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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동오(東吳)
4대 52년간 중국의 삼국시대에 존재했던 국가. 수도는 건업(지금의 난징).
초대 군주는 손권, 마지막 군주는 장락공 손호이다. 국호인 오(吳)는 손권이 봉해진 땅이 오군(吳郡)이었던 것에서 유래한다.
삼국 시대의 삼국 가운데 하나. 후한 말기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군벌 손책이 기반을 닦고, 그의 동생 손권이 황제로 즉위하였다.
개국 이후 촉한과 전략적 동맹관계를 맺었으며, 조위와 서진에 대하여 적대관계를 유지하였다.
수성의 이미지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합비전선에서 꾸준히 조위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였다. 다만 실제로 벌어진 규모나 담론의 거대함, 그리고 지속성 면에서 촉의 북벌 이상으로 평가되기는 어렵다. 그리고 단 한 차례조차 성공하지 못했다. 여러 사건 사고 끝에 내정 개혁에 실패하였고, 결국 서진에 병합되었다.
위진남북조시대의 다른 명칭인 육조시대는 오나라부터 건업에 차례대로 도읍한 여섯 국가들(오(吳), 동진(東晉), 송(宋), 제(齊), 양(梁), 진(陳)에서 유래한다.
중국 역사에서 오(吳)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가 많기 때문에 동오(東吳), 손(孫)씨성을 붙여서 손오(孫吳)로도 불리며 간혹 남오(南吳)로 부리기도 한다.
수도는 건업(建業. 오늘날의 난징)이고, 가끔 천도가 이루어지기도 한 제2수도급 무창(武昌. 오늘날의 어저우 시 어청 구), 강릉(江陵), 교지(交趾), 오군(吳郡), 회계, 장사 등이 주요 도시.
얼핏 보면 오나라의 영토 크기가 위나라보다 엇비슷해 보이지만 실상은 좀 다르다. 지배 영역 중 남방의 대부분은 인구가 거의 없거나 오의 통제력이 그리 크지 않은 이민족의 영역이었다. 오나라의 실질적 지배 영역은 위나라 또는 촉나라 국경지대와 건업 주변을 제외하고는 전무하다시피 한 수준이라고 보면 정확하다.
양주 지방에 해당되는 강남은 동진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대로 개발되기 시작했고, 형주도 무릉 쪽은 이민족들 투성이에다가 교주 쪽도 손권 사후에는 폭정으로 인해 막장이 된다. 실제로 오의 강역 수준은 위 지도만큼이 아니라, 동에서는 건업으로부터 서로는 이릉과 자귀에 이르는 장강 유역의 긴 띠의 형태로 보는 의견이 존재하고 양주 쪽은 장강 유역의 긴띠, 형주 쪽은 장사, 영릉, 계양 정도 까지로 보는 의견도 존재한다.
실제로 후한 시절 주를 따진다면 위나라는 9개 주 반, 촉나라는 익주 하나뿐인데 오나라는 2개주 반였다. 그나마도 교주는 13개 주 중에서 가장 후진 주인 데다가 인구도 거의 없는 수준이었고, 사실상 사섭 일가의 독립국이나 마찬가지라서 없는 것이나 같았다. 그나마 얻은 형주의 반도 전란의 중심에서 수십 년 동안 있었던지라 유표 때의 부유함은 찾기 힘들었다. 삼국전투기에서도 이 점을 지적해서 오의 근거지인 동오 지방만 보면 위나라의 청주 정도밖에 안 된다고 얘기하고 있다.
위나라도 서량 지방이나 태원으로 대표되는 병주에 대한 지배력은 약했다고 보여지며, 촉한도 사천 지방의 장강 또는 큰 강의 이남이 적지 않는 반란 및 이민족 거주 지역이라 실제로 지도에 표시된 것과는 달리 실 통치 영역이나 영토로 볼 수 있는 영역은 더 좁다고 볼 수 있다.
삼국 시대의 강남 지방은 개발이 거의 되지 않았는데 개발되기 시작한 건 손권 치세 중기, 그리고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서진이 캐발살나고 동진이 건국된 뒤 중원의 유민들이 대거 유입되기 시작한 남북조시대며, 강남이 강북을 앞지르기 시작한 건 남송때의 이야기.
