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문수산 축서사
매일신문 기사 입력일 : 2012-12-27
글·사진 지홍석(수필가·산정산악회장)
늘씬한 '미인송' 춘양목 숲길 감탄사 절로
# 정상 조망, 태백·소백·청량…명산 파노라마
등산의 시작점은 물야면에 위치한 축서사(鷲棲寺)와 주실령(780m)이다. 가벼운 산행의 원점회귀형 산행은 축서사에서, 주능선 위주의 장쾌한 능선 산행은 주실령에서 시작한다. 축서사에서 오르는 등산로는 경사가 급하나 주실령에서 진입할 경우 능선을 따라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봉화읍을 통과해 915번 도로를 따라 오전약수를 지나면 주실령에 도착한다. 백두대간의 주변 고개답게 백두대간 주능선이자 옥석산으로 오르는 등산로는 등산로 안내판과 나무 데크를 설치해 놓는 등 정비가 잘 되어 있다. 고개 뒤편 오른쪽에 문수산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나 있다.
등산 초입 고개 오름길을 제외하고는 그리 경사도가 가파르지 않다. 산행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왼쪽 산자락의 춘양목이다. 궁궐의 목재로 쓰이는 용도답게 하늘을 찌를 듯 미끈하게 뻗은 춘양목은 높이가 족히 20m가 넘는다. 늘씬한 미녀들보다도 훨씬 더 아름답고 빼어난 미인송에 마음을 빼앗기다 보면 문수산 등산이 저절로 즐거워진다.
오지의 산답게 등산로가 깨끗하다. 부드러운 능선을 감아 오르면 25분여 만에 첫 봉우리에 도착한다. 주 등산로에서 오른쪽으로 50여m 지점에 헬기장이 있다. 올라온 쪽을 잠시 조망하고 발길을 재촉하면 왼쪽 참나무 사이로 옥석산의 전위봉인 바위전망대가 우뚝하게 보인다. 그 모양이 보기 좋아 시계가 탁 트이는 곳에서 사진 한 장을 제대로 찍어보겠다고 벼르지만 문수산에 오를 때까지 끝끝내 완벽한 조망은 허락되지 않는다.
주 봉우리 문수산은 나뭇가지 사이로 언제든 조망이 가능해 그나마 다행이다. 고개에서 시작한 오름길이 980m봉에서 잠시 끝이 난다. 나무판으로 만든 표지목이 나무에 걸려 있다. 그다음부터는 길이 조금 수월하다. 둔덕 같은 봉우리 928봉을 지나니 935봉 오름길에도 빼어난 춘양목이 눈을 즐겁게 한다.
예배령에 도착하면 거대한 노송이 있고 그 옆에 이정표가 있다. 월계리로 탈출하는 갈림길이 오른쪽으로 나 있지만 이정표는 없다. 많은 사람이 애용하지 않는지 길이 희미하다.
완만한 오름길로 925m봉을 넘어서면 등산로가 잠시 내려앉는다. 1,051m봉을 지나면 두내약수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왼쪽으로 보이고 10여 분이면 축서사로 내려가는 안부삼거리가 나타난다. 축서사까지는 700여m의 거리다. 예배령에서 이곳 갈림길까지 약 40분이 소요된다.
20분 정도 오르면 문수산이다. 정상부에는 참나무 군락지가 형성되어 있고 봉화산악회가 세운 정상 표지석이 있다. 정상에서는 지금까지 답답했던 조망이 한꺼번에 터진다. 사면팔방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산줄기를 따라 마루금이 이어지고 문수산은 그 속에 위치한 형상이다. 마치 커다란 발우(鉢盂) 속에 우뚝 솟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태백산, 소백산, 청량산, 일월산 등 원거리의 기라성 같은 명산들과 지척의 각화산과 왕두산을 선명하게 조망할 수 있다.
하산 길은 문수지맥 주능선 길을 버리고 남릉 진달래 능선을 탄다. 얼어붙어 있는 가파른 지면이 미끄러워 몇 번이나 엉덩방아를 찧어야 했다. 축서사 내림 길에는 겨울산행의 필수품인 아이젠을 꼭 챙겨야 한다. 너무 높은 곳에 자라고 있어 그림의 떡이지만, 내림 길 주변의 참나무 군락지에는 만병통치 약초로 알려진 겨우살이가 곳곳에 자라고 있어 눈길을 사로잡는다.
정상에서 한 시간이면 축서사다. 해발 800m의 명당에 위치한 사찰로 문무왕 13년(673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설화에 의하면 문수산 아래 지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절의 스님이 어느 날 밤 앞산을 바라보니 휘황찬란한 빛이 발산되고 있어 광채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더니 한 동자가 아주 잘 조성된 불상 앞에서 절을 하고 있었다. 얼마 후 그 동자는 청량산 문수보살이라며 구름을 타고 사라져 버렸고 불상만 남았다. 훗날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의상대사가 불상을 모실 곳을 찾아다니다가 현 대웅전 터에 법당을 짓고 불상을 모시니 바로 축서사다.
의상은 3년 뒤에 축서사에서 40여 리 떨어진 봉황산 중턱에 대찰을 세웠으니 부석사(浮石寺)이다. 축서사를 '부석사의 큰집'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고려 중기 전성기에는 건물 30여 동에 대중이 200여 명이나 되는 부자 사찰로 공양을 지으려고 쌀을 씻으면 뿌연 뜨물이 10리 밖까지 내려갈 정도였다고 한다. 영험한 기도처로 유명한 사찰인데 한말 을사늑약 이후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일본군이 방화해 대웅전 1동만 남고 전소되었고 수많은 유물이 없어지고 말았다.
