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사람이 죽은 이를 따르는가, 아니면 죽은 이가…”
아무리 아름다운 그림이라도 알아보지 못하면 휴지나 다름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그림을 보라. 그리고 함께 기뻐하라.
그럴 만한 이가 없다면 그림을 걷어 집에 돌아가 잠이나 자면 된다.
-제64칙은 앞의 제63칙 ‘남전참묘’에서 바로 이어지는 내용으로 동일한 ‘남전참묘(南泉斬猫)’로 통하기도 하는데, 제63칙과 구분하기 위해 ‘남전문조주(南泉問趙州)’로 하였음.
산 사람이 죽은 이를 따르는가, 아니면 죽은 이가 산 사람을 따르는가?
강설
수행자의 입장에서 우리의 삶은 호흡마다 생사의 갈림길이며, 일반인의 처지에서 나날은 즐거움과 괴로움의 갈림길이 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것이며, 일반인 역시 자신의 삶을 멀리 밀쳐둘 수 없는 것이다.
수행자나 일반인이나 살아있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의미이다. 수행을 해서 어느 경지에 도달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무념(無念)이라는 용어를 아무 생각도 없는 바위나 고목처럼 된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생각’에 매달리고 있다.
<유식론(唯識論)>에서는 생각에 해당되는 염(念-smti, sati)이나 사(思-cetan)를 번뇌에 포함되지 않는 심리작용(心所)으로 분류하고 있다. 염(念)은 ‘지속적인 알아차림’ ‘기억작용’을 뜻하며, 사(思)는 의식적인 의지작용을 뜻한다. 그렇다고 염(念)과 사(思)가 깨달음의 지혜라는 뜻은 아니다. 반면에 기억하지 못하는 심리작용인 실념(失念-muitastit)은 ‘정념(正念)을 장애하는 번뇌’로 분류되어 있다.
‘생각’은 좋은 방향으로도 나쁜 방향으로도 전개될 수 있다. 나쁜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을 막는 것이 수행력이다. 부처님이나 선지식들은 해탈하였기에 종일 생각해도 그 생각에 끌려 다니지 않고 괴롭지도 않다. 마치 거울 같은 상태인 것이다. 그 상태를 삼매(三昧)라고 한다. 반면에 중생들은 끝없이 생각하면서 그 생각에 끌려 다니고 그 생각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것은 마치 먼지 속에 있는 것과 같다.
한편 ‘생각하지 않는 상태’는 멍한 상태이며 이 또한 번뇌이다. 책만 보고 이론적으로만 공부하는 사람은 자신이 지향하는 바가 번뇌인지 지혜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참선 수행은 화두(話頭)라는 철벽을 통과하여 밝고 맑은 지혜의 경지로 나아가는 행위이며, 이를 통해 일상의 삶이 삼매가 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바깥경계에 속지도 않고 끌려가지도 않는다. 선사(禪師)들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본칙 원문
擧 南泉復擧前話 問趙州 州便脫草鞋 於頭上戴出 南泉云 子若在 恰救得猫兒
자(子) 상대를 존중해서 호칭할 때 사용함. 자네, 그대 등의 뜻.
흡(恰) 꼭, 반드시.
본칙 번역
이런 얘기가 있다. 남전선사께서 앞의 얘기(고양이를 벤 것)를 다시 거론하여 조주스님에게 물었더니, 조주스님이 곧바로 짚신을 벗어서 머리 위에 이고 나가버렸다.
남전선사께서 말씀하셨다. “자네가 만약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고양이를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짚신을 벗어서 중국은 침상생활을 하기에 신을 신고 방에 드나들기 때문에 방안에서 짚신을 벗었다는 표현이 나왔음.
강설
그 스승에 그 제자라는 말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낮에 고양이 소동이 벌어졌을 때는 출타하여 없었던 제자 조주스님이 돌아와 스승 남전선사께 인사를 여쭈자, 남전선사께서 낮의 소동을 들려주며 “자네라면 뭐라고 했겠는가?”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조주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짚신을 벗어서 머리에 이고 나가 버렸다.
이 도리를 알겠다고 신을 벗어서 머리에 이는 어쭙잖은 짓거리 따위를 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머리가 진흙에 처박힐 것이다.
이런 조주스님의 행동을 본 남전선사가 한 마디 하셨다. “그때 자네가 있었더라면, 그 고양이는 틀림없이 살았을 터인데… 쯧쯧.”
남전선사께서는 슬퍼하셨을까, 아니면 기뻐하셨을까? 함부로 말을 뱉었다가는 남전선사의 칼이 혀를 자를 것이다.
송 원문
公案圓來問趙州 長安城裏任閑遊
草鞋頭戴無人會 歸到家山卽便休
공안원래(公案圓來) 남전스님이 다투던 스님들에게 내었던 문제를 그대로 설명함.
장안성(長安城) 당나라의 수도.
송 번역
문제 빠짐없이 설명하고 조주에게 물으니,
장안성 안에서 마음대로 한가로이 노니네.
짚신 머리에 인 것을 아는 사람이 없으니,
고향산천으로 돌아가서 곧 편히 쉬는구나.
강설
설두노선사가 송의 제1구와 제2구에서 “문제 빠짐없이 설명하고 조주에게 물으니, 장안성 안에서 마음대로 한가로이 노니네”라고 하여 스승 남전선사와 제자 조주스님의 멋진 모습을 펼쳐보였다.
아주 멋진 그림 하나가 펼쳐졌다. 스승 남전선사께서 무대를 만들어 주시니, 제자 조주스님이 한바탕 멋들어진 춤사위를 펼쳐보였다. 이보다 더 멋진 춤이 또 어디 있을까? 이 춤사위를 제대로 보는 이라면, 정월 초하루에 체한 것이 섣달그믐에 뻥 뚫리듯 속이 시원해질 것이다. 여기에는 다툼도 없고 승패도 없다. 죽는 놈도 없고 사는 놈도 없다. 그저 서울 한복판에서 어깨춤을 추며 멋지게 한바탕 놀면 될 뿐이다.
송의 제3구와 제4구에서 설두노인네는 “짚신 머리에 인 것을 아는 사람이 없으니, 고향산천으로 돌아가서 곧 편히 쉬는구나”하여 두 손을 펴 보이셨다.
아무리 아름다운 그림이라도 알아보지 못하면 휴지나 다름이 없다. 어떤 이는 그림을 분석하느라 즐겁기는커녕 머리만 아프다고 아우성이다. 또 어떤 이는 그림의 재료가 어떻고 구도가 어떻고 야단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그림을 보라. 그리고 함께 기뻐하라. 만약 그럴 만한 이가 없다면 그림을 걷어 집에 돌아가 잠이나 자면 된다.
만약 그림을 알아보는 이가 있다면 그는 어떻게 할까? 싱긋 웃고는 그림도 팽개치고 고향산천으로 돌아가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