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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영 교육장 | #나의 어린 시절
지금도 나는 내가 자란 광산1리 집에 가끔 가곤 한다. 이젠 퇴락해가는 낡은 집, 문이 닫혀진 외양간 등 마치 시간이 그 옛날 그대로 멈추어 있는 듯하다.
집 떠나는 자식들을 보며 툇마루에 혼자 앉아 우시던 아버님 모습, 밥 먹으면 잠이 온다고 고추밭에 물을 다 주고서야 밤늦게 저녁을 드시던 어머니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는 듯 어른거린다.
#어머니와 소 한 마리
우리 마을은 일제 치하에서 해방은 됐으나 고성군의 행정구역이 북한에 속해 있었고 공산 정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논농사 2600여㎟과 밭 300㎟를 가지고 농사를 짓고 나면 쌀은 거의 공출로 다 떼어 가고 일곱 식구 입에 풀칠 할 게 없었다. 어머니는 영세(지금의 인제)에 가서 날품팔이를 3개월 정도하고 품값으로 콩, 옥수수 등 5말 정도를 받아 진부령 고개까지 오면 부친이 소를 가지고 마중 나가서 이틀이 지나서야 모친과 함께 집에 오셨고, 그 잡곡 조금에다 쑥이니 냉이를 한 솥 가득 넣어 쑨 멀건 죽을 먹으며 목숨을 부지했다. 겨울에는 쉬지도 못하고 가마니를 짜서 120개로 매겨진 분량을 공출하기 위해 바빴고 여름에는 삼베를 짜서 팔아야 했다.
어머니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소 여물을 주고 하루 종일 농사일을 하고 집에 들어와서 식구들 밥해주고 또 쉴 틈도 없이 관솔불을 켜놓고 베틀에 앉으면 새벽 2시가 되어야 관솔불에 콧구멍이 시커메진 채로 잠깐 눈을 붙이셨던 고된 하루였다. 제일 잘 짜서 1등급만 받으셨던 고운 베 1필은 아직도 우리 집 장롱에 고이 간직돼 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우리 가족은 산속으로 피신하여 움막을 짓고 피난생활을 했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 능쟁이풀만 뜯어 먹어 얼굴이 누렇게 뜨고 퉁퉁 부어오르기도 했다. 배고파 흙을 주워 먹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나와 형은 이질병에 걸렸고 끝내 형은 그 병으로 고생하다 먼저 저 세상으로 가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자 농사는 해야 하는데 당장 소가 없어 난리들이었다. 인공시절에도, 피난시절에도 어머니가 허리띠를 졸라매며 지켰던 소 1마리는 금값이 되어 광산리에 6600㎟의 논을 사게 되는 든든한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그 시절의 소는 집안의 다정한 식구였고 가보였고 해결사였다.
#자연이 나의 놀이터
우리 고성군에는 유달리 전적비가 많다. 젊은 장병들의 고귀한 피 값으로 이렇게 아름다운 고성산하를 대한민국 영토로 되찾게 된 것이다. 차차 안정이 되면서 나는 자연 속에서 뛰놀며 자연이 주는 즐거움을 누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학교 갔다 오면 소 등을 타고 육수정이란 들판으로 소 풀을 먹이러 가서 그 곳에 있는 불발탄과 구리, 니켈, 납 등을 주워 팔아 엿으로 바꾸거나 용돈을 조금씩 마련하면서 행복해 했다.
여름방학 땐 광산리 앞 하천(북천)에서 살았다. 구불구불한 형태에 고기가 산란하기 좋게 주위에는 버들강아지나 갈대숲이 우거져 있었다. 여름이면 냇가에서 헤엄도 치고 싸리나무로 만든 통발을 놓아 뚝저구를 잡거나 반도로 옹고지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 먹으며 가난했던 시절 맛있는 별미를 즐기기도 했다.
나도 해상리 대밭에다 난생처음 올무를 놓아 토끼 4마리를 잡은 후 점차 장소를 확대해 나가 진부령, 향로봉 고성산, 광대바위, 해상리산 등 주위의 산은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산을 헤매며 다녔다.
언제나 묵묵히 나를 반기며 거저 보내지 않고 많은 것을 주었던 산은 어머니의 품속과 같이 따뜻했고 넉넉했지만 때로는 칼바람과 같은 매서운 바람과 싸워 이기고 끈질기게 참고 견뎌야만 생존할 수 있는 험한 환경이 되어 강인한 인내심을 키우는 학습장이 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배부르고 편안한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풀무 불에 들어가야 금이 나오는 것처럼 어머니가 온 몸을 헌신해 물리쳐 나갔던 가난은 나를 연단시킨 훌륭한 도구였고 자연은 나에게 교과서에서 배울 수 없었던 모험심과 호연지기와 인내심을 길러 주었던 것이다.
묵호중학교에 첫 발령을 받아 교단에 선지 30여 년 동안 젊은 열정을 교육에 쏟으면서 매사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 맡은 일을 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이런 인성과 체력이 뒷받침해 주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 내 고향 고성군의 교육장으로서 남은 재직기간 동안 학력향상뿐만 아니라 남을 위한 헌신과 인내심을 강조하는 인성교육에 중점을 두면서 미래의 이 나라를 짊어질 아이들의 안내자가 되기 위해 마지막 심혈을 기울일 것을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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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때 갔던 소풍에서 친구들과 기념촬영. (사진 왼쪽 첫번째가 김세영 교육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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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중 수학여행 때 김세영 교육장(사진 오른쪽서 첫번째) | ◇ 프로필
- 고성중, 마포고, 명지대, 국민대 교육대학원 졸업 - 묵호중, 주문진수산고, 화천실고, 거진공고, 강릉농공고 교사 - 대진고, 속초여고, 속고 교감, 고성교육청 장학사 - 도교육청 교육정보화 과학교육담당장학관, 속초고, 거진종고 교장, 고성교육청 교육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