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롯데가 엘지를 상대로 믿기 힘든 역전극을 펼쳤다는 소식은 약속장소를 서면에서 사직동으로 옮기는데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술 마시는 일에 장소 운운하는 게 괜한 사치임을 모르지 않지만 기왕지사 마실 술이라면 오월의 밤에 펼치는 백구의 향연과 함께 한다면 안주값은 줄어들 터였다. 더군다나 십여 년을 기다려온 롯데 부활의 해 아니던가. 술과 벗과 야구의 만남, 3S정책에 버금가는 우리 시대의 절묘한 교집합이 사직벌에 열렸다.
사직동은 온통 축제판이었다. 롯데 야구가 부산 경기(景氣)를 들썩거리게 하고 있다는 보도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편의점에는 물건이 동나고 있었고 통닭이며 오징어며 먹을거리를 파는 노점상들의 호객행위는 과격하기는 했으나 싫지 않았다. 무릇 온전한 추억이란 악역의 존재에 그 완성도가 있는 것이며 그 역할에 따라 추억의 무게도 결정되듯 만원의 사직벌에는 암표상과 노점상 그리고 곧 이어 등장하는 술 취한 난봉꾼 등이 제 역할을 해주어야만 했다. 그것이 곧 롯데 3위라는 사실에 힘을 실어줄 것이었다.
경기는 어제의 그것과 달랐다. 한화를 상대로 찔끔거리는 타격으로 점수는 1점을 뽑는데 그쳤고 예전의 에이스 염종석도 꽤나 호투를 하면서 1대1의 박빙의 승부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당겨진 시위처럼 팽팽한 경기는 믿었던 수호신 노장진이 1점을 내주면서 2대1로 끝나고 말았다. 이기는 날이 있으면 지는 날이 있는 게 스포츠의 법칙이겠지만 올해 관전 세 번 중 삼패를 맛본 나로서는 내 인생의 불운이 야구에도 미칠까 두려운 심사까지 생겼다. 불행과 패배는 달마의 선문답처럼 바람이 꽃잎을 흔드는 것인지 꽃잎이 흔들려 바람이 부는 것임을 아는 것인지 알 수 없듯이 서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그러나 어제 대역전극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관중들은 패배의 쓰라림을 알지 못했다. 30만 관객 돌파 기념 SM3 경품 추첨이 끝나도록 경기장은 여전히 만원이었다. 억세게 운이 좋은 어떤 사람이 부리나케 추첨자 앞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사실 경기 결과와 관계없는 그 사람의 행운처럼 경기의 패배와 내 인생의 불운도 그 어떤 관계도 없을 것인데 괜한 심사의 뒤틀림에 나는 뒤통수만 벅벅 긁고 있었다.
친구들은 - 후배라기엔 그들은 너무 커버렸다 - 저마다 한 마디씩 관전평을 했다. 롯데 전력의 한계니 어제 승리 후 지나친 음주니 하는 말들이 농담에 섞여 오고갔다. 같은 경기를 보고서 다른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아마도 각자의 삶이 다른 행보를 걷고 있기 때문일 것이었다. 사상과 신념이라는 거창한 명제도 결국은 학습과 생활의 결과이거나 한때 유행의 신드롬일 뿐인 것처럼 서로 다른 삶의 행로는 서로 다른 저마다의 잣대를 만들어 버렸다. 야구를 보는 눈도 세상을 보는 눈도 여자를 보는 눈도 그렇게 달라져 있었다.
여전히 진지하고 고집 세지만 전업을 고려하고 있다며 조언을 부탁하는 친구의 눈은 예전처럼 충혈 되어있지 않았다. 지난 10년 자신과 가족을 먹여살린 가게에 대해서는 애정도 증오도 없었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당면한 의무감보다는 10년 세월이 가져다 준 내공이 그의 눈에서 힘을 빼고 있었다. 여행을 떠나라. 책을 읽어라. 나는 생각도 없이 주저리주저리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지하도 한켠에서 사주를 보는 늙고 병 든 예언가처럼.
게바라가 그랬던가. 불가능한 꿈을 가슴에 지니고 살라고. 인생은 그가 꾸는 꿈만큼 무언가를 준다. 성공과 실패는 그 다음 이야기다. 이루어지거나 이루어지지 않거나는 글러브에 맞은 공이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우연의 문제이지 타자의 몫이 아니다. 그래서 그 타구가 삼중살의 악수가 된다 하더라도 감독은 타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홈런을 치겠다고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서는 삼진을 면하지 못하고 병살을 면하겠다고 억지로 밀어치기만 고집하다가는 평생 가야 안타 한 번 제대로 치지 못한다. 전략을 앞세우되 창조적인 플레이를 잊지 말 것, 다음 플레이를 예측하되 현재의 플레이에 목숨을 걸 것, 힘을 비축하되 결정적인 순간 아끼지 말 것, 여건은 충족되거나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 것 그것은 오로지 훈련과 노력에 의해서만 채워진다는 것을 인정할 것 등이 야구와 인생의 동일선상에 있다. 물론 살다보면 심판의 오심도 있고 관중의 난동도 있고 동료의 시기나 음모, 감독의 경원도 있을 수 있지만 그런 것들은 사람의 힘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선수나 인생을 사는 보통인이거나 그들은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 그것이 흔히 말하는 ‘최선’이라는 말이다.
