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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17. 묵상글 (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 나는 비교 불가! 하느님 사랑 안에 있는 주님의 벗!.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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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10.17 04:18
- 나는 비교 불가! 하느님 사랑 안에 있는 주님의 벗!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어제까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위선자라고 나무라신 주님께서
오늘은 제자들을 당신의 벗이라고 부르시며
제자들이 당신의 벗으로서 취해야 할 태도를 알려 주십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위선은 조심하되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하느님을 두려워하라 하시는데 왜 그리 해야 하나 하면
하나는 제자들이 주님의 벗들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 사랑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하느님 사랑 안에 있는 주님의 벗들이라면
주님의 벗답게 박해자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자
주님의 벗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벗이라는 고귀한 자의식과
하느님 사랑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라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의 벗이라면,
그러니까 위선자들의 벗이 아니라 주님의 벗이라면
먼저 자기의 고귀함에 대한 자의식과 자부심이 있어야 하고,
그렇기에 박해자나 적대자들을 하찮게 여길 수 있어야 하며,
그렇기에 그들을 도무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잘 아시듯 주님의 벗이라는 자의식과 자부심은 교만과는 다릅니다.
교만이 남과 비교하여 우월감을 가지고 남을 깔보는 것이라면
자부심은 나를 소중히 여기기에 남과의 비교 대상으로
자기를 함부로 내놓지 않는 것이며 요즘 말로 비교 불가인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주님의 벗이고 하느님 사랑의 고귀한 대상인데
어쩌자고 나를 하찮은 인간의 비교 대상으로 내놓고,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여길까 전전긍긍하고 더 나아가 두려워한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보물을 싸구려를 파는 시장에 내놓는 것과 같습니다.
보물은 보물답게 있어야 하고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 사랑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장에서 몇 푼에 팔리는 참새보다 귀한 존재이며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시는 하느님 사랑 안의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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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힘
“두려워하지 마라”
“행복하여라, 죄를 용서받고, 잘못을 씻은 이!
행복하여라, 주님이 허물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그 영에 거짓이 없는 사람!”(시편32,1-2)
예수님의 제자들을 위한 믿음 교육이 우리에게도 좋은 도움이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는 예수님 모습에 열광한 군중들이 주님께 몰려 들자 서로 밟힐 지경이 됩니다. 예나 이제나 진리를 목말라 주님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먼저 주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사이의 위선을 환기시킵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믿음을 부패하게 하는 위선의 누룩입니다. 참으로 믿음의 사람들에게 위선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위선이 없어 담백하고 투명하기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게 바로 믿음의 본질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도 우리의 믿음을 북돋웁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비밀은 없습니다. 누가 보든 말든 복음 선포에 투명하고 당당하라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힘입니다. 복음 선포의 삶을 통해 드러나고 확인되는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주님께 청할 바 믿음의 은총뿐입니다. 정말 믿음의 사람들은 투명하고 솔직담백합니다. 위선이나 두려움이 없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요셉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부활상 아래 바위판에 새겨진 성구입니다. 신구약 통틀어 365회 나온다는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은 인간 누구나의 원초적 정서입니다. 요즘같이 시끄럽고 혼란한 세상일수록 두려움과 불안은 증폭되기 마련입니다. 흡사 두려움과 불안에 포위되어 살아가는 사람들같습니다. 답은 믿음뿐입니다. 믿음의 빛이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두려워하지 마라”에 곧장 이어지는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믿음을 북돋우며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시편의 다음 고백도 기억할 것입니다.
“주께서 나의 빛 내 구원이시거늘, 내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께서 내 생명의 바위시거늘, 내 누구를 무서워하라.”(시편27,1)
“주님을 기다리며 너는 아귀차거라,
네 마음 굳게굳게 주님을 기다리라.”(시편27,14)
‘아귀처거라’는 마음을 굳세게 먹고 남에게 꺾이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믿음의 사람들은 끝없이 주님을 기다리는 인내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 모두에게 두려워하지 말 것을 촉구합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 벗이라 말씀하시니 더욱 반갑고 고맙습니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단숨에 읽혀지는 주님 말씀입니다. 정말 두려워할바 세상이나 사람이 아닌 하느님뿐임을 천명하십니다. 일어나는 것이 다 하느님의 뜻은 아니나, 하느님의 허락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공포와 전율의 두려움이 아닌 사랑의 두려움, 경외의 두려움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할 때 세상이나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 없을 때 세상이나 사람 모두가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세상이나 사람들의 두려움에 대한 유일한 방법은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요 바로 이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지옥의 심판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니라 우리의 고의적 불신으로 하느님께로 떨어져 나감으로 자초하는 것입니다. 진정 죽음은, 지옥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혼까지 죽음을 의미하는 주님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가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육신은 살아 있다 해도 주님과 무관한 사람들은 영적으로 진정 살아 있다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두려워할 때, 점차 세상이나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납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힘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이런 믿음의 모범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입니다. 다윗의 믿음 역시 우리의 모범이 됩니다. 다윗 역시 아브라함처럼 행위와는 상관없이 의로움을 인정해 주시는 사람의 행복을 다음처럼 노래합니다.
“행복하여라, 불법을 용서받고 죄가 덮어진 사람들!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죄를 헤아리지 않는 사람들!”
그러나 값싼 평화가 없듯이, 값싼 은총도, 믿음도 없습니다. 참으로 치열히 주님을 섬기고 순종해온 믿음의 삶이 있었기에 하느님께서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오늘은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로마의 성 클레멘스, 스미르나의 성 폴리카르포와 함께 사도교부에 속하는 분이자 사도 요한의 제자인 성 이냐시오입니다.
로마에 압송되어 맹수형으로 순교직전 7통의 편지를 썼고 당시 교회생활에 대한 귀한 정보를 주고 있습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역시 아브라함처럼, 다윗처럼,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마지막 편지에서 성인의 위대한 믿음의 고백이 감동적입니다.
“믿음은 시작이요 사랑은 완성입니다. 이제 출산의 고통이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제가 생명을 얻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고, 제가 죽음의 상태에 있기를 원하지도 마십시오. 저는 모든 교회 편지를 쓰고 있으며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여러분이 막지만 않는다면, 저는 하느님을 위해 기꺼이 죽겠습니다. 간청하건데 제게 때 이른 은혜를 베풀지 마십시오. 제가 하느님께 다가가는 길인 짐승들에게 먹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저는 하느님의 밀입니다. 저는 맹수의 이빨에 가루가 되어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인간의 품위와 위대함은 믿음에 있습니다. 믿음이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지극한 믿음이 주님을 감동케 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니 믿음으로 최선을 다한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진인사대천명의 각오 역시 믿음의 자세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부족한 믿음에 참 좋은 도움이 됩니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마음 바른 이들아, 모두 환호하여라.”(시편32,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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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믿음을 굳건히 세우시기 위하여 두 가지를 교육하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해야 한다(루가 12,1)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들로부터 장차 어떤 핍박을 당하더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로지 한 분 하느님만을 두려워하라(12,2-7)는 것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 내용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인지, 그리고 왜 그분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해야 할 분은 육신을 핍박하고 죽일 수 있는 이가 아니라, 죽은 뒤의 권한까지 가지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이시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이를 <히브리서>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히브 5,7)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오직 한 분, 아버지 하느님뿐인 것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에 대해 <시편>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을 경외함은 순수하니 영원히 이어진다.”(시편 19,10 참조)
그래서 <집회서>에서는 말합니다.
