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부터 제가 할 얘기는 굉장히 길고도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객관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기술적인 면 등 객관적인 이야기는
많은 분들이 써주시고 계시니 사소한 제 경험 하나 이야기해도 괜찮겠지요.....
저는 20살 대학생 1학년 남학생입니다. 제가 처음 축구를 알게 된 건 94 미국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 때부터입니다. 그때 전 초등학생이었죠.. ^^
출전국 중에선 북한과 일본 말고는 첨 듣는 나라들과 붙어서 우리나라 선수들이
골 넣었다하면 뭣도 모르고 좋아하던 나이이니 어린 마음에 최전방에서
득점을 올리는 스트라이커에게 관심이 갔던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선수가 황선홍이고, 제가 5학년 때 미국 월드컵이 열렸습니다.
그제야 쪼금 고정운이며 김주성도 알게 된 저는 황선홍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죠
당시 언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ㅡ,.ㅡ
첫 경기 스페인 전에서 최소한 두 골은 넣을 것으로 믿었던 황선홍이 한 골도
못 넣더군요.... -.-;; (당시 저는 야구팬이었고 축구는 거의 몰랐습니다)
잔뜩 실망해 있는데 볼리비아??라고 하는 처음 듣는 나라와 게임을 하더군요
여러번 찬스 놓치더군요.... >.< 그날 뉴스에선 '스트라이커 부재'라고 하데요
어린 저는 마구 비웃었습니다 어른들이 나보다도 축구를 모르네 스트라이커가
없다니 황선홍이 스트라이컨데........ ㅋㅋ
며칠 후 새벽에 열린 독일전에서 황선홍은 마침내 골을 넣었습니다 결과가
어떤 건지도 모른채 저는 마냥 즐거워했죠
월드컵이 끝난 직후 저는 처음으로 PC통신을 하게 됐습니다 월드컵을 통해
새로 관심을 갖게 된 축구~ 축구 게시판에 들어간 저는 진짜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와..... 죄다 황선홍 욕이었습니다........ 정말 놀랐습니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선수 황선홍에 대해 몇마디 썼습니다 게시판 분위기를 봐서
좀 돌려가면서 말을 해야되는데, 축구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5학년 짜리가
쓴 글이란게 기냥 직설적인 거죠 뭐.. 리플이 이틀 사이에 수십개가 달렸습니다
"이새끼야 황선홍이랑 같이 나가 죽어라" 이 정도는 겸손한 축에 속했습니다
그 수많은 리플 중에 제 편을 들어준 건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고
무서워서 그냥 울어버렸죠. 수많은 육두문자.... 어린 마음에 너무 큰 충격을
받은 저는 다시는 황선홍 좋아한다고 말하지 말아야 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그해 가을......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이 열렸습니다.. 황선홍, 네팔 전에
여덟골을 넣더군요... "아시아용..." 요런 소리 들었습니다...
그리고 일본과의 8강전입니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그 명승부...
2골 1어시스트로 3골을 모두 만들어낸 황선홍... 통신 게시판에
직접 글을 쓰지는 못했지만 올라온 글들을 보니 대충 이런 식이더군요
"거봐라 진작에 좀 그렇게 하지..." -.-;
한국은 4강에서 우즈벡인가? 하여튼... 1:0으로 패합니다
또 통신과 언론에서 울궈먹는 말.. "스트라이커 부재"
다음해 황선홍은 프로리그에서 8게임 연속골 신기록을 기록하는 등
절정의 기량을 보입니다... 프로축구라는 걸 처음 보게 된 저는 당연히
포항 팬이 됩니다.... 유고 특급 용병 '라데' 기억하시죠?
근데 그후 갑자기 사라진 황선홍은 이후 1년이나 그라운드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십자인대 파열이라나..... 당시 프랑스 월드컵 지역예선에서는 최용수가
펄펄 날았죠 '영웅 차범근' '뉴 스트라이커 최용수'...
언론과 통신이 만들어내는 축구 스타가 또다시 그들에 의해 역적이 되는 것이
얼마나 쉬운 것인지를 어린 나이에 경험한 저는 실소를 금치 못합니다
어쨌든... 프랑스 월드컵 직전에 황선홍은 돌아옵니다... 저는... 속으로만
혼자 좋아합니다..... 사람들 반응.... 뜨악합니다... 최용수가 있는데
저 개발은 뭐하러 돌아오나 하는 표정들이더군요
그리고 황선홍, 일본과의 평가전에서 시저스킥을 꽂고 쭈욱~ 비오는 그라운드에
미끄러집니다.......... 우하하 보았느냐 이것들아 역시 황선홍이지 하려 했는데
이런 얘기가 있더군요.... "역시 아시아용"
누구나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프랑스 월드컵을 그 망할 중국GK 때문에 벤치에서
보내고, 그는 이듬해 J리그 득점왕을 차지합니다.... 당시 고1이 된 저는
어린 나이의 충격을 서서히 지워버리고자 조심스럽게 친구들에게 이런 얘길 합니다...
