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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음악에 관한 한 생각
목차
1. 불교음악과 수행
1) 세존의 음악관
2) 청각문화의 현실
3) 미국 불교에서 불교음악 수용의 사례
2. 불교음악과 선음악
1) 전통 불교음악과 전통 선음악
2) ‘삶의 무상성’과 그리스도적 ‘동체대비’의
사상이 드러난 서양의 수많은 명곡
3) 한국의 현대 선음악
① 김영동씨의 선음악
② 김도향씨의 태교음악
③ 뉴에이지 음악
④ 그밖의 한국의 명상음악
3. 선음악의 발전을 위한 제언
참고문헌
선음악에 대한 고찰에 들어가기 위해 필자로서는 일반적으로 운위되는 불교음악을 살펴본 뒤, 불교음악 내에서 선음악에는 어떠한 것이 있으며, 이러한 선음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하는 순서로 논의를 진전시켜보고자 한다.
1. 불교음악과 수행
1) 세존의 음악관
세존(世尊; 석가모니 부처님)은 음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경전 상의 여러 곳에서, 우선 세존은 가무(歌舞), 즉 음악을 금지하고 있음이 눈에 띈다. 『아함경』을 보면, 세존이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비구들에게 현성팔관회의 법(法)을 설할 때 음악을 금지하고 있는 대목과 마주칠 수 있다. 또한 『장아함경』 권 제11 『선생경』에는 장자의 아들 선생(善生)에게 이르기를 여섯 가지 재물을 손상케 하는 업(業)이 있으니, 그중 하나가 기악과 가무에 미혹되는 것이라 하여 역시 음악을 금지하고 있다. 『증일아함경』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속박하는 데에 아홉 가지가 있는데, 세존은 노래하고, 춤추고, 기악 하는 걸 첫 손에 꼽고 있다. 『우바새오계위의경』에서는 노래와 춤, 음악, 악기 연주가 방일함의 원인이 될 수 있으니 금하라고 한다.
이러한 경부(經部)에서뿐 아니라 율부(律部)에서도 세존은 비구, 비구니는 물론 재가신도에 대해서까지 음악을 금지시키고 있다. 『마하승기율』에서 세존은 말한다. “오늘부터 악사들의 기악을 보지도 듣지도 말아라. (중략) 공연을 지나가다가 보게 되면 죄가 되지 않지만 만약 일부러 가서 본다면 비니죄(毘尼罪)를 저지르는 것이다.” 『마하승기율』의 다른 대목에서 세존은 길거리에서 공연을 본 비구니를 나무라면서, “이제부터는 기악을 듣지도 보지도 말아라. 한번 들은 사람은 반드시 다시 듣게 되느니라. 만약 비구니가 기악을 보았다면 비구니의 가벼운 죄를 범하느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세존은 음악을 영원히 금지되어야 할 대상으로만 보았을까? 『법원주림』(法苑珠林) 제36 패찬편 「음악부」에 의하면, 세존 재세시에 사위성 사람들이 음악으로 세존을 찬탄하고 스님들께 공양하였다고 한다. 이에 세존은 기악을 지어 스님들을 공양한 공덕에 의하여 미래 일백겁 중 악도에 빠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한다. 한편, 『도세품경』에는 보살에게 청정하게 하는 열 가지 일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불법을 모시는 절에서 부처님의 공덕을 노래로 찬탄하여 맑고 부드러운 성품으로 중생을 위해 법문을 전해 주는 것이며, 존신을 모시는 절에서 기악을 하고 금, 생, 적 등의 음악으로 부처님의 탑과 절에 공양을 올리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또한 『장아함경』의 『석제환인문경』에서는 음악을 예찬하는 세존의 모습이 보인다. “착하고 착하도다 반차익(般遮翼)이여, 그대는 청정한 음성과 유리금으로 여래를 찬탄하는구나. 그대의 금과 그대의 소리는 길지도 짧지도 않고 완곡하고도 애절하게 조화를 이루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구나. 그대가 연주한 금 소리에는 모든 뜻이 다 갖추어져 있어 욕망에 얽매임도 있으며, 범행과 사문과 열반도 설하고 있구나.”
이와 같은 검토를 통해, 세존은 금지할 음악과 긍정적인 음악을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세존은 수행자를 어지럽히고 수행에 방해가 되는 음악은 금하고, 불보살을 찬탄하며, 고(孤), 공(空), 무상(無常), 무아(無我)의 진리를 설파하는 음악은 권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세존이 말하는 긍정적 음악이든 부정적 음악이든, 인간은 청각을 통해 음악을 지각한다. 그런데 인간의 5가지 감각 중에 청각이 지니는 특징이 무얼까?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중에서 가장 예민한 감각이 귀라는 과학적 실험결과가 있다. 귀보다는 눈이 더 예민해 사람한테 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일 수 있다. 실제 실험에서 실험참가자들에게 영상과 소리가 있는 화면을, 처음엔 영상만 보게 했다가 이어 소리만 들려주었다. 그리고 순서를 반대로도 해보았다. 이어 어느 쪽이 만족도가 더 높냐고 했더니, 대부분이 영상을 못볼지언정 소리를 듣는 쪽을 택하겠다는 응답이 나왔다.