“하느님을 경외함은 그분에 대한 사랑의 시작이요,
믿음은 그분에 대한 의탁의 시작이다.”(집회 25,12)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하느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 외에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루카 12,7)
그렇습니다. 우리는 귀한 존재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바쳐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분께 대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18-19)
이를 잘 보여준 분이 바로 내일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입니다. 그는 처형당하기 위해 로마로 끌려가면서도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밀알이다. 맹수들의 이빨에 가루가 되어 깨끗한 빵이 되리라”
이처럼, 사랑은 두려움 없는 자유를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두려워하지 말라.”(루카 12,7)
주님!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박해를 받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진리이신 당신께 희망을 두고,
주님이신 당신께 믿음을 두게 하소서!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신 당신의 사랑으로 제 두려움을 몰아내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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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말이 씨가 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새로운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과 행동이 하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제게 큰 위로가 되는 말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힘든 이들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치 시댁에서 힘들게 시집살이하던 딸은 친정으로 돌아가서 마음 편하게 지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말이 씨가 되는 일도 있습니다. 불평의 말을 입에 달고 살면 불평할 일이 생깁니다. 원망의 말을 입에 달고 살면 원망할 일이 생깁니다. 매사에 비난과 험담을 일삼는 사람은 길가에 떨어진 씨앗처럼 열매 맺지 못하는 삶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주 하신 말씀 중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이 약하냐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믿음은 반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두려움이 큰 사람은 믿음이 약하고, 믿음이 강한 사람은 두려움이 적습니다. 복음서에 제자들이 두려워했던 장면들이 몇 번 있습니다. 첫 번째는 베드로와 어부들입니다. 밤을 새워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어부들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기쁨보다는 두려움에 떨며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이때의 두려움은 강한 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마치 고양이 앞에 있는 쥐와 같습니다. 두 번째는 풍랑을 마주한 제자들입니다. 거센 풍랑 속에서도 예수님은 편안히 잠을 자고 있었는데 제자들은 배가 뒤집힐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때의 두려움은 시련과 고난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바람이 불면 파도가 치듯이, 우리의 삶에는 시련과 고난의 파도가 몰아치기 마련입니다.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느꼈던 두려움은 4가지입니다. 강력한 힘에 대한 두려움, 시련과 고난에 따른 두려움, 근심과 걱정에 따른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런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이 있습니다. 강력한 힘을 가지셨지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나라에서는 성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욱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난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혈하던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죄가 커서 시련과 고난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시련과 고난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표징이라고 하셨습니다. 근심과 걱정을 주님께 의탁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의 짐은 가볍고, 나의 멍에는 편하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로 옮겨감이라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세 번이나 넘어지셨고, 창에 찔리시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육신은 죽으셨지만 부활하여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제자들도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순교의 길을 떠났습니다. 사도들은 모두 두려움 없이 순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화려한 건물과 제도를 통해서 2000년을 이어온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 없이 믿음의 길을 걸었던 분들을 통해서 2000년을 이어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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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예언자적 연대와 동정심!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10월 16일 목요일- 마흔두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예수님의 예언자적 사명
깊은 연민(동정)과 연대는 체제에 대한 비판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구약 성경 학자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 1933–2025)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외된 이들과의 연대와 동정심 통해 예언자적 사명을 실현하시는 역할에 대해 증언해 니다:
그분의 여러 사명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예언자적 사명을 수행하셨습니다. 그분의 가르침과 현존 안에서, 나자렛 예수님께서는 세속 권력의 의식(royal consciousness)에 대한 궁극적인 비판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분의 예언자적 비판은 사회적 주변부에 있는 이들과의 단호한 연대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그 연대는 그들과 동일한 무력함과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취약성을 요구합니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연대란, 오로지 고통받는 이들이 겪는 무력함을 함께 체험하고 수용하는 연대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자적 행위는 고통받는 이들과의 깊은 연대와 동정심 가득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회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과 연대하신 예수님은 그들의 고통에 깊은 동정심을 지니셨습니다. 이러한 동정심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인간 존엄에 반하는 구조적 고통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입니다. 예수님의 동정심은 다음을 선포합니다: 고통은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창조 질서가 아니며, 인간이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정상적 상태가 아니라, 인간성에 어긋나는 비정상적이고 용납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대에 지배적이었던 율법 중심의 질서는, 고대 파라오의 제국처럼, 동정심을 관계의 덕목으로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제국들은 통제와 질서, 권력 유지를 위해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며, 동정심의 실천을 위협으로 간주합니다. 사회 통제를 위한 법의 규범은 결코 인간의 고유한 존엄과 상황에 맞추어 조정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그 규범에 순응하도록 강요받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규범들은 무너지고 그와 함께 권력 체제 전체가 붕괴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자비는 단순한 개인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그분께서 사회 전체의 무감각과 불의에 맞서 행동하신 공적인 비판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제국은 무감각(numbness) 속에서 유지됩니다. 군사주의적 체제는 전쟁이 초래하는 인간적 희생에 대해 무감각할 것을 요구하고, 자본 중심의 경제는 빈곤과 착취의 대가를 외면하도록 만듭니다. 지배와 억압의 구조를 가진 정부와 사회는 이러한 무감각을 체계적으로 유지하고 강화하려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동정심을 통해 이 무감각을 뚫고 들어오십니다. 그분은 이 동정심을 통해, 일상처럼 여겨졌던 비정상적인 고통의 현실을 가시화하시며,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질서에 어긋나는 것임을 드러내십니다. 따라서 동정심은 단순한 선의의 표현이 아니라, 고통을 만들어내는 체제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 속으로 들어가시고, 마침내 그 고통을 육화하여 몸소 살아내십니다. [2]
자신의 저서 『존재들의 눈물』(The Tears of Things) 끄트머에서, 리처드 로어는 예수님과 히브리 예언자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이들을 "참된 예언자"라고 부르며, 그들의 특징을 제시합니다.
예언자들은 종교를 정의와 고통 속에서 연대하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길로 받아들입니다.
예언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대로, 고통이 있는 곳을 찾아 그곳으로 향합니다.
예언자들은 한 분 하느님과의 연대를 외치는데, 이는 곧 모든 피조물과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예언자들은 "반대하는 자"가 아니라, "함께하는 자"로 살아갑니다.
그들은 고통받는 이들, 배제된 이들을 위한 존재입니다.
그들은 죄가 아니라, 성장과 변화, 생명에 초점을 맞춥니.
그들은 자기들의 최고 스승이 현실 그 자체이며, 창조된 세상임을 압니다.
그들은 사제직을 거부하지 않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제직을 넘어 나아갔던 이들입니다. [3]
우리 공동체 이야기
엘리 다우드 목사(Minister Elle Dowd)의 "친절함(niceness)"에 대한 묵상(meditation)은 분명 제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저는 미국 북서부 끝자락에서 자랐고, 그곳에서는 ‘친절하게 행동하는 것’이 당연한 규범이었습니다. 누군가 이 규범을 깨뜨리면, 가족이나 친구들로부터 소외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그들이 순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기대하는 모습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이나 행동은, 설령 그것이 정의를 위한 것이더라도 ‘혼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상황에서도 ‘친절하게’ 행동할 것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Dave A.
