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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 관정으로 끌려가다
요 18:28-32
28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29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30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31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32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요 18:28-32 / [빌라도 앞에 서시다;마27:1-2,막15:1-5,눅23:1-5] 가야바 앞에서 심문이 끝났을 때는 다음 날 이른 아침이었다. 그 다음에 예수께서는 로마 총독 관저로 끌려가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관저 안으로 들어가 직접 예수를 고소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하면 불결해져서 유월절 양을 먹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29) 그래서 총독 빌라도가 유대인들이 있는 곳에 나와서 물었다. `당신들은 이 사람을 왜 고발하였소? 이 사람이 무슨 고소 당할 만한 일을 하였소?' 30) 유대인들이 의기양양해서 대답하였다. `그가 죄인이 아니라면 우리가 왜 그를 체포하였겠습니까?' 31) `그렇다면 그를 데리고 가서 당신네 법대로 당신들이 재판하시오' 빌라도의 이 말에 그들이 대답하였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누구를 사형시킬 권한이 없습니다.' 32) 이로써 예수께서 자신이 어떻게 돌아가실 것인가에 대해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가 체포당해 새벽에 빌라도가 있는 로마 관정으로 끌려오기까지 그 진행은 신속했습니다.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28) 새벽에 예수께서 빌라도 로마 총독 관청에 넘겨졌다는 것은 예수를 죽이기 위해 온 밤을 새워 새벽까지 불법 재판이 진행되었음을 증명합니다. 유대 전통적으로 모든 사법의 공회는 판결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반드시 해가 뜬 후부터 해지기까지 모여야 하며, 특히 사형에 대한 정죄는 절대로 밤에 은밀히 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목숨이 억울하게 잃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방인 빌라도의 관청에 들어가면 부정해지므로, 유월절을 지킬 자격을 잃는다고 생각해 밖에 있을 정도로 완벽한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위선자들입니다.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29-31) 빌라도는 종교 지도자들의 사주를 받아 새벽부터 몰려온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군중들은 이 사람이 행악자임으로 당신에게 데려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를 데리고 가서 당신들의 법대로 재판하시오’하고, 이 재판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이 제기하는 소송이 로마 법정에서 재판받을 성질의 것이 아니란 것과 유대인들이 이미 예수를 죽이려 확정해 놓고 추인해 달라는 것이므로 로마인의 법에 따라서 통치해온 총독으로서는 바른 판단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군중들은 시비를 가리려는 것이 아니라 사형선고를 내려달라고 압박했습니다.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32) 이 같은 고소는 예수께서 어떤 죽음으로 돌아가실 것을 미리 예언했던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예를 든다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 3:14), “내가 땅에서 들리면…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요 12:32-22)이라고 예고한 말씀을 이루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받게 할 것이나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마 20:19)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유대인의 종교법대로 돌에 맞아 죽으면 나무에 달리셔야 한다는 말씀이 응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방인의 손에 넘어가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심은 수난의 예고가 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적용: 예수를 체포하는 과정, 온 밤을 새운 심문, 예수의 답변들, 그리고 새벽에 빌라도에게 넘겨지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십시오. 예수께서 걸어가신 그 길, 십자가의 길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느 누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세상의 힘과 권력이 있는 자도 침범할 수 없으며 우리들도 어찌 할 수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이며, 하나님 나라의 왕이 누구신지 정확히 알고 인정하며 살아가야 하는 자가 우리임을 알아야겠습니다.
< 설 교 >
죄가 없으신 예수님
요 18:28-40 / 김태환 목사
오늘은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예수님 앞에 “죄가 없으신 (sinless)” “점이 없으신 (spotless)” “흠이 없으신 (blameless)” 이런 형용사들이 붙습니다. 율법 전문가들의 눈에도, 예수님에게 범법자 (criminal)라는 누명을 씌우려고 했던 산헤드린도, 헤롯 왕도, 로마 총독의 눈에도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지난 주에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할 수 있는 대속물 (ransom)이 되시기에 충분하다고요. 그만큼 우리의 죄가 크고 무겁기 때문에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물이 되시지 않으면 우리는 용서 받을 길이 없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빌라도는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인물입니다. 전 세계 모든 크리스천들이 예배 때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 속에 “본디오 빌아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구절이 영어로 된 사도신경에 “Jesus Christ who was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라고 나옵니다.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은 꼭 빌라도에게서만 받으신 것도 아닌데, 왜 다른 사람들의 이름은 모두 빠지고 빌라도의 이름만 들어갔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시어머니가 뒤늦게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세례 받기 전에 목사님과 문답(問答)을 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몇 가지 질문을 하면서 대답하는 것을 보고 세례 받을 준비가 되었는지 시험을 보는 것입니다. 그 집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예상 문제를 가르쳐 드렸습니다. “어머니, 목사님이 꼭 이 문제를 물어 보실 거예요. ‘예수님은 누가 죽였습니까?’ 그러면 ‘내가 죽였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세요. 알았죠?” 드디어 문답이 시작되었는데, 정말 목사님께서 그 질문을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누가 죽였습니까?” 그 시어머니는 이미 그 질문에 대해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자신 있게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 며느리가 죽였습니다.” 그 집 며느리가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닌데, 며느리가 무슨 잘못입니까? 빌라도에 대한 이름이 나오면 꼭 그 집 며느리같이 억울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 세계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되는가요? 대충 세계 인구의 1/3 정도로 보면 20억 정도 되겠네요. 이 사람들이 주일마다 사도신경을 외면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이러는 것입니다.
경에 나오는 빌라도는 정치인으로서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가 쓴 책에 보면 그 당시에 갈릴리에서 제일 폭동이 많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로마 정부에 대하여 대단히 비협조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빌라도는 폭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로마 군대를 보내서 갈릴리 사람들을 잔인하게 학살했습니다. 그 이야기가 누가복음 13:1에 나와 있습니다. 빌라도는 죽은 사람들의 피를 갈릴리 사람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에 섞게 했다고 합니다.
한편, 빌라도는 로마의 총독으로서 그가 가지고 있는 권력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는 당신을 놓아 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한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오?” (요한복음 19:10) 빌라도의 생각에는 예수님이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선처를 베풀어 달라고 애걸할 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지도 않았고, 변명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빌라도에게 “너의 권세가 위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면), 너에게는 나를 해할 어떤 권한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적인 면에 있어서 빌라도는 꽤 괜찮았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재판하기 전에 그의 아내가 “당신은 그 죄 없는 사람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마세요. 어젯밤 꿈 속에서 제가 이 사람 때문에 몹시 고통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27:19)”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또 빌라도 자신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시기해서 자기에게 넘겨 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태 27:18). 그래서 그런지 빌라도는 예수님을 마지막까지 지켜주려고 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고발한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소. 유월절에는 내가 여러분에게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관례가 있소. 그러니 유대 사람들의 왕을 놓아주는 것이 어떻겠소?" (요한복음 18:39) 빌라도의 생각은 사람들에게 누구를 석방할지 바라바 (Barabbas)라는 죄수와 예수님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면 당연히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택할 줄 알았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는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이렇게 나옵니다. 바라바에 대하여 “반란군 (rebellion)” “강도 (robber)” “혁명가 (revolutionary)” 이런 말들이 붙습니다. 또 “폭동과 살인죄로 감옥에 갇혀 있는 바라바 (누가복음 23:19, 25)” “아주 악명 높은 죄수 (마태복음 27:16)” 이런 말이 붙어 다닙니다. “내가 보기에 이 사람은 잘못이 없는 것 같은데 설마 사람들이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하겠어?” 이것이 빌라도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고, 더 이상 빌라도에게 다른 대안이 없었습니다.
이런 빌라도가 예수님과 어떤 말을 나누었는지 대화 내용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던 첫 마디는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나라였다면, 내 종들이 싸워서 내가 유대인들에게 잡히지 않게 했을 것이다. 이제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빌라도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왕이란 말이오?”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는 나에게 왕이라고 바르게 말하는구나. 사실 나는 이것을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것을 위해 세상에 왔다. 나는 진리에 대해 증언하려고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모두 내 말을 듣는다.” 빌라도가 다시 물었습니다. “진리가 무엇이오?”
