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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사랑방
 
 
 
카페 게시글
―‥‥남은 이야기 스크랩 이건... 내 `새참!`
권종상 추천 0 조회 78 09.04.23 01:47 댓글 9
게시글 본문내용

휴식을 갖고 있습니다. 여차저차한 연유로 두 주간의 휴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말엔 샌프란시스코에 내려갑니다. 아무튼, 며칠간 푹 쉴 생각으로 집에서 딩굴었는데, 그게 아닌겁니다. 집안에 왜 이리 할 일들이 많은지, 솔직히 일 나갈때보다 더 많은 양의 일들이 집에서 제 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홈오너가 된다는 것은, 내가 돈이 꽤 많아서 사람 써서 일 시키기 전엔 이것저것 제 손을 모두 타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미국에서 제일 보기 힘든 직업중 하나가 뭘까요? '목수' 입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목수들이 많아서 왠만한 목공일들을 저렴한 가격에 척척 해 주지만, 이곳에서는 내가 직접 '주말 목수'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솔직히 망치질도 서툰 터라, 뭐라도 고치려면 바로 옆집으로 뛰어가 도움을 청하기 일쑤고, 그때마다 제 이웃 루디 아저씨는 말 그대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뛰어와 주십니다. 그래서 어깨 너머로 저도 조금씩 그런 일들을 배우게 됐고, 지금은 서툴지만 제 나름대로 집안일을 어떻게 해 나가고 있습니다.

 

휴식이 휴식같지 않다고 엄살을 떨고는 있어도, 사실 아침에 출근을 하지 않는다는 데서 오는 여유는 여전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 한잔 여유롭게 커피 프레셔에 '눌러' 마시고, 뒷마당에 나가 아침 공기를 쐬고, 운동을 다녀오고, 아이들을 학교에 떨어뜨리고, 아내와 다시 천천히 늦은 아침과 커피를 즐기고... 아내가 일을 나가고 나면 그때부터는 할 일 투성이입니다. 오늘은 잔디를 다시 깎았고, 잔디 가장자리를 기계를 써서 다듬어내고, 자동차를 세차하고, 아내의 자동차 범퍼를 갈러 다녀오고, 오후엔 다시 아이들을 픽업하고, 아내도 픽업하고... 하하. 내일은 차고 청소를 해야 합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차고 오프너가 고장난 터라, 이것을 또 새로 사서 달아야 하는데, 도저히 제 실력으로 안 되니 이것만큼은 사람을 불러야 합니다.

 

그래도 나름으로 정원일이나 세차 일 같은 것은 조금씩 늘어나는 구석이 보이는데, 배관이나 전기, 혹은 목공 일 같은 것은 그렇게까지 진전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은 세상에 팔자에 없던 '생선 다듬기'까지 해야 했는데, 아버지께서 낚시를 다녀 오시면서 저희집에 생선을 몇 마리 주고 가셨습니다. 받을 때는 좋았는데, 이를 다듬는 것이 또 장난이 아니더군요. 생선을 깨끗하게 해체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냥 해부하듯이... 어떻게 했는데, 완전히 칼질이 아닌 톱질을 해 놓아 버렸습니다. 하루가 아무튼 이렇게 꽉 차서 흘러가는군요.

 

그래도, 그 잠깐의 여유 시간동안, 저는 점심으로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어차피 코스트코에 가야 할 일이 있었기에 장을 보면서 미리 만들어 놓은 샐러드를 집었습니다. 시금치 샐러드인데, 계란과 베이컨가루, 그리고 허니 머스타드 드레싱이 들었군요. 그런 드레싱을 별로 안 좋아하는 터라, 집에와서 블루 치즈와 랜치를 조금 뿌려서 맛있게 먹을 생각을 했습니다.

 

뒷마당엔 포도가 드디어 사춘기 청소년 얼굴에 뾰루지 나듯 가지에 새싹을 틔우고, 날씨는 마치 여름처럼 더웠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에 어떤 와인을 맞출까 하다가 선물받았던 랭그독 루시용 와인 한 병을 꺼냈습니다. 도멘 라 세르라는 곳에서 나온 '히포제 Hypogee (이거 발음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라는 와인인데, 카리냥 40%, 시라 40%, 그레나슈 20%가 섞인 파워풀한 와인입니다. 느낌이 괜찮아서 찬찬히 레이블을 살펴보니, 이 와인은 모두 60년 이상 된 포도나무에서 자란 과일들로 만들었다고 하는군요. 말 그대로 '진짜 풀 바디'의 프랑스 와인입니다. 이름 뜻은 고대 이집트 피라밋 건축 형태의 하나라고 하는데 잘 모르겠네요.

 

마치 캘리포니아의 실력있고 젊은 와인메이커들이 그랬듯,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의 현상이 나타나는 모양입니다. 보르도의 땅은 너무나 비싸기 때문에, 요즘 와인에 열정을 가진 프랑스의 젊은이들은 비교적 땅값이 저렴한 랑그독 루시용 등 '비교적 덜 알려진' 지역으로 가서 와인을 만든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 와인도 그런 사연이 섞여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블랙베리, 까만 자두, 블루베리 등 어두운 색깔의 베리류 과일의 느낌, 그리고 오크의 느낌과 훈제의 느낌이 다가오는 와인입니다. 질감은 부드러운 편이지만, 태닌이 꽉 조여오는 느낌. 마치 신세계의 비교적 잘 만들어진 카버네를 연상케 하는 느낌입니다. 첫 잔에서는 '이 와인이 순진하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 오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면 그때부터 아로마를 내뿜기 시작합니다. 이게 2002년산 와인인데, 앞으로 2년쯤 더 두었다가 마셔도 더 피어날 포텐셜이 충분합니다. 프랑스의 전통적인 와인생산기법으로 만든 와인이 아니어서, AOC 등급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나왔는데, 아마 프랑스에서도 이제 와인메이킹에서의 규제를 조금씩 푸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원체 신세계의 와인들이 치고 들어오는 상황이라, 조금씩은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가 싶습니다. 그런 대세엔 전통의 힘도 한풀 꺾이는 모양입니다.