역자 주: 오늘 묵상 글을 통해 보면, '친절함'과 '동정심'은 다른 것입니다. "친절함"은 갈등을 피하고 불편함을 감추는 방식일 수 있지만, "동정심"은 고통을 직시하고, 그 고통 속으로 들어가 함께 짊어지는 용기 있는 사랑입니다. 예언자적 자비는 정의를 위한 불편함을 감수하는 행위이며, 이는 예수님과 히브리 예언자들의 길이기도 합니다.
References
[1] Walter Brueggemann, The Prophetic Imagination, 40th anniv. ed. (Fortress Press, 2018), 81–82.
[2] Brueggemann, Prophetic, 88–89.
[3] Richard Rohr, The Tears of Things: Wisdom in an Age of Outrage (Convergent, 2025), 162–163.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Elijah Hiett, untitled (detail), 2017,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예언자이신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오늘의 시대라는 땅을 딛고 서서, 고통을 고립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탄식으로 인식합니다. 그리고 육화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성찰하고, 증언하며, 치유의 길을 선택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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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루카 12,4-7)
장차 올 세상에서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머리카락 하나’라는 우리 주님의 말씀은 머리카락의 길이가 아니라 수효를 가리킨다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육신의 어느 한 부분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뒤늦게 지체에 덧붙어 나서 삶의 유한성을 상기시켜 주는 추한 부분들은 옹근 본체 안에 결합되어 어느 한 곳도 기형이 없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예술가는 사람이지만 조각상을 만들다 실수하면 그 재료를 가지고 이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빚어 만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추하게 보이거나 균형이 어긋난 부분을 쪼아 없애는 정도가 아닙니다. 모두 부서뜨리고 같은 재료로 흠 없는 형상을 다시 빚어낼 수 있지요. 그러니 전능하신 ‘예술가께서는 그보다 훨씬 훌륭하게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평범하든 특별히든 아니면 기괴하든 사람 몸의 결함가운데 그분께서 흠을 없애고 옹근 본체로 다시 빚어내실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추한 모습의 지체는 비참한 현세 삶에서는 흔한 것이지만, 장차 올 세상에서 성도들이 누릴 행복한 삶에는 그런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선행의 결과로 크게 기뻐할 것이다. 여러분의 기쁨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고,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슬픔도 고통도 이러한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느님 안에서 맛보는 기쁨이요 신적인 기쁨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안에는 오로지 기쁨만이 존재한다. 하느님 안에는 노여움이라든가 고통과 같은 것이 없고 오로지 사랑과 기쁨만이 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평화가 될 것이다. 엑카르트는 복음서에 기록된 여인의 이미지, 곧 진통을 겪기는 하지만 새로운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에 그 진통을 잊어버리고 마는 여인의 이미지를 토대로 하여 이러한 기쁨과 일상적인 삶의 슬픔에 대한 생각을 피력한다. 그는 이와 동일한 구절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우리의 하늘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기쁨을 완전케 하소서."(488)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아우구스티노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 130
하느님께 맡겨드림
우리에게 유익하기도 하고 해롭기도 한 이 모든 곤궁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잘 모릅니다. 이들은 귀찮고 견디기 힘들고 약한 우리에게 매우 부담스러운 존재이기에 다른 일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들이 멀리 사라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 곤궁들이 우리에게서 없어지지 않는 것을 하느님께서 우리를 돌보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믿음을 두지 않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하기보다는 신심 깊은 인내로 이들을 잘 견디어 나가고 더 큰 보화물에 대해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능력은 허약함 가운데서 완성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에게는 완전한 자비를 베푸는 것을 거절하셨지만, 하느님께서는 경우에 따라서 인내하지 못하고 불평을 해 대는 사람들에게 화를 잔뜩 내시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준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청했고,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얻었는가에 대해 읽을 수 없습니다(민수 11,1-34}.
그러나 이들의 성급한 탐욕이 채워진 후 이들에게 엄한 벌이 가해졌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청하자, 하느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가 아니라 이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왕을 주었습니다(1사무 8,5-7) . 하느님은 또한 악마가 당신의 종을 시험하도록 청하자 그것을 허락했습니다(욥 1,12: 2,6). 그분은 또한 귀신들이 한 군단의 마귀들과 함께 돼지 떼에게 들어가려고 청했을 때에도 허락하셨습니다(마태 8,30-32 ; 루카 8.32).(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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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8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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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예전에 해외로 성지순례 갔다가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신자들과 함께 해외 성지순례 중이었는데, 가이드가 신자 한 명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순례지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은 분명히 확인했는데, 워낙 사람이 많은 곳이어서 다른 순례팀에 휩쓸려 가신 것 같다고 합니다. 연세가 꽤 있으신 분이어서 더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이드와 저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그분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결론은 너무 쉽게 찾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분께서 보여주신 모습이 참으로 인상 깊었습니다.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요?
어느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드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분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니, 일행을 잃어서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마침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어서 아이스크림 먹으며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십니다.
현명하신 분이었습니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되면 당황해서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시거든요. 그래서 서로 길을 엇갈려서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찾으러 오겠지.’라는 믿음에 자리를 지켜 주시니 쉽게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살면서 길을 잃었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잠시 멈춰야 합니다. 그래야 엉뚱한 곳에 가지 않고 제대로 목적지를 향해 갈 수 있게 됩니다. 멈춰서 우리의 안내자이신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문제는 주님보다 다른 것에 믿음을 둔다는 것이지요.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루카 12,1.2)
예수님께서는 이제 잘못된 종교 지도자를 따라서는 안 됨을 이야기하십니다. 먼저 누룩은 아주 적은 양으로도 반죽 전체를 부풀어 오르게 하고 그 성질을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위선’이 바로 이 누룩과 같다는 것입니다. 위선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작은 생각이나 행동으로 시작되지만, 결국 그 사람의 신앙과 삶 전체를 부패시키고 본질을 잃게 만드는 무서운 힘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12,4.5)
세상의 권력자들은 기껏해야 우리의 육체적 생명을 앗아갈 뿐,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따라서 창조주이자 심판자이신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은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도 모두 알고 계시며 깊은 사랑으로 돌보고 계십니다.
위선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의 사랑에 신뢰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길을 잃어도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서 참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자부심은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러일으킨다(스티브 룬드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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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어느 웅장한 대성당에 커다란 시계가 있었다고 합니다. 한 무리의 순례객들이 그곳을 방문하다가 그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 커다란 시계가 아니라 그 시계 밑에 붙어 있는 안내문이었다고 합니다.
그 시계가 오래 되다 보니 시간이 어떤 때는 너무 빨리 가고 어떤 때는 너무 느리게 가곤 했는데, 고치려 해도 고칠 방도가 없었나 봅니다. 그래서 그곳의 현명한 성당 관리인이 그 시계 밑에 안내문 같은 것을 걸어 놓은 것입니다. 안내문에 이렇게 쓰여 있었답니다.
"내 손이 가리키는 것을 믿지도, 탓하지도 마세요. 진짜 문제는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그러니 살아가는 동안, 마음속을 먼저 바로잡으세요. 그래야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진실을 비출 수 있습니다."