능엄경(楞嚴經)의 핵심 교의 중 하나로 꼽는 이근원통(耳根圓通)도 이런 청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이근원통이란 “귀에 의지해 완전한 깨달음에 이른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소리를 내서 소리를 듣고 관(觀)하는 수행이 가장 쉽게 깨달음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이행문(易行門: 용수보살이 설한 자성[自性]을 깨닫는 쉬운 방법)으로서 염불수행의 중요성을 뒷받침할 뿐 아니라, 또한 현대인들에게 좋은 음악이 지니는 중요성을 각성케 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2600년 전에 세존이 그토록 간곡하게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에게 좋지 않은 음악을 금하도록 역설한 까닭도, 부정적인 음악이 인간의 청각을 통해 미치는 엄청난 영향력을 염두에 두어서일 것이다. 또한 세존이 긍정하는 좋은 음악이 미치는 영향력도 좋은 쪽으로 대단할 수 있음은 물론이겠다.
2) 청각 문화의 현실
이와 같이 마음을 가장 자극하는 감각은 청각이라고 과학이나 불경에서는 말한다. 또 우리가 숨 넘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있는 의식은 듣는 의식이라 하며, 어느 신문에 식물인간에서 깨어난 사람이 환자 주변에서 하는 말을 다 들었다고 하여 놀랐다는 기사도 보도된 적이 있다. 그러기에 절집에서 임종 때 마지막 가시는 분을 위해서 하는 염불, 조념염불(助念念佛)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리라. 요즘에는 심리학 분야에서 음악을 수단으로 마음을 치료한다느니, 젖소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주었더니 젖이 더 많이 나왔다느니, 식물에도 좋은 음악을 들려주었더니 더 잘 자랐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어떤 학자는 소리에도 긍정적인 소리와 부정적인 소리가 있는데 가장 나쁜 소리는 기계톱으로 나무 자르는 소리이며, 음악으로는 랩 음악이라 했다 한다. 이런 소리 했다간 요즘 아이들한테 딱 원성사기 알맞을 뿐 아니라, 시대에 뒤진 구닥다리 소리라는 힐난을 듣기 십상이겠지만 일리있는 말이라 생각된다. 그러면서 필자를 포함해 불자들이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아이들마저, 세존이 꾸짖고 경계한 좋지 않은 음악에 내맡겨두고도 태평하게 지내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케 한다.
동양 철학에서 눈은 양의 기운으로 태양과 연결되고 귀는 음의 기운으로 달로 상징된다. 현대 문화는 육근(六根)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즉 육근의 민주적 조화를 이룬 육근이 골고루 참여한 문화가가 아니요 TV 등 영상문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눈’의 기능만 유난히 발달한 문화다. 귀를 통해 전수되었던 과거의 교육 환경과 달리 현대의 아동들이 주의력이 산만하고 심리적으로 안절부절 못하는 이유도 다 ‘눈’ 중심의 편향된 교육 방법에 문제가 있는 것일지 모른다.
3) 미국불교에서 음악 수용의 사례
모름지기 ‘눈’과 ‘귀’의 조화로운 발전을 도모해야 하겠다. 이러한 데서 좋은 불교음악, 선음악은 ‘귀’의 발전에 기여한다 하겠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불교계에서는 좋은 음악을 널리 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던가? 세존이 하도 곳곳에서 음악과 춤에 대해 금하라는 말을 많이 해서인지 한국불교 역사에서도 그렇고(물론 불교가 국교이다시피 했던 신라, 고려의 경우는 예외지만), 미국불교 역사에서도 불교계의 음악 수용이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이야기 미국불교사』라는 책을 보면 이와 관련된 대목이 나와 있다.
불교를 서구화하려는 방법을 놓고 여러 고민을 해 본 결과 미국 출판업자이자 불교를 열심히 공부하던 폴 카루스는 음악 도입이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카루스는 달마팔라의 싯구와 그밖에 불교의 경구를 베토벤과 쇼팽의 음악과 독일민요에 접합시켰는데, 카루스의 이 ‘과감한 시도’는 그와 서신 왕래를 하던 스코틀랜드 승려 아난다 메테야의 강한 반대에 부닥친다. 메테야는 국제불교도협회 의장이었고 3,000부가 발행되는 〈불교〉(Buddhism)지 편집장으로, 랭군 본부에서 카루스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낸다. “불교도에게 음악은 감각에서 추출한 추잡한 것들 중 하나입니다. 불교라는 종교는 음악을 신도들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원인 중 하나이므로 삼가하라고 가르친 점을 귀하께서는 망각하신 듯합니다.” 세존이 역설한 부정적 음악에 대한 경계를, 메테야는 음악 일반에 대한 금지로 극단화시킨 것이다.