이것이 그가 예수님과 나누었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왕이라는 말은 정치적인 의미에서 왕은 아니었습니다. 왕은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인데, 예수님께서 통치하는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고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그 길을 가르쳐 주려고 오신 분이었습니다. 머리에 떠오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6 말씀입니다. “내가 바로 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과, 진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진리와 비진리가 충돌할 때는 언제나 진리 편에 서는 사람입니다. 진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성경의 가치보다 더 실제적이고, 더 달콤하고, 더 매력적인 세상의 풍조와 가치를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지금 밖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사람들은 모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선동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7:20, 마가복음 15:11). 이 사람들은 실제로 예수님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선동을 받고 시키는 대로 바라바를 놓아 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쳐댔습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들도 저 밖에서 외쳐대는 사람들처럼, 사태의 진실을 모른 채 선동을 받고 따라가는 그런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들도 그렇습니다. 말도 안 되는 문제를 가지고 서로 다투고요. 자기들의 주장을 관철 시키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주장에 싸인을 하게 합니다. “왜 목사님은 거기에 싸인을 하셨습니까?” 하고 물으면, “아, 그 사람이 나하고 잘 아는 사람인데, 어떻게 싸인을 안 할 수가 있어요?” 그럽니다. 참 서글픈 세상입니다. 사람들이 진리에 대하여, 옳은 일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습니다. 쉽게 진리의 길을 포기합니다. 인간관계와 인맥을 진리보다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빌라도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진리가 무엇이오?” 하고 예수님께 물었으면 그 대답을 들어야 하지 않습니까? 안타깝습니다. 빌라도는 지금껏 살아 오면서 진리가 무엇인지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올바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한번도 자기 자신에게 해 보지 않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그런 것 가지고 고민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자기가 가진 지위와 권력을 누리면서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서는 인간답게 살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옳고 그른 문제를 가지고 갈등을 겪고, 진리 편에 섰다가 어려움도 당하고, 손해도 보고, 핍박도 받고, 감옥에도 가고, 그래도 나는 끝까지 진리 편에 서겠다고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는, 이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입에서 생전 처음으로 “진리가 무엇이오?” 하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그랬으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듣지 않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 읽은 말씀 38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 말을 하고, 빌라도는 다시 관저에서 나와 유대인들에게로 가서 말하였습니다.” 진지하게 진리에 대하여 생각하고 말씀을 들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자기 아내의 부탁도 있었지만, 예수님을 실제로 접해 보니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를 놔 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 주고 말았습니다. “만일 당신이 이 사람을 풀어 주면, 당신은 가이사의 지지자가 아닙니다. 자신을 왕이라고 하는 사람은 가이사를 반역하는 자입니다 (요한복음 19:12)” 이 말을 듣고 빌라도는 이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떠 오라고 하고, 그 물에 손을 씻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아무런 책임이 없다.” (마태복음 27:24)
여러분, 손을 씻는다고 해서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이 말은 어쩌면 진리에 대하여 그런 식으로 책임을 벗으려고 했던 빌라도의 비겁함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으면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이것이 그를 불안하게 했습니다. “폭동이 일어난다면 총독의 자리를 뺏길지도 모른다!” 이것이 그를 불안하게 했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권력이 있었지만, 그는 그 권력을 진리를 위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진리는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그것에게 속하는 (belong to)” 것입니다.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결코 그것을 떠나지 않고, 배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는 우리가 목숨을 다해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이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에게 호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고발을 당한 것은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시기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진리는 지켜야 한다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이런 빌라도의 오류가 오늘 우리에게도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한다는 그 무엇이 있습니까? 저는 그것이 여러분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사랑 받고, 가장 존경 받는 왕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인생을 통치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진리로 여러분의 인생을 다스리기를 원하십니다. 이 말은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나의 삶의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말을 듣는다 (Everyone on the side of truth listens to me)!”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권력의 왕과 진리의 왕
이필재 목사
솔직히 말해서 북한이 핵 능력이 저렇게 큰 줄 몰랐습니다. 정부도 몰랐던 거 같습니다. 이제 북한은 핵능력에 있어서는 확실하게 세계 10대 강국 안에 자리 매김을 했습니다.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게 핵능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세상에서 10 나라 밖에 없습니다. 정몽준 의원이 말했습니다. “강도는 기관총을 가지고 오는데 우리는 돌멩이 하나를 들고 막을 수 있느냐?” 그 비교는 맞습니다. 핵이 있는 나라와 없는 나라의 차이는 그렇습니다. 컴퓨터로 계산해 냈습니다. 북한이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핵탄두를 쏘면 한방에 서울 같은 밀집 지역은 인구 31만 명이 죽을 수 있다고 컴퓨터로 계산해 냈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게 있다고 합니다. 아무도 걱정을 안 한다고 합니다. 모두 믿음이 좋아서 그런가 봅니다. 바라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선하게 이 한반도를 운영하셔서 북한도 남한같이 교회가 세워질 수 있고 평화가 올 수 있는 거 하나만을 우리가 기대하면서 지혜롭게 국민총화를 이루어나가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부터 사순절입니다. 주님의 사역 마지막 부분을 생각하면서 지내는 시기를 말합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은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시는 장면 기록입니다. 본디오 빌라도라고 했는데 본디오가 이름입니다. 빌라도는 성입니다. 빌라도 법정의 재판으로부터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되는데 사람이 재판 자리의 피고인이 된다는 것은 누구도 피하고 싶은 고난 과정입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주의 국가였습니다. 그래서 로마 황제가 있고 그 황제 밑에 13명의 총독이 점령 국가를 감독하고 있었습니다. 13명 중에 빌라도는 수리아 지역 담당 총독입니다. 수리아 지역 안에 유대 나라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유대 총독으로 있던 시기는 역사적으로 주후 26년에서 36년으로 10년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20대 적에, 그리고 돌아가신 후 한 3년까지 거기에서 총독의 일을 봤습니다. 빌라도도, 예수님도 사실은 운명적으로 만난 사이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빌라도는 지상의 권세를 대표하는 왕 같은 위치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권 자격으로 피차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장소는 재판정이고 하나는 재판관의 권리로, 다른 하나는 피고인 자격이 되어서 마주 섰습니다. 한 사람은 말 한마디 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자기 임무 수행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고, 한 사람은 그의 말 한마디에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명이 달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재판의 과정을 객관적으로 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이 재판은 과정부터 그릇된 재판입니다. 세상의 어떤 죄인이든지 비록 그가 죄가 확실하다고 해도 그 과정은 질서 있게, 순서를 밟아서 사실 확인을 하고 맨 마지막에 확정 판결을 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여러분도 보셨을 만한 O. J. 심슨의 재판 과정은 일 년 반이 걸렸습니다. 온갖 재료를 다 연구 검토하고 마지막 최종 판결을 내렸는데도 당시 미국 국민의 여론들은 70퍼센트가 그 판결은 잘못되었다는 여론 조사가 나왔습니다. 오늘 성경에 예수님에 대한 재판은 미리 죽이기로 다 결정해놓고 마지막 형식적 절차 하나를 결재 받으러 온 것입니다. 28절에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이런 말이 있는데 예수님을 잡으라고 명령한 자는 당시 제사장 가야바입니다. 예수님은 이 가야바 종교 재판 과정에서 벌써 죽이기로 다 선거해놓고 빌라도에게 끌고 왔습니다. 왜 끌고 왔습니까? 유대 나라가 로마의 식민지이기 때문에 사형시키는 권한은 빌라도에게 있습니다. 여기 31절에 말합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로마법으로 재판할 필요가 없다.” 그랬더니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로마법대로 판결해 주십시오.”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이제 고민에 빠졌습니다. 나름대로 합법적으로 이를 사형시킬 만한 자료가 있어야 되는데 자료가 하나도 없으니까 사람들은 죽이라고 난리를 치고 죄는 없고 판결은 자기가 해야 되고…. 그런데 최종의 결과는 유대인들에게 말하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이것이 최종 판결문입니다. 예수는 죄 없다고 판결한 사람은 최고의 법정 재판관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그러면 이제 한 가지만 하면 됩니다. “이 사람은 죄가 없다. 무죄석방이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다 해결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죽여야 된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러니 큰일 났지 않습니까? 결국은 사형시키라고 빌라도의 명령에 의해서 빌라도의 부하들이 예수를 끌고 가서 사형 집행해 버렸습니다.