영어에서 위선은 Hypocrisy인데 이 단어는 그리스어 hupo (아래)와 krino (판단하다, 결정하다)의 합성어입니다. 이 두 단어가 결합된 hypokrisis(히포크리시스)가 영어의 hypocrisy가 된 것인데, 이는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배역을 맡아 연기하는 것', 즉 '가면을 쓰고 말하는 배우'를 뜻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본질을 감추고 다른 사람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위선이라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두 가지의 충동적인 마음 때문에 위선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루카 복음 18,11에 나오는 바리사이처럼 바리사이처럼, 자신이 남들보다 낫다고 느끼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이는 자존감을 높이려는 심리이지만, 타인을 낮추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고, 이렇게 하다 보면 '나' 이외에는 누구도 인정할 수 없는 고립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반대로, 어떤 사람은 남들과 같아서 다행이라고 느끼는 마음인데 이것은 소속감과 안정감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속감이나 동일성에 의지하다 보면 '자아 상실'이나 부화뇌동의 집단 최면에 걸려 옳고 그름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바람이 다 진정한 "나"를 살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호주 출신의 호스피스 간호사이자 작가인 브로니 웨어(Bronnie Ware)는 임종을 앞둔 환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삶의 후회에 대한 통찰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가장 후회하는 다섯 가지](The Top Five Regrets of the Dying)라는 책을 집필해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내 뜻대로 살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즉, 타인의 기대에 맞춰 살다가 정작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는 것이지요.
2. "내 감정을 솔직히 표현했더라면..." 갈등을 피하거나 상처받을까 두려워해 진심을 말하지 못했던 순간들을 후회하는 겁니다.
3. "일을 너무 많이 했어..." 즉, 가족과 같은 소중한 관계성에 중심을 두지 않고 일에만 몰두하며 살아온 것을 아쉬워하는 것입니다.
4. "친구들과 연락을 더 자주 했어야 했는데..." 세 번째 후회와 비슷한 내용이지요?! 소중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멀어진 친구들과의 시간을 아쉬워한다는 말입니다.
5. "더 행복해지려고 노력했어야 했는데..." 행복을 선택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걱정과 불만 속에 살아온 것을 후회한다는 겁니다.
이 중 첫 번째가 바로 "진정한 나로 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대부분 타인의 기대에 맞추느라 자신이 진짜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한 것을 가장 많이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와 첫 번째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지 못한 것"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갈등을 피하거나 평가를 두려워해 자신의 진심을 말하지 못했던 순간들을 아쉬워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고백한 또 다른 후회들 중 하나는 "행복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행복이 선택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불만과 걱정 속에 살아온 것을 후회한다는 것이지요. 이 후회도 역시 자기 존재의 소중함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감으로써 온 결과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 인정하겠지만, 참된 행복은 사랑할 때 오는 것입니다!
이만큼 진정한 자아 사랑이 중요하다는 말이겠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하느님)을 두려워하여라!"
과연 이 말씀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
사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한 공포심을 조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삶의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려는 가르침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다음에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면서 우리 존재가 참으로 소중하다는 말씀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수많는 참새보다 더 귀하다!"라고요!
이런 자아 사랑은 이기심과는 전혀 다른 참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 진정한 "나"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남들이 원하는 원하는 바를 이루는 것이거나 또 '내'가 허상으로 목표를 둔 완벽함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참으로 소중히 여기며 '내' 내면 깊은 곳에서 참으로 원하는 것이 무언지를 진솔하게 바라볼 수 있는 용기입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는 '나' 자신과 '나'와 연결되어 있는 모든 존재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맹인이자 벙어리요 귀머거리였던 헬렌 켈러는 이런 명언을 남겼습니다.
"행복의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닫힌 문을 오랫동안 보기 때문에 열려 있는 문을 보지 못한다."라고요.
지나간 것에 집착하지 말고 지금 열려 있는 가능성을 보라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조언입니다. 이 조언이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시는 조언이 아닐까 합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기(임마누엘)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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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X X X X X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116401&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서하”를 찿아 들어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위에 X X X X X 로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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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러다보니 자기를 죽이는 사람을
가장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생명을 하느님께서 귀하게 생각하시기에
겉으로 보기에 그들이 우리의 생명을 좌우하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만이 좌우하실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사람만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은 피하기가 쉬울 수 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은 오히려
우리가 알지 못하면서 공격을 받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바이러스나 환경이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기도 합니다.
바이러스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에
두려움이 클수록
내가 익숙한 곳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만나는 사람도 줄어듭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야 하기에
신경은 항상 날카롭게 서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밖에서 오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가두고
자기 자신 때문에 고통받게 됩니다.
원인이 밖이 아닌 자기 자신에서 오기에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기는 더 힘들어집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을 내 힘으로 조절하고 싶은 마음에서 옵니다.
나의 노력으로 죽음을 막거나 피할 수 있다고
아니면 적어도 늦출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생명은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역을 인간이 좌우하고 싶어하는 순간
우리는 그 두려움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이
우리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다른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만 두려워하면서
우리는 두려움에 떨 필요가 없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소중하게 대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두려움이 떠오를 때마다
우리의 생명을 소중하게 대하시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하느님께 나의 생명을 맡기는 연습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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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2,1-7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위선’이란 본래는 선하지 않은데 사람들에게 선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하는 행동을 일컫지요. 그렇게 하는 이유는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는 사람들에게 인정이나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될까봐, 사람들과 친밀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자기 혼자 외톨이가 될까봐 두려워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를 엄청나게 의식합니다. 사람들이 원하고 바라는 기준에 이르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다 정작 자기 본모습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 것 같으면, 이미 내 과거와 본모습을 다 알고 있어서 굳이 잘보이지 않아도 되는 이들하고만 함께 있으면 탐욕과 집착, 시기와 질투 같은 내 마음 속 괴물들이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 눈치 좀 그만보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세상에 묶어두고 걱정 속에 가두는 가짜 두려움에서 벗어나라고 하십니다. 그러지 않으면 남들이 나를 볼 때에만 선한 척 하고 그렇지 않으면 악함에 빠져드는 ‘이중생활’ 속에서 점점 지쳐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결국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나와 현실 속의 끔찍한 나 사이의 큰 괴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마음이 무너져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짜 두려움에서 벗어나 참된 두려움을 지녀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나에게 맡겨두신 생명을 언제든 되찾아가실 수 있는 분, 내가 죽은 후 나의 영혼을 지옥에 던질 수 있는 심판의 권한을 지니신 분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런 분은 오직 하느님 뿐이지요. 그런데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처럼 그분 시선을 피해 숨으며 그분으로부터 멀어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며 나를 지켜보고 계심을 항상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그분 뜻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면 어쩌나, 그래서 그분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면 어쩌나 항상 조심하며 말과 행동을 삼가라는 뜻입니다. 그러다보면 내 마음이 하느님 뜻과 일치하여 내 겉모습까지 그분을 닮은 참된 자녀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기가 참 어렵습니다. 쉽고 편한 것을 먼저 찾는 나약한 우리들이기에, 지속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며 실천하기가 그만큼 어렵고 힘들게 느껴지는 겁니다. 그렇게 하느님 뜻을 망각하며 살다보면 부족한 자기 모습 때문에 양심이 찔려서 어느 순간부터 하느님을 ‘무서워’하게 됩니다.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음을, 자신이 하느님께 있어서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한 존재임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용서와 자비를 신뢰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단죄하기에 날이 갈수록 죄책감과 자괴감이 커져가지요. 그러다 나중에는 그런 자기 모습을 위선으로 감추고, 심판과 단죄의 화살을 다른 이들에게 돌리는 가혹하고 무자비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굳게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을 바탕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여 하느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속에 사는 사람은 다른 이를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습니다. 안쓰러움과 공감으로, 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라는 선한 지향으로 이웃과 형제들에게 다가가 도움의 손길을 내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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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380
10월17일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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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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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꼰벨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최문기 마티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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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나는 맹수의 이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요한 사도의 제자로 추정되는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24~107)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그는 요한 사도의 제자일뿐 아니라 당시 번영했던 안티오키아 교회의 2대 주교였습니다. 그리고 초세기 교회의 대표 순교자로 유명합니다.
