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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아홉 달 전, 나는 40년 넘게 살던 종로구 옥인동을 떠나 은평구 불광동으로 이사를 했다. 새로 이사 가는 집에 이택희 화백의 작품을 한 점 걸고 싶었다. 그 바람을 이 화백에게 토로하자, 그는 그렇다면 집들이 선물로 그림을 ‘빌려주겠노라’ 약조했다. 나는 그가 이미 완성한 작품을 갖다 걸어도 상관없었으나, 그는 굳이 새로 그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집의 기운이나 분위기를 보아 거기에 맞는 그림을 새로 그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야 대환영이었다. 단지, 제값을 치르고 화백의 작품을 구입하는 것이 마땅하나, 내게는 그만한 여유 돈이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우선 임대차를 시행하기로 하였다. 일단 그의 작품을 빌려 걸고, 훗날 내게 돈이 생겼을 때 작품료를 지불한다는 구두 계약을 맺었다. 덧붙여, 그림의 임대료로, 딱히 정해진 금액을 없고, 임차인 조성태가 임대인 이택희 화백에게 수시로 술을 산다는 조건을 추가했다.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수년 전부터 둘이 술을 마시면 술값을 주로 내가 내왔던 터, 나로서는 있으나마나 한 조건이었다.
구두 계약을 체결한 후, 나는 일부러 우리 집 거실의 한 벽을 비워두고서 이제나저제나 이 화백의 그림이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 화백은 그림을 완성하기는커녕 지금껏 시작도 하지 않았다. 물론 나는 그 점에 대해 추호도 원망하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 얼마간의 게으름은 진지한 작가가 갖추어야 할 네 가지 덕목 가운데 하나이거니와, 이 화백이나 나나 딱히 급할 것이 없었다. 실은 언젠가 그의 작품이 우리 집 거실 벽에 걸리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실제로 거기 그림이 걸려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우리는 수시로 만나 술을 마셨고, 나는 자주 임대료를 냈다. 우리는 대체로 늘 즐거웠다.
한 달 전쯤, 이 화백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내게 임대할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대신 다른 그림을 갖다 걸도록 하라는 제안을 전했다. 홍대 서양화과를 같이 다닌 이 화백의 절친한 친구 가운데 영길이 형이라는 분이 있다. 그 형이 다니던 액자회사가 문을 닫게 되어 퇴직금 조로 회사에 있던 그림 여러 점을 가져다가 부암동 모처에 보관하고 있으니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가져다가 당분간 집에 걸어두라는 것이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을 복제한 포스터들로서, 포스터 자체보다는 ‘액자가 더 폼 나는’ 그림들이다. 나는 그 즉시 달려가 그림을 골라올 계획이었으나, 역시나 얼마간의 게으름을 실천하느라 차일피일 미루다가 한 달쯤 지난 시점, 그러니까 2009년 7월 19일 일요일 저녁에 김민경을 대동하여 부암동을 찾았다.
집에서 얌전히 쉬고 있던 후배 Y를 불러 사무실 문을 따고 들어갔다. 김민경의 자문을 구하여 그림 두 점을 골랐다. 니콜라 드 스타엘(Nicolas de Staël)의 “콘서트(Le Concert)”(아래 첫 번째 그림)와 소일레 일리-마이리(Soile Yli-Mayry)의 “불탄 지평선 I(Burned Horizon I)”이다.
Y를 시켜 부암동 사는 한 선배의 트럭을, 사용허가는 임의로 생략하고, 사무실 앞에 끌어다 놓고 그림을 실었다. Y를 계속 협박한 끝에 운전까지 시켜 집에 싣고 왔다. 그림을 날라다 준 Y는 부엌 식탁에 앉아 내가 내놓은 포도를 먹는 둥 마는 둥 하다 떠났다. 나는 그림 걸기 작업에 착수했다. “콘서트”는 거실 벽에 걸고, “불탄 지평선”은 침실 탁자에 세워두었다. 그 와중에 이택희 화백에게 전화가 왔다. 그때 마침 나는 거실 천장에 레일을 박고 있던 터, 대신 전화를 받은 민경이는 어서 오셔서 그림 위치를 잡아달라고 목청을 높인다. 나는 굳이 이 화백을 부를 필요까지야 있겠나 싶었으나 이 화백이 마다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림 걸기 작업을 끝낸 후에 이 화백이 당도했다. 그림 위치를 확인한 그는 제대로 걸었다며 만족해 한다. 거실에서 이 화백과 내가 담소를 나누던 중에 침실에서 화초 이파리에 쌓인 먼지를 닦던 민경이가 다시 목청을 높였다.
