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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3: 23. 십일조 - 마 23: 24.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4.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 ( 23-26 )
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 도다.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 26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cummin)의 십일조를 드렸다. 그것들은 향료들이었다. 이것은 땅의 소산물의 십일조를 드리라는 율법에 근거한 것이다.
* 레 27: 30 - 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
그러나 십일조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정의(義)와 긍휼(仁)과 믿음(信)이다. 정의(義)는 하나님의 뜻인 율법을 행하는 것이며, 긍휼(仁)은 자비와 사랑을 가리킨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믿음(信)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리킨다. 물론 인간관계의 신실성도 포함된다.
* 미 6: 8 –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마 23: 23. 십일조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
주께서는 십일조 생활을 하루살이에 비교하셨고, 정의(義)와 긍휼(仁)과 믿음(信)을 약대에 비교하셨다.
우리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하지만, 종교 생활의 형식보다 실질을 중시해야 하고, 실질이 없는 종교적 형식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함을 알아야 한다.
1]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네 번째 저주 선언문이 시작된다.
저주의 대상이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로 지목(指目)된다.
비판의 내용은 그들이 사소하고 세분된 규정과 전통에는 아주 민감하나 그보다 더 중요한 근본적인 율법 정신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십일조'는 소출의 10분의 1을 바치는 율법의 규정으로서 기원은 족장 시대로 모세의 계명에서 법제화되었다.
* 창 14: 20 -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 창 28: 22 -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 레 27: 30 - 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
* 신 14: 22-29 – 십일조 규례 – 22 너는 마땅히 매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23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24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25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가서 26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27 네 성읍에 거주하는 레위 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이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 28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29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 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 십일조의 근본 취지(趣旨)
① 자신의 소유에 대한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인정.
② 이웃 사랑(구제) 및 성전 운영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자발적 사랑의 예물로서가 아닌 강제적 의무 규정으로 고착화 시켰다. 이것을 통해 유대인 됨과 율법 완수자 됨의 기준으로 삼았다.
(2) 박하
'박하'는 헬라어로 '헤뒤오스몬'(*)이라고 하는 독특한 향내를 지닌 채소(mint)이다.
유월절 쓴 나물의 양념으로 쓰였으며 그 향내로 인해 회당의 방향제(芳香劑)로 쓰였다고 한다.
* 출 12: 8 -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3) 회향
'회향'은 헬라어로 '안네돈'(*)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미나리과의 식물이며 양념에 사용되는 식물로서(anise, dill) 약품과 향료에도 사용된다.
(4) 근채
'근채'는 '퀴미논'(*)이라고 부르는 식물로서 미나리과에 속하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는데 그 열매는 양념이나 약품으로 사용된다.
근채를 다른 말로 구민초(cumin)라고도 한다.
이상에서 나열한 식물 종류는 이스라엘의 농작물 중 매우 사소한 수확물이다.
이처럼 사소한 종류를 나열한 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레 27: 30의 규례(規例)에 따라 얼마나 십일조에 철저했던가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의 비판은 세세한 십일조 생활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음에 나오는 그들의 행실에 대한 비판을 강조하기 위하여 대비적으로 십일조 생활을 강조한다.
2]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더 중한 바'(*, 바뤼테라)란 '더 어려운 일'이나 '더 힘든 일'(De Wette)이 아니라 지엽적이거나 사소한 일과 대조되는 '더 중심적이거나 결정적인 일'(Ridderbos) 또는 '더 중요한 일'(Meyer, NIV)을 가리킨다.
이런 관점에서 공동 번역 성경에서는 '아주 중요한 율법'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 말은 율법 중에서 더 중요한 것이 있고 덜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암시한다.
여기서는 차등적인 율법 내용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앞에 나온 사소한 십일조 행위와 대비시킴으로써 더욱 중요한 율법을 소홀히 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어리석음을 강조하고 있다.
(1) 정의
'정의'(義)는 헬라어로 '크리시스'(*)라고 부르는 이 말은 종말적 심판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하고 재판, 판단을 의미한다. 옮음(right), 공의(justice), 의(righteousness)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본문에서의 '의'는 정당하고 공정한 뜻이다. '정의'라는 의미와 더불어 실천적 측면에서의 인간관계의 올바름이라는 의미도 함께 지닌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이해를 분명하도록 돕는다.
