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 대구 지식인들은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80년 5월18일 그날 자신이 피비린내 나는 광주에 없었다는 사실 때문일까 비겁하다는 것, 그들이 사지에서 죽어가고 있을 때 자신은 몽상가로 살았다는 그 심리적 압박감을 적당히 합리화시키고 잠재워 줄 수 있는 공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런 욕구를 흡수한 숱한 고고장, 디스코장, 회관 , 스탠드바, 카바레, 음악다방, 막걸리집, 방석집, 학사주점, 당구장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져나왔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로 시작되는 영화 '바보들의 행진’주제가인 송창식의 ‘고래사냥’ 가사처럼 세상은 ‘타락 권하는 시대’로 접어들었고, 시인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억눌린 자아를 광적으로 해체시켜 나갔다.
당시 지역 시인들은 코리아백화점 옆 왕비, 대구백화점 옆 유경, 동성로 은하·아세아·맥향·심지 등지로 분산돼 포진하기 시작한다. 왕비·유경다방에는 나이든 시인, 아세아 다방에는 룸펜스타일의 시인, 예술지상주의파들 은 심지로 모여들었다. 심지의 오늘이 궁금해 현장으로 가보았지만 현재 그 자리에는 협성교육재단측이 신축중인 지하1층 지상11층 높이의 우봉빌딩이 우람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하지만 더 이상 그 시절 늦가을 중앙파출소 앞 거리의 설렘은 감지되지 않고 휘황찬란한 흥청댐만이 동성로를 휩쓸고 있었다.
그 시절 심지다방은 삶의 행로를 찾지 못한 지역 문학청년들에겐 ‘해방구’였다. 78년쯤 박덕규(대건고), 박기영(달성고), 박상봉(대구고), 김상윤(대구고 출신으로 현재 하나은행 서울 분당지점장), 권태현(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소설가) 등 59년생 지역 문학청년들이 모여 결성한 오구(烏口) 동인들도 심지로 모여든다. 부산의 이산하 시인, 전주에선 현 재 영화평론가를 더 잘 알려진 하재봉 시인, 서울에선 명상서적 전문 출판 가로 잘 알려진 시인 류시화(본명은 안재찬), 이문재 시인 등 전국의 문학 청년들도 소문을 듣고 마치 성지순례코스처럼 심지를 거쳐갔다.
연이어 ‘우리 문단의 무서운 아이들’인 장정일, 이인화(‘영원한 제국’이란 소설로 유명한 문학평론가 겸 소설가. 본명은 류철균이고 그의 부친은 경북대 국문 과 류기룡 교수), 안도현(대건고), 구광본(계성고), 이정하(대건고) 등도 소문을 듣고 거기로 모여든다.
광장은 탄압받고, 대신 골목문화가 활기를 띨 수밖에 없었다. 각종 시동인지가 ‘자유의 바람’을 몰고온다. 이기철·이하석·이태수·이동순·박해수 등을 축으로 하는 ‘자유시’, 박재열·구석본 등을 축으로 하는 ‘형상 ’, 송재학·장옥관·김재진 등을 축으로 한 ‘오늘의 시’, 김용락·배창환 등을 축으로 한 ‘분단시대’, 서지월·김세웅·김상환 등을 축으로 한 ‘자연시’, 김선굉·서정윤·하청호·박곤걸 등을 축으로 한 ‘자연시’ 등이 동인지 전성시대를 열어나갔다. 그 틈바구니를 비집고 국시 동인이 질경이처럼 태동한다.
“우리는 자유롭다고 말하면서 자유롭지 못한 방법과 새롭다고 말하면서 새롭지 못한 정신의 허울좋은 가면을 거부한다. 우리는 우리가 바로 독자 이고 시인이며 바로 시의 실체인 동시에 시의 목적이기를 시의 전부이기를 원한다.”
83년 4월 박기영·장정일·안도현·박상봉·권태현·김상윤이 동인으로 그루 출판사에서 발간한 국시동인시선집 맨 뒷장에 적힌 글로 그들의 행동강령이 잘 나타나 있다.
심지는 당시 정식 허가받은 업소가 아니었다. 지하 주차장 한켠을 막아 다방으로 불법개조했다. 한낮에도 심지는 어두컴컴했다. 일반 손님들은 그곳을 좋아할 리 만무했다. 히피 기질이 있는 혈기방장한 문인들에게 적격이었다. 박기영은 그곳을 그리스 신하에 등장하는 지하세계 ‘하데스’로 명명했다. 빛보다 어둠이 더 친숙했던 그곳에선 이상하게 자유로움을 느낀다. 그런 색깔이 감도는 대표적 시가 국시동인시선집에 실린 박기영의 ‘나의 곤충기’이다. 곤충기 중의 한 대목이다.
‘…/ 어느날 땅 위를 걷던 누군가가 방향을 잃고/ 세계로 나가는 자신 의 전부인 길을 잃고, 밑도 없는/ 웅덩이 속으로 떨어져 껍질에 싸여진 몸을 바둥거렸다/…’
‘웅덩이’란 바로 심지를 의미한다. 당구장에서 봉산동 학사주점가와 동아쇼핑 옆 곡주사, 동성로 공주식당 가를 전전하면서 서로의 안부와 문학적 자기 점검을 위해서 하루 한 번씩 꼭 심지를 찾았다. 그곳에 가면 주인 몰래 공짜 커피를 주는 덧니난 20대 초반의 레지 이양이 그들을 살갑게 대해주었다. 하지만 바뀐 주인이 그들의 열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심지파들은 거처를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상경한 오구 동인들은 서울로 올라가서도 자기들만의 공간을 구축했다.
계성고 출신 시인지망생 손태도의 자취방을 봉천대학으로 명명한 뒤 그를 학장(?)으로 앞세운 40여명의 지역 문청들은 춥고 황량한 시절 마치 남극의 펭귄처럼 몸부벼대며 견뎌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손 학장만 등단하지 못하고 나머지는 모두 문인의 꿈을 이룬다.
다음 회는 기인 박기영 시인(45·현재 대구에서 프리랜서 VJ로 활동)과 장정일의 만남, 심지의 전통을 이어받은 봉산동 시인다방, 문화동 문화공간 시인, 중앙초등 정문 맞은편 중구 공평동 그리운 시인, 김동원 시인이 오픈한 전통찻집 차하늘 등으로 계승된 대구시인다방사의 뒤안길을 더듬어본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영남일보 주말판(2003년 11월6일 목요일 발행)
/영남일보 사이트에서 갈무리 받아 옮겨왔습니다. 기사 중 몇군데 오기가 있어서 옮긴이가 임의로 수정했습니다.
첫댓글 이 긴 글 중에서 59년생이라는 말이 제일 가슴에 와 닿는군요. 하- 벌써-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