세력은 촉보다 조금 나았다는 식으로 해설하는 경우가 많은데(ex. 위:오:촉=6:3:1을 주장한 미야자키 이치사다) 이는 사료상으로도 확인되는 인구에 따른 것이라 보통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한서 지리지(전한 시기, AD 2년 기준)에 따르면 형주(3,775,884명)+양주(3,027,598명)+교주(1,372,290명) : 익주(4,548,654명) 사이에는 약 2:1 정도의 차이가 성립하며 후한서 군국지(AD 140년 기준)링크에 따른다 해도 형주(6,315,952명)+양주(4,338,538명)+교주(1,114,444명) : 익주(7,242,028명) 사이에는 약 1.65:1 정도의 차이가 존재한다. 후한이 전한보다 지역에 대한 통제력 및 인구 파악 능력이 부족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호족의 세가 강한 편이었다.) 전한과 비슷한 2:1 정도의 인구비가 존재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차이다. 인구가 밀집된 형북 일대가 오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다고 해도 인구 피해는 촉한에도 존재함을 감안한다면 통상적으로 2:1, 아무리 적게 잡아도 1.5:1 정도의 인구 비례가 존재한다고 예측된다.
또한 촉이 망할 때 배송지가 주석으로 남긴 왕은의 촉기에 따르면 촉의 인구는 - 호(戶) 28만 / 남녀구(男女口) 94만 / 대갑장사(帶甲將士) 10만 2천 / 관리(吏) 4만 명 하여 약 인구 108만 2천 명에 병력 10만 2천 명, 오의 경우에는 손성의 진양추에 따르면 - 4개 주(州) / 43개 군(郡) / 313개 현(縣) / 호(戶) 52만 3천 / 관리(吏) 3만 2천 / 병(兵) 23만 / 남녀구(男女口) 230만 하여 약 인구 256만 2천 명에 병력 23만 명으로 오의 인구가 2배를 넘는다.
또한 통전 7권에 있는 내용에 따르면 아예 촉한은 건무 원년에 인구 90만 오나라는 230만으로 역시나 두 배가 넘는다. 이는 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전한&후한 시기 지역별 인구 비례와도 유사하다.
촉이나 위와 비교하자면 중앙의 통제력이 낮고, 지방 호족, 그중에서도 일종의 개발영주에 속하는 토호들의 힘이 강했다. 이 때문에 손권이 별로 영토 확장을 못했다는 설도 있다. <중국의 역사 - 위진남북조> 등 이시대의 강남 정권들을 다룬 서적들을 살펴보면 오의 국가 구조는 이러한 개발 영주들과 피란민으로 구축된 측근 세력들 간의 균형을 이루는 구조였다고 이야기된다.오나라가 조위와 촉한과 비교했을 때 보이는 불안 요소 세 가지- 내부 반란, 장수들의 충성심 부족, 관리 안 되는 황족들 오의 사성을 위시한 지방호족들이 꾸준히 오나라의 주축이었으며, 개국공신급이라고 할수 있는 정보, 한당, 반장같이 고향을 떠나 오나라에서 활약하게 된 자들은 본인이 죽고나면 그 일족이 정계에서 영 힘을 못 쓰는 걸 넘어, 언급 자체가 안될정도로 몰락하게 된다. 주유, 주치, 주태, 진무등등의 공신들의 일족조차도 언급이 거의 안된다. 오나라가 건국된 시점부터는, 오의 사성 중 육씨, 고씨, 주씨와, 장소의 일족인 장씨, 제갈근의 일족인 제갈씨, 전종의 일족인 전씨, 그리고 황족인 손씨가 아니면 아예 제대로 언급도 안 될 정도. 다양한 성씨의 인재가 넘쳐나는 위나라와 촉나라와 비교해보면 호족들의 세력이 매우 막강했고,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암투를 벌였다고 볼 수 있다.
어찌보면 아직 미개척지에 가까운 강남 일대를 기반으로 삼은 데서 유래한 숙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촉이나 위가 그래도 과거 400년간 중원을 군림한 한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지역을 기반으로 하였기에 잘 구축된 군현제를 기반으로 하는 탈봉건적 중앙 집권 국가였던 반면에 한무제시기에야 본격적으로 중국의 영역에 들어왔던 지역이 많았던 만큼 기반으로 하는 지방 호족 세력의 연립 정권인 오나라의 경우 상대적으로 중앙의 힘이 약하고 지방 호족들의 목소리가 클 수밖엔 없었던 셈이다.
