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느끼는 행복 / 최호택
김 두장, 깻잎 석장, 김치 볶음 서너 젓가락, 된장국 한 그릇 그리고 밥 한 공기. 오늘 아침으로 먹은 음식이다. 수저를 놓고 포만감을 느낀다. 커피 한 잔을 곁들이니 한없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동갑내기 유끼 구라모또의 피아노 선율(旋律)이 세평의 공간에 나지막이 흐른다. 아침 새들의 일상적인 지저귐이 그치지 않는다.
시절을 잊은 채 한기(寒氣)를 가두고 사는 방에는 스탠드 형 전기난로가 따듯한 온정을 내뿜고 있다. 아직도 뜯지 못한 창문 밖 비닐로 아침 햇살이 퍼진다. 이 집도 한 때, 새로 지었을 때에는 온 동네의 부러움을 샀으련만 지금은 골동품처럼 쓸모없고 볼품없는 집이 되어버렸다. 마당에는 아무렇게나 돋아난 이름 모를 풀들이 뽑아도, 뽑아도 짓궂은 개구쟁이마냥 이곳저곳에서 삐죽이 얼굴을 내민다. 비라도 내리고 나면 참으로 가관(可觀)이다.
그래도 이 집이 좋고 행복하다고 한다면 자기위안이고 억지일까. 한 동안 도시 생활도 아파트 생활도 해보았지만 오늘 내가 느끼는 것보다 더 안락함과 행복함을 느꼈던 것 같지는 않다. 안락함이라든가 행복함이라든가 하는 것은 거주 환경이나 집의 규모에 있는 것만은 아닌 듯하다. 심정적으로 그런 것을 느낄 수 있는가 없는가가 더 중요한 것 같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인데, 재벌(財閥)의 하루 생활과 생각함이 촌부의 그것과 다름이 도대체 무엇일까. 훈제 연어 두 조각, 양상추 셀러드, 고기볶음, 생선 두 토막-이렇게 식단이 바뀌고 커튼이 자동으로 오르고 내리는 침실에서 눈을 뜬들 인생의 무엇이 달라지는 것일까.
행복의 깊이와 안락함의 너비가 아파트의 층수와 평수에 따라 변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오늘 그들이 그들의 삶으로부터 안락함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듯이 촌부(村夫)의 우중충하고 냄새나는 누옥에서도 얼마든지 그것을 느낀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들이 삶 속에서 아파하고 고뇌한다면 그것 또한 세상 사람들의 몫이다. 늦은 아침을 들고 자가용을 타고 일터로 떠나는 사람이나, 새벽 첫 차를 타고 꾸벅꾸벅 졸면서 일터로 가는 사람이나, 그들의 가슴에 있는 행복은 같은 것이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이라 했던가! 정원의 단풍나무 아래 아무도 모르게 피어있는 민들레를 보라! 민들레의 잎은 오월의 대지로부터 양분을 빨아들여 푸르고 싱싱하며, 노란 꽃은 조금의 흩어짐도 없이 화색 좋은 얼굴을 하고 있다. 제 곁의 키가 큰 단풍나무의 위용에 옴츠려들거나, 단풍나무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단풍나무 잎 사이로 꿈틀거리며 파고드는 햇살이면 감지덕지이다. 이미 새 잎이 돋아 그 잎이 어린아이 손바닥만 해진 단풍나무도 민들레를 깔보지 않는다. 너는 민들레요, 나는 단풍나무일 뿐이다. 그 뿌리가 단숨에 빨아들이는 수분의 양이 엄청나게 다르지만 시기하지도 욕심내지도 않는다. 민들레는 단풍나무의 그것과 비교해 보잘 것 없는 양이지만 자기의 몫이 딱 알맞고 충분한 양인 줄을 안다.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 썩어서 악취가 나든, 쓸모가 없어서 쌓아두든, 한없는 욕심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민들레가 단풍나무를 탐내어 필요 이상의 양분과 수분을 취하였다면 그 뿌리부터 썩고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민들레는 멸종된 종(種)으로 알아야 마땅하지만, 오늘도 민들레는 노랗게 피어 가냘픈 몸매를 바람에 맡긴 채 홀씨를 날리고 있다. 안분지족의 도를 터득한 까닭이요, 욕심을 버려 죄의 뿌리를 절(切)하였음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렇게 맑고 고운 자태로 피어 웃음을 보낼 수 있으랴!
민들레를 닮건, 단풍나무를 닮건, 인간은 무욕의 자연을 닮아야 한다. 자연은 언제나 인생의 좌표로 삼을만한 경구(警句)를 주지만 어리석게도 깨닫지 못하고 지나치고 있다. 무관심이요, 자만이다. 여지없이 불편함과 어려움을 토로하고야 만다. 누가 만들어 준 불편함인가? 누가 만들어 준 어려움인가? 삶이 어려운 것은 맞닥뜨린 일을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그 어려움이 있다. 또한 불편함이란 무엇인가? 풍족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부족함의 편견일 뿐이다.
모름지기 자연으로부터 안분지족의 도를 배워봄이 어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