24년경 태어나셨으니, 아마도 어린 나이였지만, 예수님을 직접 뵙는 영광을 누린 제자였습니다. 이냐시오 주교님은 한국 천주교로 치면, 최양업 신부님과 비슷합니다. 대대적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계속되었지만, 오랜 세월 체포되지 않고, 박해로 힘겨워하는 초세기 교회의 든든한 기둥이요 아버지로서 신자들을 보호하고 격려했습니다. 45세에 주교가 된 그는 약 38년 동안 안티오키아 교회를 위해 봉사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07년 83세 되던 해 이냐시오 주교님은 체포되었는데, 체포에서 순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너무나 잔인하고 혹독했지만, 이냐시오 주교님은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당당히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안티오키아에서 체포된 주교님은 로마로 압송되어가는 과정에서 수인이라기 보다는 영웅이요 개선장군 같은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압송되어가는 당신의 모습에 가슴 아파하고 통곡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냐시오 주교님은 오히려 그들을 따뜻이 위로했고 격려했습니다. 용기를 잃지 말고 힘을 내라고, 파이팅하자고 외치셨습니다.
놀라운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냐시오 주교님께서는 안티오키아에서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그 고통스러운 여정 중에도 머릿속은 언제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 양들에 대한 극진한 사랑은 일곱 통의 편지 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나의 간청입니다. 불필요한 호의를 나에게 베풀지 마십시오. 나를 맹수의 먹이가 되게 버려 두십시오. 나는 그것을 통해 하느님께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밀알입니다. 나는 맹수의 이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이 맹수라는 도구를 통해서 내가 하느님께 봉헌된 희생 제물이 될수 있도록 그리스도께 기도하십시오.”
“이 세상의 모든 쾌락도 지상의 모든 왕국도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 극변까지 다스리는 것보다 그리스도 예수와 일치하기 위해 죽는 것이 나에게는 더 좋습니다. 내가 찾고 있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바로 그분이며 내가 원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 부활하신 바로 그분입니다. 다시 태어나는 내 출생의 때가 가까웠습니다.”
“지금은 내가 살아서 이 글을 쓰고 있지만 죽음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나의 지상적인 모든 욕망은 십자가에 못박혔고 세상 물질을 사랑하기 위한 불은 내 안에 더 없습니다.”
재판관 앞에선 이냐시오 주교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놀라운지. 재판관이 묻습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주교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테오포로라고 합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 “하느님을 공경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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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2)하느님 사랑으로 인해>
우리 모두 이 땅에 멋진 ‘소풍’을 온 이상, 우리네 하루하루의 삶이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해야 할텐데, 너무나 자주 불행하다고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우리 인간들의 ‘무지’(無知) 때문이 아닐까요? 다른 무지에 앞서 존재에 대한 무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자신에 대한 무지, 이웃에 대한 무지, 하느님에 대한 무지로 인해 우리는 그렇게 자주 불행을 느끼리라 저는 믿습니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복음은 너무나도 명백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머리카락 수효까지 다 세고 계시는 분!’ 인간의 머리카락 숫자는 약 10만개 정도라고 합니다. 하루에 40-50개 정도 빠지고 또 다른 머리카락이 생성됨을 되풀이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수많은 우리 인간들의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세고 계시지는 않겠지요? 이 말은 그만큼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말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만큼 우리를 잘 알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이 극진하다는 말입니다.
내가 아무리 부족해도, 내가 아무리 비참해도, 내가 아무리 죄인이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지켜보시며, 나를 위해 애쓰시고, 나를 구하시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만 큰 오산입니다. 내 입술이나 내 코에 묻은 얼룩을 나는 모르는데 나를 쳐다보는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듯이 어떤 경우 나에 대해 다른 사람은 다 아는데, 나만 나를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노력이 나를 알기 위해 나를 떠나는 노력입니다. 나를 찾아 자주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나를 보다 정확히 보고, 나를 보다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더 큰 기준이자, 더 큰 잣대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나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분이신지요? 얼마나 나에게 큰 가치와 등급을 매기시는 분이신지 모릅니다. 내게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큰 분이신지는 십자가상의 예수님 모습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의 존재 전체, 당신의 목숨까지 걸고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정말 하찮은 존재이지만, 정말 가련한 존재이지만, 정말 슬픔과 고통의 존재이지만, 정말 약한 존재이지만, 하느님 그분의 사랑으로 인해 강건해집니다. 그분의 자비로 인해 성화됩니다. 우리 인생이 비록 죄와 죽음의 그림자로 얼룩져있다 할지라도 그분 안에 머무름으로 인해 환히 빛납니다. 우리가 비록 어둠속에 앉아있다 할지라도 하느님 그분의 현존으로 인해 밝게 빛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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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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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두려움이 사라지는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두려움과 마주합니다. 미래, 실패, 사람들의 시선, 그리고 홀로 남겨질지 모른다는 근원적인 두려움까지. 이 두려움은 마치 우리를 옭아매는 사슬과 같아서, 우리를 위선적으로 만들고 거짓말을 하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두려움의 본질을 꿰뚫어 보시고, 진정한 자유로 나아가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아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너희는 머리카락까지도 모두 세어 놓았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루카 12,6-7)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보호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하찮은 참새 한 마리조차도 하느님의 손길 안에 있는데, 하물며 그분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우리를 돌보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안의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합니다. "언제 두려움이 사라지는가?" 그 답은 바로 "두려워하지 않기로 결심한 순간부터"입니다. 두려움은 믿음이 없어서 생깁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믿기로 결심하는 순간부터 우리 안에 싹트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중요한 관계는 '믿음의 결단'에서 시작됩니다. 결혼을 예로 들어 봅시다. 배우자를 믿기로 결심하는 순간부터 진정한 결혼 생활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안 믿으려는 사람은 결혼해서도 의처증이나 의부증에 시달립니다. 아무리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도, 아무리 충실한 모습을 보아도, 결국은 불신과 두려움에 갇혀 끊임없이 자신을 보호하려 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위선입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 약해 보일까 봐, 세상에 잡아먹힐까 봐, 혹은 사랑받지 못할까 봐 거짓말을 하고 자신을 포장하는 것입니다. 마치 멧돼지가 발에 가시가 박혀도 절뚝거리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정글에서는 약하게 보이면 바로 사냥감으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이 바로 이런 위선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보호를 믿기로 결심하지 않았기에, 끊임없이 자신을 위장하고 두려움에 갇혀 살았습니다.