이 때문에 오나라 장수들 열전보면 커리어에 이민족 토벌이 기본으로 들어갈 정도로 이민족도 많았고 개발되지 않은 땅이 많았으며 나라의 건국후에도 행정 구역 정비와 호족들을 관리하는데 역량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기본적으로 손오의 성립은 손책의 강동 정벌에서부터 시작인데 한미한 가문인 손가가 이 지역을 명분없이 무력으로 장악한 데다가 지역 명사들과도 마찰이 심했기 때문에 건국 이후 이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적당히 영천 호족들과 조씨 군벌 세력이 서로 간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결합하여 성장한 조위나 유언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호족들을 때려잡고 유장 시기 혼란을 지나 유비가 입촉한 이후 한실 부흥을 명분으로 호족들을 휘어잡고 중앙 정부가 확실한 권위를 잡은 촉한과 달리 기본적으로 황실의 영향력이 약했기 때문에 오의 사성 같은 대가문이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황실 구성원의 내분도 촉이나 위에 비해 이런 쪽으로는 말이 아예 나오지 않은 것과는 달리 손책이라는 강력한 구심점이 사라진 이후엔 오나라는 일부 세력이 지속적으로 이탈하는 등 홍역을 치루었고 이 때문에 손권은 친위 세력 구축에 많은 힘을 쏟고 황권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하지만 말년에 이궁의 변으로 본인 스스로가 황족 간의 난리를 조장한 격이 되어 버렸고 손오가 망할 때까지 이는 오나라 황실의 고질병 비슷한 게 되어버렸다.
위에 나타나는 인구 통계자료 이러한 사회 구조를 반영하는데, 사실 관리호(吏)는 고관대작 만이 아니라 서리, 아전 같은 '지방 행정 공무원'을 통괄한 것이다. 인구는 촉의 3배 가까이 되는데 관리의 숫자는 오히려 촉보다 적은 것이다. 당연히 국가 중앙 정부의 지배력이 약해지고, 호족들은 약한 통제력 때문에 할거할 수 있게 된다.
이게 화북 지방의 피란민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정부의 구성원들에게는 상당히 마음에 안들었던 모양. 사실 한(漢)나라 이래로 권위있는 왕권을 추구한 중국 정치인들의 입장에서 이런 분위기의 사회는 거의 '혐오스러운 무정부 지역', 일본 위진 남북조 개설서의 비유따나 총과 사막 대신 검과 밀림으로 배경을 옮긴 서부 개척 시대라 할 정도로 신천지나 다름 없었으며, 거기에 더해서 위에서 언급했듯, 손씨 정권 역시 유교적으로 만족스러운 명분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손책, 손권 시대에 오나라에 살던 명사(화흠 등)나 신하가 조조 측으로 이탈하는 경우도 흔히 있었고, 오나라의 장수가 위나라로 도주하는 경우도 종종 생겼으며 촉에 사신으로 다녀오면 촉빠가 되는 신하들이 많았다. 심지어 손권 사후에 손씨들이 난장판을 벌여서 국가가 막장이 되자 주적은 내부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촉에 밀서를 보내 적당한 때 길을 열어줄테니 군대를 끌고 와서 난리 평정에 도움을 달라고 요청을 한 적도 있었다.
아무래도 공적 기록이 많은 위서나 기록 자체는 많이 소실되었지만 그래도 진수가 원래 촉 빠의 신하였다는 데서 알 수 있듯 조정에서의 일을 많이 담은 촉서와는 달리 오서는 뭔가 기이한 일들을 많이 실어놓았는데, 그 덕분인지 읽다보면 왠지 모르게 역사가 아침 드라마 틱한 느낌을 받는다. 황후가 궁녀들에게 살해당하는 일까지 있었다(…).
칭제의 명분 자체도 그럴싸하지 못한 편. 오나라의 칭제 자체도 위나라가 한나라로부터 선양을 받았다는 것이나, 촉한이 한의 계승을 내세우는 것에 비하면 그럴 듯한 명분이 없었다. 위, 촉한 두 나라가 모두 칭제하자 자존심에 덩달아 칭제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손가(孫家) 3대의 군사 업적이 있긴 하지만
박물지에 따르면 예장군에는 일부다처제가 존재했으며, 여자들의 사회 활동이 활발했다고 한다. 박물지가 써진 시기를 보자면 오나라 때도 이런 풍속이 있었을 것이다.