“오빠, 밖에 비와?”
“안 오네.”
“어, 근데 왜 빗소리가 나지?”
“선풍기 소리야. 비 안 와.”
그러나 재난은 이미 시작된 후였다, 미처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뿐.
밤 10시 반 경, 우리는 웃고 떠들며 왁자하게 집을 나섰다. 북한산 쪽두리봉에서 불어 내려오는 바람 소리가 요란하다. 이 화백과 김민경을 배웅하러 나간 참, 민경이를 버스 태워 보낸 후 이 화백에게 (아직 시작도 안 한) 작품 임대료를 한번 더 낼 속셈이었다. 구기동 가서 소라 안주에 소주나 한잔 하자는 내 제안에 이 화백에 난색을 표한다. 매우 보기 드문 현상이었다.
“내일 아침 일찍 재남이랑 걔 친구들 데리고 강릉 가야 돼.”
고등학교 1학년생 재남이는 이 화백의 딸로서, 딸 친구들과 놀러 간다는 사람을 붙잡을 수는 없는 노릇, 나는 그를 보내고 외로이 발길을 돌렸다. 집 앞에 왔을 때 소리가 들렸다. 물이 쏟아져 내리는 소리였다. 나는 몸을 날리다시피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현관 바로 오른편에 방이 하나 있다. 책이며 공구들, 기타(guitar), 등산 장비 따위를 보관하는 문간방으로서, 그 방 한 켠으로 세탁실이 붙어있다. 집에 들어와 문간방 물을 열려는데 안에서 뭔가가 저항한다. 문짝을 힘껏 밀어 여는 순간, 댐이 터지듯 다량의 물이 쏟아져 나오며 거실로 흘러 넘친다. 첨벙첨벙 방안으로 뛰어들어가 세탁실 문을 당긴다. 봇물이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그곳이 재난의 진원지였다. 세탁기 급수관과 수도꼭지를 연결한 부위가 수압을 견디지 못해 빠져버린 것이었다. 수도꼭지로부터 쏟아지는 물이 원기둥 모양의 폭포를 이루며 빠른 속도로 바닥에 고인 물의 수위를 높이는 중이었다. 텀벙텀벙 달려들어가 수돗물을 잠그고 세탁실 배수구를 막고 있던 세탁기 배수관을 뽑았다. 망연자실할 겨를 따위는 없다. 거실로 뛰쳐나갔다. 마침 그날 저녁, 세탁하려고 냉장고 옆에 개둔 이불을 거실 바닥에 유유히 흐르는 강물 위로 던졌다. 장롱을 뒤져 물깨나 빨아들일 것 같은 겨울 외투들을 닥치는 대로 꺼내왔다. 화장실 벽장에 넣어 둔 수건이며 부엌 바닥에 있던 걸레, 옷장 서랍에 든 티셔츠, 이사 올 때 쓰던 커다란 농업용 비닐봉투 따위 물건들을 쌓아 거실 바닥과 문지방에 제방을 만들었다. 어느 정도 물길을 잡은 후에 쓰레받기를 들고서 문간방으로 진격했다.
쓰레받기로 연신 물을 퍼 세탁실로 던졌다. 세탁실에 걸어둔 빨래들이 젖는다. 그 따위에 신경 쓸 틈이 없다. 방구석에서 월척이 튀어나온다 해도 무시할 판이었다. 퍼내고 퍼내도 수위는 좀처럼 줄지 않는다. 허리와 다리가 끊어질 듯 아프다. 가장 두려운 것은 거기 고인 물이 아랫집으로 침범하는 사태였다. 그 사태를 막기 위해 나는 이를 악물고 고전했다.