"황선홍이 그래도 잘하긴 잘하는 거 같아"
그러자 즉각 응답이 옵니다...
"걘 원래 아시아한테만 잘해"
저는 입을 다물고 맙니다........ ㅡ,.ㅡ
우와 외국인 히딩크 감독도 서른 둘의 환갑 스트라이커를 뽑더군요
그리고 컨페드레이션스 컵이 열렸습니다... 프랑스 5:0 대패.....
다음 경기 멕시코 전.. 전 고2였고 그 경기는 학교에서 야간 자습을 할 때 열렸습니다
쉬는 시간에 TV틀어보니 0:0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자습감독으로 들어오시자
곧바로 TV끄고..... 전 집중해서 자습할 수가 없었죠... 지금이 기회다
계속 이 생각만 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애들이 보고 있는데 황선홍이
결승골을 넣으면... 애들 생각도 바뀌겠지.. 그러면 나도 드디어 황선홍 팬임을
자신있게 밝힐 수 있겠다...
그 순간 갑자기 저쪽 교실에서 와~ 하는 함성이 들렸습니다. 감독하시던 선생님이
얼른 TV를 트시더군요 ㅋㅋ 골 장면은 지나갔습니다... 한국1:0멕시코...
누가 넣었을까???? 저의 신경은 온통 거기에 집중됩니다... 곧 느린 화면이
다시 나오더군요..... 최성용이 센터링을 올립니다... 페널티 에어리어 정면에서
번개같이 뛰어올라 기가 막힌 헤딩골을 터뜨리는 선수는... 황선홍입니다.....
저는 미친놈처럼 열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있게 외쳤습니다..
"우와~ 역시 황선홍이야! 짱이라니깐!!"
워낙 기분이 좋으니깐 앞뒤 생각안했는지 애들도 맞장구를 하나둘 칩니다...
"그래 쟤가 그래도 그중 나은 거 같아"
'우하하!! 난 황선홍을 초딩 3학년 때부터 좋아했다구!! 이래도 쟤가 개발이냐?
아시아용이냐? 우하하!!!' 속으로 마구 외치고 있는데...
-.-;
"음... 황선홍 같은 애가 골 넣으면 안되는데... 그럼 잘하는 줄 알고
감독이 계속 쓸텐데....."
"그러게.... 저렇게 나이든 선수가 골 넣으면... 세대교체에 장애가 되는데..."
???
이건 또 무슨 얘긴가??? 1:0이란 스코어에 즐거워하면서 그런 얘길 스스럼없이
내뱉는 아이들한테 그 분위기 속에서 화를 낼 수도 없고, 그거 따졌다가...
옛날의 통신에서처럼 나까지 그 욕을 먹게 되면....?
세대교체의 장애물....? 황선홍은 부상을 털고 마지막 월드컵을 향해
투혼을 불사르고....... 진정한 절정의 황혼을 맞이했는데...
세대교체를 막고 있다니........
서른 두 살의 스트라이커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언뜻 들었습니다..
경기는 2:1 한국의 승리로 끝났죠...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언뜻 들리는 소리..
"하하 멕시코 밥이었네.. 근데 오늘 경기 진짜 웃기지 않냐? 발야구 선수(황선홍)
한골, 야구선수(홈런왕 유상철) 한골... 하하"
황선홍은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개발'로 세뇌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 열이 뻗쳤습니다.. 뭘해도, 어떤 활약을 보여줘도 볼리비아 전 이후
'개발 황선홍'이 뇌 속에 박힌 이들에겐 그의 골은 뽀록이고, 수십개의 슈팅 중
상대방 실수로 들어간 웃기는 골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의외로 여전히 많았습니다...
호주 전 1골... "오오~ 2경기 연속골~" ^^ / "개뽀록 골" -.-
핀란드 전 2골... "음... 최고 킬러는 역시 그인가.." ^^ "핀란드는 유럽 약체" -.-
그리고......... 마침내 6월 4일이 되었고.......
왜 안정환을 선발 기용안했냐는 몇몇 친구들의 투덜거림 속에
34세의 할아버지 공격수 황선홍은 '개발' '역적'의 꼬리표를 뗄 마지막 기회를
맞이합니다...