여기, 아버지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근원적인 두려움 때문에 평생 위선적이고 경쟁적인 삶을 살았던 한 중년 남성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신과 전문의 이무석 교수의 책 '삼십년 만의 휴식'에 나오는 실제 상담 사례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사회적으로는 성공했지만, 늘 불안과 강박에 시달렸습니다. 끊임없이 남들과 경쟁하며 이기려 했고, 완벽주의에 사로잡혀 자신을 혹사했습니다. 그의 불행의 근원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있었습니다. 평생 아버지로부터 따뜻한 사랑이나 인정의 말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고, 늘 비판과 냉대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그 노력이 사회적인 성공으로 이어졌지만, 내면 깊숙한 곳에는 '아버지에게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지독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 두려움이 그를 위선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겉으로는 강하고 능력 있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늘 비난받을까 봐 전전긍긍했고, 자신의 약점을 숨기기 위해 거짓으로 자신을 포장했습니다.
상담 과정에서 그는 마침내 이 두려움의 실체를 직면했습니다. 이무석 교수는 그에게 아버지의 눈을 통해 자신을 보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더 이상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아버지를 용서하고, 오히려 그 역시도 사랑받지 못했던 불쌍한 존재였음을 이해하고 불쌍히 여기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이 '결심'은 그에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이무석 교수는 그의 꿈 이야기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를 용서한 뒤 그가 꾼 꿈에서, 예전에는 늘 엄하고 거대했던 아버지가 소파 위에 있는 작은 강아지처럼 보였다고 했습니다." 이 상징적인 꿈은 그가 아버지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결심과 함께 그의 내면에서 '믿음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더 이상 아버지의 인정을 구하지 않아도 자신이 존재 가치가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고, 그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치유되어 30년 만에 비로소 '휴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의 위선적인 삶은 막을 내렸고, 그는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 이야기들 속에서 "언제 두려움이 사라지는가?"에 대한 분명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믿기로 결심하는 순간부터입니다. 인간이 신의 존재를 믿어야 하는 이유는, 증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행복을 위한 근원적인 필요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믿기로 결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위선의 가면을 벗어 던지고, 참된 평화와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저의 큰형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릴 적 밤마다 극심한 가위눌림이라는 어둠의 세력에 시달렸던 형님은, 스스로 강해지려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이제는 주님께 나를 온전히 맡기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가위눌림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성호를 긋고 자신을 주님께 의탁하는 '믿음의 결단'을 내렸고, 그 순간부터 하느님의 보호가 임하며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 어둠의 세력과 싸우며 강한 척 살지 않아도 되는, 참된 평화를 얻었습니다.
두려움은 믿음이 없어서 옵니다. 그런데 믿음은 믿기로 결심할 때 생깁니다. 증거가 있어서 믿는 게 아닙니다. 그냥 주님께 우리 자신을 의탁하기로 결심하면 됩니다. 그 순간, 두려움은 사라지고 참된 믿음이 우리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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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말이 씨가 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새로운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과 행동이 하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제게 큰 위로가 되는 말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힘든 이들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치 시댁에서 힘들게 시집살이하던 딸은 친정으로 돌아가서 마음 편하게 지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말이 씨가 되는 일도 있습니다. 불평의 말을 입에 달고 살면 불평할 일이 생깁니다. 원망의 말을 입에 달고 살면 원망할 일이 생깁니다. 매사에 비난과 험담을 일삼는 사람은 길가에 떨어진 씨앗처럼 열매 맺지 못하는 삶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주 하신 말씀 중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이 약하냐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믿음은 반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두려움이 큰 사람은 믿음이 약하고, 믿음이 강한 사람은 두려움이 적습니다. 복음서에 제자들이 두려워했던 장면들이 몇 번 있습니다. 첫 번째는 베드로와 어부들입니다. 밤을 새워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어부들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기쁨보다는 두려움에 떨며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이때의 두려움은 강한 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마치 고양이 앞에 있는 쥐와 같습니다. 두 번째는 풍랑을 마주한 제자들입니다. 거센 풍랑 속에서도 예수님은 편안히 잠을 자고 있었는데 제자들은 배가 뒤집힐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때의 두려움은 시련과 고난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바람이 불면 파도가 치듯이, 우리의 삶에는 시련과 고난의 파도가 몰아치기 마련입니다.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느꼈던 두려움은 4가지입니다. 강력한 힘에 대한 두려움, 시련과 고난에 따른 두려움, 근심과 걱정에 따른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런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이 있습니다. 강력한 힘을 가지셨지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성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욱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난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혈하던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죄가 커서 시련과 고난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시련과 고난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표징이라고 하셨습니다. 근심과 걱정을 주님께 의탁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의 짐은 가볍고, 나의 멍에는 편하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로 옮겨감이라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세 번이나 넘어지셨고, 창에 찔리시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육신은 죽으셨지만 부활하여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제자들도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순교의 길을 떠났습니다. 사도들은 모두 두려움 없이 순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화려한 건물과 제도를 통해서 2000년을 이어온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 없이 믿음의 길을 걸었던 분들을 통해서 2000년을 이어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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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이찬우 다두 신부님]
어릴 때 우리나라의 무서운 전설을 다룬 드라마인 “전설의 고향”을 보며 귀신을 무서워하였습니다. 특히나 저는 ‘내 다리 내놔’ 편을 보고 나서는 갑자기 귀신이 나타나 저를 잡아갈까 봐 두려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요즘처럼 집 안에 화장실이 있지 않고 집 밖에 있어서 밤에 화장실에 가기도 꽤나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이처럼 어릴 때는 귀신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를 무서워하였다면, 어른이 된 지금은 보이는 존재가, 특히 사람이 무섭습니다. 사람들이 무심코 저에게 하는 행동 하나 말 한마디가 더 무섭습니다. 마음에 상처 주는 말을 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을 볼 때면 사람이 정말 무섭게 느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루카 12,4-5)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하느님만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경외’, 곧 두려워함은 성령 칠은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무서운 분이셔서, 우리가 죽은 뒤에 심판하시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경외란 하느님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혹시라도 그분 마음을 상하게 하지는 않는지 자신을 살펴보게 하는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가장 두려워합니까? 사람입니까? 하느님입니까? 하느님을 왜 두려워합니까?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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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1-7: 너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먼저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경계하라고 하신다. 누룩은 작은 것 같지만 온 반죽을 부풀게 하듯이, 위선은 작아 보이지만 공동체 전체를 병들게 한다. 겉으로는 거룩해 보이지만, 속은 탐욕과 교만으로 가득 차 있는 삶, 그것이 바리사이들의 모습이었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이 위선에 물들지 않도록 경고하신다.
이어서 주님은 두려움의 방향을 새롭게 가리키신다. “육신을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 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지옥에 던질 권한을 가지신 하느님을 두려워하라.”(4-5절) 즉,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단순히 벌을 받을까? 무서워하는 공포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저버릴까? 두려워하는 경외심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설명한다: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In Psalmos 111)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 자녀답게 살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다.