카루스는 메테야의 반대를 진지하게 받아들였지만, 메테야에게 붓다는 감각적 쾌락의 극단이나 금욕주의 중에서 어느 한 쪽을 추구하지 말고 중도(中道)의 길을 가도록 가르쳤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또한 시와 마찬가지로 음악도 매우 저속한 생각뿐만 아니라 매우 숭고한 사상도 표현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고 덧붙인다. 이어 카루스는 메테야에게 스즈키가 번역한 『대승기신론』의 한 부분을 따서, 마명대사는 파탈리풋트라 사람들에게 “고전적이고 슬프면서 곡조가 좋은 가락을 작곡해 인생의 비참함과 공허함 및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무아(無我)에 대해 생각하도록 유도”하여 불교도로 개종시켰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카루스는 아잔타 동굴 벽화에 기타와 다른 악기들을 가진 승려들이 그려진 것에 대해 언급하면서, “유럽의 고전음악은 깊은 종교적 정신에서 우러나온 것이므로 가히 불교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쇼팽의 야상곡 37번 작품을 ‘열반을 향한 염원’이라고 하는 것보다 더 잘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한다. 승려인 메테야보다 경전과 불교역사에 더 충실한 쪽이 카루스임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설득에도 메테야는 자기 의견을 굽힐 줄 몰랐지만, 카루스는 캘리포니아에서 많은 동조자를 얻었으니, 가장 열성적 후원자는 새크라멘토에 있는 불교교회 주지 마찌난다 스님이다. 마찌난다는 ‘수년간의 고생’ 끝에 300명 이상을 불교로 개종시켰으며, 자신의 노력 중에서 스스로 미국인에게 맞게 작사·작곡한 노래(예를 들어: ‘나의 붓다 곁으로 더 가까이’)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카루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말한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그리스도교 숭배의식을 본떴다고 생각하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붓다도 로마에 가면 로마 사람이 하듯이 행동하라고 가르쳤어요.” 이와 같이 카루스와 마찌난다의 사례는 불교계에서 음악을 수용하는 경우에 참고할 수 있는, 바람직한 중도적 접근의 사례가 아닐까 한다.
선사들 가운데는 수행 중 삼매 속에서 들려왔던 음악에 대해 소참법문이나 대담에서 말한 분이 계시다. 또한 많은 경전에 따르면, 세존이 성도했을 때나 법열의 경지에 들었을 때 음악이 울려 퍼졌다 한다. 어쩌면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전통 속의 훌륭한 불교음악이란, 이렇게 수행 중에 삼매에 든 가운데 하늘에서 들린 음악을 기록한 건지 모른다. 적어도 하늘에서 나는 음악소리를 들을 정도에 버금가는 수행 속에서나 만들어지고 연주되었으리라 추측해본다. 수행 속에서 감각이 정화되지 않고서는 음악을 듣는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작품을 써내고 연주하기가 불가능할 테니까 말이다. 우리 모두가 수행을 여법히 해나갈 때만, 건강한 청각의 회복을 통해 연주나 작곡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좋은 음악을 선별해 자신에게는 수행의 조도(助道)로 활용할 수 있을 테고, 특히 아이들에게 들려주어 그네들의 불심을 함양케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2. 불교음악과 선음악
1) 전통 불교음악과 전통 선음악
앞서 필자는 불교음악 일반을 다루어보았다. 그렇다면 선음악은 불교음악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 걸까? 선음악과 불교음악은 마치 그림에서 선화와 탱화와 비교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불교음악은 범패, 화청, 향가, 기악 영산회상, 영산재의 기악음악, 세종대왕이 작곡한 불교음악, 민요 및 잡가류 불교음악 등 다양하다. 역사적으로 ‘선음악’이라 해서 따로이 전해져온 음악은 없으므로 이러한 불교음악 속에 ‘선음악’이 들어있다고 보는 것이 좋으리라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각각의 전통 불교음악 속에 선음악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으리라 짐작되며, 특히 필자로서는 전통 ‘선음악’ 장르로서 〈〈영산회상〉〉을 꼽아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필자로서도 이런저런 인연이 있어 대금도 불어보고 거문고도 타고 국악공부를 한 적이 있는데 주로 〈〈영산회상〉〉 공부였다. 한국 국악계의 국악공부는 〈〈영산회상〉〉에서 시작해 〈〈영산회상〉〉으로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한 우리 나라 최고 수준의 대금주자나 가야금, 거문고 주자, 최고 수준의 일급 학자들도 이 곡에 대해서는 다양하게 개성적으로 평하고 소개할 뿐 말로 도저히 소개할 수 없는 가장 함의가 풍부하고 헤아리기 어렵지만, 아름답고 예술적으로 뛰어난 곡으로서 한국을 대표할 음악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한편, 우리 나라 국악학자 분 중 101세까지 사셨던 이혜구 박사님은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 이 〈〈영산회상〉〉 곡의 첫 번째 악곡인 〈상영산〉 음악(약15분)을 틀어놓고 음악에 맞춰 체조하는 걸 건강비결로 삼았다는 얘기가 있다. 이 분은 90세 시절에도 대학원 강의를 하실 정도로 노익장을 과시하셨는데, 그 배후에 〈상영산〉의 공력이 숨어 있다는 생각이다.