날이 샜다. 밤새 애쓴 끝에 수위가 현저히 낮아졌다. 물에 잠겼던 장판이 비로소 숨을 쉬기 시작한다. 책꽂이 아래 칸에 꽂힌 책들은 이미 목숨을 잃은 상태였으므로 구명활동을 포기했다. 캐비닛과 사물함에 들었던 물건들, 벽에 기대어 둔 기타 케이스들을 꺼내 침실이며 부엌 바닥, 탁자 위에 어지러이 늘어놓고 선풍기를 돌렸다. 물을 퍼내고 또 퍼냈지만, 문간방 장판지 밑으로 파고 들어간 물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방바닥을 밟으면 물침대처럼 밟은 자리가 푹푹 꺼졌다. 푹신푹신한 느낌이 그런대로 괜찮은데, 아랫집으로 물이 새면 어쩌나, 걱정은 떠나질 않는다. 문간방으로 가는 밸브만 열고 보일러를 켠 다음 온도를 최대로 높였다. 문 밖에 선풍기를 세워두었다. 월요일 아침, 오늘도 바깥에선 새들이 지저귄다. 너무나도 배가 고파 라면을 끓여 먹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거실 책상 컴퓨터 앞에 의자 둘 자리를 확보한 후 인터넷으로 제습기를 주문했다. 문간방에 들어가 물질을 더 해야 마땅했으나 피곤에 지친 몸을 가누지 못하여 침대에 기어들어가 곯아 떨어졌다.
월요일, 정오쯤 기상하여 대충 배를 채우고서 재난 수습을 이어갔다. 버릴 것은 버리고 닦을 것과 말릴 것은 닦고 말렸다. 보일러를 틀고 선풍기 강풍을 쏘인 덕에 장판 표면은 거의 말랐다. 그러나 그 아래로 들어간 물은 장판을 걷어내기 전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벽지가 물을 빨아올려 벽마다 해안선처럼 생긴 자국이 조금씩 위로 기어오른다. 나는 아침에 주문한 제습기가 어서 도착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차근차근 재난을 수습했다. 시간은 흐르고, 저녁이 찾아왔다. 혼자 할 일은 대충 끝났다. 장판을 걷으려면 방에 있는 가구를 모두 꺼내야 한다. 그 일을 혼자 하기에는 벅찼다. 나는 일을 중단하고 며칠 전 선물 받은 쑥국수를 삶았다. 삶은 국수를 물에 헹구어 볶은 고추장, 참기름, 식초, 조개젓, 깨소금 따위를 넣고 비벼 우적우적 씹어 삼켰다. 김치를 씹을 때마다 혀를 씹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였다. 컴퓨터 앞에 앉아 반주 CD를 구워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용산 현장에 8시까지 가야 한다. 추모 미사를 드린 후 범국민대회를 하는데, 거기 공연을 참가하기로 했다. 나는 지난 하루 나의 심신을 괴롭히던 사적인 재난을 잊으려 애썼다. 사적인 재난은 잠시 묻고 이제 공적인 사태에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일이 꼬인다. 숙대 입구에서 버스를 잘못 내린 탓에 한참을 걸어야 했다. 재난은 혼자 오지 않는다던 속담이 떠오른다. 공연 시간조차 맞추지 못할 것 같아 초조하다. 마침 현장 담당자에게서 문자가 왔다. 미사가 늦어지는 관계로 범국민대회가 예정보다 삼사 십분 가량 늦게 시작될 전망이란다. 하기야 늘 그렇다. 어쨌든 천만다행이다. 후배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물난리를 당하여 사정이 이러저러하니 다음 날 낮에 집에 와서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용산 현장에 도착했다. 골목 안 사거리, 대책위로 쓰는 카페 레아(Rhea)에서 노찾사 단원들과 집결했다. 미사가 끝난다. 사회자가 범국민대회 시작을 알린다. 다시금 마음 속에 분노가 끓어 오른다. 학살을 자행하고서도 사과 한 마디 없는 짐승들에게 욕지기가 난다. 사과는커녕 수사기록을 감추며 사태를 철저히 외면하는, 짐승만도 못한 것들에게 치가 떨린다. 아, 그런데 이상하다. 분노 외에도,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또 있다. 무엇일까? 현장에 백기완 선생이 오셨다. 범국민대회 첫 순서로 선생께서 발언을 하신다. 내 마음은 여전히 불편하다. 왜 이럴까? 왜 이러지? 그때 문득 반주 CD를 굽고 나서 확인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MR CD를 구워 재확인을 하지 못하고 후다닥 그냥 들고 나왔던 것이다. 단원들에게 물었다. “혹은 MR CD 따고 갖고 있는 사람 없어?”