그러면 빌라도는 왜 그런 것입니까? 자신의 살 길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먼저 이 유대나라에서 빌라도의 위치입니다. 총독 가운데 빌라도는 유대 나라에 가서 아주 폭군 같은 인상을 주어왔고 유대인들의 미움을 샀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본래 로마 군대 주둔지는 가이사랴 지방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예루살렘은 거룩한 땅입니다. “아무리 식민지이지만 이 예루살렘 땅에는 로마 군인들이 들어오지 못한다.” 그래서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는데 빌라도가 예루살렘으로 주둔지를 옮겨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마음이 아주 상했습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서는 한 달이 멀다하고 팔레스타인 지역과 유혈 충돌이 생기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자꾸 생깁니까? 자기들이 주장하는 성역의 자리를 침범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모리아 산에 건축되어져 있는 예루살렘 성전은 지금은 이슬람 사원입니다. 그러니까 유대 청년들은 부글부글 끓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저 이슬람 사원을 폭파시켜 버리겠다.” 막 결사대가 조직되고 그게 발견되면 또 싸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룩한 땅이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 성지에 빌라도가 말을 타고 군대를 끌고 와서 주둔하고 있으니까 얼마나 원망의 대상이 되었겠습니까?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합니까, 불가합니까?” 예수님에게도 물은 적이 있는데 이 가이사는 로마 황제입니다. 그의 초상을 동판에 새겨서 예루살렘 중앙에 갖다 놨습니다. 가이사 초상에 새겨진 깃발이 예루살렘 사방에서 펄럭이고 있습니다. 우상 숭배를 싫어하는 유대인들이 그것을 볼 때마다 우상 개념이 되기 때문에 분통이 터졌습니다. 유대 나라 사람들은 누구나 다 성전세라고 해서 한 사람당 반 세겔씩 냅니다. 반 세겔씩이지만 국민 전체가 내니까 꽤 큰 금액입니다. 이것은 성전을 위해서만 쓰는 돈입니다. 빌라도가 다 빼앗아서 자기 총독 하는 일에 다 써버렸습니다. 국민감정이 폭발 직전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타이밍이 맞아 떨어지는데 “이번 유월절에 대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열두 살 이상의 모든 남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이니까 이 군중집회가 이때를 기회로 빌라도 타진 총 결사대회를 할 것이다.” 암암리에 조직하고 살벌하게 분위기가 다 조성되었습니다. 그런데 피해나갈 길이 생겼지 않습니까? 유대나라의 최고 법적 기구인 가야바 법정에서 예수를 끌고 와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죽이게 해주십시오!” 사실은 빌라도는 이것 때문에 살 길이 생겼습니다. 자기를 향하여 쏟아지는 원망의 소리가 예수에게 돌아가서 관심의 방향이 달라지니까 ‘아! 이 문제만 잘 처리하면 되겠다.’라는 속셈이 깔려있어서 무죄 석방을 못시키는 것입니다. 만약 이 유월절 폭동이 현실화되면 빌라도는 최소한 총독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됩니다. 소환됩니다. 그래서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느냐, 총독의 자리에서 물러나느냐 정치적 계산이 빌라도의 고민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경험합니다. 욕심이 생기면 진실은 벌써 떠났습니다. 민중들에게는 진실해보이고 싶고, 총독 자리는 유지하고 싶고, 이것이 불의한 정치인의 마음입니다. 빌라도가 지금 로마 총독이 되었다는 그 자체가 그는 정치적으로 굉장한 실력자이기 때문에, 13명의 실세 가운데 들어있는 사람으로 그는 자기가 만난 곤란한 위치를 평소 가지고 있는 정치 능력을 발휘해 해결하려고 합니다. 자기 양심의 후원을 얻으면서 총독의 자리는 굳게 지키자고 다짐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표현하느냐?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로 탈출구를 찾아내고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오늘 본문성경에서도 빌라도가 예수를 부르는 소리가 동일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군중들에게 예수님을 말할 때에도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이 그에게는 굉장한 계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고 나서도 맨 꼭대기에다가 팻말을 붙였다고 했습니다. 뭐라고 붙였습니까?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답변하십니까? “네가 말하는 대로 내가 왕이니라. 그러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팻말을 보고 빌라도에게 유대인들이 그 앞에다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 명칭 변경을 요구했습니다. 빌라도는 “아니다. 나의 쓸 것을 썼노라.” 끝까지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고집하고 죽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무슨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를 보니 죄가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살면서 빌라도가 예수를 모르겠습니까? 그는 메시야라고 말하는 선지자임을 다 보고받았습니다. 자기의 부하 백부장도 예수를 믿고 부하의 병을 고쳤습니다. 그는 신비한 능력으로 행한 것이 하나도 선하지 아니한 것이 없는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라야 성남시보다도 적습니다. 그 동네에서 일어난 것을 통치자가 모르겠습니까?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 주변의 사람이 수만 명씩 따라다녔다고 했는데 그 군중의 의미가 무엇인가 낱낱이 살피고 주시해 왔습니다. 보고 받았습니다. 그러나 빌라도가 예수님의 선교활동에 절대 방해를 하지 않은 것은 로마 정부에 손해가 안 납니다. 그런 사람을 죽이자니 양심이 허락하지 않고 안 죽이면 유대 백성들이 들고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자기와 똑같은 왕으로 만들어버리면 죽일 수 있는 권리가 생깁니다. “너 유대인의 왕이지? 그래, 내가 지금은 유대인의 왕으로 와 있는데 너는 로마를 반역해서 갈릴리에서 민중 선동을 해서 예루살렘까지 진격해서 유대인의 왕이 되고자 하는 것이지? 정치적 반란이지?” 똑같은 정치인으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나는 선지자이기 때문에 너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너는 로마의 항거하는 정치 세력이야. 유대인의 왕이야. 맞지? 네 제자들도 네가 왕이 될 때 좌편, 우편 권세를 달라고 했잖아! 너는 정치적인 맞수야! 죽여도 돼!” 그래서 죽인 것입니다. 정치가의 아주 기막힌 정치 기술이 발동합니다. “나는 로마 통치에 반기를 드는 유대인의 왕을 죽였지 절대로 선지자를 죽인 것이 아니야. 너는 유대인의 왕이야. 유대인의 왕이라고 저기 써 붙여.”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빌라도의 아내가 재판장까지 찾아와서 충고를 했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여보시오! 저 사람 재판 잘하시오. 내가 어젯밤에 저 사람 때문에 불길한 꿈을 꾸었나이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 조심해서 재판하시오.” 그렇게 말했지 않습니까? 가뜩이나 양심의 소리 때문에 괴로워 죽을 지경인데 아내가 와서 이상한 소리로 찔러대니까 더욱 심기가 불편해졌습니다. 빌라도의 아내가 꾼 꿈이 무엇인지 성경에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전설은 확실합니다. 그 꿈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이 똑같은 음성으로 끝없는 시간에 계속해서 똑같이 하는 말이 “빌라도가 죽였다, 빌라도가 죽였다, 빌라도가 죽였다.” 그렇게 외치는 꿈을 꾸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되었지 않습니까? 오늘도 우리가 다같이 빌라도가 죽였다고 말했지 않습니까? 사도신경을 항상 하고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2천년 동안 예수 믿는 사람들은 끝이 없는 시간에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동시에 똑같은 목소리로 끝없이 말합니다. 그대로 된 것입니다. “나는 깨끗하다, 깨끗하다.” 했지만 빌라도의 양심은 괴로워서 죽을 지경입니다. 그래도 총독의 자리는 지켜야 되니까 온갖 변수를 다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변수가 나옵니다. 바라바를 들고 나옵니다. 