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명절 추석이 다가옵니다. 조상께 차례 드리고 온 가족이 모여 얘기꽃을 피우다 보면 바깥 생활의 고단함도 물러갑니다. 하지만 가족이라고 늘 따스함만 줄까요? 모처럼 만났다가 감정 상하고 다투게 되는 일 또한 얼마나 많습니까? 가장 힘이 되기도 하지만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하는 것이 가족이라는 말이 그래서 있나 봅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부자간의 갈등이 비극으로 끝난 조선 왕실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영조와 사도세자 얘기를 모르는 분은 없을 겁니다. 추석을 앞두고 개봉하는 영화 <사도>는 1762년 윤 5월 13일, 영조의 명에 따라 뒤주에 들어갔다가 8 일 만에 죽음에 이르게 되는 사도세자의 하루하루를 과거의 이야기와 교차해가며 그린 영화입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영조 (송강호 분)는 어머니 숙빈 최씨가 미천했다는 열등감과 형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심에 평생 시달렸기에 스스로 완벽한 왕이 되고자 노력합니다. 뒤늦게 얻은 아들 사도세자 (유아인 분)에게도 기대를 걸고 당연히 공부와 예법을 강조합니다. 영특하긴 하지만 무예와 예술에 더 마음이 가는 아들 사도세자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인 셈이지요. "공부가 국시(國是)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옷차림이 그게 뭐냐?",끊임없이 이어지는 영조의 호통에 눌린 사도세자는 광증으로 치닫게 되고 결국 죽음으로 갈등은 끝이 납니다.
▶ 융건릉 내에 있는 역사문화관에서 사도세자 무덤이 묘에서 원으로 다시 고종 때에 릉으로 격이 높아지는 과정을 알 수 있습니다.
분노와 절망에 몸부림치는 영화의 주인공 사도세자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면 그의 무덤 융릉을 찾아볼 것을 권합니다. 영화에서 영조와 사도세자 간에 벌어진 핏빛 비극이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 (소지섭 분)의 효심으로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듯이 융릉는 정조가 아버지를 위해 화려하고 정성을 들여 꾸민 곳입니다. 정조는 즉위 직후'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천명하고 현재 동대문구 휘경동에 있던 아버지 무덤인 수은묘를 1789년 지금 위치인 경기도 화성으로 옮겨 현륭원으로 격을 높이고 왕릉 못지않은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융릉은 여느 왕릉과는 달리 홍살문 - 정자각 ? 릉으로 이어지는 일직선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전하는 얘기에 의하면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불같이 더운 날 뒤주 속에서 돌아가신 것을 가슴 아파했고 사후세계마저 답답하게 지내시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정자각을 비켜 탁 트인 곳에 무덤을 썼다고 합니다.
세계문화유산이기에 멀리서 볼 수밖에 없지만, 융릉 앞에 서 있는 문인석은 정조의 얼굴을 쏙 빼닮았습니다. 또한, 정조는 용의 여의주를 상징하는 연못 곤신지를 파 아버지를 연모하는 마음을 나타내기도 했고 릉을 감싸고 있는 화산(花山)에는 나쁜 귀신을 물리친다는 소나무를 심게 했습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어느 더운 여름날 송충이가 솔잎을 갉아먹는 것을 보자 정조는 집어 들고는"네가 아무리 미물이지만 어찌 이리도 무엄할 수 있단 말이냐! 비통하게 사신 것도 마음 아픈데 너까지 어찌 괴롭히느냐."고 하며 이빨로 깨물어 죽여 버리기까지 합니다. 영화에서"소자가 아니면 아버님은 죽지 않았을 것"이라며 정조가 흐느끼던 무덤은 바로 이 현륭원 (지금 융릉)이 아닐는지요?
?
한편 융릉은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 (문근영 분)가 1815년 숨을 거두자 합장한 부부묘 이기도 합니다. 영화 마지막에 아들 정조가 잔치를 베풀고 춤을 추자 혜경궁 홍씨가 우는 듯, 웃는 듯한 표정으로 사연 많았던 자신의 삶을 드러냈던 장면이 무덤을 앞에 두고 떠오르기도 합니다.
아버지 사도세자 옆 가까이에 묻혀 저 세상에서도 지극한 효심을 다하려는 것일까요? 정조는 죽고 나서 융릉 동쪽 두 번째 언덕인 건릉에 묻힙니다. 이 정도라면 아버지 영조에게 '불효막심한 놈' 취급을 받았던 사도세자의 아픔도 아들 정조의 아름다운 정성으로 위로받지 않았을까 상상해보게 됩니다.