이어 〈〈영산회상〉〉 아홉곡을 석굴암의 부조 및 여래 좌상의 감상에 빛댄 가야금 주자 이효분 교수님의 글을 통해 ‘선음악’으로서의 〈〈영산회상〉〉의 가능성을 가늠해보았으면 좋겠다. 이 글은 〈〈영산회산〉〉 곡을 가야금으로 타며 느꼈던 바를 기록한 것이다.
《영산회상》의 첫 곡인 〈상영산〉은 낮은 음으로 천천히 호흡을 고른다. 조심스레 차근차근 한 장단 20박의 가락을 길게 여미고, 다시 시작하여 여미고, 다시 시작하고. 마치 본존불 선을 그어가듯 여유롭게 흐르는 가락이 평화스럽다. 즐겁지만 난잡하지 아니하고, 슬프지만 비통하지 않다. 고요함 속에 활기가 있으니 경망하지 않고, 화사하되 야하지 않은 가히 미의 극치 아니겠는가. 〈상영상〉을 지나 〈중영산〉에서 높이 시작한 가락은 본존불 뒷자리 십일면 관음보살같이 더욱 화려하게 수를 놓으며 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섬세하게 흐르는 선을 따라 십일면 관음보살의 목걸이는 그 화려함을 더해간다. 왼손에 잡은 꽃병에는 활짝 핀 연꽃이 부처를 향한 지성스러움을 절절히 전한다. 그 마음으로 드디어 본존불의 광배를 보름달같이 둥글게 자신의 위로 올려놓았다. 유독 자신의 머리 위로 부처의 광배를 올린 십일면 관음보살의 아름다운 마음이 제석천과 범천, 문수와 보현 보살에게 이어진다. 한 장단 20박이 〈중영산〉 끝에서 속도감을 내어 〈세영산〉과 〈가락덜이〉의 한 장단 10박으로 넘어갈 때처럼, 아름다운 팔등신의 몸에 동적으로 흐르는 선에는 속도가 붙어 있다. 배 앞의 치마 주름은 두 허벅다리를 강조하며, 얇은 옷 주름 속에는 여성스러운 곡선미가 감춰져 있다. 이들 모두 마음을 비우고 정리한 듯 얼굴에 안정된 표정을 담고 있다. 〈세영산〉, 〈가락덜이〉 한 장단 10박은 어느덧 한 장단 6박으로 흘러간다. 십일면 관음보살 양쪽으로 제자 다섯씩 서 있는 십대 제자 모습에 눈길이 닿는다. 이들 제자 모두는 머리를 깎고 가사를 어깨에 걸치거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있다. 여섯 박 장단 “덩-기덕 쿵 더러러러-”가 군더더기 없듯, 이들 제자 모습도 꾸밈이 없고 깊이가 있다. 제자들의 각자 각자 표정은 특징적이다. 《영산회상》도 〈삼현도르리〉에서 낮은 가락 〈하현도드리〉를 잇고 불교 노래인 〈염불도드리〉는 2장에서 ‘나무-아미-타-불-’하며 육자 염불로 부처의 가르침을 염원한다. 2장 후반에 가서는 볶는 염불로 속도감을 내며 빨라져서 마무리한다. 〈삼현도드리〉와 〈하현도드리〉 그리고 〈염불도드리〉의 마지막 악장인 4장은 모두 같은 도드리 악장으로 부처의 중요한 가르침을 반복하듯 한다. 석불 위쪽 본존불 얼굴 높이에는 열 개의 감실이 있다. 보살 일곱 구와 유마거사상으로 보이는 보살들이 앉아 있다. 두 개의 감실은 왠지 비어 있다. 감실에 앉은 이들은 본존불의 얼굴을 바라보며 설법을 듣는 모습으로 한층 재미를 더할 뿐만 아니라 아름답기까지 하다. 헌데, 이들 보살 틈에 끼어있는 유마거사가 특이하게 머리를 깎지 않았다. 부처님 세상에서 머리를 깎지 않음은 부처의 무한 사랑과는 무관하다. 무관함으로 치면 한 장단 12박의 〈타령〉과 〈군악〉도 불성과 무슨 관련이 있으랴. 《영산회상》 마지막 곡 〈군악〉에 들어서 3장 열두번 째 장단부터 권마성의 솟구치는 가락을 따라 천장의 연화문에 이른다. 높은 하늘에서 하나의 진리가 큰 돌을 중심으로 햇살같이 빛처럼 퍼지는 것 같지 않나.
