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26일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루카 10,1-9
성령의 불이 타오르게 하는 유일한 방법
요즘 넷플릭스에서 흥행하는 우리나라 영화 ‘정이’의 줄거리입니다.
지구 종말쯤 인류는 지구를 떠난 새로운 정착지들을 우주에 만들었는데 내전이 발생하였습니다.
몸이 약한 서현의 수술비를 위해 전쟁에 나간 엄마 정이는 영웅적인 전쟁영웅이 되었지만 결국 정이가 수술하는 날 뇌사상태가 됩니다.
큰 기업들은 정이의 전투 능력을 그대로 옮기기 위해 정이의 뇌를 로봇들에게 주입합니다.
이런 가운데 서현은 성인이 되어 엄마의 뇌로 A.I. 로봇들을 만드는 일을 합니다. 하지만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습니다.
서현도 뇌를 다른 기계의 몸에 넣으면 영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기계인 줄만 알았던 엄마의 로봇에서 활성화되는 뇌의 영역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딸에 대한 사랑의 영역이었습니다.
서현은 이제 뇌사상태로 누워 있는 엄마가 아닌 로봇에게 무언가 책임을 느낍니다.
그녀에게도 모성애가 발동하는 것입니다.
이제 엄마가 아기처럼 무언가를 배우는 로봇이고
아이가 엄마가 되어 폐기될 로봇에게 새 인생을 살도록 목숨을 겁니다.
한갓 로봇을 인격체로 취급하는 것을 알게 된 회사에서는 가만있지 않았지만, 서현은 자기 목숨을 버려가면서 이제 막 걸음마를 떼는 로봇을 자유롭게 살도록 풀어주고 보내줍니다.
이 영화는 공상과학 SF 물이지만, 실제로는 한 아이가 어떻게 어머니가 되어가는지 그 과정을 다루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부모에게 받은 사랑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누군가를 또 키워내고 독립적인 존재로 만들려는 과정에서 활활 타오릅니다.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도 부모가 되려는 의지가 없다면 그냥 싹이 트지 못한 씨앗처럼 우리 안에서 썩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많은 일꾼을 보내달라고 주님께 청하라는 내용입니다.
목자는 부모가 되어주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탄생시키는 하느님 자녀들의 어머니입니다.
이 역할을 맡았던 분들이 바오로 사도의 제자들이라 볼 수 있는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이렇게 씁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2티모 1,6)
안수로 받는 것은 성령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그냥 불에 타는 것이 아닙니다.
차에 연료를 넣어도 움직이려는 마음이 없으면 그 연료는 연소하지 않습니다.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은사를 불태우라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바오로 사도가 준 성령은 어머니가 딸에게 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피 흘림입니다.
피 흘림은 피 흘릴 때 그 사람은 안에서 불탑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모 1,7.8)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으시고 광야에서 단식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성령의 불을 끄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작게 타오릅니다.
그리고 육체의 욕망을 채울 때 꺼집니다.
영과 육은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당신 성령은 내어주시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의 길로 나아가셨습니다.
이때 성령께서 가장 활활 타올랐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을 받기만 한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 그 성령의 불씨가 꺼지지 않게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와 단식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멈추지 말고 이웃의 영혼을 성장시키기 위해 나도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바로 서현이 어머니를 닮은 하나의 로봇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죽음을 감수한 것과 같습니다.
이때 어머니에게서 받은 성령이 가장 활발히 타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 그리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성령이 활발히 탈 때 육체적으로는 죽는 것 같지만 그 생명은 가장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입니다.
만약 사제가 본인 혼자 묵상하기 위해 기도한다면 성령의 불이 탈까요? 물론 불씨가 꺼지지는 않을지라도 활활 탈 수는 없습니다.
신자들을 위해 피를 흘리려고 할 때 그제야 부어진 성령이 불이 되어 나를 태웁니다.
성령은 내가 이웃사랑의 뜻으로 불살라지기를 원할 때 우리 안에서 타게 되는 것입니다.
