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17장 12절 ~ 18절
영광스러운 높은 보좌는 태초부터 우리 성소가 있는 곳이라. 12)
A glorious high throne from the beginning is the place of our sanctuary. 12)
sanctuary ① 보호구역 ② 성역 ③ 피난처 ④ 안식처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가라는 질문은 사람들의 오래된 질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명확한 답을 내놓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미 답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께로부터와서 다시 주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근원은 곧 하나님께서 코에 불어넣으신 생명의 숨결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값으로 죄의 오염을 씻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가 계신곳이 영광스러운 높은 보좌이며, 우리가 그의 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에덴에서 쫓겨나 방황하고 있지만 구원의 손길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값으로 우리에게 다가왔고
그의 피묻은 손을 붙잡으면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천국은 태초에 아담이 있었던 에덴의 모습과 같을 것으로 보입니다.
에덴은 기쁨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기쁨의 성소에 다시 돌아갈 날을 소망하며 기다립시다.
하나님으로부터왔지만 불순종의 죄로 오염되었습니다. 그 오염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염을 제거하지 못한자들은 바깥 흑암에서 이를 갈며 슬퍼하며 버려짐을 슬퍼하게 될 것입니다.
오 주,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여,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며 또 내게서 떠나는 자들은 흙에 기록되리니 이는 그들이 생수의 근원이신 주를 버렸음이니이다. 13)
O LORD, the hope of Israel, all that forsake thee shall be ashamed, and they that depart from me shall be written in the earth, becasue they have forsaken the LORD, the fountain of living waters. 13)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소망이시며, 하나님을 외면함은 곧 사람들의 수치가 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내게서(me)의 "나"는 예레미야입니다. 이것은 당시는 구약만이 있고, 구약을 접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한정된 상황이므로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는 곧 말씀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통로와 같았습니다. 예레미야가 지금의 성경과 같은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를 떠난 자들은 곧 말씀을 멀리하는 자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수의 근원은 말씀이며, 예레미야를 통하여 당시의 사람들에게 선포되고 전달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당시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은 예레미야같은 선지자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대신 모든 사람이 성경을 가질 수 있는 여건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수의 근원이신 말씀을 멀리하는 사람은 소망이신 주를 포기하는 것이며, 그로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되고, 흙에 기록되는 것처럼 허무하게 소멸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흙(땅)에 기록됨의 의미는 하늘에 기록됨의 반대됨으로 느껴집니다. 흙에 기록됨은 곧 땅에 글씨를 쓰는 것입니다.
흙에 쓴글씨는 그냥 지워지는 허무한 것입니다. 반대로 하늘에 기록됨은 우리의 영생처럼 영원한 기록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주를 시험하여 그를 고소할 구실을 얻고자 함이라. 그러나 예수께서 못 들은 체하시고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다 쓰시더라.
This they said, tempting him, that they might have to accuse him. But Jesus stooped down, and with his finger wrote on the ground, as though he heard them not.
요한복음 8장 6절
stoop ① 몸을 구부리다 ② 허리가 굽어 있다 ③ 몸을 낮추어 하다 ④ 구부리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잡힌 여성을 주께로 데리고 온 것은 고발하려고 함이었습니다. 즉 여인을 용서하라고 했다면 율법을 무시한다고 고발할 것이고, 그녀를 죽이게 된다면 살인자라고 몰아세울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이때 그들이 주께서 그들의 말들을 못들은 체 하시며, 땅에 무엇인가를 적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내용을 쓰셨을까하고 궁금해 합니다. 어떤 내용을 쓰셨는지는 모르지만 주께서 땅에 글씨를 쓰심은 그들의 말이 흙에 기록됨을 의미하며, 그들이 주께하는 말을 듣지 않으시고 소멸하심의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오 주여, 나를 고쳐 주소서. 그리하면 내가 고침을 받으리이다. 나를 구원해 주소서. 그리하면 내가 구원을 받으리이다. 주께서는 나의 찬양이심이라. 14)
Heal me, O LORD, and I shall be healed; save me, and I shall be saved: for thou art my praise. 14)
나를 떠나는 자가 허무하게 소멸될 것이라 말하는 말씀의 통로인 예레미야가 자신을 고쳐달라고 주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선지자라 할지라도 우리와 주앞에는 동일선상에 있는 모습입니다. 주앞에서 누가 더 잘했고 못했고는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앞에서는 높고 낮음이 없으며, 선지자도 구원의 대상일뿐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바울에게서도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하게 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한 후에 어떻게 해서든지 내 자신이 버림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고린도전서 9장 27절
이러한 모습은 구원이 하나님과 각자의 일대 일의 관계임이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구원은 다른 사람과 상관이 없고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절대의 기준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선한 공의의 심판자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에 언약이라는 계약에서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경기장에서 달리는 사람들이 모두 달릴지라도 한 사람만이 상을 받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너희도 상을 얻게 되도록 달리라.