이러한 〈〈영산회상〉〉은 이조 후반기에 크게 융성했다. 억불숭유 정책으로 불교에 대한 강한 탄압을 일삼던 이조에서 기본적으로 불교적 색채가 농후한 이러한 음악이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은 실로 의아한 일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현상을 유교 측에 대한 긍정적 평가에 입각해 판단해 보면, 예술 자체가 지니는 아름다움을 그 배경이나 기본 사상에도 불구하고 존중할 줄 아는 미덕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유교의 예악사상에서 ‘악’은 통치의 중요한 수단 중 하나임을 감안할 때, 이조 후기 〈〈영산회상〉〉의 대유행은 그 의의가 자못 크다 하겠다. 또한 불교적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근본 정서를 꿰뚫고 심오한 진리에 입각한 상태에서 세속의 다양한 음악까지도 포용하고 섭수하는 위대한 음악은, 그 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지고 사랑받지 않을 수 없는 게 아닐까 한다.
〈〈영산회상〉〉의 작곡방식은 변주가 주를 이룬다. 조선시대 음악의 전반적 창작수법은 변주가 위주다. 왜 새로운 선율을 만들지 않고 변주곡을 만들었을까? 이를 이해하는 데는 조선시대 음악의 사상적 지주 역할을 한 유교 5경 중의 하나인 『예기』(禮記)에 나오는 다음 대목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예악(禮樂)의 근본을 아는 자는 능히 예악을 창작할 수 있고, 예악의 의식과 절차를 아는 자는 능히 예악의 이치를 가르쳐 논술할 수 있다. 예악을 창작하는 자는 성자(聖者)라 하고, 예악의 의리를 훈술(訓術)하는 자를 명자(明者)라 하는데, 그러므로 명성(明聖)이란 예악을 창작하고 훈술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성자(聖者)만이 새로운 것을 창작할 수 있다는 얘기다. 앞서 세존의 음악관을 이야기한 바 있는 데, 필자로서는 세존의 음악관이 공자나 유학자의 입을 빌어 표현된 게 『예기』의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악편」(樂篇)의 진술이 아닌가 한다. 진정으로 수행에 도움이 되고 진리에 이바지 하는 음악 이외의 음악을 절절히 금기시하던 세존의 말씀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세종도 수많은 곡을 지었지만, 선율은 고려 시대의 음악을 이용하고, 노랫말만 새로 지었다 한다. 『예기』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할 점은 《영산회상》곡을 실제 사정을 모르는 이가 들으면 이 곡들이 모두 전혀 다른 곡처럼 들린다는 사실이다. 변주이되, 자유로운 예술혼이 창조적으로 결합되어, 완전히 새로운 곡들처럼 연결되어 있는 게 《영산회상》이 아닌가 한다.)
이 외에도, 국악으로 분류되지만 소위 ‘정악’(正樂: 아정하고 고상하며 바르고 큰 음악)에 속하는 〈수제천〉, 〈보허자〉, 〈여민락〉, 〈수연장지곡〉, 〈가곡〉, 〈가사〉 등 역시 위에서 〈영산회상〉에 대해 말한 것과 거의 비슷한 맥락에서 좋은 ‘선음악’에 값하는 작품들로 손색이 없지 않나 한다. 또한 정악은 아니어도 소위 한국의 ‘산조’음악 역시 가야금 산조, 거문고 산조, 해금 산조, 대금 산조, 아쟁 산조 등 모두 30분-1시간 정도 소요되는 좋은 명상음악, 선음악으로서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다. 한편, 불교음악 중의 범패 음악도 그 자체로 좋은 명상음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범패의 경우는 최소한 입정을 하고서 뇌파를 가라앉힌 상태에서 듣지 않으면 제대로 감상하여 선적 경험을 하기는 어렵다는 걸 전제로 하고.
2) ‘삶의 무상성’과 그리스도적 ‘동체대비’ 사상이 드러난 서양의 수많은 명곡
바하, 헨델,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차이코프스키 등 뛰어난 서양 작곡가의 훌륭한 음악들은 대체로 인생의 무상함과 허무함을 노래한 것이 많으며 이들이 명시적으로 ‘선’을 표방하고 있지는 않아도 음악 속에 드러난 그들의 사상과 정신은 “삶의 무상성”을 사무치게 노래하면서 그리스도적 “동체대비”의 정신을 발양하고 있음은 틀림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나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교향곡 같은 것이 바로 그 전형적인 예일 수 있지 않을까?
