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공동설
김성민
중환자실에 누워 있으면 우주를 들이마시는 기분이 들어 천정은 매일 환하고 사람만 사멸하거든 침묵이 아무리 허공을 멸균해도 형광등은 플라스마 비말을 펄펄 흘리며 온 병실을 오염시켰지 누구도 이 전이에 대해 항의하지 않았어 빛은 입자이면서 파장이니까, 어쩌면 빛과 사람은 같은 패턴으로 생존해왔는지도 몰라 자기가 무슨 상태인지도 확신할 수 없어서 평생을 깜박거리지
환자들에게 천체망원경이 지급되면 좋겠어 너무 오래 누워 있으니 중력이 뭉쳐서 삶의 뒷면까지 관측 가능할 것 같은 기분이거든 우주는 원내 감염이 심각한 병실일 뿐이지 어떤 진통제를 투여해야만 번식하는 억겁을 무한정 받아내는 숙주가 되는 건지
45억 년 동안 전신 마비에 걸린 지구에게 마비는 곧 정신이었지 우주는 육체를 계속 돌려주었고 낮의 감각이 밤까지 잠열을 쑤셔 박았지 그저 뱃속으로 침강하는 지진파를 한 음절씩 곱씹으면서 머리털까지 나부끼는 자전을 느끼며 의식의 명암이 퇴적될 때까지
우주를 골라 태어나는 천체는 없지 살을 오래 멈추고 겪는 죽음이 그럴 거야 속옷 밑에서 마비의 진물이 흘러나오면 그때 이런 질문을 하게 돼
지구의 속살도 온통 녹아있나요?
방 탈출 게임
아가미를 움츠리며 게가 쪽방에 살을 넣어요
아무리 말려 비틀어도 개폐되지 않는 외골격 고독들
이 밀폐를 탈출하기 위해선 겉부터 개봉해야 하죠
갑각에 입주한 삶은 노환과 평수를 짜 맞추지 못해요
내부가 외부로부터 흠집나요
웃자란 그늘이 쩍쩍 벗겨지는 방
인기척에 놀란 게들 화들짝 움직임을 감춰요
등판 밑의 응달이 불면으로 넓어져요
방의 모든 영역이 검게 잠겨요
게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생애를 탈출했는가, 같은 질문을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적막과 체취로 가득한 방을 허우적거려요
깜깜하면 육신은 똑같죠
게는 단단했다가 물컹해지며 죽어요
제 흠집에 이불을 끌어 바르는 손놀림이
열 개의 부속지를 뚝뚝 꺾어요
이번에는 단단해질 수 있을까요
등딱지에 올라타는 광택들 혼탁해지고
오래된 속살이 밤새 생사를 탈피해요
열 개의 다리는 없고
여러 개의 관절만 분절된 노년
옆걸음만 부축하며 곁눈으로 걷는 생명들
껍데기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지 모를 입맛을 찾아
바닥을 긁어요
절박을 짊어지고 시와 인간,
세계의 무게를 내려놓지 않겠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빈방에서 시를 쓰며 영혼의 공복을 달랜 시간이 길었습니다. 한때는 사람이 무서웠습니다. 타인의 내밀을 발굴하는 데 익숙하지 못해 세계와 오차를 겪은 적이 많았습니다. 경제적 우세종으로 살 수 없는 삶을 치르며 다시는 시를 쓰지 않겠다 낙담한 시절도 깊었습니다.
병원 입원비 청구 문자, 체납액 독촉 전화만 가득하던 일상 속에서 당선 소식을 들었습니다. 햇빛을 한 번 바라보고, 거울 속 제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있음을 들이밀던 공허한 눈부처가, 오래 묵은 울음의 장력을 동공 속에서 풀어주었습니다.
지난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된 날, 제가 사는 지역에서는 일시에 마을 회관이 개방되었습니다. 어르신들은 다시 간격을 좁혔고, 서로의 등을 긁어줄 권리를 돌려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많은 등이 세상을 등진 후였습니다. 그렇게 전해지지 못한 이야기들이 후략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시를 다시 쓰게 된 이유입니다.
죽는 것보다 무서운 것이 혼자 겪는 삶이었다고 쓸쓸히 말씀하던 주름진 눈매를, 응급실에 누워 생사를 처방받는 이들의 온기를, 도로에 버려진 유기 동물의 갈 곳 모를 발버둥을, 전쟁이 포탄으로 뭉개버린 몸서리를, 인간이 망쳐버린 것들을 인간이 재건해나가는 의지를 채록하겠습니다. 끝끝내 남은 것들을 표기하겠습니다. 시의 표의는 유기된 것들이 내뱉은 마지막 표음으로부터 후속하리라 믿습니다.
부족하고 허점 많은 저를 시인으로 호명해주신 계간 『시와산문』 심사위원 나희덕 선생님과 황정산 선생님, 장병환 이사장님께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인생의 편차를 함께 견뎌준 내 영혼의 손잡이 이선영에게 여생의 애정을 헌신하겠습니다.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 시와 삶을 격려하고 지지해준 박신우, 제 글의 내력을 다독여주신 차진명 선생님, 우리 글쓰기 모임 「유난」 회원들 고맙습니다. 어려운 시절 동고동락한 박성환, 오케이민 실장님들, 제 생활과 인격까지 보듬어주신 고래실 이범석 대표님, 『월간옥이네』 식구들,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절박을 짊어지고 시와 인간, 세계의 무게를 등에서 내려놓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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