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또래라면 빌 빅스비의 연약한 표정과 헐크의 먼가 슬픔에 젖은 듯한
야수의 눈을 다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자세한 내용까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왠일인지 TV 시리즈 두 얼굴의 사나이는
다소 우울하고 슬픈 느낌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안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입니다.
작품성과 대중성 사이의 줄타기를 가장 완벽하게 해내는 감독이랄까..
드라마에서 중국 무술 액션극을 넘어 헐리우드 블록 버스터까지,
중국 이민자 내부의 가족사에서 서양인들의 고전 문학, 미국인들의
내전의 아픔, 가족 분열의 참상까지..
그는 정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다방면의 것들에 손을 뻗치고,
솜씨 좋게 요리를 만들어 냅니다.
(그 비결은 그의 가장 큰 특기인 드라마, 내러티브의 강점일 겁니다.)
단 한번도 실패의 길을 걷지 않았고(물론 이번처럼 대규모의 대중적인
시도는 처음이었지만), 자신감을 잃지 않았던 그가 결국엔 헐리우드
블록 버스터에 당당하게 입성을 하게 되죠..
오우삼이 몇 편의 B급 액션을 연출하고 미국인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최대한 성의를 보인 후에 대규모 블록 버스터에 진입한 것과는 달리
이 사람은 처음부터 자기의 스타일을 고집했고, 결국은 승승장구하며
엘리트의 길을 걷 듯, 한 여름의 블록 버스터까지 모셔진 것입니다.
그 것도 미국인들이 엄청난 애착을 가지고 있는 코믹스의 영화화를
덥석 물어 버렸죠. 아마 그런 점이 미국 평론가들의 혹독한 비난
일색의 평가에 일조를 했을 겁니다.
결론적으로 블록 버스터로서의 헐크는 흥행 상으론 그다지 나쁘지
않았지만(미국, 영국, 프랑스에서 박스 오피스 1위, 독일에서 2위)
재미라는 측면에선 참혹한 평가를 받았습니다. (한국에선 흥행도 참패)
그렇다고 이 아저씨가 눈썹 하나 까딱하진 않겠지만, 어떻게 보면 아예
작정하고 이런 식으로 만든 것도 같네요..
영화는 정말 산만합니다.
낯선 다중화면 분할 기법이란 것도 그렇고, 초반의 익스트림 클로즈 업도
그렇고, 좀 더 효율적으로 좀 더 효과적으로 쓰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그에게 이런 효과는 만화적 느낌을 강조해 주는 것
이상으로 애착을 주지 않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후반부 헐크가 선보이는 액션들, 특수효과들..
이 낯선 장면들은 호기심 어린 자극을 주기도 하지만 그 많은 돈을 어디다
퍼 부은 거야 라는 생각이 들만큼 시원한 시퀀스가 도무지 보이지를 않습니다.
통통 튀는 녹색 비치 발리볼이니(이 거 보고 정말 웃었습니다. 정말
기가 막힌 표현 ^_^), 거대한 슈렉이니 하는 조소를 받는 헐크의 모습도
도무지 정이 가질 않지요. 인간적인 연민이 가득했던 두 얼굴의 사나이
에서의 헐크랑은 천지 차이가 나는..
줄거리는 어찌나 굴곡이 져 있는지 영화를 보는데, 눈보다 머리가 더 필요할
지경이구요.. 도무지 정연한 느낌이 들 지가 않는 것이 화면의 산만함보다
더 어지러울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싫었냐구요..?
그건 아닙니다.
여전히 그의 화면은 매끄럽고 매혹적이며, 뻔한 공식에서 벗어난 다채로움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언제나처럼 이야기의 중심은 가족, 혹은 아버지를 끼고 흘러가는데,
다만 그의 전가의 보도라 할 수 있는 드라마의 흐름이 이전 같은 단아함을
전혀 보여주지 못 했던 게 아쉽습니다.
머랄까 이번 작품은 몸에 안 맞는 옷을 억지로 입은 느낌일 뿐입니다.
다음엔 돈을 좀 효과적으로 쓰는 모습을 기대하며.. 그의 건투를 빕니다.
(제작비 1억 5천만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