수행자든 아직 수행의 길에 들어서지 않은 이들이든 이러한 음악을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듣는다면 뭇 중생들의 허망한 삶과 천변만화하는 현상계의 무상함에 젖어들고 인간의 삶과 우주의 본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심화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이와 같이 ‘선음악’이라 명시적으로 표방하지 않으면서도 사실상 내용적으로 고, 공, 무상, 무아의 정신을 음악으로 구현해낸 여러 좋은 음악들을 ‘선음악’에 포함시켜 수행의 조도로 삼는 데 주저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서양에서는 카톨릭 신부, 수녀, 수사를 제외하고는 독신 수행자가 많지 않은 현실에서 많은 예술가, 철학자들이 사실상 동양의 출가 수행자를 방불케 하는 치열한 진리에의 탐구와 예술가 정신에 기반한 정진력을 보여주었다는 판단이며, 이들의 예술적 성과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감상하고 탐구하며 소화·흡수하는 것은 선음악의 정당한 유산을 확대시키는 일임과 아울러, 동서양 인류의 하나 됨에도 크게 기여하리라 생각된다.
3) 한국의 현대 선음악
① 김영동씨의 선음악
한국의 현대 선음악으로서, 그 질적 판단을 별개로 하고 가장 많이 알려진 음악은 김영동씨의 음악이다. 적어도 음악 영역에서의 일반 대중에게는 명상음악이나 선음악 하면 ‘김영동’이라 할 만큼 가히 독보적 위치를 차지한다 하겠다. 지금은 몰라도 몇 년 전까지, 한국의 곳곳에 산재한 명상센터 단학선원(지금은 단월드)에서 주로 사용하는 음악도 김영동씨의 음악이었으며 한국의 사찰을 비롯한 많은 명상 수행단체에서 음악을 틀었다 하면 김영동씨의 음악이 대체로 첫 손 꼽혔다. 김영동씨의 작품은 아주 많으며, 아예 CD 앨범 제목을 ‘선(禪)Ⅰ’이라 하여 〈법고〉, 〈반야심경〉, 〈발원문〉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고, ‘선(禪)Ⅱ’라는 앨범을 통해서는 〈산행〉, 〈귀소(歸巢)〉, 〈아침의 소리〉 라는 음악을 발표했다. 필자가 보건대 이 분의 음악이 선이나 명상에 입문하는 단계에서 일정 정도, 정서적으로 기여하는 바가 분명 있다는 생각은 들며 이는 찬탄할 만한 일이라 생각된다. 그리하여 몇 년 전 열반하신 법정스님께서, “산사의 불전에서 아침저녁으로 행해지는 단조로운 예불의식에 그의 우아한 소리와 가락이 어울려 아름답고 장엄한 음악이 되었다. 이런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한결 투명해진다.”는 찬사까지 이끌어내었다. 한편, 잡지 인터뷰를 통해 밝힌 김영동씨의 선음악에 대한 견해도 확고한 선음악에 대한 목적의식을 엿볼 수 있다.
명상(冥想)이란 말을 한자로 풀이하면 생각 자체도 없앤다는 뜻이며 자기가 갖고 있는 욕심을 덜어내기 위해 선생활을 하고 선음악은 이를 순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특히 선음악은 내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이 사회가 건강한 사회인지 아닌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요즈음의 대중음악은 사회의 촉매역할을 하기보다 냄비 끓듯이 금방 끓고 금방 식는 가벼운 형식으로 흐르는 것을 우려하다보면 선음악이나 명상음악 등의 깊이 있는 음악들이 해야 할 몫이 훨씬 큼을 느낍니다.
김영동 작곡가께서 부디 전통 속에 흐르는 위대한 명상음악적 요소를 잘 흡수하고 그간의 성과를 바탕으로 더욱 높은 수준의 좋은 작품을 발표해주길 바라마지 않는다.
② 김도향씨의 태교음악
이어 태교명상 음악으로 유명한 김도향의 음악을 살펴보자. 김도향은 말한다. “번뇌가 없어지면 식이 맑아집니다. 임산부가 식이 맑아지면 곧 태아에 좋죠. 보통 임산부들은 일반적인 번뇌에다 ‘내 자식은 머리가 좋아야 한다.’ 등의 욕심이 더 붙어서 번뇌가 클 수밖에 없거든요.” 1985년 10월쯤에 그는 한 통계에 접한다. 일 년에 약 70만 명의 생명이 태어나는데, 그중 19%인 13만 5,000명 정도가 기형아거나 사산아라는 조사발표였다. 김도향씨는 명상음악 CD 30개를 제작하면서 특별히 태교용으로 10개를 내놓았다. 임산부가 체계적으로 들어야 하는 음악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는 세례 받은 독실한 천주교인이지만 10년 간 전국을 유람하며 “나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를 물으며 구도행각을 벌였던 바 있으며, 어렵지만 세속에서도 이 물음을 계속 물을 수 있다면 굳이 산속 깊이 있지 않아도 되지 않겠다 싶어 다시 세속으로 돌아왔다고 스스로 어느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그는 달마스님의 〈관심론〉과 성철스님의 〈돈오입도요문론〉에도 심취해 있다. 그는 잠자기 전이나 이른 아침에 가부좌한 자세로 듣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음악에 메이지 말고 물 흐르듯 감상하라고 충고한다.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가로수를 바라보듯 무심히 들으라고 부탁한다. 필자로서 음원을 도저히 찾을 수 없어 들어볼 수 없었지만, 그 옛날 ‘벽오동’이나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로 널리 알려졌던 이 가수이자 작곡자의 계속적인 정진을 기원하고 싶다.