유튜브에는 가상현실 VR을 쓰고 일주일, 혹은 100일까지 살아본 이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처음에 그들이 느끼는 것은 자유입니다.
이 세상에서 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것, 만나고 싶은 모든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 느끼는 것은 ‘허무함’ 자체입니다.
그들이 가상 세계에서 나와서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진짜 자기 친구를 만나 그들과 우정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려 할 때야만 우리 안에 심어진 성령의 불씨가 타오르고 그제야 기쁨과 평화도 생겨납니다.
행복해지고 싶거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합시다.
성령의 불을 태우는 방법은 이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26일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루카 10,1-9
사목자는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합니다!
초세기 교회 바오로 사도의 역할과 사명이 얼마나 막중했었는지는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티모테오 주교와 티토 주교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바오로 사도의 직제자로서 이방 선교 활동의 최측근 협력자였습니다.
바오로 사도 친히 두 사람을 선발하여 양성시켰고, 일정 지역의 사목 책임자, 즉 주교로 임명한 것입니다.
당시 바오로 사도는 주교조차 임명할 권위와 역량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 사도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가 소유하고 있었던 권위와 힘은 오로지 사랑과 봉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와 초세기 교회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손톱만큼의 권위나 자리가 주어진다면, 그것은 오로지 주님을 위한 것이며,
주님 나라 건설을 위한 것이며, 이웃 사랑의 실천과 봉사를 위해 주어진 것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티토를 얼마나 극진히 총애했는지는 다음의 표현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나 바오로가 같은 믿음에 따라 나의 착실한 아들이 된 티토에게 인사합니다.”(티토서 1장 4절)
바오로 사도는 당신의 제자 티토를 친아들처럼 여겼습니다.
티모테오에게 보낸 서한은 또 어떻습니까?
“나는 밤낮으로 기도할 때마다 끊임없이 그대를 생각합니다.
나는 그대의 눈물을 생각하면서 그대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기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티모테오 2서 1장 3~5절)
보십시오.
그들의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은 스승 제자 사이를 넘어 연인 사이에 주고받은 연서(戀書) 이상의
분위기를 풍깁니다.
초기 교회 바오로 사도와 영적 제자들 사이에는 이토록 끈끈한 가족정신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맺어주신 인연은 혈연이나 지연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습니다.
티토는 원래 이교도였으나 바오로 사도를 만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받아들인 개종자였습니다.
티토는 바오로 사도를 도와 마케도니아 교회와 코린토 교회 신자들을 위해 열심히 사목활동을 펼쳤습니다.
비록 성경 이름은 티토에게 보낸 편지이지만 내용을 보면 초대교회 지도자들, 더 넓게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사목서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감독은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합니다.
또한 거만하지 않고 쉽사리 화내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나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손님을 잘 대접하고 선을 사랑해야 하며,
신중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자제력이 있으며, 가르침 받은 대로 진정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전한 가르침으로 남을 격려할 수도 있고 반대자들을 꾸짖을 수도 있습니다.”(티토 1장 7~9절)
정말 바오로 사도 대단하십니다.
어찌 그리도 핵심을 찌르시는지요?
언행일치가 안 되는 지도자, 자기관리 등 기본도 안되는 지도자로 인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지도자는 자신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어야겠습니다.
바오로 사도 말씀대로 거만하지 않고 겸손해야겠습니다.
여간해서는 분노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 기도를 통해 열심히 내공을 닦아야겠습니다.
술도 조심해야겠습니다.
말도 신중히 가려서 해야겠습니다.
그래서 흠 잡힐 데 없는 사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야 진정한 지도자가 되어 이웃을 지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과 벗 사이에>
2023. 01. 26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루카 10,1-9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주님과 벗 사이에>
삶의
길 위에서
만나는 벗은
주님께서
만나시려는
벗이요
주님을
만나야하는
벗이니
날마다
걸음마다
주님을 닮아
주님과 벗
그 사이 잇는
나이어야 한다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