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의 추억
/장석창
일찍 잠에서 깬다. 좀 더 자보려고 뒤척이다 산책에 나선다. 집 주변 수영강 유람선 선착장에 멈춰 선다. 동지로 다가서는 늦가을 밤하늘의 어둠은 넓고도 두텁다. 강 건너 가로등 불빛이 강물에 반사되어 얄랑인다. 고흐가 아룰의 밤하늘에 매료되어 그렸던 r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1888)의 전경과 흡사하다. 깊고 푸른 밤, 별을 따라가다 북두칠성을 발견하고 환호한다. 일곱 개의 별로 이루어진 국자 모양 별자리, 지금 그 안에는 무엇이 그득 담겨 있을까? 고적할 때 별을 본다. 총망한 도시에 야음이 내리고 지친 심신이 그 적막함에 빠져들 때면 별은 점검이 드러난다. 밤하늘을 수놓는 별들은 스스로 빛을 발산하는 항성恒星이다. 촘촘히 보이는 별들도 실제 거리는 천문학적이다. 별은 독립적이고 개별적이지만 사람들은 무리로서 별을 논한다. 별은 외롭지 않다.
나는 경남 함양의 명예군민이다. 이십여 년 전, 내가 속한 한국헬프클럽은 매년 11월이 되면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강청리 주민을 상대로 의료봉사를 했다. 이를 인연으로 우리 단체와 강청마을은 자매결연을 하였고, 당시 군수의 주관으로 모든 회원에게 명예군민증이 발급되었다. 나는 소속 회원들과 함께 2004년 11월 7일에 있었던 수여식을 겸한 봉사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지리산 자락 강청마을로 떠났다 만추의 지리산 밤하늘은 명징했다.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하늘을 바라보았다. 초롱초롱 별빛이 도심에서 보는 것과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지척에 있는 듯 따스했다. 인공조명이 아닌 자연의 빛이다. 응시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영롱함에 안구가 편안했다. 콧속에 스며드는 공기는 신선 했고, 백무동 계곡 물소리는 옥구슬이 구르는 듯 귀를 정화했다. '아아! 여기가 민족의 영산靈山지리산이구나.' 나는 윤동주 시인이 별을 헤듯 별 하나에 마음속 품은 낱말을 붙여나갔다. '사랑, 기쁨, 설렘..' 한 단어에 이르러 숨을 골랐다. 그리고 되뇌었다. '정情'
마을회관에는 주민들의 정성 어린 저녁 식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지리산 흑돼지 수육과 산 더덕 같은 특산물 요리에 집에서 담근 막걸리가 곁들여진 시골 밥상이었다. 한 사발 가득 막걸리를 부었다. 술 익은 냄새가 풍겨 나왔다. 주민들과 서먹하던 장벽은 이내 허물어지고 어느새 우리는 벗이 되었다. 막걸리는 정이 담긴 술이다. 그 향은 은근하고 맛은 구수하다. 막걸리는 넘길 때 인후를 자극하지 않는다. 합석하는 사람들 관계는 수평적이다. 서로를 깔보지 않고, 올려보지도 않는다. 여기에 돌올함은 없다. 정갈한 주점에 홀로 앉아 윤이 나는 그릇에 마시는 막걸리는 왠지 어색하다. 아낙네가 새참으로 찌그러진 놋 주전자에 담아 와, 모여 앉은 농부들의 갈증을 풀어주는 막걸리. 흙 묻은 손을 풀잎에 대충 문질러 닦고, 커다란 사발에 가득 부어 양손으로 모아 쥐고, 목젖이 불룩불룩하게 단숨에 들이켜고는, 입 주변을 소매 끝으로 한번 홈쳐내고, "어허, 시원하다" 추임새 후, 풋고추를 막장에 찍어 우적우적 씹는 것이 그 참맛이다. 지리산 밤의 정취에 취하고, 함께 온 이들의 우정에 취하고, 마을 사람들의 인정에 취했던 나는 마지막으로 막걸리에 취하고 싶었다. 쭉 한 사발을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