③ 뉴에이지 음악
다음으로 한국에서 꽤 유행했고 불교를 비롯한 제도화된 종교와 연관은 적지만 나름의 영적 지향을 견지하며 명상적 삶을 추구하는 이들(뉴에지New Age 그룹)이 좋아하는 명상음악인 뉴에이지 음악을 살펴보자. 뉴에이지 음악은 그 성격상 정확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주로 1980년대에 나타난 음악의 한 유형으로 피아노나 기타의 독주, 또는 적은 인원의 전자음악 합주곡들인데 속도가 좀 느리고 반복이 많으며 부드럽고 점잖은 일종의 명상곡 계통의 음악이다. 뉴에이지 철학에 자극을 받아 이루어진 정신적 초월이나 현대 생활에서 영육(靈肉)이 갖게 되는 스트레스에 대한 강장제라 할 수 있겠다.
로큰롤(Rock-n-rll)이 과도한 볼륨으로 약간 파괴적인 성격을 갖는 데 비해 뉴-에이지 음악은 좀 미묘하고 청취자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듯한 소리의 효과를 갖고 있다. 수천 년 간의 인간 역사에서 음악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제의적·치료적 요소에 대한 원시에 회귀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하겠다. 1986년에 처음으로 미국에서 뉴에이지 그래미상이 수여되었고, 이로부터 하나의 음악장르로 정착되었다. 지금은 미국의 산타 크루즈를 비롯해 24시간 뉴에이지 음악만 취급하는 방송국들도 생겨났다. 한국에도 인터넷 방송이긴 해도 24시간 방송되는 뉴에이지 및 클래식 방송이 있다.
뉴에이지 음악의 기수는 스티븐 헤얼펀(S. Halpern)인데, 그의 첫 앨범 〈스펙트럼 모음곡〉(Spectrum Suite)은 1974년에 선을 보였는데 특히 심리적 이완과 치료를 위한 시도였다. 그는 한때 뉴욕에서 트럼펫과 기타 연주자로 활동하였는데 명상 치료음악에 관해서는 거의 독보적인 역할을 하였다. 자신의 음악이론서도 2권이나 출간했다. 그밖에 뉴에이지 음악의 개척자들은 100여명을 헤아릴 수 있다. 그중에서도 뎀비(Demby)는 여성 작곡자로 활약하였고 야니(Yanni)는 그리스 태생으로 그의 격정적인 팝 성격의 악기와 낭만적 피아노와 느린 템포의 감상적인 발라드는 그를 단연 대중적 인기인으로 부각시켰고 지금도 가장 매스컴을 많이 타는 사람의 하나가 되었다. 도이터(Deuter)는 독일 산으로 인도 음악을 배운 후 독특한 앨범들을 남겼다(www.google.com의 검색창에 “new age”을 쳐 넣은 뒤 가수 이름만 더 쳐 넣으면 엄청나게 많은 음악을 상당한 경우 실황중계로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음). 이외에 대표적 뉴에이지 아티스트로 조지 윈스턴(George Winston), 앙드레 가뇽(Andre Gagnon) 등을 꼽을 수 있다. 조지 윈스턴의 ‘디셈버’ 같은 음악은 한국에서 가히 뉴에이지 음악의 대표곡으로 생각될 정도로 애호가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고, 이 음악이 흘러 나오면 웬만한 사람은 어디선가 들어봤다는 말을 토해내기 일쑤다.