예장군豫章郡의 사대부들은 많은 아내를 거느리고 산다. 그런데 그 부인들은 부끄러움도 모른 채 얼굴을 드러내고 시장에서 한 푼 까지도 다투며 돈을 벌어 그 남편의 수레, 말, 옷 등을 마련해주고 있다. 그 남편이 효렴으로 천거되어 다시 부잣집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도, 여자들이 모든 것을 공급하여 바친다. 먼저 들어온 아내들이 비록 몇년을 부지런히 하며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온 집안에 가득할 정도일지라도, 오히려 방출되어 자리를 뒷사람에게 피해준다.
6.1. 손오 정권의 경제사적 의의
중국 역사상 매우 중요시되는 강남 개발의 시작.
국가 구조는 뭔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고, 삼국지 자체만을 다룬 기록의 경우 아무래도 촉한에 밀리는 것이 사실이라 할 수 있는 오지만, 위진남북조의 사회 경제사 측면에서 본다면 오는 거의 위에 필적하는 비중으로 다뤄진다. 이는 중국 경제사 측면에서 엄청나게 중요시되는 강남 개발의 시작점을 오나라, 개중에서도 손권으로 잡고 있기 때문. 이 시기 오는 이민족을 몰아내고 지금의 강동 지역인 남방에서 한족이 지배하는 지역을 넓혔다. 당대의 오 지역은 아직 미개척지가 많아서 행정 구역을 쉽게 늘릴수 있었다.
특히 건업을 수도로 정한 일은 반드시 다뤄질 정도로 중요시된다. 손권이 수도로 정하기 전까진 도시 근처에도 미개척지가 존재할 정도로 별볼일 없던 지역이 손권이 수도로 정하고 오나라 시기에 집중적으로 개발되면서 이후 오랫동안 강남 지역 정권들의 수도로 사용될 정도로 발전하니 그럴 만도 하지만. 위진 남북조 시대에서 건업을 수도로 한 남조를 가리키는 표현인 육조시대의 선두로 오나라가 꼽힌다.
전한 시기 아주 강성한 제후왕이자 오초칠국의 난의 주동자였던 오왕 유비의 영지였던 오나라의 부유함(<사기> 오왕 비 열전에 따르면 구리와 소금이 많아 세금을 거두지 않았다고 한다.)을 생각하면 손권의 강남 개발 이전에도 강남은 개발이 많이 되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전한 시기 오나라는 생각처럼 넓은 지역은 아니었다. 대략 장강 하류 삼각지와 그 주변 지역 정도에 불과한데 그것도 다른 왕들에 비하면 아주 크고 강성한 것이었다.
물론 손오 정권 시절 강남 개발에는 아직 한계가 있었다. 춘추 전국시기 장강 유역인 형초, 오월 지역에 나라가 세워져 경제와 문화는 어느 정도 발전했으나 여전히 땅은 넓고 사람은 적어 생산력은 낮은 상태였다. 그래도 적어도 생계를 꾸리는 데 큰 곤란은 없어 토지 개간에 큰 압박감을 느끼지 않았다. 손오 시기에 북방의 선진 농업 기술이 강회 이남 지역에 전해지긴 했으나 아직은 이러한 혜택을 입은 지역은 넓디넓은 남방 지역의 일부일 뿐이며 그 나머지 지역은 여전히 낙후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삼국 시대만 하더라도 경지에 불을 질러 밭을 갈아 물을 끌어다 농사짓는 화전 경작 수준이었는데, 동진 시대에 들어서야 화북에서 난을 피해 대규모의 유이민이 이주해 북쪽의 생산 도구와 기술이 남방의 논 농사와 결합하게 된다.
따라서 영토를 개발하기엔 오나라는 영토에 비해 인구 부족에 시달릴수밖에 없었고 행정 장악력도 부족한 편이었다. 그래서 손권은 지방의 주요세족에게 행정력과 개발을 위임했고 그 결과, 사족에게 소속된 이들은 중앙 정부에 소속되지 않아 조세와 요역, 병역을 부담하지 않는 개인의 부곡(部曲)이 되어 호족 중심의 체제가 강화되었으며 과장해서 반란이 일년 열두달 일어났다. 인적 자원을 채우기 위한 어쩔수 없는 방편으로 손권의 인간 사냥이 이루어지기도 했고 이 때문에 대만까지 가서 대만 원주민들을 끌여들여 인구를 늘리려다 실패해서 목숨을 잃는 장수도 속출했다. 이는 동진 시기에 많은 유이민이 들어오면서 이런 인구 부족은 어느 정도 해결을 보게 된다.
