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만남
베이직교회를 담임 하시는 조정민 목사님의 칼럼을 읽다가 느낀 바가 있었습니다.
“아무나 사귈 일이 아닙니다.”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내용 중에 <잘 되는 사람은 잘 될 사람들을 찾아 나서고 망하는 사람들은 망할 사람들을 즐겨 만납니다. 결국 만남이야말로 빈익빈 부익부의 원천입니다.>
(향유 냄새 나는 집, 아굴라와 브리스가 카페)
이 글을 보다가 복음 광고 51번째 현수막 문구를 <빈익빈 부익부의 출발점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있다 합니다. 인생에서 최고의 만남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요1;12)> 로 정했습니다.
인생을 사노라면 다양한 만남을 가지게 마련입니다.
여러 유형의 사람들을 접하면서 배우게 되는 점은 확실히 세상에는 자신을 기준으로 보자면 두 유형의 사람들만 있습니다.
일컬어 이로운 사람과 해로운 사람입니다.
마치 소설 상도에 등장하는 것처럼 하루에 수많은 사람들이 한양 도성을 출입하지만, 자신을 기준으로 보자면 내게 유익을 주는 유형과 해를 끼치는 유형으로 단순화 해볼 수 있습니다.(소설 상도에서는 이가(利家)와 해가(害家)로 구분합니다.)
만일 이 두 범주에 들지 않는 유형은 자신과는 무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러한 분류도 이론적으로는 간단하지만 경험해 보아야 알 수 있다는데 인생의 아픔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다 이로움을 줄 것처럼 보이지만 웃음뒤에 보이는 독소의 무서움은 상상을 초월한 법이기 때문입니다.
유한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네 인생들에 있어서 만사에 때가 있음은 당연지사입니다. 이러한 인생사의 이치를 솔로몬은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도서3;1) 이라 말씀합니다.
이러한 인생의 진리와 이치를 인정한다면, 유한한 이 땅에서 만의 만남에 연연할 것이냐? 아니면 영생을 주실 분과의 만남에 우선을 둘 것인가로 한정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신자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면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삶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한복음 3:36)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5)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 3:17)
생로병사와 희노애락을 피해 갈 수 없는 인생살이에서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구세주이심을 믿고(received him, 그분을 받아 들임) 살아감으로, 영원한 생명과 영구한 나라 백성으로서의 감격과 기쁨을 알고 누리는 은총을 맛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점에서 히브리서에는 믿음의 선진들이 보여주는 희안한 모습들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또한 자기 소유를 빼앗기는 일이 있어도, 그보다 더 좋고 더 영구한 재산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그런 일을 기쁘게 당하였습니다.>(히10:34, 새번역 성경)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히13:14)
영원을 볼 수 있고 영원을 사모하는 사람에게 더 이상 유한한 것에는 미련이 없기 마련입니다. 유한한 것에 가치를 두고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는 말은 곧 영원과 영구한 것을 보지 못하고 또한 믿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만남과 어떤 시간 관념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을까요?
여러분 한명 한명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