없다. 내가 가져간 한 장뿐이다. 그 즉시 음향 엔지니어에게 확인을 요청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변명에 지나지 않겠으나, 당시 내 마음이 너무 부산했기 때문이다.
백기완 선생의 연설이 이어진다. 망나니, 개망나니, 쥐망나니에 대한 ‘과학적’ 고찰을 전개하시는 중이다. 그 즈음 나는 깨달았다,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마음 속 정체를. ‘깨달았다’기 보다는 ‘느꼈다’고 표현해야 하리라. 나는 씁쓸히 느꼈다. ‘이곳에서 자행된 학살에 맞서는 지금 우리의 방식이 어찌하여 여전히 과거적인가?’
순간 나는 1991년 시점으로 시간여행으로 떠나온 듯한 기분에 빠졌다. 열 한 명의 열사가 목숨을 던지며 체제에 저항하던 이른바 ‘분신 정국’이 떠오른다. 그때 정신 없이 쫓아 다니던 추모집회에서도 나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구호를 외쳤고, 지금 부르는 노래를 그때도 불렀다. 18년이라는 그 무색한 시간에 내 마음이 슬프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추모문화제에 참가하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다. 여기서 하는 추모문화제와 저기서 열리는 추모문화제가 약간의 틀만 다를 뿐 대동소이하게 과거적인 것만 같은 느낌, 그 때문에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지친 몸보다 마음이 더 피곤했었다.
백기완 선생의 연설이 끝난다. 사회자 소개 없이 노찾사가 무대에 오른다. '동지를 위하여'를 부른 후 고개 숙여 인사를 올린다. 내가 입을 연다. “2년 전쯤, 사진작가 김시우 선생에게서 들은 말이 생각납니다.”
또 꼬인다. 김시우가 아니라 이시우다. 나중에서야 기억났다. 말을 뱉은 그 순간에는 기억나지 않았으니 정정도 하지 못했다. 나는 말을 이었다. “’사람 몸의 중심이 어디 일까요? 어떤 이는 심장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뇌라고도 합니다. 저는 아픈 곳이 몸의 중심이라 생각합니다. 아픈 곳이 있으면 온 신경이 거기 쓰이니까요. 마찬가지로, 세상의 중심은 바로 아픈 곳입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세상의 중심에 아프게 서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는 가슴 아픈 역사의 비극으로 영원히 기록될 것입니다. 반면, 이명박 정부는 우리 역사의 해프닝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아니,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광야에서’ 큰 목소리로 함께 불러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재앙이 닥쳤다. 내 발언이 끝난 후, ‘그날이 오면’이 아니라 ‘광야에서’ 전주가 나오는 것이다. 가뜩이나 복잡한 마음이 노래를 시작하며 한결 더 복잡해졌다. 왜 2번 트랙을 안 틀고 3번을 틀지? 순서대로 가면 된다고 미리 얘기를 했는데, 왜 3번으로 건너 뛴 걸까? 집회가 예정보다 많이 늦어졌기 때문인가? 이미 이렇게 된 일, 할 수 없지—노래를 부르는 동안 이런 생각들이 널을 뛰었다. 나는 상황 수습을 포기했다. ‘광야에서’를 부른 후 무대에서 내려간다는 결정을 이미 내려버린 것이다.
‘광야에서’가 끝났다. 난 관객을 향해 허리를 구부려 작별 인사를 한 후 마이크를 바닥에 놓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런 나를 지켜보며 엉거주춤 서 있던 단원들도 멍한 표정으로 하나 둘 무대에서 내려온다. 관객들 사이에 일순 싸한 분위기가 감돈다. 힘 없이 ‘한 번 더’를 청하는 소리가 들린다. 박수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잠잠하다. 나는 음향 엔지니어에게 왜 3번으로 건너 뛰었느냐고 따진다. 그 역시 어리둥절하다. 공연 진행을 담당한 분도 옆에 서서 어쩔 줄을 모른다. 나는 “이미 이렇게 된 거, 할 수 없지요.”라고 내뱉고 현장을 떠난다. 숨을 거칠게 쉬며 버스정류장을 향해 걷는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다, 내가 반주 CD를 잘못 구워 왔음을.
