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 유문(春香遺文)
서정주
안녕히 계세요.
도련님
지난 오월 단옷날, 처음 만나던 날
우리 둘이서 그늘 밑에 서 있던
그 무성하고 푸르던 나무같이
늘 안녕히 계세요.
저승이 어딘지는 똑똑히 모르지만,
춘향의 사랑보단 오히려 더 먼
딴 나라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천 길 땅 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兜率天)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더라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어요?
더구나 그 구름이 소나기 되어 퍼 불 때
춘향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 거여요.
(시집 『서정주 시선』, 1956)
[어휘풀이]
-도솔천 : 욕계 육천(欲界六天) 가운데 넷째 하늘 하늘에 사는 사람의 욕망을 이루는
외원(外院)과 미륵보살의 정토인 내원(內院)으로 이루어졌다 함.
[작품해설]
이 시는 죽음을 앞둔 ‘춘향’이 이몽룡에게 남기는 유서 형식의 작품으로,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부드러운 독백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여성적인 섬세함과 부드러움 속에 강렬한 영상을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1연은 임에게 하는 체념적 인사이고, 2연은 행복했던 지난날에 대한 회상과 함께 ‘무성하고 푸르던 나무’같은 열렬한 애정을 표현한 부분이다. 3연은 멀고 먼 저승도 자신의 사랑보다는 가까이 존재한다고 하며 죽음의 세계까지도 그녀의 사랑 속에 있음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4연은 생사(生死)와 시공을 초월하는 자신의 사랑을, 지옥세 떨어져 썩은 물로 흐르거나 극락에 올라 구름으로 떠 있다 해도 결국은 도련님 곁이 아니겠느냐는 반어적 의문 형식으로 극대화시킨다. 그리고 5연에서는 하늘의 구름이 소나기가 되어 내려올 때, 자신도 함께 그 곳에 있을 것이라는 영원불변의 사랑을 다시금 강조한다. 이렇게 이 시는 윤회전생(輪廻轉生)에 의해 ‘검은 물’ → ‘구름’ → ‘소나기’로 춘향을 변신시켜, 결코 소멸하거나 중단되지 않는 그녀의 영원한 사랑을 불교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작가소개]
서정주(徐廷柱)
미당(未堂), 궁발(窮髮)
1915년 전라북도 고창 출생
1929년 중앙고보 입학
1931년 고창고보에 편입학, 자퇴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어 등단
시 전문 동인지 『시인부락』 창간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 시분과 위원장직을 맡음
1950년 종군 위문단 결성
1954년 예술원 종신 위원으로 추천되어 문학분과 위원장 역임
1955년 자유문학상 수상
1977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2000년 사망
시집 : 『화사집』(1941), 『귀촉도』(1948), 『흑호반』(1953), 『서정주시선』(1956), 『신라초』 (1961), 『동천』(1969), 『서정주문학전집』(1972), 『국화옆에서』(1975), 『질마재 신화』 (1975), 『떠돌이의 시』(1976), 『학이 울고간 날들의 시』(1982), 『미당서정주시선집』 (1983), 『안 잊히는 일들』(1983), 『노래』(1984), 『시와 시인의 말』(1986), 『이런 나
라를 아시나요』(1987), 『팔할이 바람』(1988), 『연꽃 만나고 가는 사람아』(1989), 『피
는 꽃』(1991), 『산시(山詩)』(1991), 『늙은 떠돌이의 시』(1993), 『민들레꽃』(1994), 『미당시전집』(1994), 『견우의 노래』(1997), 『80소년 떠돌이의 시』(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