* 신 16: 19 -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 사 1: 17 -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2) 긍휼
'긍휼'(仁) - 헬라어로 '엘레오스'(*)라고 하는데 공동 번역에서는 '자비'(mercy)로 번역되어 있다.
'자비'라는 말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또는 사람이 사람에게 베푸는 것으로 사용된다.
이 단어는 22: 37-40의 내용을 참고하여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행위를 말하고 있다.
(3) 믿음
'믿음'(信) - 헬라어 `피스티스'(*)는 믿음, 신뢰, 신용(faith, truth), 약속, 서약, 증거, 담보, 보증, 확신 등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이웃에 대한 신뢰를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 히 11: 6 -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시 15: 3-4 – 3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4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이와 같은 세 가지 종류의 단어, 의(義 정의), 인(仁 긍휼), 신(信) 믿음의 개념은 설명할 수 있거나 객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실천을 통해서만 보여줄 수 있다.
십일조는 객관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내 보일 수 있지만 정의(義), 믿음(信), 긍휼(仁)은 삶을 통해서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몸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버렸도다.'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버렸다'로, 공동번역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로 번역하고 있다.
3]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여기서 예수의 치밀함을 엿보게 된다.
예수께서 보신 유대인의 십일조 행습(行習)은 무조건 비판을 가할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모두 지켜야 할 것들이었다.
이와 같은 의미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하는 예수의 선언(5: 17)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공동 번역 성경에서는 "십 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반문하는 형태로 번역되어 있다. 적절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십일조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의와 인(仁)과 신(信)이다.
정의는 하나님의 뜻인 율법에 일치하게 행함을 의미한다.
긍휼(仁)은 자비와 사랑을 가리킨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믿음(信)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리킨다. 물론 인간관계의 신실성도 포함된다.
선지자 미가는,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였다. (미 6: 8).
마 23: 24.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 도다. (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 도다. )
맹인된 지도자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고 있었다.
1] 맹인 된 인도자여.
이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행실에 대해 다른 형태의 비판을 가하기 위해서이다.
그러기 위해서 분위기를 환기시키면서 다음의 비유를 말하고 있다.
2]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 도다.
비유적이며 상징적인 표현이다. 하루살이와 낙타를 극적으로 대비시켜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분하였다.
이러한 과장법은 19: 24에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라고 나타나 있다.
* 마 5: 29-30 –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 마 17: 20 –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 마 21: 21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하루살이는 팔레스타인 기후에서 흔한 곤충(昆蟲)이자 가장 조그만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루살이는 포도주 통에 몸을 던지곤 했는데, 유대인들은 종교적으로나 음료로 사용하기 전에 채로 포도주를 걸렀다.
왜냐하면 부정한 곤충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무의식적(無意識的)으로나마 그것을 섭취함으로써 부정을 덧입을까 해서이다.
* 레 11: 20, 23 – 20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은 너희가 혐오할 것이로되 23 오직 날개가 있고 기어 다니는 곤충은 다 너희가 혐오할 것이니라.
* 레 17: 10-14 – 10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 중에 무슨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를 먹는 그 사람에게는 내 얼굴을 대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12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 중에 아무도 피를 먹지 말며 너희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라도 피를 먹지 말라. 하였나니 13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나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 먹을 만한 짐승이나 새를 사냥하여 잡거든 그것의 피를 흘리고 흙으로 덮을지니라. 14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떤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것의 피인즉 그 피를 먹는 모든 자는 끊어지리라.
낙타는 가장 몸집이 큰 짐승으로 취급되었으나 이것 역시 먹을 수 없는 부정한 동물로 간주 되었다.
* 레 11: 4 -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낙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부정한 곤충과 동물을 비유로 들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행위를 부정적인 것으로 강조한다.
그들이 삼킨 낙타는 무한정한 탐심과 육체적 향락, 무절제한 죄악을 암시한다.
이 비유는 네 번째 저주 선언문의 내용을 한마디로 압축, 요약하고 있다. 하기 쉬운 일에는 생색을 내며 자랑하고 어려운 일에 대해서는 모른 척하여 책임을 피해가는 위선적인 종교인에 대한 비판이다.
맹인 된 지도자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고 있었다. 주께서는 십일조 생활을 하루살이에 비교하셨고,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낙타에 비교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종교 생활의 형식보다 실질을 중시하여야 하고, 실질이 없는 종교적 형식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함을 알아야 한다.