다음으로 기타로(Kitaro)는 일본 출신으로 씬세싸이저 슈퍼스타이다. 많은 수의 뉴에이지 작곡가가 그렇듯이 그도 역시 라즈니쉬 아쉬람을 드나들었다. 그의 첫 번 독주 앨범인 〈Astral Voyage〉가 1978년에 나온 후 2년 뒤에 일본 TV 방송 다큐멘터리 시리즈인 실크로드(Silk Road)의 싸운드 트랙으로 쓰여진 것 중 몇 개가 판매 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최근 들어 가장 각광받는 한국의 뉴에이지 작곡가라면 양방언이 손꼽힌다.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동포인 양방언은 락, 재즈, 클래식, 국악, 월드 무직 등을 포함한 다채로운 음악을 구사하며 음악성이 좋다는 평가를 받는 뉴에이지 작곡가다. 1996년 일본에서 첫 솔로 앨범인 〈The Gate of Dreams〉를 발매했고, 2001년에 〈Pan-O-Rama〉를 한국에서 양방언이란 명의로 발매하여 좋은 평가를 얻었고, 앨범에 수록된 〈Frontier!〉는 2002년 아시안 게임 공식 주제가로 채택되었다. 1999년에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해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이외에도 한국에서는 대한민국 1세대 뉴에이지 음악가로 김광민을 그리고 2세대 뉴에이지 음악가로 이루마, 전수연 등을 꼽는데 양방언도 2세대 뉴에이지 음악가라 할 수 있다.
④ 그밖의 한국의 명상음악
지금까지 소개한 음악 이외에도 명상음악을 표방한 음악으로 왕준기 교수의 ‘다도’(茶道) 음악 시리즈가 있고, 국립국악원이 여러 차례 개최한 공연을 통해 ‘다향, 다도’(茶香 茶道)와 관련된 여러 현대 작곡가들의 명상음악들이 발표된 바 있다.
3. 선음악의 발전을 위한 제언
앞서 한국의 전통음악에서 추려낼 수 있는 선음악을 살펴보았는데, 전통 선음악이 길게는 거의 500년 1,000 년 이상의 전통 속에서 정련될 대로 정련되어 최고 수준의 선음악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모두 연주했을 때 15-20분 정도 걸리는 〈수제천〉과 같은 음악을 지금부터 몇십 년 전 프랑스에서 처음 연주했을 때 문화적으로 가장 선진적이라 할 프랑스인들이 ‘하늘의 음악’이라는 평을 했던 것이리라. 또한 한국의 전통 ‘가곡’(‘우조초수대엽’인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등등)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것도 그 음악성이 가히 선적인 경지에 들어섰기 때문이리라. 이에 비해 현대적 한국 선음악은 아직은 이에 못 미치는 게 현실이며, 많은 불교의 찬불가가 ‘찬송가’와 흡사하다는 평을 들어왔음은 불교문화에 대한 어느 정도의 안목이 있는 이들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꼭 불교를 표방하지 않아도 한국 문화 전반이 일제 치하의 일본 문화 잔재와 해방 이후 물밀 듯 밀려들어온 미국 문화의 영향을 결정적으로 받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주체적 문화역량을 기르는 데는 소홀히 한 채 대체로 경제발전에만 매달려온 것 또한 우리가 익히 아는 바다. 역사가 이러함에 불교음악, 선음악도 그 기반이 대단히 취약한 상태일 수밖에 없음은 필연적 결과이겠다. 그리하여 그나마 애쓰는 불교음악, 선음악 작곡가와 연주자, 공연단체를 적극 지원하고, 많은 불자들이 실제 삶과 수행 속에서 음악생활의 일부로서나 수행의 조도로서의 선음악을 적극적으로 감상하고자 하는 자세를 기르고, 특히 어린이, 청년들에게도 적합하다 생각되는, 동서양을 막론한 좋은 선적 내용과 정서를 담고 있는 음악을 발굴 보급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리라 생각한다.
한국은 지금부터 600년 전부터 최근 100년 전까지 공자라는 성인의 사상에 따라 ‘예악형정’이라 하여 예의범절, 음악, 형벌, 행정을 통치의 중요한 수단으로 삼았을 정도로 바른 음악의 토양이 튼튼한 나라로, 엄청난 음악적 자산을 지닌 나라이다. 불교계에서 불교음악을 비롯한 정악이나 민속악 속의 뛰어난 선적이고 불교적인 음악을 발굴하여 사찰에서도 다양하게 선보이고 신도들에게 감상을 권유할 필요가 있다. 또한 서양의 훌륭한 음악들도 그 음악 정신이 선의 정신과 통한다고 판단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사찰이나 불교적 문화 속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속에서 과거 전통 속의 우수한 선음악에 버금가는 현대적 선음악이 탄생할 수 있으며 과거 신라, 고려에 그랬듯이 민족 문화 전체를 선도하는 불교음악, 선음악 탄생의 토양이 비옥해질 수 있다 하겠다. 한국의 많은 훌륭한 전통음악이 중국의 당악에 그 뿌리를 두고 있지만 창조적으로 재창조되어 독특한 한국적 색채를 지녔음이 음악학자들에 의해서나 우리들의 귀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압도적으로 서양음악 위주인 한국음악 풍토 속에서도 바로 이러한 주체적 재창조가 이루어져 훌륭한 불교음악, 선음악도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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