그제서야 모든 것이 명백했다. CD를 구울 때 2번과 3번 트랙 순서가 바뀐 것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지난 5년간 줄잡아 수백 번도 넘게 해 오던 일에 그날따라 실수를 범하고 말았던 것이다. 음향 엔지니어는 내 말에 따라 순서대로 틀었을 뿐이고, 나는 나만의 오해에 빠져 오판을 내렸다. 버스정류장에 이르러 공연섭외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의 실수를 시인하고, 죄송함을 전하고 용서를 구했다. 같이 무대에 올랐던 노찾사 단원들에게서 전화와 문자가 빗발친다, 버스에 올라 이동하는 동안에도. 평소에 웬만해선 화를 내지 않던 선배까지 노발대발 화를 낸다. 쥐구멍에나 찾아 들어가고 싶다. 단원들에게 문자를 돌렸다. ‘집에 물난리 맞은 탓에 내 제정신이 아닌가 봅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날 저녁에 삼선교에서 동아리 모임이 있었는데, 용산 공연 때문에 모임에는 못 가고 뒤늦게 뒤풀이에 합류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 물난리 사태를 후속 관리해야 했건만,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 단 한번도 모임에 나가지 못해 그날은 얼굴 도장이라도 찍어야 했다. 잠깐 들렀다 일찍 나올 작정이었으나, 막상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그게 안 된다. 참담하고 괴로운 속에 소주를 들이붓는다. 주변이 시끄럽기도 하거니와 마음이 무겁고 답답한 탓에 나의 언성이 자꾸 높아진다. 대충 하고 집에 가야지, 내 이러다 또 사고 치지, 하면서도 3차까지 따라갔다가 결국 마무리 사고를 치고 말았다. “저는 오늘 부로 동아리에서 탈퇴하겠습니다. 이제 저한테는 모임 일시 통보 안 하셔도 됩니다.”
앞에 앉은 선배가 어이 없는 표정으로 묻는다. “너 아까 노찾사 그만두는 한이 있어도 앞으로는 사진 모임에는 안 빠지겠다며? 여름 MT는 날짜가 언제든 무조건 같이 간다며?”
내가 해롱해롱 대꾸한다. “그건 다 거짓말이었어.”
잠시 후 나는 간다는 얘기도 없이 술집을 빠져 나왔다. 자정께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던 비는 이제 그쳤다. 택시에 올랐다. 기사님한테 북악산길로 올라가자고 했더니 “그리 올라가면 한참 돌아가는 길인데 왜 하필?”이라며 의아해 한다. 제일 좋아하는 길이라 드라이브 삼아 간다며 나는 고집을 부렸다. 기사가 차를 가파른 언덕길로 돌린다. 내가 길 안내를 맡는다. 성북동 골프연습장 삼거리에서 길안내를 잘못한 탓에 성북동 길로 한참을 달리다 되돌아왔다. 비로소 북악산길, 택시는 꼬불꼬불 텅 빈 새벽 길을 달린다. 물기에 젖은 아스팔트 위에 가로등과 헤드라이트 불빛이 반짝인다. 북악산 꼭대기 팔각정을 지날 때 내가 갑자기 차를 세운다. “기사님, 여기서 내려 주세요.”
기사가 당황히 묻는다. “예? 여기서요?”
“예. 걸어 내려갈래요.”
차가 선다. 기사는 산 아래 큰길까지 빈 차를 몰아야 한다. 그것을 보상하려면 미터에 찍힌 택시비에 팁을 얹어 주었어야 하는데, 그랬는지 말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택시는 떠나고, 나는 터덜터덜 아무도 없는 산길을 걸었다. 몇 년 전에 종로구청에서 북악산 산림탐방로를 만들었다. 북악산 스카이웨이와 나란히 산길을 내고 도로 쪽으로 낮은 펜스를 친 산책로로서, 부암동과 팔각정, 성북동을 연결한다. 옥인동 살던 시절, 조깅코스 삼아 이삼 일 걸러 한 번 꼴로 낮이나 밤이나 수도 없이 오가던 길이라 낯설거나 무섭지는 않다. 물에 젖은 낮은 나뭇잎들이 머리를 스치는 기분이 좋다. 물기 먹은 흙을 밟는 내 발자국 소리가 바삭바삭 듣기 좋다. 나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비틀비틀 산길을 걸었다.