그날 만난 친구들에게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이것 밖에 없었다. 그러나 체 게바라가 베스트셀러가 된다고 해서 혁명이 일어나지는 않듯이 인생도 야구도 아는 것과 행하는 것과 그 결과는 항상 같을 수는 없다. 내 인생도 그러하다. 어쩌면 타이밍을 놓쳤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제 갈 길이 아닌 길을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있고 나로 인해 누군가 눈물짓고 있을지도 모른다. 보폭은 흔들리고 페이스는 무너졌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고 때가 되면 배는 꼭 고파오는 것처럼.
40억 짜리 갈매기 정수근이 그랬다. 자신의 몸값 40억은 방망이 10억, 다리 10억, 수비 10억 그리고 나머지 10억은 주둥이라고. 이기기 위해서는 야구 실력 못지않게 팀 분위기가 좋아야 하고 팀원끼리의 팀웍도 좋아야 한다면 그것에 일조하는 가치가 10억이라는 말이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다른 건 몰라도 주둥이 값은 하고 있다고 한다.
야구도 인생도 마찬가지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에 미치지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에 이르지 못하는 법이다. 거대한 담론을 씹고 살았던 우리들 젊은 날, 무거운 얼굴로 마르크스를 달달 외고 다니던 그 많던 책상 운동권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마도 여전히 포장마차 한 구석에서 시대를 논평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나는 이제 그들에게서 희망을 찾지는 않는다. 원전 한 권 제대로 읽지 않았지만 최루탄 가스에 젖은 눈에 후후 입바람 불어대며 최루탄 많이 먹어서 우리는 오래 살 것이라며 히히대던 친구, 서태지가 좋다며 가투 뒷풀이 마당에서 굳이 랩을 휘날려 선배 눈총을 샀던 어느 후배, 학회실에서는 금연을 해야 한다며 목소리 높이다가 가장 먼저 담배를 배웠던 청바지가 잘 어울리던 여학생, 자신은 겁이 많아 데모는 못하지만 노래는 잘 하니까 노래로 운동하겠다며 어깨를 으쓱이던 노래패 후배, 그 많은 사람들이 지금 우리 시대의 곳곳에서 희망으로 자라고 있을 것이다. 정치를 하지도 유명인사가 되어 있지도 않겠지만 지지하는 정당을 위해 댓글을 쓰고 지지하는 시민단체를 위해 한 달에 만 원 꼬박꼬박 이체시키면서 그렇게 말이다.
그렇게 인생도 세상도 즐기며 살면 되는 것이다. 괜스레 눈을 부라리고 주먹을 불끈 쥐고 살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생이 더 잘 되는 것도 아니다. 즐기는 힘만큼 강한 것은 없다. 분노도 슬픔도 좌절도 인생의 정거장에서 먹는 3분 우동이라 여기며 다시 룰루랄라 출발을 준비하면 된다.
롯데가 한화에 2대1로 진 날, 90학번 남학생 네 명과 그 옆에 슬쩍 곁다리를 낀 어느 필부가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고 새벽 첫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 낮에는 보기 힘든 봄 햇살이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하고 있었다. 그 놈들 다 컸다고, 그러니 네 살 궁리나 잘 하라고 하면서...
어느 시인의 글로 후배의 질문에 답한다.
청춘의 먼길
마포 아현동 연탄재 쌓인 뒷골목 어귀
눈보라 송이송이 잘 오신다
목덜미에 사타구니에 아슴푸레한 어깨 위에
우우우 껴안기다가 곤두박질친다
길 잃은 동무들 아현호프집에 퍼질러 앉아
철 지난 유행가를 목청껏 외쳐 부를 때
기대일 언덕도 몸 눕힐 벤치마저 없이
산산이 부서지는 세기말의 시간들
새벽 한시, 쌍라이트 켠 차량들이
남부순환로를 찾아 끝없이 돌진하고
나 또한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 발버둥친
청춘의 십년 세월 있었다
끝내 저버려선 안될 것들 하나둘씩 내던지며
텅빈 책장 위로 소리없이 쓰러지던 내 넋들만 탓했다
무너져라, 무너져라, 무너져 내려라
청춘이 나에게 가르쳐 준 길은 왜 그리 먼가?
결코 맞닿을 수 없는
그대와 나의 가냘픈 틈새
대지여! 그가 정녕 필요한가?
기다려다오.
청산 못한 빚이 아직 그에게 남아 있다.
첫댓글 오랜만이유,,, 언수형, 잘 지내지요...
멋지네요....
크,,,좋았겠다,,,나두 야구장 가고싶다,,, 그 보다도 언수선배 글이 더 좋네^^
나 그 동네에선 5분 대기조-ㄴ데 , 사직동 왔으면 날 불러야 할 거 아녜요 누구 허락받고 야구장에 맘대로 간 겨~~!
난놈아..박스하고 여행간다고 하더니만 선배꽴에 빠져 사직동에 머물고 말았네..야구를 언제 봤더라.. 야구보다 난 앞에서 파는 통닭이 더 먹고잡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