융건릉을 둘러봤다면 내친김에 불과 1.7km 떨어져 있는 용주사도 가보길 권합니다.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넋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하던 정조가 부모은중경 설법을 듣고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찰입니다. 정조가 자주 행차해서인지 일주문이 없고 홍살문이 있는 등 구조와 건물에서 사찰과 궁궐 양식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용주사의 상징이랄 수 있는 부모은중경은 부모 은혜가 높고 깊은 것을 설법한 불경입니다. 정조는 당대의 화가 김홍도에게 불경 내용을 목판에 그림으로 새기도록 합니다. 순조 때 제작된 석판, 동판 부모은중경과 함께 정조가 하사한 목판 부모은중경을 절 입구 효행박물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대웅보전 옆 호성전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그리고 정조와 효의왕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전각입니다. 1981년 세워진 전각 앞 탑에는 탑신에 부모은중경이 한글로 새겨져 있어 효찰대본산이라는 용주사의 특징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영화 <사도>는 언제나 왕이어야 했던 아버지 영조와 한 번이라도 아들이고 싶었던 사도세자의 엇갈림 그리고 그 비극을 효심으로 마무리한 정조를 그렸습니다. 그렇지만 "그만한 일도 못 한단 말이냐?"고 아들을 몰아붙이는 영조,"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소…"라는 사도세자의 독백은 18세기 조선 왕실에서 벌어진 특별한 일일 뿐 아니라 지금도 현실에서 일어나는 부모 자식 간의 갈등입니다. 이 가을, 고즈넉한 왕릉 융건릉과 아름다운 사찰 용주사를 여행하며 내 부모와 자식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돌아오는 추석에는 마지막까지도 사랑이 남아있는 곳, 가족을 새삼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용주사와 융건릉은 1호선 병점역? 2번 출구로 나가 수시로 다니는 시내버스를 타면 15분 거리에 차례차례 있습니다. 두 곳의 거리는 가깝지만, 차들이 많이 다니기에 걷기에는 위험합니다.용주사와 융건릉 모두 문화관광해설사의 안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용주사는 오전 10시, 오후 1시, 3시 해설을 듣거나 전화 예약(031-221-6987)을 하면 되고 융건릉은 오전 11시, 오후 2시 해설을 이용하면 됩니다. 단 매주 월요일은 두 곳 모두 휴관과 휴일입니다.
민족의 명절 추석이 다가옵니다. 조상께 차례 드리고 온 가족이 모여 얘기꽃을 피우다 보면 바깥 생활의 고단함도 물러갑니다. 하지만 가족이라고 늘 따스함만 줄까요? 모처럼 만났다가 감정 상하고 다투게 되는 일 또한 얼마나 많습니까? 가장 힘이 되기도 하지만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하는 것이 가족이라는 말이 그래서 있나 봅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부자간의 갈등이 비극으로 끝난 조선 왕실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영조와 사도세자 얘기를 모르는 분은 없을 겁니다. 추석을 앞두고 개봉하는 영화 <사도>는 1762년 윤 5월 13일, 영조의 명에 따라 뒤주에 들어갔다가 8 일 만에 죽음에 이르게 되는 사도세자의 하루하루를 과거의 이야기와 교차해가며 그린 영화입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영조 (송강호 분)는 어머니 숙빈 최씨가 미천했다는 열등감과 형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심에 평생 시달렸기에 스스로 완벽한 왕이 되고자 노력합니다. 뒤늦게 얻은 아들 사도세자 (유아인 분)에게도 기대를 걸고 당연히 공부와 예법을 강조합니다. 영특하긴 하지만 무예와 예술에 더 마음이 가는 아들 사도세자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인 셈이지요. "공부가 국시(國是)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옷차림이 그게 뭐냐?",끊임없이 이어지는 영조의 호통에 눌린 사도세자는 광증으로 치닫게 되고 결국 죽음으로 갈등은 끝이 납니다.
▶ 융건릉 내에 있는 역사문화관에서 사도세자 무덤이 묘에서 원으로 다시 고종 때에 릉으로 격이 높아지는 과정을 알 수 있습니다.
분노와 절망에 몸부림치는 영화의 주인공 사도세자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면 그의 무덤 융릉을 찾아볼 것을 권합니다. 영화에서 영조와 사도세자 간에 벌어진 핏빛 비극이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 (소지섭 분)의 효심으로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듯이 융릉는 정조가 아버지를 위해 화려하고 정성을 들여 꾸민 곳입니다. 정조는 즉위 직후'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천명하고 현재 동대문구 휘경동에 있던 아버지 무덤인 수은묘를 1789년 지금 위치인 경기도 화성으로 옮겨 현륭원으로 격을 높이고 왕릉 못지않은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융릉은 여느 왕릉과는 달리 홍살문 - 정자각 ? 릉으로 이어지는 일직선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전하는 얘기에 의하면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불같이 더운 날 뒤주 속에서 돌아가신 것을 가슴 아파했고 사후세계마저 답답하게 지내시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정자각을 비켜 탁 트인 곳에 무덤을 썼다고 합니다.