용산에서 삼선교로 가던 버스 안에서 한 선배에게서 답 문자를 받았었다. ‘비가 많이 오긴 했구나. 새 건물인데도 물난리가 나다니.’
내가 다시 문자를 보냈다. ‘장마랑은 아무 상관없고, 외출한 사이에 세탁기랑 수도 연결부가 깨졌다오.’
답 문자가 다시 왔다. ‘귀신이 안 놀아줘서 해코지 하는가 봐. 가끔 놀아주렴.’
작년 가을에 이사를 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서 귀신을 만난 일이 있었다. 그날도 술을 꽤 많이 마시고 새벽에 귀가해 부엌 탁자에 앉았을 때였다. 거실 창을 통해 여자가 하나 들어와서는 내 등뒤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뭐 더 필요하신 거 없으세요?”
나는 놀란 나머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
나의 명령에 따라 귀신은 꽁무니를 뺐다. 그로부터 한 일주일쯤 지난 날 밤, 그 친구를 그런 식으로 쫓아버린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귀신이라도 내 집에 찾아온 손님인데 너무 매몰차게 대한 듯하여 사과하고 싶었다. 혹시 부르면 진짜 오지 않을까 싶어 소리 내어 불러보았다. “귀신아, 저번에는 미안했다. 내 말 들리면 다시 와 보거라.”
그랬더니 진짜로 왔기에 부엌 탁자에 앉히고서 일단 사과를 했다. 자기는 괜찮단다. 내가 물었다. “어쨌거나 저번에 날 찾아온 이유는 뭐야? 뭐 원하는 게 있어?”
잠시 망설이던 그 친구는 자기를 한 번만 안아 달란다. 해서 안아 주고 나서 또 물었다. “또 뭐 해줄 건 없고?”
밖에 자기 친구들이 있는데 다들 배가 고프니 밥이나 좀 달란다. 나는 그러마 약속하고 그 친구를 보냈다. 거실과 부엌에 불을 켰다. 해 둔 밥이 없으니 일단 급한 대로 쌀자루에서 컵 한 가득 쌀을 퍼냈다. 집 옆 공터에 누가 쓰다가 버리고 간 작은 폐 가건물이 하나 있는데, 나는 그리로 난 창가에 쌀 담은 컵을 내놓았다. 며칠 거기 두었던 쌀을 나중에는 폐가 지붕에 뿌렸다.
그렇게 귀신을 만난 두 번 다 꽤 취해 있었으므로 이것이 절대적인 사실이라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나눈 대화와 내가 그를 안아 줄 때 분명히 느낀 몸의 감각을 아직도 나는 기억한다. 따라서 그것이 단지 환상이었을 뿐이라 단정하지도 못한다. 나중에 민경이에게 이 사실을 전했더니 눈을 똥그랗게 뜨고서 앞으로는 절대로 그 친구를 부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자꾸 놀아주면 눌러앉아 들러붙을 수도 있단다. 그 말에 나도 걱정이 되어 다시는 그 친구를 부르지 않았다. 단지, 아주 가끔 그 친구가 왔음을 느낄 때가 있긴 했는데 그 때마다 그냥 무시함으로써 거리를 유지해 왔다.
그 친구를 두 번째 만나던 날, 그를 보내기 전에 내가 물었었다. “그나저나 너희도 이름이 있어?”
그가 대답했다. “다 지나간 일인데요 뭐.”
그 말에 난 그저 속으로 생각했다. ‘다 지나간 일이라, 지나간 일……그럼 이름이 ‘과거’라는 말이냐?’
북악산 산책로 중턱에 이르면 작은 봉우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산길이 도로에서 잠시 멀어지는 구간이 있다. 계단을 올라 봉우리 꼭대기를 지날 수도 있고, 봉우리 오른쪽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 오른편 아래에 ‘뒷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낮에 그곳을 지나다 내려다보면 마을 높은 데 누가 별장으로 쓸 양으로 거창하게 지어 놓은 삼층집도 있는가 하면, 마을 언덕 중턱에는 옛날 여는 시골 집처럼 굴뚝을 끌어안고 낮게 웅크린 집들이 옹기종기 널렸다. 아직도 마을 곳곳에는 채소를 키우는 밭이 있다. 몇 년 전에는 염소들이 돌아다니는 광경을 보기도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는다.