어느덧 대학생이 된 저는 고딩때의 남자, 여자친구들 여러 명과 함께
거리 응원을 나갔습니다.........
고백하지만... 당시의 저는 이런 생각이었습니다......
"드디어 때가 왔다.... 이 많은 사람 앞에서 황선홍이 골을 넣어야 한다...
우리가 이기더라도, 황선홍이 골을 못 넣으면 이 경기는 나한텐 의미가 없다.." ^^
초반 몇번의 위기를 넘기고, 전반 25분...
사실 이을용 선수의 패스는 딱 보기에 극적인 패스는 아니었습니다. TV화면의
한계라고나 할까요 골이 터지기 직전에는 문전 앞에서의 손에 땀을 쥐게하는
공방전이나 날카로운 센터링이 있기 마련인데 이을용 패스는 그런 스타일은
아니었죠.. 테크닉 상으로야 '완벽' 그 자체의 패스였지만, 당시 카메라는
패스하는 이을용을 클로즈업하고 있었고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날카로운 것인지를
미처 알지 못한채 다들 밋밋하게 그 패스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순간 화면이 전체적으로 바뀌더니... 누군가 쏜살같이 폴란드의 두 장대 수비수
앞으로 뛰어나와 그 패스를 트래핑 한번 안하고, 그냥, 곧바로, 쏘옥 골로
연결합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죠...
제.발. 황.선.홍.이.어.라.
이기적인 생각이라고 욕하셔도 할 말 없습니다... 저는 그를 그만큼 좋아했으니까요^^
골을 성공시키고 180도 몸을 틀어 카메라로 달려오는 선수는...
같이 광화문에서 그 큰 화면을 쳐다보고 있던 저와 저의 친구들에게 달려온 선수는...
18 Hwang Sun-Hong (FW)
1 Goal / 1 match
저는 울어버렸습니다................ 정말 현기증이 나고, 아찔했습니다...
그날 저는 8년만에..... 이 게시판 저 게시판을 돌아다니며 그를 찬양하는
글을 올려댔습니다... 거의 미쳐서 말이죠... 언론을 향해 외칩니다
"이 놈들아 니놈들이 그렇게 미워하던 '똥볼' '개발' 황선홍이 한국에
월드컵 첫 승을 선물했다 봤냐??" 그런데 그날 밤 TV에서 방송 3사는
'황선홍'에 대한 특집기사를 총 열 개 이상 내보내더군요... 왜 있잖아요
올림픽에서 금메달 딴 선수한테 맨날 나오는... 몇 남 몇녀 중 몇 째로 태어나..
무슨 초등학굘 졸업하고... 하는거.. 씁쓸하고, 또 너무 기쁘기도 하고 묘하데요..
미국 전에서도 초반 열 한 명의 선수들 중 최고의 컨디션을 보이며 펄펄 날던
황선홍은 눈두덩이 부상을 입은 후 많이 약해집니다... 안타까웠지만...
한국이 16강에 나가고, 8강에 나가고... 4강까지 가고... 이젠 어느 게시판에
황선홍 팬이라고 써도 저 욕하는 사람 없었습니다... 8년만에... 저는 '황새 팬'으로
커밍하웃 한 것입니다...
남자 새끼가 무슨 겁이 그렇게 많냐 하고 비웃으실 지도 모르지만, 제가 열 두 살에
받은 충격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정말 극복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에서 황선홍 팬이 저 하난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 후추를 알게되고..
와 진짜 명예의 전당에 황선홍이 올라온 걸 보고 기겁했습니다.. 여기 운영자
누군지 진짜 간 큰 사람일세..... 감히 황선홍을 올리다니... 후추님을 보면서..
저는 후추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단지 황선홍을 인정하는,
황선홍 팬페이지를 제외하고는 제가 본 최초의 인터넷 사이트였기 때문입니다..
여기 게시판에는 월드컵과 함께 황선홍에 대한 칭찬의 글이 많이도 올라오더군요..
제가 봐도 쫌 심하다 싶을 정도로 찬양 일색의 글도 있고...^^ 하지만 어느 누구도
옛날 제가 올렸던 글처럼 "너도 같이 나가죽어라" 이런 리플 달지 않습니다..
황선홍 팬 커밍아웃, 저에겐 이거 하나만으로도 이번 월드컵은 정말
뜻깊은 것이었습니다..
명전 황선홍 인터뷰에서 황새가 이런 말씀 했었죠.. '나한테 국민들이 갖고 있는
나쁜 감정 모두 바꾸고 은퇴하고 싶다'라고... 그때 그거 보고 진짜 감동 먹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