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이 지친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믿음은 쉼이고 기쁨이지 무엇을 하기위한 고통의 과정이 아닙니다.
인내는 이뤄내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되는 것이 맞습니다.
믿음으로 지친다면 그것은 잘못된 무엇인가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지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껴진다고 해서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삶의 길보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길이 더 힘들수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요?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고나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이 그 이전보다 더 힘들고 먼 고행의 길처럼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전도를 하면 소극적이게 되고, 자기의 신앙처럼 피곤하고 힘든 믿음의 여정을 권유하기를 미안하게 느끼기도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순종함에서 자유를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라고 부르는 이유가 신앙의 진정한 본질인 것입니다.
이 본질이 망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자기의 생각대로 살면서 하나님을 조언자 혹은 인생에 참견하시는 분으로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참견하는 분을 주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알기 이전에 살아가면서 짊어졌던 짐에 더하여 하나님을 조력자로 오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또하나의 제안으로 받아들여 짊어지게 되는 것이 됩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을 알기 전보다 하나님을 믿은 후에 더 힘들어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로 모시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며, 그것이 아니라면 믿음을 가졌다고 보기 힘든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작은 차이같지만 믿음은 둘 중에 하나이므로 전혀 다른 믿음이 되며, 주께서 자신을 참견하는 자로 생각하는 자를 순종하였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옮기지도 말며 너희는 어떤 일도 하지 말고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한 대로 너희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
예레미야 17장 22절
저의 경우에도 주일에 일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납기에 맞추는 것이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일을 해보니 납기는 어떻게 해도 다 이뤄지고, 잊혀졌습니다. 그러나 저의 불안함으로 저는 쉬는 것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제게도 휴식이라는 쉼이 주어짐을 느꼈습니다. 그전에는 끊임없는 일정에 연속이었다면 저에게도 허락된 쉼이 생겨난 것입니다. 마음은 걱정은 되지만 한편으로 기쁨이고 또한 제가 주의 말씀에 제자신의 생각의 걱정을 내려놓는 순종을 하였다고 생각하니 기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예는 미국대륙으로 피난온 청교도들에게도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는 미국 서부를 개척하기 위하여 이민자들에게 땅을 무상으로 나눠주던 때였습니다. 땅을 나눠주는 방식은 마차를 달려 먼저 깃발을 뽑으면 그 땅의 주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차경주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마차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믿는 청교도들은 주일이 되면 길을 멈추고 안식하는 것을 지켰습니다. 결과적으로 청교도들이 많은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달려나갔던 사람들의 마차는 무리한 작동으로 파괴되었고, 말들도 지쳐서 쓰러져버렸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한치앞으로 모르는 유약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장 소중한 가치인 구원은 이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상일을 염려하여 주의 말씀에 불순종함을 당장 멈추는 것이 우리의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 될 것입니다. 세상일들은 모두 실패든 성공이든지 일어나고 잊혀져버립니다. 하지만 불순종은 남게 되는 것이며, 그로인하여 신앙의 길에서 힘들고 지치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