6.2. 촉과의 경제 규모 비교
이렇게 연구가 되면서 불거진 문제가 위, 촉, 오 삼국의 경제력 순위. 과거에는 인구와 영토를 기준으로 해서 삼국의 경제력을 위 > 오 > 촉 순으로 평가했지만 본격적으로 연구가 진행되자 아직 저개발 상태의 장강 유역이 이미 500년간 개발이 되었고 토질도 비옥했던 사천 지방보다 어떻게 더 부유할 수 있냐는 주장을 하는 촉빠들도 있다.
그러나 오나라의 인구는 200만이 넘어서 100만에 불과했던 촉나라보다 두배나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인구가 곧 경제력이었으므로, 인구수로 보면 촉이 오보다 경제적으로 나았다는 주장은 말이 안 된다.
일단 장강 이남이 거의 개발되지 않았지만, 이에 반해 장강(양쯔강) 하류는 춘추 전국 시대부터 개발되었으며, 오나라가 장악한 형주 남부 지역(현재의 호남성지역) 하나만 가지고도 촉나라가 장악한 익주 전체의 면적과 맞먹기 때문에, 아무리 촉나라가 국가 운영을 탄탄히 해도 근본적인 규모의 차이 때문에 오나라를 능가하기는 힘들었다.
결과적으로 촉나라는 가장 약한 국력 때문에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멸망했다.
6.3. 둔전 제도
위의 경우 둔전이 군현 지역내에 있더라도 군현의 간섭을 받지 않았지만 손오는 둔전관이 군현을 다스리는 경우도 있었는데 258년 손휴가 내린 조서(既出限米,軍出又從)를 보면 둔전병은 따로이 조세(限米)를 납부해야했다. 이듬해 내린 조서에는 주군의 관원과 백성 그리고 둔전병들이 농사를 등지고 장삿꾼이 된 것은 과중한 세납 때문(由租入過重)이라고 했다.
6.4. 화폐, 상업
동탁이 화폐 제도를 말 그대로 개박살낸 이후, 중국 전토에서 인플레이션이 극심해지고 현물 거래제로 전환하게 된다.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 위에서 오수전을 다시 제대로 발행하고 촉에서 직백오수, 태평백전 등의 당백전을 발행했던 것처럼 오는 대천오백, 대천당천의 당백전들을 발행하였다. 그러나 화폐 경제를 되살리려 한 손권의 노력이 무색하게 사람들은 화폐보다는 실물 거래를 더 신뢰했고, 마치 훗날 한반도에서 일어날 일과 비슷하게 화폐 장려 계획은 실패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만들어진 동전들은 도자기를 만드는데 쓰인다.
한편 촉에서 만든 태평백전등이 오나라 일부 지역에서 유통되기도 했는데, 이 태평백전 역시 크기와 중량이 일정하지 않은 당백전 악화(惡貨)였으므로, 오나라 내에서 얼마나 유통되었는지는 많은 자료가 추가되어야 알 수 있겠지만, 이미 화폐 경제 자체가 박살난 상황에서 얼마나 영향을 주었을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다만 아예 유통이 안 된 동탁의 소전과 달리 촉한의 직백오수와 그것을 계승한 화폐들은 촉 내부에선 그럭저럭 성공적으로 유통되어, 비록 이전 시대에 비하면 악화였으나 이미 화폐 경제가 무너진 상황에서 그나마 신뢰가 가능했기에 촉한 경계와 인접한 일부 지역에서 유통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오나라 중앙 정부가 유통한 화폐가 아니었으므로 오나라 전체에 줄 수 있었던 영향은 크지는 않았을 터다.