얼마 전에 이명박 대통령도 특사령을 발표해서 감옥에 있던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나 다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빌라도에게 권한이 있습니다. 예수 놓아줄 수도 있습니다. 빌라도가 말했습니다. “내가 너를 놓아줄 권세도 있고 죽일 권세도 있다.” 고유 권한입니다. 그래서 ‘아! 차마 이 사람을 죽일 수 없다. 그러므로 합법적인 방법을 동원해보자. 내가 가지고 있는 고유 권한인 특사령을 통해서 한번 변수를 써보자.’ 그래서 살인강도 사형수로 되어있는 바라바를 갖다 붙인 것입니다. “이 두 사람 중에 국민의 소원이 어디냐? 한 사람만 놓아주겠다.” 그러면 아무래도 “어휴! 바라바는 살려주면 안 됩니다. 바라바를 죽이고 예수는 살려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계산하면 “그래! 예수는 너희들이 요청해서 내가 살려주겠다.” 그러면 국민 동요는 없어지지 않습니까? 또, 자기는 자리가 보존되는 것입니다. 빌라도 아이큐는 수백이 넘는 거 같습니다. 별 변수를 다 갖다 부리고 나중에는 세숫대야에 물 떠오라고 해서 거기에 손을 닦습니다. “나는 깨끗하다.” 하는 종교 의식을 하는 것입니다. 손을 닦았다고 죄가 없어집니까? 별 수단을 다 써보는 빌라도의 고민이 반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형수 바라바와 예수를 경선 시켰습니다. ‘틀림없이 예수를 놓아주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정반대가 나왔습니다. “바라바를 살려주고 예수를 죽여야 된다.” 그래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한 가지를 교훈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왔노라.” 빌라도가 물었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예수님이 무언의 대답을 하셨습니다. “너 같이 사는 것이 비진리요 나같이 사는 것이 진리다. 너는 지금 옳은 일을 판결하지 아니하고 비진리를 위해서 네가 가고 있다.” 그것입니다. “내가 가는 길은 살고자 함이 아니요 진리를 실행하고자 함이요 네가 가는 길은 모든 거짓을 다 동원하여 살고자 하는 비진리의 길이다. 네가 그 길을 가고 나는 이 길을 갈 것이다. 네 입으로 나를 죄 없다 하고 네 입으로 나를 정죄하느냐? 너는 세상의 왕이고 나는 진리의 왕이다. 너의 진리는 왕의 자리 유지 밖에 없는 진리다. 그게 비진리다.” 우리가 역사나 현실에 보아서 넉넉히 알 수 있습니다. 왕들은 국민과의 약속이라든가 국민의 정사라든가 정치 발전의 역사성이라든가 이런 것들은 아랑곳없습니다. 누구 할 것 없이 독재자들은 오직 나의 왕권의 자리를 유지하는 데다 모든 것을 맞춥니다. 지금 북한을 보십시오. 국민은 굶어 죽든지 말든지 세계가 무슨 말을 하든지 말든지 김일성 보존이라는 정치 철학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끝없는 국민 고통을 시키고 있잖아요? 다른 왕들도 그런 왕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늘 아침까지 북한 핵실험하는 것을 반대하는 나라가 세상에서 72개국이 나왔습니다.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정치적으로 무기력했습니다. 죄 없다는 변호인단의 변호 한마디 후원받지 못하고 처참하게 끌려가 물리적 힘에 의해 죽으시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예수가 말하는 진리란 무슨 힘이 있는 것이냐? 빌라도의 거짓된 권세는 예수를 3일 동안 무기력하게 만들었습니다. 3일 후에 진리는 부활했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의 힘은 조용히 성령의 불이 붙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빌라도 군대의 주둔지요 가야바 법정 소재지인 예루살렘을 달구기 시작했습니다. 그 불길은 누구도 끌 수 없이 타오르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이 지구상에 가득하게 퍼져나갔습니다. 그 진리는 빌라도를 파송한 로마를 점령했고 가장 중요한 그 중앙에 베드로 성전이라는 교회를 세워 세계 모든 교회 중심지 역할을 지금까지 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죽는 거 같으나 사는 것입니다. 비진리는 사는 것 같지만 죽습니다. 오늘 28절 말씀을 보면 이상한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유대인들이 자기 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유월절을 보내려고 법정 안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소리만 지르고 있으므로 빌라도가 법정 안과 밖을 나갔다 들어갔다 하면서 재판을 합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얼마나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있는지 유월절 절기에 저런 예수와 같은 죄수와 가까이 하는 것이 부정하다고 믿기 때문에 가까이 안 들어온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잘못되면 하나님 배지를 달고 다니면서 하나님을 죽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먼저 죽는 것입니다. “살고자 하면 먼저 죽어라”입니다. “망신당하고 정치력 없이 무기력 하게 물러나는 자는 다시 부활할 것이다. 왜 이 진리를 너희가 모르느냐? 나는 진리의 왕이다. 그래서 내가 먼저 죽는 것이다.” 여러분! 손해 보면서 예수 믿으십시오. 이기지 마십시오. 양보하고 지십시오. 피 흘리고 그냥 쓰러지십시오. “아! 내가 졌습니다.” 악착 같이 잔머리를 굴려서 자기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지 마십시오. 죽으십시오. 저는 오래 목회 생활 했습니다. 노하우가 생겼습니다. 어떤 문제든지 나를 먼저 죽이십시오. 그러면 삽니다. 두 왕들의 대화에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찾아야 됩니다. 운명적으로 만난 빌라도와 예수! 세상의 왕과 하나님의 나라의 왕! 어떤 길을 내가 선택할 것인가? 영적 지혜가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
요한복음 18:28~40 / 하용조 목사
인류 역사상 가장 아이러니하고 이해하기가 안 되며 이상한 재판이 있다면, 바로 예수님께 행한 재판입니다. 그 재판은 유대인들에 의한 종교 재판과 로마인들에 의한 정치 재판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종교 재판도 아니고 정치 재판도 아닌 매우 특이하고 불합리한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본문의 28절 말씀부터 읽습니다.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이 짧은 한 구절 안에서 불법적인 정치 재판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증거로 첫째,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시려고 가야바 법정에서 빌라도 법정으로 옮겨지십니다. 한 법정에서 계속 재판을 받는 게 아니라 필요에 따라 재판장이 바뀌는 겁니다.
매우 특이하고 이상한 재판
둘째, 예수님께서 새벽에 재판을 받으십니다. 여기서 ‘새벽’이란 현대로 말하면 오전 3~6시에 해당합니다. 예수님께서 심야에 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어떤 재판이기에 그토록 급하게 서둘렀을까요? 예수님께서 전시(戰時)에나 있을 법한 재판을 받으신 겁니다. 그것도 살인이나 강도 혹은 쿠데타와 같은 중죄도 아닌데, 충분한 검증 절차도 없이 졸속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빌라도의 법정을 의미하는 ‘관정’에 유대인들은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인 빌라도의 법정에 들어가면 유월절 잔치에 참여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빌라도가 관정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29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빌라도가 밖으로 나오자 유대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를 지릅니다. ‘저 사람은 행악 자이기에 우리가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무슨 악을 행했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도대체 어떤 죄를 지었기에 이런 꼭두새벽에 데리고 왔느냐는 겁니다. 정치적 관점에서 보느냐, 종교적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혐의는 달라지겠지만 빌라도가 봤을 때 예수님에게서 아무 혐의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살인이나 강도 혹은 국가 전복 등을 꾀한 중죄를 지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데리고 가서 너희의 법대로 재판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이 사람을 죽여야 하는데 자신들에게 그럴 권한이 없으니 로마법에 따라 사형시켜 달라는 겁니다. 30, 31절 말씀을 봅니다.
“대답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하니.”
