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의 독백(獨白)
- 사소(娑蘇) 단장(斷章)
서정주
노래가 낫기는 그 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 버렸다.
활로 잡은 산돼지, 매(鷹)로 잡은 산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開闢)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 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무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海溢)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사조(思潮)』 창간호, 1958. 6)
[어휘풀이]
-물낯 : 수면(水面)
[작품해설]
이 시는 『삼국유사』에 실려 전하는 ‘사소 설화’를 변용하여 구도자(求道者)의 신앙적 염원인 영원한 절대 세계에 대한 열망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사소’는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처녀로 잉태하여 산으로 신선 수행(神仙修行)을 떠난 일이 있는데, 이 시는 집을 떠나기 전, ‘사소’의 집 꽃밭에서의 독백을 시화(詩化)한 것이다. 이 시는 인간 세계의 유한성과 인간 본질의 한계성을 깊이 인식한 ‘사소’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인간의 부활을 갈망하는 구도적 정신을 보여 준다.
이 시는 전 14행의 단연시로 내용상 3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단락은 1~6행으로 인간 세계의 유한성을 제시하고 있다. 화자는 ‘노래가 낫기는 그 중 나아도 /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힘차게 달리는 말도 바다에 이르면 멎을 수밖에 없음을 인식한다. 이러한 화자는 이제 산돼지나 산새들에게도 입맛을 잃어 버렸다. 화자는 이러한 자각을 통하여 인간 세계의 유한성을 말한다.
2단락은 7~11행으로 자연과 동화될 수 엇ㅂ는 인간 본질의 한계성을 드러낸다. 핵심적 이미지인 ‘개벽하는 꽃’은 소멸과 생성, 죽음과 부활이 반복됨으로써 거듭 태어나는 영원한 생명을 상징한다. 화자는 ‘꽃’으로 상징된 자연의 세계, 곧 영원의 세계에 합일되려 하지만, 결국은 ‘네 닫힌 문에 기대섰을 뿐’인 자신의 한계만을 자각할 뿐이다. 다시 말해, 신선이 되고 싶어하는 ‘사소’는 열심히 선(仙)의 세계를 꿈꾸고 있으나, 그 때마다 영원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한계성을 확인하고 절망한다. 3단락은 12~14행으로 영원의 세계를 갈망하는 화자의 모습을 보여 준다. ‘벼락’과 ‘해일’은 영원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화자가 극복해야 할 온갖 고통이나 형벌을 의미한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라는 반복되어 나타나는 주술적 성격의 절규 속에는 영원의 세계를 향한 뜨거운 열망이 담겨 있다. 그것은 바로 현실 세계의 유한의 존재를 벗어나 영원한 세계로 상승하고자 하는 시인의 희원(希願)일 것이다.
[작가소개]
서정주(徐廷柱)
미당(未堂), 궁발(窮髮)
1915년 전라북도 고창 출생
1929년 중앙고보 입학
1931년 고창고보에 편입학, 자퇴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어 등단
시 전문 동인지 『시인부락』 창간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 시분과 위원장직을 맡음
1950년 종군 위문단 결성
1954년 예술원 종신 위원으로 추천되어 문학분과 위원장 역임
1955년 자유문학상 수상
1977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2000년 사망
시집 : 『화사집』(1941), 『귀촉도』(1948), 『흑호반』(1953), 『서정주시선』(1956), 『신라초』 (1961), 『동천』(1969), 『서정주문학전집』(1972), 『국화옆에서』(1975), 『질마재 신화』 (1975), 『떠돌이의 시』(1976), 『학이 울고간 날들의 시』(1982), 『미당서정주시선집』 (1983), 『안 잊히는 일들』(1983), 『노래』(1984), 『시와 시인의 말』(1986), 『이런 나
라를 아시나요』(1987), 『팔할이 바람』(1988), 『연꽃 만나고 가는 사람아』(1989), 『피
는 꽃』(1991), 『산시(山詩)』(1991), 『늙은 떠돌이의 시』(1993), 『민들레꽃』(1994), 『미당시전집』(1994), 『견우의 노래』(1997), 『80소년 떠돌이의 시』(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