산책로를 내려오다가 그 작은 봉우리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뒷골 주민들이 주차장으로 쓰기도 하고, 때로는 아베크 족이 심야데이트 장소로 쓰기도 하는 꽤 널찍한 공터가 나온다. 북악산길은 전 구간에 가로등이 촘촘해 밤에도 어둡지 않지만, 봉우리를 돌아서 주차장 공터까지 나오는 길은 가로동이 드물어 어둡다. 그날 밤 나는 계단을 오르기 싫어 공터 쪽으로 에둘러갔다. 주변이 으슥하다. 나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 뭔가가 내 앞으로 다가온다. 정체를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사람이었다.
“허허, 놀라셨군요. 죄송합니다.”
그가 걸음을 멈추고 내게 말을 건넨다. 어둠이 눈에 익자 그의 모습도 들어온다.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다. 대님을 맨 짙은 색 개량한복 바지에 흰색 티셔츠 차림이고 몸이 바짝 말랐다. 뭐 하는 놈인데 이 시간에 산에 다니고 그런담,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내가 남 탓 할 처지가 아니다. 늦추었던 걸음의 속도를 높이며 나도 한 마디 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그가 대답한다. “아니에요. 그나저나 이거 한번 보실래요.”
그가 내민 손에 A4 종이가 한 장 들렸다. 그가 덧붙인다. “한 번 읽어 보세요. 건강 관리 하시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이른바 전단(傳單)이다.
“아, 예.” 나는 전단을 받아 한번 들여다보고는 걸음을 옮기며 대충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청년과 나는 그렇게 스쳤다. 문득 청년을 어디선가 한번쯤 본적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생각을 지우고 발길을 재촉했다.
부암동 자하문 앞길에 내려와 택시를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택시는커녕 개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아 깊이 적막했다. 부암동 주민자치센터로 내려가 정문 앞 벤치에 앉아서 콜택시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현 위치를 일러주자 곧 연락하겠단다.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을 때 아까 청년한테 받은 종이가 손에 잡혀 다시 펼쳐 보았다. 기 훈련을 통한 건강 관리법을 소개하는 전단이다. 대충 보기에도 내용이 조악하고 진부하여 더 볼 것이 없었다. 뒷면을 보았다. 어라, 원래는 아무 것도 없는 빈 쪽인데 누군가 친필로 정성스럽게 글을 써 놓았다. 내용은 이러하다.
마지막 떠나는 길에 큰 불편을 드려서 뒤늦게 송구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었습니다. 집에 새로 오신 붉은 얼굴 손님이 너무 두렵고 어려워서 견디지를 못하였습니다. 무섭고 화가 나서 저도 모르게 공연한 폐를 끼쳤습니다. 심려가 크신 것 같아 마음 많이 아파했습니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동안 따뜻하게 대해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이제 다시는 찾아 뵙지 못하겠지요. 임 곁에 머무는 동안 길고 길었던 마음의 원이 크게 녹았습니다. 제게는 그 날들이 제가 이 땅에서 맛보는 마지막 복락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복된 날들을 뒤로하고 돌아서는 마음에 슬픔이 가득합니다. 혹시나 훗날 다시 뵈올 그날까지 건강히 지내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감사합니다.
나는 전단을 손에 쥐고 꽤나 오래 그곳에 앉아있었다. 담배를 두 개피 피웠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적막한 새벽, 가로등 불빛으로 빨려 올라가는 담배연기가 무척이나 예쁘고 정갈했다. 세 대째 담배를 꺼내려는데 문자가 왔다. 그리고 갈만한 택시가 없어 죄송하단다. 나는 체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하문 터널 입구로 내려가면 빈 택시가 지나갈 것이다.
집에 들어와 거실 불을 켰다. 니콜라 드 스타엘의 “콘서트”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한결 화사하긴 한데, 집안 분위기가 왠지 좀 쓸쓸한 것 같기도 하다. 귀신들이 그림이나 글씨를 싫어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다. 저 그림이 그토록 무서웠을까?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장마에 장대비가 쏟아져도 멀쩡하던 집에 수돗물로 물난리를 일으키다니, 장난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그러면서도 마음 한 켠에 서운함이 감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 우리는 서로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는 존재인고로, 각자의 길을 가야 하리라. 시원한 일이다. 이미 지나간 일, ‘과거’는 떠났다.