여기서 유대인들의 속셈이 완전히 드러납니다. 합법을 가장한 불법을 자행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로마법을 이용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려고 편법을 쓰고 있습니다. 32절 말씀을 읽습니다.
성경을 이루시는 예수님의 죽음 방법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유대인들의 행위는 성경 말씀의 예언을 이루는 것입니다.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한 재판이 피할 수 없는 정치적 압력임을 알게 됩니다. 그는 로마에서 파견 나온 유대 총독인데, 간교한 유대인들은 그 사실을 백분 활용해 여론 재판으로 몰아갑니다. 재판의 내용은 없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만약 당신이 이 재판을 하지 않거나 거부한다면 우리는 이 사실을 로마에 알릴 것이고, 그러면 당신의 정치 생명은 끝날 것이다’라며 무언의 협박을 하고 있습니다. 권력에 약했던 빌라도는 인간적 양심과 정치적 현실 사이에서 고심합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마음에도 없는 재판을 시작하면서 형식적으로 심문합니다. 33, 34절 말씀을 봅니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빌라도는 사태가 시끄러워지자 관정으로 들어와 예수님을 불러들입니다. 관정 바깥에서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며 무심코 질문합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예수님의 응답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듭니다. 곧 예수님께서 ‘그것은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하는 말이냐’며 도로 물으시는 겁니다. 빌라도는 귀찮은 생각으로 마음에도 없는 재판을 하다가 예수님의 말씀에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35절 말씀입니다.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세상에 속하지 않은 예수님의 나라
빌라도는 예수님께 ‘유대인들과 그들의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다시 묻는 겁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빌라도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말씀을 하십니다. 그게 36절 말씀이고, 오늘 설교의 주제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총독이고 재판관인 빌라도는 갑자기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유대의 모든 권한을 갖고 있는 빌라도도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종류의 나라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나라가 있고,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가 있음을 예수님을 통해 듣게 됩니다. 전쟁, 테러, 불법, 흥망성쇠가 있는 이 세상 나라가 전부는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새로운 나라가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 나라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가 쓴 ‘신국론’(神國論)은 좋은 작품입니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멸망당한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나라가 있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또 하나의 나라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이 말씀을 알아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이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은 잘 없습니다. 오늘날 인공위성, CNN 방송, 인터넷 등으로 지구상의 모든 소식들을 들을 수 있지만, 이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은 없습니다.
빌라도의 세계관에 이 세상의 나라가 있고, 예수님의 세계관에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사람의 나라가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도 있는 겁니다. 우리는 사람의 나라에 대해 이해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선 전혀 모릅니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특징
우리는 두 나라를 대비시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 세상 나라의 특징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인류의 역사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를 보면 얼마나 많은 나라들과 문명들이 일어섰다가 사라져갔는지 모릅니다. 물론 민족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이 세상 나라의 특징은 사람이 통치합니다. 옛날에 왕이 통치했고, 지금은 독재자나 영웅이 통치합니다. 민주주의 국가라는 제도에서 대통령, 수상, 권력 기관이 통치합니다. 어쨌든 그들은 모두 사람입니다. 그리고 전쟁, 테러, 압제 등이 있습니다.
셋째로 이 세상 나라의 특징은 자기 사랑입니다. 한 국가, 한 민족의 핵심 사상은 이기심입니다. 요즘 대한민국은 독도 문제로 일본과 대립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이라크, 북한 등도 모두 나름대로 명분을 갖고 있습니다. 그 명분의 핵심에 이기적 욕망이 들어 있습니다.
넷째로 이 세상 나라의 특징은 항상 권력 중심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가 이기게 돼 있는 게 이 세상 나라입니다. 또한 이 세상 나라는 정신적이지 않고 물질적입니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우선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도 끝도 없고 멸망해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둘째로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통치하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백성들을 보호하십니다.
셋째로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이타적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섬기는 자가 리더입니다.
넷째로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영적입니다.
고로 두 나라의 세계는 너무나 다릅니다. 로마서 14장 17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또 마태복음에서 천국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천국,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최소한 세 가지 요소가 내포돼 있습니다. 하나,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둘, 하나님의 통치 영역입니다. 셋, 하나님의 통치 그 자체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고 이미 임했으며 곧 완성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과거, 현재, 미래의 다양한 시제로 기록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동시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 28절에서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기 때문에 귀신이 떠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의 마음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신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또 누가복음 17장 20~21절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시제와 공간을 갖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적입니다.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서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곧 천국의 도래
마태복음 3:2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곧 천국이라는 사실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셨음을 뜻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 나라에서 고민하고 갈등을 겪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슬퍼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으며, 환희와 감사와 찬송과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3장 3~5절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재미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하셨지만, 그 나라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거듭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이성이나 학습 등으로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7~8)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헷갈렸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계와 너무 다르고 상식에도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저는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찬송가 495장을 좋아합니다. 3절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이런 고백이 있는 사람들은 천국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가난, 질병, 실패, 억압 등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사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정부 기관이나 기업체에서 일을 하고 정당에도 가입해 활동을 하지만, 우리가 속한 나라는 이 땅에 있지 속하지 않은 것입니다. 37절 말씀을 읽습니다.
왕이신 예수님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예수님의 말씀에 빌라도는 또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빌라도는 로마가 곧 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는 그게 아닌 것입니다. 38절 말씀입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여기서 우리는 나라가 두 개이듯, 진리도 두 개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세상 나라에서 통용되는 진리가 있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통용되는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진리에 대해 말씀하시고, 빌라도는 이 세상 나라의 진리를 생각합니다. 같은 시간에 한 공간에서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과 대화할수록 낭패를 경험합니다. 따라서 그는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골치 아픈 논쟁을 피하고 싶은 겁니다. 오직 그의 관심은 예수님께서 어떤 죄라도 지었느냐 짓지 않았느냐는 겁니다. 아무리 찾아 봐도 죄가 없는 사람을 사형시켜야 하다니 얼마나 골치 아프겠습니까?
죄가 없으신 예수님
그 순간 빌라도는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에 죄수 한 명을 사면하는 전례를 생각해 냅니다. 그걸 기회로 예수님을 심하게 때리고 풀어주면 자신의 양심도 편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을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제안합니다. 그런데 모여 있던 유대인들이 예수가 아니라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바라바는 강도입니다. 자타가 인정하는 사형당해 마땅한 흉악범입니다. 39, 40절 말씀을 봅니다.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
민중, 대중은 소중하지만 그와 반대로 가장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는 양면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유대 군중은 예수님 대신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결국 강도 바라바는 풀려나고,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사형을 당하시게 됩니다.
주님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
김충식 목사
예루살렘을 가면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고 일컫는 십자가의 길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께서 빌라도로에게 사형 언도를 받은 법정에서부터 갈보리 언덕에서 죽으시고, 묻히신 무덤까지의 길을 일컫습니다. 다른 말로는 ‘슬픔의 길, 탄식의 길’이라고도 합니다. 지난 주간 성지순례를 가서 십자가의 길을 세 번째 걸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결코 먼 거리가 아닌 불과 1km 남짓 되는데 예수님이 머무셨던 14장소가 있습니다. 그 곳을 ‘Holy Place’ 또는 ‘Station’이라고도 하는데, 그 곳에는 예수님이 머무신 곳을 기념하는 예배당이 지어져 있거나 성물들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색다르게 다가옵니다. 예수님이 머무신 곳을 말씀드리면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로마 군병들에게 심문과 채찍질과 매질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어머니를 만나고, 베로니카를 만납니다. 예수님은 슬픔을 가득 안고 뒤따라오는 여인들을 위로하시고, 십자가를 지기 힘겨우셔서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지고 빈 몸으로 걷지만, 세 번씩이나 넘어지십니다. 그리고 골고다 언덕에 다다렀을 때 옷을 벗기우고, 눕혀서 못을 박히시고, 십자가에 달리시어, 죽으신 후 묻히신 무덤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길이 주는 의미를 되새겨 보겠습니다.
첫째로, 십자가의 길은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이 되신 길입니다.
