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계단에 앉아
박혜경(박 숲)
햇빛요양원 204호에 월급을 털어 넣던 날 나는,
당신의 집이 있는 루르마랭에 갔다
좁고 긴 골목으로 죽은 계절이 뒹굴고
햇빛이 깨진 유리조각처럼 잘게 부서졌다
한 번도 열린 적 없는 자줏빛 낡은 대문
나는 네 개의 계단을 올라 당신의 문 앞에 섰다
집주인이 된 적막이 강하게 나를 밀어냈다
뒤집힌 물음표처럼 엉덩이를 네 번째 계단에 묻고
나는 볼록렌즈가 되어 당신의 말속에 스민
알제리의 햇빛을 조각조각 모았다
엄마의 방은 알제리의 태양보다 뜨거웠다지
어느 틈엔가,
빵만큼이나 고독이 필요했다는 당신이 나타나 소리쳤다
맞장뜨란 말야!
소스라치게 놀란 내게
잇새에 문 담배를 잘근잘근 씹으며 당신은 침묵,
그게 부조리란 말이지!
조롱기 가득한 독소로 내 몸 어딘가를 할퀸 뒤 사라졌다
요양원 204호와 대척점인 당신의 집 루르마랭!
당신을 쫓아 긴 회랑 같은 골목을 뛰었다
군데군데 박힌 조각난 햇빛처럼
날카롭게 빛을 내던 당신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뫼르소*가 되어 오랫동안
당신의 집 앞 네 번째 계단에 앉아
여름의 정수리를 헤아리다
무거운 그림자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제도,
그제도,
엄마가 죽었다는 간병인 전화는 걸려 오지 않았다.
*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이름.
하프문 베타
아몬드 잎 위에 잠든
당신의 꿈을 산책해요
입술 틈새로 방울방울 호흡을 나눠요
수초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으면
서로의 파동이 지나가요
당신이 지느러미를 펼칠 땐
물 위로 뜬 반달이 출렁거려요
물결무늬 곡선의 유려한 몸짓이 다가와요
푸른 빛 미끈한 꼬리 사이로 감춘
날카로운 가시의 비밀!
내 등은 꼿꼿하게 긴장해요
우리는 한 공간에서 만날 수 없어요
손을 잡고 수초 사이를 유영하며
완성된 원을 펼치는 춤은
꿈에서나 가능하죠
각자의 방에는
유리알 눈동자가 굴러다녀요
당신은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는
베타의 습성*을 지녔어요
당신의 꼬리에 새로운 반달이 출몰해요
바닥에 깔린 조약돌의 기분을 아시나요
거품으로 지은 집이 물 위를 떠다녀요
찢겨나간 지느러미의 아픔을 당신은
제대로 느꼈어야 했어요
우리는 이제,
서로의 꿈을 산책하지 않아요
유리 벽 너머 당신의 플레어링
숨이 막혀요
나를 할퀴고 물어뜯는 당신은
누구인가요
* 베타는 종족끼리 합사하면 서로 죽도록 물어뜯고 싸운다.
더욱 치열하게, 단단한 작품을
쓰는 것으로 보답할 것
빛을 향해 손을 뻗으면 시가 있었다. 밤 문턱 너머 골목에 서면 차가운 바람의 살갗처럼 또 시가 달려들었다. 오래 품어온 비밀이 저 혼자 헝클어지고 멍울지고 영글다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올려다본다. 모두 비슷하면서 서로 다른 나뭇잎들. 반짝이며 흔들리는 한 장의 나뭇잎을 표현하기 위한 단 하나의 언어.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은 내게 시를 쓰기 위한 최고의 각성제였다.
몇 해 전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신 뒤, 빠른 속도로 기억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당신이 지닌 화양연화의 순간은 기억의 주름 어디쯤 담겨 있을까. 전소全燒된 어머니는 떠나간 자들의 뒷모습처럼 소슬하고 아련했다. 어머니의 현재는 나의 미래가 될 수도 있었다. 문득 어느 날 뭉텅 사라질지도 모를 내 기억들을 걱정했던 그 부조리한 순간. 인간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시적 단상이 끝내 울음처럼 터졌다.
남몰래 가꾼 정원처럼 묵묵히 물을 주고 가지를 치며 그렇게 혼자 시를 보살폈다. 햇빛 아래 내밀고 싶었지만, 자라지 못한 화초처럼 늘 부족했고 부끄러웠다. 제대로 가고 있는지 궁금했던 시기, 이제 거의 다 왔다며 용기를 주었던 이영주 시인. 그 한마디는 최면처럼 시에 대한 그리움을 더욱 부추겼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최고의 멘토가 되어준 이영주 시인께 감사 인사 전한다.
짧은 여행처럼 내 곁을 스쳐 간 몇몇 시인들의 열정을 떠올린다. 각자의 자리에서 빛을 내는 별처럼 묵묵히 시를 위해 사는 그들의 한결같은 삶을 동경한다고 고백하고 싶다.
여전히 무르익지 못한 나의 시 쓰기에 적당한 토양과 바람과 태양을 선사해주신 ‘시와산문사’에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또한 부족한 작품을 세상 밖으로 꺼내 주신 심사위원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 인사 올린다. 더욱 치열하게, 단단한 작품을 쓰는 것으로 보답하고자 한다.
봄이 무르익었다. 두꺼운 옷과 침구를 세탁하고 겨우내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창문을 활짝 열어 폐부 깊숙이 봄바람을 들인다. 옥상 빨랫줄에 걸린 셔츠처럼, 어쩌면 나는 꽤 긴 시간 하얗게 펄럭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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