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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 2월 횡성 실업고(현 횡성고) 졸업 기념사진. |
수렁속에서 겨울잠 자는 미꾸라지는 최고 보양식 도랑서 미꾸라지·버들치·뚝지 잡던 추억 아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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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순업 전 횡성초교 교장 | 나는 대학을 다니느라 춘천에 잠시 나간 것 외에는 고향 땅을 떠나본 적이 없다. 직장도 집과 횡성 지역의 학교를 오가며 41년 6개월의 교직생활을 횡성초등학교에서 2008년 8월 말로 마감했다. 늘 내가 태어난 땅을 밟고 그 자리의 자연과 더불어 살아왔다. 이는 내생애에 단점이 될 수도 있지만 가능한 장점이 되도록 노력했다.
조곡리 사람들은 고래실 수렁논에서 벼를 베어 묵단을 벌거숭이 산등성에 지게로 져다 펴 널고, 건조되면 지게로 져서 앞 마당에 벼 낟가리를 만들었다가, 밤새도록 발기계로 타작을 했으니 생활은 궁핍하고 농사일은 하나같이 고되기만 한 노동이었으며, 나도 힘든 농사일을 도우며 지게질도 하고 소도 뜯기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6·25가 할퀴고 간 당시 소는 재산 1호였다. 우리 집 소도 온 마을 밭과 고래실 논을 갈고 써레질의 주역으로 고된 일을 도맡아 하며 땅을 불려줬다. 갈을 꺾어 넣은 그 논에는 물방개가 헤엄쳤고 개구리와 맹꽁이, 우렁이가 지천이었다. 가을이면 파인 물꼬와 웅덩이에 미꾸라지가 엉켜 겨울잠을 준비하고 겨울에는 수렁논 흙 속에서 겨울잠 자는 미꾸라지가 어려웠던 시절 좋은 보양식이 됐다. 창포 등 물풀이 우거진 도랑에는 족대를 대면 미꾸라지, 붕어, 버들치, 뚝지, 가재, 새우가 걸려들었고 메 뿌리, 아카시아 꽃, 진달래꽃, 찔레 순, 시경, 오디, 칡뿌리, 새알 등이 좋은 간식거리였으며 그 주변이 모두 신나는 놀이무대였다.
80년대 이후 물방개, 미꾸리, 창포, 흔하게 눈에 띄던 물레나물, 솜방망이 꽃도 사라졌다. 그런 것들이 현재까지 옆에 있어 줬으면 고향 땅이 더 푸근할 터인데 지키지 못한 아쉬움이 너무 크다.
그러나 땔감채취에 의한 과거의 벌거숭이산은 원시림처럼 나무가 우거졌고 내가 횡성 중·고등학교를 다니느라 자동차가 지날 때 비가 오면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마른 날은 먼지를 뒤집어쓰며 5㎞를 걷던 자갈길 신작로는 4차선으로 포장돼 있다. 이제 디지털 시대가 도래해 문화생활과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생활의 편의를 만끽하고 있지만 어려웠던 지난날 고된 농사일 경험과 자연의 접촉은 내 삶의 영양소가 돼 생태환경에 눈을 뜰 수 있었고 들꽃에 심취할 수 있게 됐다.
농촌은 도시에 비해 교육·문화 등 환경이 취약하다. 농촌에는 어쩔 수 없는 사람만이 남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시골도 시골에 사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자연의 특혜가 숨어 있다. 나는 그것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안흥초등학교에서는 ‘흙을 살리자’라는 주제로 환경부 프로젝트에 응모해 오리농법, 야생화 가꾸기, 채소 가꾸기 등 흙의 오염을 줄이는 탐구·관찰·인성학습의 장을 제공했다. 횡성초등학교에서는 횡성군청의 도움을 받아 숲이 있던 자리에 학교 숲을 복원하고 토종식물의 생태학습장을 만들어 탐구력과 인성계발의 장으로 활용했다.