세계문화유산이기에 멀리서 볼 수밖에 없지만, 융릉 앞에 서 있는 문인석은 정조의 얼굴을 쏙 빼닮았습니다. 또한, 정조는 용의 여의주를 상징하는 연못 곤신지를 파 아버지를 연모하는 마음을 나타내기도 했고 릉을 감싸고 있는 화산(花山)에는 나쁜 귀신을 물리친다는 소나무를 심게 했습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어느 더운 여름날 송충이가 솔잎을 갉아먹는 것을 보자 정조는 집어 들고는"네가 아무리 미물이지만 어찌 이리도 무엄할 수 있단 말이냐! 비통하게 사신 것도 마음 아픈데 너까지 어찌 괴롭히느냐."고 하며 이빨로 깨물어 죽여 버리기까지 합니다. 영화에서"소자가 아니면 아버님은 죽지 않았을 것"이라며 정조가 흐느끼던 무덤은 바로 이 현륭원 (지금 융릉)이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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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융릉은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 (문근영 분)가 1815년 숨을 거두자 합장한 부부묘 이기도 합니다. 영화 마지막에 아들 정조가 잔치를 베풀고 춤을 추자 혜경궁 홍씨가 우는 듯, 웃는 듯한 표정으로 사연 많았던 자신의 삶을 드러냈던 장면이 무덤을 앞에 두고 떠오르기도 합니다.
아버지 사도세자 옆 가까이에 묻혀 저 세상에서도 지극한 효심을 다하려는 것일까요? 정조는 죽고 나서 융릉 동쪽 두 번째 언덕인 건릉에 묻힙니다. 이 정도라면 아버지 영조에게 '불효막심한 놈' 취급을 받았던 사도세자의 아픔도 아들 정조의 아름다운 정성으로 위로받지 않았을까 상상해보게 됩니다.
융건릉을 둘러봤다면 내친김에 불과 1.7km 떨어져 있는 용주사도 가보길 권합니다.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넋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하던 정조가 부모은중경 설법을 듣고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찰입니다. 정조가 자주 행차해서인지 일주문이 없고 홍살문이 있는 등 구조와 건물에서 사찰과 궁궐 양식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용주사의 상징이랄 수 있는 부모은중경은 부모 은혜가 높고 깊은 것을 설법한 불경입니다. 정조는 당대의 화가 김홍도에게 불경 내용을 목판에 그림으로 새기도록 합니다. 순조 때 제작된 석판, 동판 부모은중경과 함께 정조가 하사한 목판 부모은중경을 절 입구 효행박물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대웅보전 옆 호성전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그리고 정조와 효의왕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전각입니다. 1981년 세워진 전각 앞 탑에는 탑신에 부모은중경이 한글로 새겨져 있어 효찰대본산이라는 용주사의 특징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영화 <사도>는 언제나 왕이어야 했던 아버지 영조와 한 번이라도 아들이고 싶었던 사도세자의 엇갈림 그리고 그 비극을 효심으로 마무리한 정조를 그렸습니다. 그렇지만 "그만한 일도 못 한단 말이냐?"고 아들을 몰아붙이는 영조,"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소…"라는 사도세자의 독백은 18세기 조선 왕실에서 벌어진 특별한 일일 뿐 아니라 지금도 현실에서 일어나는 부모 자식 간의 갈등입니다. 이 가을, 고즈넉한 왕릉 융건릉과 아름다운 사찰 용주사를 여행하며 내 부모와 자식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돌아오는 추석에는 마지막까지도 사랑이 남아있는 곳, 가족을 새삼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용주사와 융건릉은 1호선 병점역? 2번 출구로 나가 수시로 다니는 시내버스를 타면 15분 거리에 차례차례 있습니다. 두 곳의 거리는 가깝지만, 차들이 많이 다니기에 걷기에는 위험합니다.용주사와 융건릉 모두 문화관광해설사의 안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용주사는 오전 10시, 오후 1시, 3시 해설을 듣거나 전화 예약(031-221-6987)을 하면 되고 융건릉은 오전 11시, 오후 2시 해설을 이용하면 됩니다. 단 매주 월요일은 두 곳 모두 휴관과 휴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