고린도후서 5:21을 보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하며, 고린도전서 15:3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인데 우리를 위해 죄인이 되시고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기 위해 죄인이 되어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죄없으신 분이 스스로 죄인이 되셨지만,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예수님이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두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유대인들이고 또 하나는 빌라도입니다. 예수님이 사형선고를 받으실 때 법정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살려주고 싶어서 폭동과 살인죄로 투옥된 바라바와 예수님 둘 중에 누구를 놓아주면 좋겠느냐는 질문을 유대인들에게 하지만 그들은 바라바를 요구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죄인이 되게 하신 것은 작은 이해관계와 독선적인 신앙관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바라바를 죽이는 것보다 유익했습니다. 그래서 바라바를 내어달라고 요구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것입니다.
반면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살려주려고 애를 쓴 사람으로 복음서에 묘사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인 사형선고를 내린 사람은 빌라도입니다. 그러므로 지나간 2,000년 동안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사도신경을 외울 때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는 고백을 합니다. 빌라도가 사형선고를 내린 이유는 인기영합주의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죄가 없으신 줄 알았고, 바라바보다는 예수님을 풀어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포퓰리즘(populism)의 대표자가 되었기에 군중들의 마음을 사고, 자신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쉽게 생각했습니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처럼 빌라도도 유대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하였을 때 대단한 야심과 야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총독부가 있는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에 황제의 신상이 그려져 있는 깃발을 들고 왔습니다.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성이었기에 유대 백성들은 다른 신상이 들어오는 것을 금기시 했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힘에 밀려서 황제 신상이 그려진 깃발을 다시 가이사랴로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더 큰 출세를 위해 예루살렘 사람들과 사마리아인들이 폭동을 일으켰을 때 매우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예수님의 재판도 진리를 따르거나 공의를 따르지 아니하고, 출세와 인기와 성공을 위해 주님을 죄인으로 정죄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빌라도가 이런 일로 더 큰 출세를 해야 되는데 요세푸스 역사가에 의하면 후에 죄책감에 못 이겨 스스로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최종적으로 진리가 승리한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이 승리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유대인이나 제2의 빌라도가 되기 쉽습니다. 작은 이해관계나 또는 인기나 세속적인 욕구로 인하여 예수님을 언제든지 불신하거나 배신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순절 기간을 맞이하여 겸허히 자신을 돌아보면서, 예수님을 죽이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을 전달하므로 영혼을 살리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사람과 살리는 사람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세상의 작은 것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다든지,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죄하는 것이 아닌, 끝까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예수님만이 영원한 나의 주님이시라는 고백을 하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죄 없으신 분인이지만, 죄인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둘째로, 십자가의 길은 수치와 수모와 고통의 길이였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길의 거리가 불과 1km 내외인데 젊은 장정인 예수님이 하룻밤 심문과 고통으로 그렇게 무겁지 않은 십자가를 왜 못 지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빌라도 법정을 떠나 불과 얼마 안가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 걸을 힘이 없어 구레네 시몬이 대신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다. 더 한 것은 맨몸으로도 걸을 수 없어서 세 번씩이나 넘어집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성지순례를 통해서 확실하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60대인 저도 질 수 있는 십자가로 예수님이 하룻밤 고난을 당했다고 해서 못 질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다른 이에게 맡길 수밖에 없고, 쓰러지고, 또 쓰러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십자가형에 처할 사람은 선고를 받자마자 십자가에서 빨리 죽기 위해 심한 채찍질과 매질을 통해서 거의 일어설 수 없을 정도의 초죽음 상태로 만들어 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3살의 청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쓰러졌던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당하신 육체적 고난입니다.
더우기 십자가의 길은 수치의 길입니다, 골고다 언덕에 도달하면, 예수님의 옷을 벗긴 장소가 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속옷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림을 보면 부끄러운 곳을 가린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완전히 벌거숭이 상태가 되신 것입니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벌거숭이가 되신 주님은 큰 수치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저는 아직까지 교회 성도들과 목욕을 같이 한 적이 없습니다. 선교여행이나 성지순례를 가도 구분을 하여 화장실을 사용합니다.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장 극도의 수치심을 느끼시는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 지나가는 사람들이 침을 뱉으며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뛰어내려오라 다른 사람은 구원하면서 왜 네 자신은 구원을 못하느냐?’하는 모욕까지 당하십니다. 이사야 53:3을 보면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질고를 당하시고 징벌을 당하시고 수치를 당하신 것은 곧 우리를 위해 당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주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주는 분이기에 주님을 필요로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주님을 위해 작은 희생이라도 드릴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입니다. 혹시라도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주어지는 시련이나 불이익, 시험이나 어려움이 있더라도, 예수님이 당하신 수치와 수모와 고난을 기억하면서, 이겨나갈 뿐만 아니라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십자가의 길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으신 길입니다.
자칫 잘못생각하면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혼자서 해낼 수 있는 분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걸으실 때 어머니인 마리아를 만났습니다. 십자가의 길에는 슬픔과 괴로움으로 가득찬 마리아가 예수님을 부둥켜안고 있는 조각상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 가운데 최고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아픔과 고난 중에서도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면서 힘을 얻고 용기를 가지셨을 것입니다. 다음에 만난 사람은 베로니카로 알려진 전승의 여인입니다. 베로니카라는 여인은 삼엄한 경비와 공포분위기도 아랑곳하지 않고 군중 속에서 뛰쳐나와서 자신이 두르고 있는 수건을 꺼내어 피와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주님의 얼굴을 닦아주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베로니카는 혈루증을 앓다가 예수님께 치유받은 여인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주님의 은혜를 감사했기에 자신의 위험은 생각하지 않고 주님께 다가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준 사랑의 수건에는 예수님의 얼굴 자국이 있어 그 수건이 기적을 일으키는 수건이 되었다고 합니다. 베로니카라는 말은 영어로 번역하면 트루 이미지(True Image)입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의 진실한 사랑을 받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습관적으로나 의례적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이 아닌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감동을 갖고 주님을 찾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실 때에 일부 여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북받치는 슬픔을 가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들을 통해서도 힘을 얻으시고 위로를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멀리서라도 진정한 주님의 후원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묻히실 곳이 없어 잘못하면 밖에 버려져서 짐승이나 새들의 밥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이 등장해서 예수님에게 새 무덤과 향품을 제공하여 귀한 장례를 치루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들을 준비시켜 주님을 섬기게 했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슬픔과 탄식의 길이요, 고통의 길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등장하여 주님을 섬겼습니다.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예수님에게 수치심과 모욕감과 고통을 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예수님의 아픔을 감싸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돕는 사람도 있었던 것이 주님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넷째로, 십자가의 길은 주님이 귀한 말씀을 주신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이 열네번 머무시는 중에 말씀을 주신 곳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눅23:28)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는 당신을 위해서는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비록 십자가에서 죽으시지만 사흘 후에는 찬란한 부활의 영광에 들어가는 것을 알고 계셨기에 “나를 위해서는 울 필요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대신에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하십니다. 