재난이 발생한 지 이틀이 지났다. 화요일인 오늘 낮에도 재난 수습 활동을 계속 이어갔다. 천만다행으로 아랫집에서 잠잠하다. 작년에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방수 하나는 제대로 한 모양이다. 오후에 제습기가 도착했다. 문간방 안에 들여보내 창문을 죄 닫고 가동을 개시했다. 장판에 올랐던 부기가 차츰 가라앉기는 하는데, 바람처럼 신속하게 습기를 거두어가진 않는다.
오후 늦게 현이 녀석과 그의 처가 오토바이를 몰고 나타났다. 그들 부부의 도움을 얻어 방안에 있던 가구와 집기를 모두 거실로 꺼낸 후 마침내 장판을 제치고 고름을 닦듯 물을 닦아냈다. 현이는 취기를 껴안고서 하루 종일 재난 수습 탓에 피곤한 나를 옆으로 밀치고서 몸소 방안으로 들어가 죽은 사람 염하듯 정성스레 방바닥을 닦고 또 닦았다. 일 끝내고 집 앞 식당 '통나무집'에 가 그들과 더불어 옻닭을 먹으면서 종일 잊었던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다. 잊을 만하면 정구지 바구니 들고 나타나 상상 밖의 발언으로 허를 찌르던 명희 언니도 큰 도움이 되었다.
저녁 먹고 들어와 거실에 너절한 책과 잡동사니, 책꽂이 따위를 피해 다니며 재난 수습 뒤처리를 계속했다. 재난의 여파가 이 정도에 그쳐 그나마 다행이다. 오히려 잘 된 측면도 있었다. 그 전부터 문간방 가구 배치를 다시 하려고 마음 먹었으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던 나날이 여러 달인데, 물난리 덕분에 방에 있던 가구 두 개를 마침내 다른 방으로 옮겼다. 또, 책꽂이 맨 아래칸에 있던 책들은 안 그래도 이제는 쓸모 없는 것들인지라 언제 날 잡아 다 처분할 생각이었는데 마침 이 참에 아무 거리낌없이 내다버렸다.
한동안 집 안팎을 분주히 오가다 일손을 놓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쓰기 시작한 지 꽤 시간이 지났다. 시나브로 새벽이 당도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여 자판을 두드리는데, 지금 막 뒤통수 쪽에서 우당탕 요란한 소리가 난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름 큰 재난과 재앙을 겪은 터라 이제는 웬만하면 별로 놀라지도 않는다. 천천히 의자를 돌려 뒤를 보니 그제 벽에 걸었던 스타엘의 “콘서트” 액자가 저 혼자 떨어져 소파 뒤로 들어가 버렸다. 다가가 살펴보니 천장에 밖은 레일에 연결한 철사가 끊어졌다. 철사 두 가닥이 액자의 무게를 견디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액자를 꺼냈다. 다행히 멀쩡하다. 액자는 그냥 소파에 세워두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다. 내일 철물점에 가서 액자 걸이 철사를 넉넉히 사와야겠다. 그러다가 문득 손길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어제 입었던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없다. 너절한 거실 책상 위, 부엌 식탁을 위를 뒤졌다. 역시 없다. 어제 밤 청년에게 받은 전단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택시 기다리던 벤치에 두고 왔는지, 택시에 두고 내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거실과 부엌을 돌아다니다 단념하고 화장실에 들어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담배를 다 피우고서도 한참을 서서 거울을 바라보다가 수건에 물을 묻혀 거울을 깨끗하게 닦는다. 집게손가락에 물을 묻혀 말끔해진 거울 위에 쓴다. ‘과거는 가지 않았다.’
이내 물기가 마르면 거울에 쓴 글씨는 보이지 않겠지만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면 거울에 수증기가 묻어 물로 쓴 자국이 드러나리라. ’과거는 가지 않았다.’
그렇다. 과거는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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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길어서 죄송합니다~~─,.─;
좀 쉬었다 읽을게~반절 정도 읽었다~ㅋ
뭐라 할 말이 없다..부디 잘 지내라..
앞부분 읽다 고민했다 ... 다음에 계속 읽기로 했다 .
끝까지 읽었습니다. 어떤 소설보다도 재미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