田) 발견
▶1894년 전라도 고부군민, 전봉준 영도하에
고부관아 점령
동학농민운동의 기치가 높이 오른 날이다. 탐관오리의 학정에 견디지 못한 고부군민 1000여명이 이날 새벽 녹두장군 전봉준과 함께 고부 관아를 노도처럼 ‘접수’한다. 이들은 무기를 탈취하고 불법 징수한 세곡을 나누어 준다. 조정이 ‘고부민란’에 대한 적절한 수습책을 제시하자 군민들은 일단 해산한다. 하지만 민란의 책임을 모두 동학교도와 농민들에게 전가시키면서 주모자를 체포하려 하자 3월 다시 봉기한다.
▶1880년 스위스의 광대 그로크 출생
▶1863년 세계최초의 런던지하철 개통
세계최초의 지하철이 영국 런던에서 1863년 1월 10일 개통됐다. 팔링턴 스트리트와 비셥스 로드의 패딩턴을 잇는 6km 구간의 이 첫 지하철은 증기기관차였다. 지하철 상태는 매우 열악해 터널 천정은 지상도로에서 수인치 두께 밖에 안되었고 매연과 증기를 뽑아내기 위해 여기저기 통풍구가 뚫렸으며 때로는 가옥 밑을 통과하기도 했다.
1861년 지하철을 건설중인 모습
패딩턴으로부터 팔링턴街까지 메트로폴리탄선 제1구역을 건설하는 데만 3년이 소요됐다. 패딩턴역에서 가진 개막식에는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글래드스턴이 첫 번째 열차를 탔다. 에스컬레이터로 역에 들어가고 빠져 나올 수 있게 하자는 비쇼의 제안은 그 뒤에 실현되었다.
유럽 대륙에서 처음으로 지하철이 들어선 도시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1896)였다. 뒤이어 1898년에는 오스트리아의 빈에, 1900년에는 프랑스의 파리에 그리고 1902년과 1906년에는 독일의 베를린과 함부르크에 차례로 지하철이 들어섰다. 미국에서는 1901년 보스턴에 첫 지하철이 생겼고 뉴욕 지하철은 1904년에 개통됐다. 아시아에서는 1927년 일본 동경에 첫 지하철이 개통됐다. 한국의 첫 지하철은 1971년에 착공해 1974년 8월15일 개통됐다.
1863년 1월 10일, 영국 런던의 패딩턴(비숍스로드)과 페링던 사이의 6km 구간을 잇는 런던 지하철이 세계 최초로 개통되면서 인류는 SF소설에서나 상상할 수 있었던 ‘땅 속 열차’를 처음 경험하게 된다. 초기의 지하철은 증기기관차로 운행되었는데, 증기기관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은 심각한 문제였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전기 철도 방식의 전기기관차는 1890년 11월 4일, 스톡웰과 킹 윌리엄가(街)를 연결한 ‘시티 앤 런던 지하철’이었다.
이후 유럽 대륙에서 최초로 지하철이 들어선 도시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1896)였고,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의 빈(1898), 1900년에는 프랑스 파리에 그리고 독일의 베를린(1902)과 함부르크(1906)에 차례로 지하철이 들어섰다. 영국에서는 지하철을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라 부르고, 보통 튜브(Tube)라고 하는데 우리가 지하철을 부를 때 이르는 서브웨이(subway)란 말은 영국에서라면 단순히 길 건너편을 연결해주는 지하통로를 의미한다. 프랑스에서는 지하철을 메트로(metro)라고 부르는데, 런던의 지하철을 튜브라고 부르는 까닭은 처음 터널을 만들 때 사용되었던 틀의 모양이 수영장 튜브의 단면을 닮아서 지금까지 튜브라고 부른다. 현재도 런던 지하철(Underground)의 터널은 튜브를 닮아있다.
런던 지하철(Underground)을 튜브라고 부르는 이유
▶1835년 일본 메이지시대의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 출생
▶1808년 러시아 작가 마푸 출생
▶1778년 생물 분류법의 기초를 다진
스웨덴 식물학자 린네 사망
린네 [Linnaeus, Carl][Linné, Carl von, 1707.5.23~1778.1.10]
스웨덴의 식물학자 카를 폰 린네가 1778년 1월 10일 웁살라에서 사망했다. 린네의 가장 큰 업적은 생물 분류법의 기초를 다진 점에 있다. 그가 8천가지의 식물과 4천1백62종의 동물을 분류하고, 이름을 부여한 학명은 오늘날까지도 생물 분류학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학명 가운데 가장 기초적인 것은 종명(種名)인데 종명의 부여는 린네가 창안한 이명법(二名法)에 따르고 있다. 이명법은 간단하면서도 뛰어나, 예를들어 사람의 학명인 Homo sapiens의 경우 Homo는 속명(屬名)이고 sapiens는 종명이다. 이명법은 라틴어 표기를 원칙으로 하였으며 속명의 첫 글자는 항상 대문자로 쓰고 전체는 반드시 이탤릭체로 표기했다.
생물 분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린네는 1707년 스웨덴의 로스홀트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과학자의 재능을 보인 린네는 웁살라대학에서 공부했고 네덜란드에서 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742년부터 웁살라대학의 식물학 교수 겸 의학 교수로 근무하며 분류학과 식물학의 체계를 잡은 공로로 1761년 스웨덴 최초의 귀족 과학자 칭호를 수여했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은 귀족을 상징하는 카를 폰 린네로 불렀다.
린네는 식물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수집가로도 활약했다.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수집한 수많은 식물과 곤충 그리고 광물의 표본은 박물관을 만들어 보존했다. 린네가 남긴 연구자료와 소장품은 모두 스물 여섯 상자나 되었고 도서는 3천여 권이나 되었다.
▶1668년 터키 이즈미라에 지진 발생,
2만여 명 사망
▶1234년 중국 금나라 멸망
1861년 지하철을 건설중인 모습
https://youtu.be/z90YKFFnSQ0
출처 네이버지식백과,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