여기에 나타난 ‘너희는’ 예수님을 따르는 여인들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이든 자신의 죄를 보면서 애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십자가에 달리어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우는 것보다 먼저 우리 속에 있는 죄성과 악한 모습을 보면서 통회하고 자복하고 애통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는 말씀은 역사적으로는 40년이 지난 주후 70년에 로마의 티터스(Titus) 장군에 의해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여인들의 자녀들이 예루살렘 멸망 때 당해야 하는 참상을 보신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의 자녀들은 예루살렘 멸망 때에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우리도 내일을 모릅니다. 1년 후의 일은 더욱 모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서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보면서 애통해 하며, 우리 자녀를 위해 울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은총 속에 거하기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비록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은 영적인 눈이 뜨여서 하나님의 세계를 보라는 의미입니다. 현실에만 급급해하지 말고 가치있는 세계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장 눈 앞에 있는 땅만 바라보면서 사는 어리석은 인생이 아니라 하늘의 세계를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이 귀에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에는 예수님을 죽인 사람과 예수님에 대해 적대감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예수님에게 작은 사랑이라도 드리고 싶어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말씀하셨습니다. 사순절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 주님이 걸으신 그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으면서, 우리도 고난당하시는 주님에게 무엇인가 드릴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양다리 걸친 사람
요 18:28-40 / 조상호 목사
미리 보기
어느 글을 보니 교회 안에는 크게 네 종류의 크리스챤이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바울 형(Paul Type)’ 입니다. 바울은 처음에 기독교를 박해하며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가두며 핍박했습니다. 그러다가 믿는 자들을 체포하려고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 후 인생의 방향이 180도 변한 인물입니다. 박해자에서 하루아침에 믿음의 사람이 되었고 남은 생애를 변함없이 주님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을 만나서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급선회한 바울처럼, 주님을 믿고 딴 사람이 된 후 이웃으로부터, 친구들로부터,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람이 완전히 변했다>는 말을 들을 뿐 아니라, 주님 만나는 그날 까지 바울처럼 치선을 다하여 굴곡 없이 주님을 섬기는 성도가 있습니다. 둘째로 ‘베드로 형(Peter Type)’ 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열정적이고 매사에 적극적입니다. 호언장담을 하며 다른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쉽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께서 로마군병에게 잡혀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을 때, 세 번씩이나 부인하며 주님을 배신했다가 곧 바로 회개하여 마음을 돌이키는 등, 부침이 심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좋을 때는 태산도 옮길 것 같은 태도로 호언장담을 하다가도, 겨우 한 달도 못되어 꼬리를 내리며 식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또 어떤 부흥회나 수련회 같은 때에 다시 불이 붙었다가 시간이 흐르면 또 식어져 믿음이 완전히 바닥에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성도가 바로 베드로 형입니다. 셋째로 ‘롯의 아내 형(Lot's Wife Type)’ 입니다. 그녀는 소돔과 고모라성이 멸망할 때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천사의 말을 어겼다가 소금 기둥으로 변한 성경속의 인물입니다. 그녀는 주님을 알고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즐겨왔던 세속의 달콤함을 못 잊어 뒤돌아보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소돔과 고모라 성을 뒤돌아보았던 여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롯의 아내처럼 세상의 즐거움에 미련이 남아 자꾸 세상을 뒤돌아보는 사람이 바로 이 유형에 속합니다. 넷째로 ‘빌라도 형(Pilate Type)’ 입니다. 그는 로마 총독의 신분으로 예수님을 재판 할 때, 세상과 주님 사이에서 고민하며 갈등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를 결정하지 못한 채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그는 세상과 주님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던 양다리 걸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 네 가지 부류 중에 어느 부류에 속하십니까? 독야청청 주님을 위해 살았던 바울 타입 입니까? 아니면 믿음이 식었다가 다시 불붙었다가를 반복하는 베드로 타입 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세상에 미련이 남아 자꾸 세상을 뒤돌아보는 롯의 아내 타입 입니까? 아니면 세상과 주님 사이에서 교묘하게 양다리 걸치고 있는 빌라도 타입 입니까? 여러분들은 어떤 타입에 속합니까? 저는 오늘 양다린 걸친 사람, 빌라도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는 누구인가?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빌라도 총독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는 본래 로마 상류층 출신이 아니라 평범한 중류층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로마 황실 집안의 여인인 <클라우디아 프로큘라>라고 하는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우리에게는 디베료라고 알려져 있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세 번째 아내인 클라우디아의 딸이며,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손녀입니다. 중류층 출신인 그가 어떻게 해서 황실 집안의 딸과 결혼을 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중류층 출신인 그가 황실 집안의 여인과 결혼함으로써 단번에 상류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후 26년에 그는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이 시기는 세례 요한이 막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출현을 예언하면서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려는 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상황을 기록한 여러 가지 역사서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는 정치를 잘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유대 총독으로 취임한 초기에 로마 황제숭배를 강요하다가, 우상숭배를 그 어떤 것보다 금기시하는 유대인들과 아주 심각한 갈등 가운데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또 그가 다스리고 있는 지중해 해안도시인 가이사랴에 소위 수문(水門) 건축을 하기 위해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자, 유대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켜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빌라도 총독이 정치를 잘 하지 못하자, 그에 대한 나쁜 소식이 로마 중앙정부에 끊임없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졌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의 기회가 없었습니다. 만약 한번 만 더 유대 땅에 문제가 발생하면 유대 총독인 그는 더 이상 로마 황제의 신임을 받지 못할 만큼, 그는 절박한 상태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 때가 그가 유대의 총독으로 파견된 지 4년째 되던 시기입니다. 그가 이렇게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태에 유대인들에게 있어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루살렘에서 큰 소동이 일어날 것 같다는 보고를 받게 되어 평상시 머무르고 있던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와서 예루살렘에 있는 총독 관저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시기에 유대인들이 그에게 찾아와서 나사렛 예수를 재판을 해서 사형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웃기는 재판
그런데 이 재판이라는 것이 웃기는 재판입니다. 원래 재판을 언제 합니까? 날이 환한 낮에 진행합니다. 그런데 28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 남들 다 집에서 두 다리 뻗고 자고 있는데 웃기지도 않게 새벽에 찾아와서 재판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중요한 사건에 대해서 밤에 심문하는 것을 금지한 로마법에 어긋나는 재판이었습니다. 또 재판이란 고소한 원고와 고소당한 피고가 각각 재판관 앞에 함께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본문 28절을 보면 고소인인 유대인들은 이방의 재판정에 들어가면 자신들의 몸이 더럽혀진다고 해서 재판정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소한 유대인들은 재판정 밖에 있고, 고소당한 예수님은 재판정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재판장인 빌라도는 고소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어떻게 합니까? 29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 그는 고소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재판정 밖으로 나가서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고소당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그가 어떻게 합니까? 33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는 고소한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들은 후, 다시 재판정안으로 들어갔습니다. 38절도 보시기 바랍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지금 빌라도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나가서.. 다시 들어와서.. 다시 나가서..” 그의 들락달락, 왔다갔다, 갈팡질팡하고 있는 그의 이와 같은 행동은 19장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19장 4절을 보면,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다 하더라.” 또 9절을 보면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서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또 13절을 보면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 (히브리 말로 가바다) 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더라.”라고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계속해서 밖에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고, 다시 나갔다가 다시 나오고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결단하지 못하는 모습이 빌라도의 모습이요, 이쪽으로 갔다가 저쪽으로 갔다가를 반복하는 양다리 걸친 모습이 바로 빌라도의 모습입니다.