3] 올바른 헌신
하나님의 말씀은 외적인 의미와 내적인 의미를 다 포함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는 그 말씀대로의 순종과 함께 그 말씀이 의도하는 영적 의미를 잊지 말아야 한다.
본문은 이러한 두 가지 의미 중 말씀대로의 문자적 순종은 철저히 지키면서도 그 말씀의 근본 의미는 파악하지 못한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책망이다.
이제 이러한 본문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자의 참된 자세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1) 외적인 것도 중요하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을 포함하는 총체적인 개념이다. 달콤한 알맹이를 소유한 과일의 껍질과 같이 외형은 내용을 포함한다.
외적인 질서는 매우 중요하다. 외적인 질서 속에 내적인 절제가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외적인 경건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외적인 경건 속에 내적인 신실함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물질을 드리는 것도 중요하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듯이 물질을 아낌없이 바치는 외형 속에는 '정성'이라는 마음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육신의 양식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다. 성령이 거하는 하나님의 전을 잘 보호하고 가꾸는 일도 우리의 영혼을 소중히 가꾸는 일만큼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외적인 질서와 육신의 일을 무조건 금하시지 않았다.
* 마 4: 4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 말씀 속에는 육신의 양식의 필요성을 인정하셨고,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는 본문의 말씀은 질과 양, 영적인 것과 육적인것, 즉 외적인 경건과 내적인 경건 모두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기독교는 금욕주의가 아니라는 것을…'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빛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도리어 세상으로 들어가는 복음, 세상 속에 들어가는 기독교의 중요성을 일깨우신 말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2) 외적인 경건주의에 치우칠 때 우리는 하나님이 뜻하신 본래의 의도를 간과할 때가 많다.
이렇듯 외적인 것도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지나치게 외적인 것만 강조할 때 거기에는 율법주의의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
본문의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율법의 표면(외적인 면) 만을 보았을 뿐 그 진실(내적인 면)을 보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규례는 중요시 하였지만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보지 못했다.
그들은 자그마한 것에 신경을 쓰다가 큰 것을 놓치고 말았다. 무엇이 더 중요하며 무엇 때문에 말씀을 지켜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외적인 경건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경건에는 내적인 진실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과 같고, 썩어 냄새나는 시체가 들어 있는 무덤을 단장하는 것과 같다.
육신의 것과 육신의 양식을 구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가 있어야 한다.
많은 물질을 드리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물질에는 옆전 두 냥을 바친 과부의 마음, 즉 전적인 감사와 헌신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것들이 전제되지 않는 육신의 일은 모두 바리새주의로 흐르기 쉬우며, 형식주의로 흐르기 쉽고, 육신의 것을 탐하는 쾌락주의로 흐르기 쉽다.
(3)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더욱 중요하다.
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공의로운 삶이다.
불의한 물질은 하나님을 가증히 여기는 것이다. 불의한 삶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이다.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허공을 치는 주문에 불과하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요구하시는 삶은 공의이다. 다른 모든 자보다 의로운 삶을 살았던 에녹을 기뻐하셨듯이 그리고 당대의 의인인 노아를 효시로 삼으셨듯이 의로움만이 하나님 앞에 인정될 수 있는 제물이요 삶이다.
② 우리가 실천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사랑이다.
사랑은 모든 덕목의 완성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며 믿음의 종착역이다. 사랑이 없는 희생, 사랑이 없는 봉사, 그리고 사랑이 없는 헌신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한 것같이 사랑이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의 삶을 모방하는 것일 뿐 예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사랑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자녀이며 군사임을 증언하는 가장 뚜렷한 증거이며, 그리스도께 드릴 수 있는 최대의 헌상품이다.
③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이어야 한다.
이것은 마음으로부터 그를 사모하며 그를 뒤따르는 것을 말한다. 몸은 그의 명령을 따르면서도 마음은 그에게서 떠나있는 삶이 아니라 내 마음과 몸과 생활이 온전히 하나가 되어 그를 사모하며 뒤따르는 생활을 말한다.
이러한 생활은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예수를 자신의 중심에 하나님을 향해 열어 놓는다. 그리고 예수를 자신의 중심에 모신다. 그리고 그의 명령대로 행하며 말씀에 의해 통제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우리의 생활의 열매는 이렇듯 '온전히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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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믿음(信)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리킨다. 물론 인간관계의 신실성도 포함된다.
설교 감사합니다.
믿음(信)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리킨다. 물론 인간관계의 신실성도 포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