6.5. 산출되던 물산
장강 일대는 예로부터 벼농사에 적합해 쌀이 많이 생산되어 식량이 풍족하였다. 또한 강과 바다에 인접해 있어서 각종 생선들도 많이 잡혔다. 진나라 말기의 명장 장한이 소부 직책을 맡고 있을 때 어업세를 거둔 지역 중 하나가 바로 회계로, 동오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다. 또한 국가에서 중요시 여기던 자원인 소금 또한 많이 산출되었다. 앞서 말한 사기에도 나왔듯 이 땅은 구리와 소금이 많은 땅이었고 전한 시기 오나라는 소금과 구리를 수출하며 '해염현'이라는 명칭을 가지는 현도 존재할 정도였으며 더군다나 202년에 주유가 "우리 땅은 소금과 동이 나와 부유하기 때문에 적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라고 주장할 정도로 소금은 풍족한 것이었다. 그 정도로 동오 지역은 개발은 덜 되어 있을지언정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하여 잠재성을 인정받은 지역이었다. 괜히 제갈량이 천하삼분지계를 논할 때 오나라가 지리를 얻었다고 평한 것이 아니다.
그외에 오나라는 기후 조건과 남방 교역 덕분에 진귀한 사치품을 다양하게 모을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말과 같이 부족한 자원들을 거래했다. 특히 교주는 오나라가 남방의 물품을 생산하거나 들여오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지니고 있었고, 이는 결국 사섭 사후 손권이 사씨 가문을 내치고 교지를 직할 통치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사씨 가문을 내친 것이 교주의 정치를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이 때문에 손오 멸망 때까지 교주 지역은 손오 정권에 저항하면서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7. 군사
군사적인 면에서는 세병제를 취했는데 군대가 사병화되어 통합된 지휘 체계가 없는 점이 큰 약점이었다. 이는 호족 연합체인 오의 국가 특성에서 기인하는데, 호족들 개인이 이끄는 군대를 모아서 오군으로 편성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오군의 지휘 체계 아래에 또 별개의 지휘 체계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방어전에서 꽤 뛰어난 성과를 거둔 반면, 외정을 나갔다하면 발리는 게 일이었다. 특히 통합된 지휘 체계를 요구하는 야전 능력이 심각하게 떨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죽을 쑨 다른 원인은 남중 평정 후 말을 어느 정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부족한 기병을 대신해 보병 전력을 강화하는 데 힘썼던 촉과 달리, 오는 이런 노력이 없었다는 것도 한 몫했다. 일본의 동양 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이런 손오의 체제를 일종의 일본의 개발 영주(사무라이와 다이묘의 전신격)와 유사한 체제로 보았다.
군사 지휘관들마저도 제멋대로이며 당시 기준으로 봐도 용맹함과는 별개로 규율은 상당히 엉망이었다고 볼 수 있을 정도. 감녕과 여몽이 다툰 일화에서 이러한 군부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감녕의 하인인 어린애가 여몽에게 도망쳐 있다가 감녕이 그 아이를 붙잡아 죽이자, 분노한 여몽은 군사를 몰아 감녕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말리자 감녕과 화해하였다는 일화인데, 어떻게 보면 서로의 그릇을 드러내는 훈훈한 일화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한 국가의 최고위급 장수들이 무슨 조직폭력배들처럼 사소한 다툼으로 자존심 싸움을 벌이고 원한을 품고 휘하 군을 함부로 동원해 전투를 벌이려다가 그만둔 엽기적인 모습이다. 게다가 이게 무슨 '막장'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라 '미담'으로 취급된다. 이런 고위급 인물들이 어린아이 하나 때문에 내전을 벌이며 서로 죽이려던 걸, '어머니의 중재로 참았다'고 자뭇 훈훈하게 기록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짓을 벌였던 여몽과 감녕마저도 오나라에서는 분명 매우 양식있고 비중이 높은 용장이라는 점이다(…).
그나마 손권이 오왕에 즉위한 뒤에는 보급 체계라도 통합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손권이 오왕 즉위하기 전까지는 아예 봉읍제라 하여 각자 땅 나눠주고 적절히 관원 임명하고 각자 무기 조달해서 군대 편성하는 체제였다.
당시 위는 문무에 이름있는 장수들을 대촉 전선에 배정하였는데 촉한과 위의 대결은 아무래도 옹, 양주의 유동적인 상황을 촉한이 적극적으로 이용해 이민족, 현지인 포섭으로 계속 영향력을 늘리려 하고 위가 군사, 행정력을 동원해 이를 방어하는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전선도 유동적이어서 서로 병력을 기동하는 일이 잦아 장수들이 활약을 주도 할 수 있었다. 반면 손오와 위의 싸움에선 지형의 문제로 서로 대치하는 국면이 주가 된 전선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는 위가 공격하게 만들어 승리를 얻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육손의 석정 전투와 제갈각의 동흥제 전투.