 

아무튼, '가볍다'고 하긴 조금 무거운 샐러드와, 역시 '프랑스 와인'이라고 하기엔 거의 신세계의 무게를 내어 주는 와인과, 저는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마당으로, 뒷마당으로, 화단으로... 밀짚 모자를 쓰고 전정가위를 들고... 그리고 보니, '낮술에 대한 팬터지' 하나는 또한번 확실하게 깨 버렸군요. 두 잔쯤의 와인에 헤비한 샐러드는 아무런 생각 없이 정원일에 제 자신을 묶어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하하. 느닷없이 우리네 농가의 '새참'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건, 이 와인이 내어주는 어떤 텁텁한 맛 때문이기도 할 터입니다. 새참을 '술참'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막걸리 때문이었겠지요. 적당한 알코올이 일에 흥을 불어넣어주었을테니.

 

문득 하늘을 보니, 우리나라의 초여름이 떠오르고, 어느 해 농활 갔을 때 그 동네 어르신이 권해 주셨던 막걸리의 투박하지만 정겨웠던 맛이 떠오르는 것은 아마 지금 나이에 느낄 수 있는 '수구초심'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장난을 걸어오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 내일은 뒷마당 정리를 끝내고, 차고 청소를 확실히 해 놔야 하는데... 일보다는 '술참' 생각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직 반 병 이상 남은 이녀석 때문일까 싶습니다. 하하.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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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4.23 05:50

    첫댓글 저도 서양 사람들이 직접 집을 짓고 수리하는 모습이 참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직접 집안을 수리하고 가꿔나가면 더 정이 가겠죠? 다만 부인과 아이들이 같이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

  • 09.04.23 06:32

    Lange d'oc 우리 살던 동네입니다. 와인이 fruity 한 맛이 나는 게 맛이 좋습니다..단, 미국이 와인 인프라가 안 되서 아무리 좋은 와인도 가지고 오니 맛이 변합니다. 42프랑이 1 불할때 39 프랑에 한병, 750 ml 였는 데...랑게 독 와인은 보르도 것하고는 다른 품종, 다른 지방엔 또 다른 것 이런 식이 더군요. 남이 하면 죽어도 안 따라하는 불란서 프라이드 때문인지...

  • 작성자 09.04.23 08:06

    아닙니다. 사실은 토양과 포도의 품종의 매치라는 문제, 그리고 마이크로 클라이밋이라는 문제 때문에 그렇지요. 이른바 떼르와라는 것이 문제가 되는데, 까리냥 같은 품종은 아무리 보르도 가져다 심어봐도 그 포텐셜을 다 못낸답니다. 반대로 보르도에서 잘 자라는 멀로 같은 품종은 진흙 토양에서는 잘 자라지만, 랑그독 같은 데서는 잘 자라지 못해요.

  • 09.04.24 17:30

    와인 농사에 일가견을 가지고 계십니다. 300년 동안 영국과 전쟁에 피폐해진 프랑스가 영국에 포도주등을 비싸게 바가지 씌우려고 어디산 몇년도라는 대 지구 사기극을 시작했지요..포도를 눌러 짠물이 무신 큰 차이가 있다고...그러나 외국에서 이렇게 알아주니 프랑스는 고맙지요..잘 속아 줘서..제 둘째 사위가 프랑스인으로 셰프로 올라 갈려고 하루에 14시간씩 뜨거운 불앞에서 요리를 합니다..와인 맛을 감정할 때마다 "아빠 이것 좀 맛봐 줘요" 하면 이것은 괜찮다, 혹은 똥 같다 해주며 삽니다. 한끼도 와인 안마시고 살지를 못하다보니 와인 맛 하나는 제일 잘본다고 추어주는 바람에....

  • 09.04.23 08:57

    요즘엔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도 목수는 귀한 직업이 되어 버렸습니다...동네 목공소가 거의 없어졌다고 봐야합니다...거대 기업들이 집에쓰는 기성 목공제품들을 싸게 만들어서 출시하니...동네 목공소는 문을 닫을수 밖에 없는 현실이죠...그래서 한국도 목수 일당이 엄청 셉니다...님처럼...와인한잔에 셀러드...그리고 직접 흘리는 땀과 노력속에...온집안의 가족들이 행복해지겠죠...좋은글 늘 감사합니다.....

  • 09.04.23 10:50

    글 재주는 좋으신데 손 재주가 좀 달리시군요~,그것까지 잘하시면 시샘이 날뻔~~ㅋㅋ

  • 09.04.23 12:21

    암튼 팔방미인에 가깝다는... ㅎ

  • 09.04.24 03:14

    권종상님의 글은 언제봐도 마치 노련한 예술가의 잘 다듬어 놓은 조각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성실함과 봉사정신이 우러나는 삶의 태도가 부럽습니다. 강건하세요. 아자!

  • 09.04.24 13:32

    저 loncha만 봐도 지방 쫘악 빠지고 실핏줄까지 불끈할 것 같은데요...상당한 인내를 요하는 종류로 가득하군요...차근차근 ...그리고 자주 드세요...물 많이 드시고요..곧 람보처럼 되실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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