그러나 주님은 곧바로 위로의 말씀을 주신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하나도 하느님께서 잊고 계시지 않는다. … 너희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6-7절) 참새조차 잊지 않으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인 우리를 절대 잊지 않으신다는 말씀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구절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머리카락까지 세신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세밀히 아신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분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더 큰 불신앙이다.”(Homilia in Matthaeum 34)
우리가 세상에서 겪는 두려움—미래에 대한 두려움,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길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길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할 때, 세상의 두려움은 작아지고, 우리는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사람의 눈치를 더 두려워하는가, 아니면 하느님 앞에서의 진실을 더 두려워하는가? 나는 위선의 누룩 속에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신뢰 속에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자녀답게 살아간다면, 머리카락 하나도 잊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손길 안에서 담대히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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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런 나 얼마나 좋은가요>
루카 12,1-7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
그때에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서로 밟힐 지경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이런 나 얼마나 좋은가요>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루카 12,1-2)
굳이 숨기지
않겠어요
나는
나이니까요
굳이 드러내지
않겠어요
나는
나이니까요
이런 나
얼마나 좋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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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생활의 궁극 목적이 무엇인지를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러는 동안에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서로 밟힐 지경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루카 12,1-7)
1)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를 바로 앞의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조심하여라.”에 붙여서 읽으면, “위선은 언젠가는 반드시 위선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위선’을 ‘바리사이들의 누룩’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바리사이들의 위선이 다른 사람들을 물들여서 위선자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조심하여라.”는, “너희는 바리사이들 같은 위선자가 되지 마라.”입니다. ‘위선’으로 다른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지만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드러난다.’는,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게 되면, 위선자들의 위선은 모두 드러날 것이고, 엄한 심판과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입니다.
2)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를 바로 뒤에 있는 3절에 붙여서 읽으면, 이 말씀은, “너희가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복음은 온 세상에 선포될 것이고,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듣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복음 선포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받을 몫이 없을 것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능동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라는 말씀이, 마태오복음에는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7).”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말씀은,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라는 명령입니다.
<복음 선포는, 또는 선교활동은,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실행해야 할 신앙인의 사명이고 본분입니다. 그런데 선교활동은 특별한 재능이 필요한 일이 아닙니다.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자기가 잘하는 방식으로 하면 되고, 자신의 ‘삶’으로 신앙을 증언하면 됩니다.>
3)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5,13-14)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나의 벗’이라고 부르신 것은, 당신의 목숨을 내놓을 만큼 제자들을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당신이 제자들을 보호하고 지켜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는, “박해자들을 무서워하지 마라.”이고, “육신의 죽음을 무서워하지 마라.”이기도 합니다. “...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는, “하느님만 섬겨라.”이고, “영혼의 멸망을 두려워하여라.”이기도 합니다.
박해자들에게 육신의 목숨을 빼앗기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지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하는 생활도 아니고, 무병장수를 누리려고 하는 생활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려고 온 삶을 다 바쳐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박해자들은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일에 대해서 아무 권한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그자들을 무서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과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4) 하느님께서 참새 한 마리도 잊지 않으신다는 말씀과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우리의 신앙생활을 세세하게 잘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잘 알고 계시니까 그대로 갚아 주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귀한 존재다.”, 즉 “너희는 하느님께서 귀하게 여기시고 특별히 사랑하시는 자녀들이다.”라는 뜻입니다.
<“왜 하필이면 참새를 비교 대상으로 삼으셨을까?”라고 물을 수 있는데, ‘참새’는 박해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예수님 말씀은, “박해자들은 참새들보다 더 하찮은 존재다.”라는 뜻으로도 해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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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참으로 소중한 존재>
무엇인지 몰라서 말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답답하게 하고, 알면서도 말하지 못하면 조바심이 나고, 알지만 말을 않는다면 힘이 든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침묵을 압니다. 하느님 안에서 고요를 찾는 것입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소연도, 감사도, 침묵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침묵은 곧 기도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고 인정해 주지 않아도 서운함 없이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신(루카 12,7)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분 앞에 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위선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위 잘나고 똑똑한 그들은 그들의 내면적인 모습과는 달리 어떤 것을 아는 체, 가지고 있는 체하기 때문입니다.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나기 마련입니다.
생선을 만져놓고서는 향내가 나기를 바랄 수는 없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내적으로 변하지 않고 겉꾸민다면 그와 다를 바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들은 바를 가슴에 새기고 또 가르치며, 가르치는 바를 살아야 할 소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2)
본당 생활을 하다 보면 피정이나 기도회에 열심히 참여하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의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을 많이 받았다고 호들갑을 떨며 자랑을 하고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오히려 많은 사람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은총을 많이 받았다고 하면서도 그들의 삶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더 교만해지고, 뻣뻣해지며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낫다는 마음이 은연중에 자리하게 됩니다. 받은 은총을 말하지 못해 조바심을 내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은총을 받았는지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삶의 태도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사실 “사람이 하는 일이 제 눈에는 옳게 보이지만, 야훼께서는 그 마음을 헤아리십니다.”(잠언21,2)
“구술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은총을 받은 만큼 삶의 모범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은총을 증거 하지 못한다면 바리사이의 위선이 우리 안에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귀한 존재입니다. 각자는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고 그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이들을 하느님은 귀하게 여기십니다. 괜한 욕심과 바램 때문에 위선을 떠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큰 만큼 정의도 살아있습니다. 정의로우신 분은 불의를 심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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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를 향한 질책과 불행 선언에 이어서 제자들을 위한 가르침이 이어집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이들과 율법 교사의 운명을 비교하시면서 예수님 자신과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받게 될 박해를 예고하셨습니다.
미래에 벌어질 일에 대한 예고는 제자들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들이 맞게 될 고난의 순간을 준비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고자 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시작은 제자들이 경계하여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알려 주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누룩에 비유하십니다. 누룩은 빵을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한 재료입니다. 그런데 밀가루 반죽이 빵이 되려면 발효라는 일종의 부패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누룩을 비유로 들어 바리사이적 위선이 제자 공동체 안에서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주의를 당부하십니다. 제자들은 율법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리사이들을 경계하여야 합니다.
제자들이 두려워하여야 하는 대상은 하느님이십니다. 제자들은 목숨을 위협하는 박해나 핍박의 상황에서 두려움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주관하시고 심판하실 권한을 가지신 하느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두 닢 값어치의 참새 다섯 마리보다 더 귀한 존재이므로 하느님께서 보호하여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경계할 대상과 두려워할 대상을 아는 것은 ‘지혜’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를 하느님께 청합시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10,2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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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 수도회 강승현 베드로 신부님]
오늘 하루 내 곁에서 헌신하고 있는 분들에게 감사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유학생 시절 여러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어려움은 단연 언어였습니다. 그 괴로움이 얼마나 컸던지 산책 중에 주인과 함께 노는 강아지를 보더라도 ‘강아지도 이탈리아 말을 알아듣는데 나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라며 저 자신을 한심해 하고 자책하기 일쑤였습니다.
저 딴에는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외국어를 말하고 알아듣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교수님들의 자비로운 마음 덕에 학부 수업은 무사히 마쳤지만 졸업을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남았습니다. 바로 논문이었죠.
초등학생보다 못한 외국어 실력으로 방대한 자료를 읽고 정리해 글을 쓴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도 모르게 지도 신부님을 피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부님께서 저를 연구실로 부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베드로, 나는 너를 도와주기 위해 있는 거야. 그러니 언제든 나의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 오렴. 나는 항상 여기에 있을 테니.” 교수님의 그 말씀이 제게 얼마나 큰 위로와 위안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무섭고 두렵게만 보이던 교수님이 그 순간 정말 다정한 친구, 나와 함께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친구로 느껴졌습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나의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나의 결점을 알고도 나를 떠나지 않고 늘 내 곁에 머물러 있는 절친으로 다가오시며 제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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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루카 복음 12장 7절)
가을은 두려움 없이 그리고 아낌없이 모든 것을 되돌리는 자연의 섭리를 통해 인생을 돌아보도록 초대합니다. 가을은 두려움이 커서 많은 것을 움켜쥐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셈입니다.