나는 내가 근무하는 고향학교, 나의 영향력이 미치는 작은 영역, 그 곳 지역 특색을 접목, 교육환경을 최고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전국아름다운학교, 행복한 학교 친환경 최우수학교로 선정됐고, 언론 매체의 소개와 많은 전국 교육자들이 학교 방문을 보고 조금이나마 나의 작은 소망이 실현된 증거라 자위했었다.
나는 횡성의 토박이로서 고장에 대해 누구보다 당연히 잘 알아야 된다는 전제 아래, 1980년 여름방학 카메라와 녹음기를 들고 당시 생존했던 애국지사, 목격자, 후손을 찾아다니며 증언을 녹취하며 향토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횡성사람들은 횡성을 애국의 고장이라고 부른다. 횡성지역에서의 처절한 의병활동과, 1919년 3월 16일 횡성보통학교 졸업을 앞둔 학생들이 고종황제의 독살 소식에 베 헝겊을 가슴에 달고 무언의 시위를 하다 휴교령을 당한 후, 그 해 4월 1일 횡성 장날 수천 명이 모여 도내에서 가장 대규모로 전개됐던 4·1만세운동은, 횡성을 애국의 고장이라고 부르는데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당시 당사자는 독립운동이 자신과 가정의 파멸을 수반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겠지만 구한말 의병 활동과, 4·1만세운동에서 보듯이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3·1운동의 연장인, 횡성 4·1군민 만세운동으로 다섯 명이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순국하고 많은 시위자가 총상을 입었으며 태형과 옥고를 치른 사람도 수십 명이나 됐다.
최양옥지사 같은 분은 현장에서 탈출, 광복이 될 때까지 26년간 두 번에 걸쳐 17년의 옥살이를 하며 독립운동에 몸을 바치기도 했으며 일인들의 상권이 횡성에 발을 못 붙이도록 횡성사람들은 단결해 일제에 대항했다. 이를 두고 일인들은 횡성사람이 외지인에 대해 배타적, 또는 깍쟁이라 했으나 실제로 순박하고 정이 많은 사람들이다.
농사일이 힘들 때 불렀던 횡성어리리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횡성 정금리 사람들이 전국 민속공연대회에서 회다지소리로 대통령상을 수상했듯이 횡성사람들은 전통을 잘 보존하며 가꿔 나간다. 어려웠던 시절에 먹던 찐빵을 되살려 전국에 명성을 떨치게 한 안흥찐빵도 그 한 예이며, 고래실 다락 논을 갈며 구성진 소리로 비탈 밭을 갈던 한우는 노동력이 쓸모없지만 이제 육질로 전국적인 횡성한우의 명성을 떨치며 부를 창출하고 있는 것도 지혜롭게 사는 횡성사람들의 한 단면이다. 횡성은 교통이 사통팔달 뚫려있어 편리하며 인정이 넘치는 곳으로 아름다운 산과 계곡이 펼쳐져 있다. 어답산, 태기산, 운무산, 매화산, 발교산, 병무산, 덕고산 등 횡성의 크고 작은 산들은 오를수록 정이 가고 아름답다. 그 곳에는 애환이 담긴 화전민의 흔적과 이 땅을 지켜온 많은 야생화도 볼 수 있어서 이다. 이제 살기 좋은 횡성, 맹꽁이 소리가 골짜기에 울려 퍼지고 봄을 알리는 가녀린 노오란 솜방망이 꽃을 다시 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 프로필
- 46년생 횡성군 횡성읍 조곡리 출생 - 횡성중·고, 춘천교육대학 및 동대학원 졸업 - 횡성군 화성, 덕고, 우천, 횡성, 상창, 유현, 성북초 교사 - 횡성초등학교 교감 - 안흥초, 횡성초 교장, 춘천교육대학교 겸임교수 - 횡성군선거관리 부위원장 및 문화원 이사 - 문화해설사 및 숲 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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