현재 축서사의 대표적인 문화재로는 보물 995호로 지정된 보광전 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와 1379호 괘불이 있으며 지방문화재자료로는 삼층석탑과 석등이 있다. 주실령에서 시작해 문수산을 오르고 축서사로 하산하는데 약 8㎞가 채 되지 않는다. 등산 소요시간은 알려진 것보다 조금 더 걸린다. 4시간 정도 소요된다. 폭설이 내리면 대형버스는 주실령이나 축서사로 진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대구에서 오전 7시에 출발하면 오후 7시 이전에 도착할 수 있다.
축서사(鷲棲寺)
건립시기 : 673년(문무왕 연간)
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개단리
요약 :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문수산(文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673년(문무왕 13) 의상(義湘)이 창건했다.
당시 인근 지림사[智林寺 : 지금의 水月庵]의 주지가 어느 날 밤 산 쪽에서 서광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가 의상에게 이를 고하고 함께 산에 올라가 보니 비로자나불이 광채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의상은 이곳에 축서사를 짓고 이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867년(경문왕 7)에 부처님 사리 10과를 얻어 부처님 사리탑을 조성했다. 참선 수행 도량으로서 명맥을 이어오다가, 1705년(숙종 31) 중건했다.
당시에는 법당 등 전각 6동과 광명루(廣明樓), 승방 10여 동이 있었으며, 도솔암(兜率庵)과 천수암(天水庵)의 암자가 있었다. 1875년 경 대웅전・보광전・약사전・선승당・동별당・서별당・청련당・백화당・범종각 등이 있고 상대・도솔암・천수암 등 세 개의 산내암자가 있었으나 조선 말기에 일본군이 의병 토벌을 목적으로 불태워 대웅전 1동만 남겼다. 일제강점기에는 한동안 폐사로 있다가 일제 말기에 삼성각을 복원하였고 6・25 한국전쟁 후인 1957년에 요사를 신축하였다. 1996년부터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1999년에 대웅전을 완공하고 2003년에 운수각・선열당・안양원・심검당 등을 건립하였으며 2006년에 극락전과 선방 및 누각・종각・일주문 등을 완공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보광전・적묵당・보물각・응향각・보탑성전・심검당・선열당・안양원・범종각・법성료 등이 있다.
유물 중 보물은 봉화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상 및 목조광배(보물, 1989년 지정)를 비롯하여 괘불탱(보물, 2003년 지정)이 있다.
현재 보광전에 봉안된 석조비로자나불상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의거하여 사리를 봉안하는 원탑의 건립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내의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납석제 사리호(舍利壺)의 표면과 밑면에는 탑을 세운 발원자와 건립연대, 장인 등과 관련된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 사리호는 석탑에서 발견된 이후 1912년경에 이 절의 노승이 가지고 있었는데, 1929년 일본인의 손에 넘어갈 뻔했다가 이를 조선총독부가 다시 사들여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상은 상 전체에 호분이 입혀져 있으나 목조 광배는 후대에 보수된 것이다. 사리호의 명문에 의하면 신라 헌덕왕 때의 시중이었던 김양종의 막내딸인 명단이 부모님을 위하여 867년(신라 경문왕 7)에 석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 당시 최고 권위자였던 신라 왕실 측근의 진골가문에서 후원하였으니 아마도 신라 왕실의 안정을 이루기 위한 왕권강화라는 측면에서 원탑과 함께 비로자나불상을 제작한 셈이 된다. 축서사 비로자나불상은 얼굴을 약간 안으로 당겨 반듯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다. 어깨와 다리의 폭이 크게 차이가 없고, 두 팔을 몸에 붙이고 있어 방형에 가까운 불신이며 신체 비례도 안정감이 있다.
얼굴에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은 듯하여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양쪽 어깨를 덮은 옷은 양 팔 위를 거쳐 다리 아래로 길게 흘러 내렸다. 가슴 위에 보이는 대각선으로 걸쳐 입은 내의와 띠매듭, U자형으로 늘어진 굵은 옷깃에 꽃무늬가 장식된 점이나 다리 사이의 옷주름이 물결처럼 표현된 점 등이 특이하다.
축서사 괘불은 1768년에 제작된 높이 894cm, 너비 509cm의 대형 불화이며,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배경에 솟아오르는 모습의 구름을 채워 넣어 법석에 강림한 부처님의 상서로운 모습을 극대화했다. 석가모니불을 홀로 그린 독존 형식의 괘불이지만, 광배 위로 화불과 보살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화면 구성은 이전에 조성된 괘불에는 보이지 않는 새롭게 나타난 도상이다.
축서사 괘불 화기에는 정일 스님과 낙선, 일성 스님 등 10명의 스님들이 1768년 3월 14일에 불사를 시작해 25일간 괘불을 그리고 4월 부처님오신날 축서사 대적광전에 점안 및 봉안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괘불 조성에는 환성지안 스님의 3세손이자 1769년 봉정사 경판 조성 불사를 증명한 벽허명찬 스님이 증명으로 참여했다.
문화재자료는 삼층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과 석등(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이 있다. 삼층석탑은 867년(경문왕 7)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했다는 석탑조성명기(石塔造成銘記)가 있는 매우 귀중한 것이다. 그러나 기단부 하대, 3층 옥신과 개석, 상륜부가 일실된 상태이다. 석등은 신라 말 고려 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봉화군 문수산 산행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