세상 유혹과 세파가 엄청나게 거세게 밀려드는 오늘날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오직 하느님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 없이 복음을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려고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고 구속하며 지배하고 약화시키는 이들에 맞서 투신하시다가 박해받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도 그분이 걸으셨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 길은 늘 도전과 고통과 시련이 따르기에 쉽지 않음을 잘 압니다. 그래서 적당히 양다리를 걸치고 살아가거나 빵 속에 감춰진 누룩처럼 위선으로 자신을 포장하거나 슬쩍 현실회피를 하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 부족이요, 사랑 부족에서 오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봅니다. 두려움이야말로 사랑의 근원적인 걸림돌입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신자이면서도 현세의 이익이나 권력 앞에서는 가면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두려워해야 하는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뿐입니다. 인간은 육체를 죽일 수 있을 따름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빼앗아 가실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루카 복음 12장 5절)
제자들은 사람들 앞에 자기들의 믿음을 고백하기를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귀하고 여기시고 돌보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루카 복음 12장 4절-7절)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루카 복음 12장 6절-7절)
한 닢은 로마 동전 ‘아스’를 말하는데 이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마태오 20장 2절)인 로마 은화 ‘데나리온’의 16분의 일에 해당되는 매우 적은 액수입니다.
이처럼 참새는 싼 값으로 살 수 있는 가난한 이들의 음식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주 하찮은 참새도 잊어버리지 않으신다면 그보다 훨씬 귀한 제자들에 대한 관심이야 더할 나위 없이 큼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존귀한 것은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느님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렇게 우리를 있는 그대로 귀하게 여겨주시고 극진히 사랑해주십니다. 우리는 그 사랑의 힘에 의지하여 신앙을 증거하는 데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찬 섭리에 대한 확신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어려움도 견디어 내게 해줍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외부의 위협이 아니라 스스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세상과 사람의 눈치를 보며, 성령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과 복음적 가치들을 상대화 하는 오늘, 이제 더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현세의 편리함이나 자본의 힘에 끌려다니지 말고 두려움 없이 소신껏 행동으로 신앙을 고백했으면 합니다.
나의 힘이 아니라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나를 귀하게 여겨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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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믿음을 굳건히 세우시기 위하여 두 가지를 교육하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해야 한다(루카 12,1)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들로부터 장차 어떤 핍박을 당하더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로지 한 분 하느님만을 두려워하라(12,2-7)는 것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 내용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인지, 그리고 왜 그분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해야 할 분은 육신을 핍박하고 죽일 수 있는 이가 아니라, 죽은 뒤의 권한까지 가지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이시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이를 <히브리서>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히브 5,7)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오직 한 분, 아버지 하느님뿐인 것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에 대해 <시편>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을 경외함은 순수하니 영원히 이어진다.”(시편 19,10 참조)
그래서 <집회서>에서는 말합니다.
“하느님을 경외함은 그분에 대한 사랑의 시작이요, 믿음은 그분에 대한 의탁의 시작이다.”(집회 25,12)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하느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 외에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루카 12,7)
그렇습니다. 우리는 귀한 존재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바쳐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분께 대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18-19)
이를 잘 보여준 분이 바로 내일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입니다. 그는 처형당하기 위해 로마로 끌려가면서도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밀알이다. 맹수들의 이빨에 가루가 되어 깨끗한 빵이 되리라.” 이처럼 사랑은 두려움 없는 자유를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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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12,7)
주님!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박해를 받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진리이신 당신께 희망을 두고, 주님이신 당신께 믿음을 두게 하소서!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신 당신의 사랑으로 제 두려움을 몰아내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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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는 비교 불가! 하느님 사랑 안에 있는 주님의 벗!>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어제까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위선자라고 나무라신 주님께서 오늘은 제자들을 당신의 벗이라고 부르시며 제자들이 당신의 벗으로서 취해야 할 태도를 알려 주십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위선은 조심하되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하느님을 두려워하라 하시는데 왜 그리 해야 하나 하면 하나는 제자들이 주님의 벗들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 사랑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하느님 사랑 안에 있는 주님의 벗들이라면 주님의 벗답게 박해자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자 주님의 벗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벗이라는 고귀한 자의식과 하느님 사랑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라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의 벗이라면, 그러니까 위선자들의 벗이 아니라 주님의 벗이라면 먼저 자기의 고귀함에 대한 자의식과 자부심이 있어야 하고, 그렇기에 박해자나 적대자들을 하찮게 여길 수 있어야 하며, 그렇기에 그들을 도무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잘 아시듯 주님의 벗이라는 자의식과 자부심은 교만과는 다릅니다. 교만이 남과 비교하여 우월감을 가지고 남을 깔보는 것이라면 자부심은 나를 소중히 여기기에 남과의 비교 대상으로 자기를 함부로 내놓지 않는 것이며 요즘 말로 비교 불가인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주님의 벗이고 하느님 사랑의 고귀한 대상인데 어쩌자고 나를 하찮은 인간의 비교 대상으로 내놓고,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여길까 전전긍긍하고 더 나아가 두려워한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보물을 싸구려를 파는 시장에 내놓는 것과 같습니다. 보물은 보물답게 있어야 하고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 사랑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장에서 몇 푼에 팔리는 참새보다 귀한 존재이며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시는 하느님 사랑 안의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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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루카 12,1)
<고진감래의 삶(신앙)!>
오늘 복음(루카12,1-7)은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는 말씀과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는 말씀입니다.
'고생 끝에 낙(기쁨)이 온다.'는 '고진감래'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이는 체험된 삶의 지혜이며, 우리의 삶을 대변해 줍니다. 곧 '거져 주어지는 것, 그냥 주어지는 것이 없다.'는 것이고,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모든 것은 '수고와 땀의 결실'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뜨거운 뉴스로 계속 보도되고 있는 캄보디아 소식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도 바로 '고진감래의 메시지'입니다. '쉽게 돈 벌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고, 때문에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그런 유혹과 가짜 뉴스를 경계해야 하고, 그것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그들의 위선과 가짜를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면서, 박해와 시련을 견디어 내라고 하십니다.
'믿는 이들의 삶도 고진감래의 삶(신앙)'입니다. 믿는 이들의 목적인 생명과 부활은 거져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는 분명한 표지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생명과 부활의 대전제는 십자가'입니다. 그 너머에 생명과 부활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 몸소 가르쳐 주신 '진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그대로 믿고 따라간 수많은 순교자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진리'입니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루카12,4.5)
"주님, 세상을 떠난 한영희(막달레나)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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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루카 12,7)
세상은 우리를
잊을지라도,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존재를
결코 한순간도
잊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따뜻한 위로이자
가장 따뜻한 시선을
우리에게 보내십니다.
참새 한 마리도
잊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오늘 만납니다.
소외된 이들,
가장 작은 이들이
하느님께
가장 가까운
소중한 사람임을
다시 일깨워
주십니다.
모든 인격은
절대적 가치를
지니며,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세상의 평가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않습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일은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인격을
수단이 아닌 존재로,
평가가 아닌 기억으로,
비교가 아닌 존중으로
마주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로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소중한 인격과
타인의 존엄을
사랑과 신뢰 안에서
다시 만나는
소중한 오늘입니다.
소중한 인격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가장 빛나는
하느님의
가장 소중한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소중함이
이끌어가는 삶은
사랑의 참된
여정입니다.
소중함의
여정 위에
우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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