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서예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小石
보리피리
한하운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 ㄹ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인 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 ㄹ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 ㄹ닐니리.
귀 천 (歸天)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실 내
김윤성
어디로 向을 한 시간인가
거기 계절도 없이
스스로 한 개의 질서와 생명과
모습을 이루었으니.
-의자에서 일어나
빛나는 눈동자를 가지면
내 가슴 무한한 가능을 품고
창이 열린다.
바 위
- 유치환 -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님의 침묵
- 한용운 -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청 포 도
- 이육사 -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노천명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 놓고
밤이면 실컷 볕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오.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짓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오
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 -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 김영랑 -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 날빛이 빤질한
은결을 돋우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자 화 상
- 윤동주 -
산모퉁이를 돌아 논 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 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 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며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낙 화
- 이형기 -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아롱아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아침
정현종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있는 건 오로지
새날
풋기운!
운명은 혹시
저녁이나 밤에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올는지 모르겠으나,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바람에도 길이 있다
천상병
바람에도 길이 있다.........
.
강하게 때론 약하게
함부로 부는 바람인 줄 알아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
보이지 않는 길을
바람은 용케 찾아간다
바람길은 사통팔달(四通八達)이다.
.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가는데
바람은 바람길을 간다.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그대 있음에
- 김 남 조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내 마음에 자라거늘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
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
사는 것의 외롭고 고단함
그대 있음에
삶의 뜻을 배우니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논 개
- 변영로 -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울 릉 도
유 치 환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금수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 있기에
동해 쪽빛 바람에
항시 사념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지나 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의 사직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 올 적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완화삼(玩花衫)
-조지훈
차운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리(七百里)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나그네
- 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 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 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새
- 박남수 -
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體溫)을 나누어 가진다.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嬌態)로
사랑을 가식(假飾)하지 않는다.
---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傷)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고사 I
조 지 훈
목어(木魚)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 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 만리(西域萬里) 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산 유 화
- 김소월 -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山에
山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이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너를 위하여
김남조
나의 밤 기도는
길고
한 가지 말만 되풀이한다.
가만히 눈 뜨는 건
믿을 수 없을 만치의
축원.
갓 피어 난 빛으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쓸쓸히 검은 머리
풀고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 본
너그러운 사랑.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나의 사람아.
눈이 내리는
먼 하늘에
달무리 보듯 너를 본다.
오직 너를 위하여
모든 것에 이름이 있고
기쁨이 있단다.
나의 사람아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정현종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어디 나를 놓고 오지 못하고
이 고생이구나
나를 떠나면
두루 하늘이고
사랑이고
자유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