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식 전사장의 1남1녀는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고, 장 장관의 아들 형제는 해외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소장 학자. 큰아들 하준(夏準·38) 씨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영국으로 유학,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쳤다. 그는 박사학위를 받기 1년 전인 27세 때 케임브리지대 경제학부 교수로 취임, 학계를 놀라게 했다.
그가 1991년에 쓴 박사학위 논문 ‘산업정책의 정치경제학’은 산업정책을 분석하는 데 경제적 측면뿐 아니라 정치적 요소를 함께 고려한 것으로 학계의 큰 관심을 끌었다. 그는 이후로도 잇따라 주목받는 논문을 발표해 ‘신경제학의 샛별’로 불리고 있으며, 한국인 가운데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사로 꼽힌다. 그의 동생 하석(夏碩·34) 씨 역시 영국 런던대 과학철학과 교수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장홍염 씨는 슬하에 1남5녀를 두었다. 아들 웅식 씨는 고려대를 졸업하고 교직에 몸담았다가 현재는 사업을 하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홍염 씨의 사위 다섯 명 가운데 서울 출신인 넷째 사위만 제외하고 모두 경상도 출신이라는 점. 그의 둘째 사위는 ‘동아일보’ 정치부장 출신의 박경석(朴敬錫·64) 전의원(현 배재대 초빙교수)인데, 박 전의원은 고향 포항 출신의 2대 국회의원이었던 최원수 씨의 중매로 결혼했다. 최씨와 홍염 씨는 2대 의원을 역임하면서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박 전의원은 결혼 전에도 물론 장인을 알고 있었다. 1959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자마자 정치부로 발령받았던 그는 이듬해 4·19 직후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혁신계 정당 취재를 담당하면서 장인과 인연을 맺었다. 장인 홍염 씨는 당시 사회대중당에 참여했다가 장건상 등과 함께 혁신당을 결성, 조직위원장과 선전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대지주 진섭 씨의 아들 4형제가 모두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된 데는 아버지의 교육열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진섭 씨는 큰아들 병준과 둘째아들 병상을 일본으로 유학 보내 넓은 세상을 체험하게 했는데, 당시로선 장산도뿐 아니라 전국 어느 곳의 부자라 해도 두 아들을 일본에 유학 보낸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장진섭의 재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들 형제의 독립운동 노선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이는 형제간의 나이 차이로 인해 독립운동에 뛰어든 시점이 달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3·1운동 직후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첫째 병준 씨가 우파 민족진영을 대표한다면 30년대 이후 중국에서 무장 투쟁을 벌였던 홍염 씨는 생전에 “나는 민족주의자요 사회주의자로 자칭하고 살아왔다”고 말하곤 했다.
병준 씨 형제들 사이에 형성된 이런 사상적 스펙트럼은 우리 현대사의 명암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이 때문에 광복 후 좌우 대립의 혼란기에 가족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겼을 법도 하지만 그런 흔적은 없다. 다만 아나키즘 쪽에 기울었던 홍염 씨는 나중에 반 이승만 투쟁이다, 혁신계 활동이다 해서 뛰어다니는 신난한 삶을 살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