고린도전서 9장 24절
구원의 언약은 각자의 고유한 하나님과의 계약이지만 그 언약의 결과인 상급은 모두 같지 않습니다.
위 말씀에서 드러나는 것은 구원 = 상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상급이 없는 구원도 있고, 상급이 있는 구원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복음에 순종함은 어떤 것이든 헛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순종은 모두 같은 것이 아니라 열심으로 달리는 순종의 사람에게는 구원과 더불어 상급이라는 보상이 반드시 더 있을 것입니다.
O 보소서,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주의 말씀이 어디 있느냐? 지금 임하게 하라." 하나이다. 15)
Behold, they say unto me, Where is the word of the LORD? let it come now. 15)
지금도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때에도 하지 못했던 답을 우리는 쉽게 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저도 잘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앞에 이천년전에 예언된 짐승의 표가 서서히 그 모습을 갖추고 드러나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이 어디있느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천년전에 주의 말씀으로 예언된 짐승의 표가 뉴스에 나오는 것을 확인해보라라고 말해주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주 특별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육천년의 역사에서 주의 말씀이 현실로 실행되고 있는 시대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백신사기극으로 이방인들의 복음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이것 또한 마지막때에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될것이라는 말씀이 지금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형식의 교회 출석하는 교인은 줄어들지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본질의 말씀을 믿고 돌이키는 성도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기회를 얻을 것이며, 순종과 불순종의 선택을 하게될 것입니다.
나로 말하면 목자가 되어 주를 따르는 데서 서둘러 떠나지 않았으며 재앙의 날도 원치 아니하였음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입술에서 나온 것이 바로 주 앞에 있었나이다. 16)
As for me, I have not hastened from being a pastor to follow thee: neither have I desired the woeful day; thou knowest: that which came out of my lips was right before thee. 16)
woeful ① 비참한 ② 불행한 ③ 슬퍼할
주는 내게 공포가 되지 마옵소서. 주는 재앙의 날에 나의 소망이시라. 17)
Be not a terror unto me: thou art my hope in the day of evil. 17)
위 말씀을 보면 선지자도 두려워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선지자도 우리와 같은 구원의 대상이며, 그가 많은 일을 했어도 그의 권리가 주앞에서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느끼는 것인데 죄를 지을 수록 죄에 둔감해지고, 말씀에 순종하면 할 수록 죄에 더 민감해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뜻대로 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더 가혹한 기준을 적용하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자신에게 적용하는 기준은 그것이 낮던 높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에게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 되고 심판자가 되는 것입니다. 가끔 이러한 것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 심판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죄보다 더 무서운 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자리로 올라가는 것은 죄보다 무서운 것입니다.
나를 박해하는 자들로 수치를 당하게 하시고 나로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그들을 놀라게 하시되 나를 놀라게 하지는 마옵소서. 그들에게 재앙의 날이 임하게 하사 두 배의 멸망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18)
Let them be confounded that persecute me, but let not me be confounded: let them be dismayed, but let not me be dismayed: bring upon them the day of evil, and destroy them with double destruction. 18)
confounded ① 당황한 ② 괘씸한 ③ 지독한
persecute ① 박해하다 ② 처벌하다 ③ 고통받다
dismay ① 크게 놀라게 하다 ② 경악 ③ 당황하게 하다 ④ 당황
우리는 왼뺨을 맞으면 오른 뺨을 대야하지만 주께서는 그들을 징벌하실 것입니다. 주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주께서 그의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무조건 용서하라고 하신 것을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성도들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말씀으로 하나님도 그러실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위의 말씀을 읽는 자는 그러한 착각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성도들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하신 것은 성도들이 직접 심판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 의미입니다.
공의의 심판자이신 주께서는 원수를 사랑하지 않으시며,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위 말씀에서 예레미야는 주께 예레미야의 복수를 위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심판자의 위치에 서지 않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심판자의 위치에 서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동등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을 축구경기에 비유하면 우리는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이고, 주께서는 심판입니다. 상대편이 반칙을 범했다면 심판이 옐로우카드나 레드카드로 처벌하도록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선수가 다른 선수에게 반칙의 책임을 물으려 싸운다면 둘 다 심판으로부터 카드를 받게 됩니다.
주께서는 공의와 선의의 심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께 순종함이 평안함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