양다리 걸친 자
당시의 정황에 의하면 그는 예수님이 죄가 없으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마태복음 27장 18절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빌라도는 왜,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지금 자기 앞에 붙잡혀 왔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서기관들의 시기 때문에 예수라는 사람이 곤경과 박해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자기 앞에 죄인으로 끌려왔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그는 예수님이 자기에게 끌려왔을 때, 유대인의 종교문제로 쉽게 처리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33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다른 복음서와 본문을 정리해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했던 것과 같이 아주 간결하고 분명하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말하였도다. 네가 말한 그대로다.” 빌라도가 또 묻습니다.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하는지 듣지 못하느냐?(마27:13)”예수님은 거짓증거에 침묵하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재판하면서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이 두려워하지 않고 침착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오히려 심히 기이히 여기게 되었습니다(마27:14). 그는 예수님에게서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느낀 것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27장 19절을 보면 갑자기 자기 집으로부터 그에게 메시지가 왔습니다. 자기 아내가 그에게 재판 직전에 보내 준 메시지였습니다.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 아마도 새벽녘에 밖이 시끄러워서 빌라도가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간 후, 그의 아내는 계속해서 잠을 잤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무슨 꿈인지 모르지만 꿈자리가 매우 시끄러워 그녀를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재판하고 있는 남편에게 편지를 보낸 것 있습니다. “내가 꿈에 무척 고생을 했어요. 저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니 상관하지 말고 당신은 손을 떼세요.” 아내의 꿈을 통해서 전해진 메세지 역시, 예수는 죄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빌라도 그는 예수님이 죄가 없으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38절을 보면 더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그는 예수님에게서 그 어떠한 죄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죄!>라고 선언하면 되는데, 그는 <무죄!>라는 단 한 마디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냥 어정쩡하게 외줄 타기 하듯 양다리 걸치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양다리 걸치는 사람은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양다리 걸치면 고통이 따른다
제 초등학교 친구 중에 이모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이 친구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대학교 1학년 때 실로 8년 만에 만났습니다. 알고 보니 저와 같은 대학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학교에서 유명한 춤꾼이었습니다. 당시에 얼마나 춤을 잘 추는지 이 친구가 떴다하면 춤을 추던 사람들이 다 춤을 멈추고 그가 추는 춤을 보고 있었다고 할 정도로 소문난 춤꾼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여학생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습니다. 많은 친구들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많은 여자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친구가 우거지상을 하며 찾아왔습니다. 알고 보니 두 여자 사이에서 양다리 걸치고 있었는데 그것이 고민이 되어 잠도 오지 않고, 공부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친구는 1학년 때 4.2만점에서 평균 점수 1.8인가를 받아서 낙제하여 1학년을 또 다시 다니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친구를 보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두 여자를 한꺼번에 사랑하는 남자치고 행복한 사람은 없다” 이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아무리 두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고 싶어도 한꺼번에 둘 다 사랑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한 쪽에만 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쪽을 다 가슴에 품고 왔다 갔다 하면 마음에 갈등과 심적 고통만이 뒤따릅니다. 두 여자 사이에 양다리 걸친 남자는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앞에 두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함께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세상과 당신을 겸하여 섬기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양다리 걸치기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10장 2절에서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죄를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치시며 그 주상을 헐으시리라.” 우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죄 값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도 소중히 투자하고 아끼면서 세워놓은 모든 것이 다 허물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두 마음을 품고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양다리 걸치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양다리 걸치는 사람의 말로는 비참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줄타기 하듯이 양 다리 걸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고정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향한 한 마음만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내 마음을 채울 때는 항상 행복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마음을 주기 시작하면 갈등과 고통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성경말씀을 읽어도 그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마음이 나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본문에 등장하는 빌라도는 고통스러운 양다리 걸치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는 최후로 자기가 판결하지 않고 군중들로 하여금 판결을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39절)” 그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최후의 결정권을 군중들에게 넘겨줍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의 사주를 받은 군중들은 “바라바라. 바라바를 놓아주소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소리 지르기 시작합니다. 유대인들은 진짜 강도인 바라바를 놓아주는 대신,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주장합니다. 이 때 빌라도는 어떻게 합니까? 마태복음 27장 24절에 의하면 그는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하며, 결국은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습니다. 그 다음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저주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저주받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저주 받는 이름
우리가 매 주일 주일예배에서, 혹은 새벽기도회나 각종 예배를 드릴 때, 신앙고백을 하는데, 그 때마다 어떻게 합니까?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고백합니다. 예배 때마다 빌라도의 이름은 저주받고 있습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2,000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그의 이름은 저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두 사람도 아니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수십억의 기독교인들로부터 예배 때마다 저주받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이 축복받는 이름이 되어도 시원치 않은데, 저주를 받는 이름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런데 양다리 걸친 빌라도의 행동을 보면서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그의 모습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한 발은 주님께, 다른 한 발은 세상에 들여놓은 박쥐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학시간은 아니지만, 한 가지 질문하겠습니다. 박쥐가 날짐승입니까? 아니면 들짐승입니까? 날아다닌다는 사실만 놓고 보면 분명히 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박쥐는 새가 아니고 정확하게 분류하면 포유동물, 즉 들짐승입니다. 박쥐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좋지 않은 비유에 곧잘 이용됩니다. 그래서 우화에 박쥐 이야기가 있잖습니까? 다 아실 것입니다. 새가 유리할 것 같으면 자기도 새라고 했다가, 다시 쥐가 유리할 것 같으면 자기는 쥐라고 하던 박쥐가, 결국은 새와 쥐 양편으로부터 다 버림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편에 붙었다 저편에 붙었다 하며 양다리 걸친 사람을 <기회주의자> 혹은 <박쥐같은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양다리 걸친 사람의 말로는 비참합니다. 박쥐같은 사람은 양쪽으로부터 다 배척을 당합니다.
사무엘하 15장을 보면 박쥐같이 양다리 걸치기를 하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아히도벨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원래 다윗 왕의 측근 모사로서, 요즘말로 말하면 대통령의 정치분야 고문과 같은 직책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이라는 불효자식이 아버지 다윗 왕에 대해 반역을 일으키자, 아히도벨은 다윗을 배반하고 하루아침에 압살롬에게로 가버렸습니다(삼하16:15).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의 후궁과 동침해 왕위계승이 완료되었음을 전 국민 앞에 과시하도록 조언을 하였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의 풍속에 의하면 전왕의 후궁들을 취하는 것이 왕권의 완전계승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기회주의자 아히도벨은 (레20:11)에서 “누구든지 그 계모와 동침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는 말씀을 알면서도, 압살롬을 부추겨 아버지 다윗 왕의 후궁들을 취하게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서 아히도벨은 아들에게 쫓겨 가는 다윗을 추격해 압살롬으로 하여금 아비를 죽이도록 까지 진언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아히도벨은 명석한 두뇌와 재빠른 상황분석력으로 충고를 했지만, 압살롬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는 다윗을 배반했기 때문에 다윗에게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압살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목매어 자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삼하17:23). 이와 같이 기회주의자는 양쪽으로부터 다 배척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줄타기 하는 인생은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막으라고 유대인들에게 내어주고 나서,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다고 책임이 없다고 손을 씻었지만, 그의 이름은 역사 속에 씻을 수 없는 저주받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들이 빌라도의 자리에 섰다면 어떤 결정을 내리시겠습니까? 구약의 여호수아서 24장 15절에서 여호수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늘 선택하라!
그는 그와 함께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언가 한 가지를 오늘 선택하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으려거든 차라리 하나님에게 대적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한다면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 엘리야 선지자도 열왕기상 18장 21절에서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고 도전합니다. 그 역시 하나님이든지 바알이든지, 무언가 선택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 주님은 계시록 3장 15절에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중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세상 사이에서 줄타기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정쩡하게 미지근 상태로 있으면 토해내시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들이 빌라도의 자리에 섰다면 어떤 결정을 내리시겠습니까? 예수님입니까? 아니면 세상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썩어질 우상입니까? 여호수아는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하)”고 하며,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지 않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하나님만 섬길 것을 결단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양쪽에서 재미를 보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다 결국 한 마리도 못 잡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이 아침에 귀중한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헛된 것을 따라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영원한 것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중국사람 중에 임어당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버드대학에서 40년 동안 강의를 했던 석학 중에 석학입니다. 대만의 양명산 밑에 임어당의 무덤과 그가 살던 집이 있다고 합니다. 그 집에 가보면 많은 문집들이 있는데, 어느 문집 중에 이런 글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 없이 보낸 40년은 나에게 있어서 완전히 고아와도 같은 삶이었다.” 그는 예수 없이 살았던 인생을 고아 같은 인생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공부를 많이 하고 많은 재물들을 소유했지만 여전히 그의 인생은 여전히 고아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다음,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로서 평안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부모 있는 아이와 부모 없는 고아가 언제 차이가 나는 줄 아십니까? 같이 놀 때는 모릅니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저녁때가 되면 구별됩니다. 해가 지면 부모가 있는 자녀들은 콧노래 부르며 서둘러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고아는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반겨줄 부모님이 없습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구분이 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죽을 때 보면 압니다. 믿지 않는 자는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에 죽을 때 보면 불안과 괴로움 가운데 부들부들 떱니다. 그러나 믿는 자는 평안 가운데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여러분들은 고아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치 않은 채, 살아가고 있는 분들은 오늘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의지함으로 고아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축복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까지 세상과 주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빌라도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면 여호수아처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믿음으로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