오나라의 굴욕으로 대표적인 게 료래래(遼來來)로 유명한 합비 공방전이지만, 최대의 굴욕은 촉 멸망 후에 익주나 먹자고 보협과 육항에게 병력 3만 명을 줘서 영안으로 쳐들어가게 했는데, 겨우 2천 명 이끌고 있는 나헌한테 쩔쩔 매다가 진에서 보낸 형주 자사 호열에게 발린 것.
한편 손오는 건국 과정에서 강남 토착민인 산월(山越)의 저항을 받았다. 산월은 고대 백월(百越)의 후예로 지금의 강소성, 안휘성, 복건성, 강서성 등지의 산악 지역에 분포했다. 이들은 농사뿐 아니라 무기 제조도 할 줄 알았으며 전투에 뛰어났다. 손오는 병력 충원과 재원 마련을 위해 산월이 비교적 많이 분포해 있던 지역에 반복적으로 출병했다. 제압한 산월인들 중 '강한 자는 병사로 삼고, 약한 자는 민호(民戶)로 편입'시키는 방침을 세워 전쟁과 생산에 활용했다.
8. 문화
양판소 수신기가 가장 사랑하는 나라다. 괴상한 사건이나 괴물은 높은 확률로 오나라에 나타난다 그래서인지 괴물들을 물리치는 사람들도 많다. 계낭을 죽인 제갈각이라거나, 팽후를 삶아먹은 육개라거나, 낙두민이라는 괴인을 하녀로 둔 주환이라거나 무릉만이나 산월 같은 이민족이나, 중원에서는 보기 어려운 특이한 동물을 접한 경험이 이러한 전설들을 낳게 했을 것이다.
종교 면에서는 손권의 치세에서 불교가 진흥되었으며, 손책의 기록으로 보아 우길을 숭배하는 태평도 계열의 도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손호가 세운 비석이 몇개 있는데 탁본이 남아있다. 과도기적이고 특이한 서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9. 해외 교류
고구려와 접촉하여 외교 관계를 맺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여담으로 한반도의 삼국만큼은 아니지만 일본과 어느 정도 교류가 있었으며, 애초에 삼국 시대 자체가 중국이 갈래갈래 찢어진 시기이다 보니 주변국들도 독립적인 움직임을 보이면서 줄타기를 많이 했다. 고구려가 그런 식으로 오나라와 위나라 사이에서 운을 띄우다가 관구검한테 한방 먹기도 했고, 베트남 지역의 사(士)씨 정권도 사섭의 통치 아래 위와 오 사이에서 외교전을 벌였다.
10. 기타
요절 징크스가 유명하며, 심지어 촉으로 양자가 되어서 와도 요절하는 나라. 요절이 많은 이유로는 원래 습기가 많은 지역이라 기생충이나 질병이 창궐하고, 북방에서 이주해온 한족은 강남 지방의 토착병에는 면역력이 없어서 급사하는 경우가 잦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오나라의 요절징크스 참조.
나관중이 삼국지연의를 지을 당시, 원 왕조를 몰아내고 천하를 통일한 명 왕조가 장강 이남, 건업(당시 금릉)을 중심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그나마 오나라의 비중이 높아지고, 오나라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늘어났다는 말도 있다.
삼국지 연의가 촉한이 주인공인데 여기서 오나라는 아군이 되었다가 적이 되었다가를 반복한다. 그렇지만 최후에는 제갈각의 의도에 의해 손이와 정봉 형제가 촉한의 멸망을 막기 위해 애쓰는 모습도 보인다.
과거에는 빠와 까가 툭하면 충돌했고 요즘에도 심심치 않게 충돌하는 촉과 위와 별다른 옹호론자들이 없는 게 특징이다.
본 삼국지와 삼국지가 울고있네의 저자 리동혁의 연구에 의하면 오는 멸망 직전 비축된 곡식은 280만 섬, 배는 5000여 척 정도였다고 한다. 덤으로 후궁은 5000여 명 정도됐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