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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원문보기 글쓴이: 管韻
01.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년~1762년)
조선의 왕세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영조의 차남으로 어머니는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이다. 정실 아내는 혜경궁 홍씨(헌경의황후)이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정조를 낳았다. 아버지와 오랜 갈등 끝에 만 27세의 젊은 나이로 7월의 한여름 땡볕 삼복더위에 쌀 담는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굶어 죽은 것, 즉 임오화변으로 유명하다. 영조는 늦은 나이(42살)에 얻은 아들인 사도세자한테 기대가 지나쳐서 감내하기 힘들 정도의 질책과 정신적 학대를 가했다. 사도세자는 정신병을 얻어, 기행과 비행을 일삼다가 결국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았다. 일부에서는 비운의 왕세자라고 하지만, 죽기 전 온갖 이유로 수십~백여건에 달하는 살인을 저질러, 빈말로도 무고한 피해자라고는 도저히 칭하기가 어렵다.
2. 이름과 시호
휘는 '훤(愃)'으로, '너그럽다'는 뜻이다. '선'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愃'에 '선'이란 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종 때 지은 《열성어휘(列聖御諱)》에는 독음이 '훤'으로 적혀있고, 대응하는 음의 한자로 '煊(마를 훤)'을 써두었다. 또한 자(字)가 너그럽다는 뜻인 '윤관(允寬)'인데, 이름과 자는 뜻이 연관되게 짓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사도세자의 이름 역시 '잊는다'는 뜻인 '선'보단 '너그럽다'는 뜻인 '훤'으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하다.
원래 영조가 내린 시호는 '사도(思悼)' 단 2글자였다. 그러나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장헌(莊獻)'을 존호로 올려 '사도장헌세자'가 되었고, 정조 7년(1783)에는 존호가 추가되어 '사도수덕돈경장헌세자'가 되었으며, 정조 8년(1784) '홍인경지(弘仁景祉)', 다시 정조 18년(1794) '장륜융범기명창휴(章倫隆範基命彰休)'를 올렸고, 한참 뒤인 철종 5년(1854) '찬원헌성계상현희(贊元憲誠啓祥顯熙)'를 더함으로써 최종적인 정식 시호가 '사도수덕돈경홍인경지장륜융범기명창휴찬원헌성계상현희장헌세자'로 길어졌다. 간혹 "장헌세자가 죽어서 '사도세자'라는 칭호를 얻었다"라는 말이 돌곤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장헌(莊獻)'과 '사도(思悼)' 둘 다 죽은 뒤에 붙은 시호이기 때문에 둘 중 어느 것을 써도 틀리지 않다.
후에 '장조(莊祖)'로 추존되는 사도세자는 1735년(영조 11년) 음1월 21일, 영조와 후궁 영빈 이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영조는 장남 효장세자를 7년 전에 안타깝게 잃고 다른 아들을 두지 못한 상태였고, 42세의 고령에 사도세자를 낳았다. 또한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도 당시 40세였다. 조선 시대의 40세는 손주를 보아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이 때문에 영조는 어렵게 얻은 늦둥이 왕자의 탄생을 당연히 매우 기뻐했다. 조선 시대에는 환갑도 동네에서 잔치를 열어 줄 정도로 드물었고, 70대는 나라에서 명예 벼슬을 내리고, 해당 인물이 천민이라면 그 자녀를 효자라고 면천시켜 줄 정도로 적었다. 10대에 결혼하고 20대에 출산해, 40대면 손자를 보고 50대쯤에 죽는 게 자연스러웠던 시대였다.당시 42세였던 영조 역시 자신이 곧 노년이 된다고 보았고, 그리 오래 살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영조는 무려 83세까지 장수하여 조선 역사상 최장수 군주로 기록되었고, 이는 사도세자에게 크나큰 불행이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태어난 즉시 정실 정성왕후 서씨의 양자(법적아들)로 공식 입적한 후 '원자(元子)'로 정했고, 이듬해인 영조 12년(1736)에는 이제 막 돌이 지난 원자를 왕세자로 정식 책봉한다. 영조는 갓난 세자에게 기대가 너무 커서 세자가 읽을 책을 임금인 자신이 직접 꼬박 밤 새 가면서 필사(筆寫)했고, 성균관의 탕평비도 세자의 성균관 입학을 기념해서 특별히 제작했다고 한다.
사도세자는 젖먹이인 어린 나이에도 유달리 매우 총명한 모습을 많이 보였다. 태어난 지 4달 만에 스스로 기었고, 6달 만에 영조의 부름에 어느 정도 대답을 할 수 있었다. 또한 7달 만에 동서남북을 분간했고, 2살에 천자문을 배워 60자를 써내었다. 3살에 다식을 받자 수(壽) 자, 복(福) 자가 박힌 과자는 먹고 팔괘(八卦)를 박은 것은 먹지 않았다. 이에 궁녀들이 "잡수소서"라고 권하자 "팔괘는 우주의 근본이니 아니 잡숫겠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팔괘를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복희를 그린 책을 보고 "높이 들라."라고 하고 절을 올렸다고 한다. 밥을 먹던 중에 아버지 영조가 말을 걸자, 입에 있는 밥을 전부 뱉고 답한 적도 있다고 한다. 왜 음식을 뱉었는지 영조가 묻자 어린 세자는 "소학(小學)에서 '부모가 부르실 때는 입에 있는 걸 뱉고 말하는 게 효(孝)'라고 배웠습니다"라고 답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3살 때. 말하자면 김시습 수준의 천재이었다.
또 같은 해에 천자문을 배우던 중에 사치 치(侈) 자와 가멸 부(富) 자에 이르자 '치'자를 집고 다시 자신이 입은 옷을 가리키며 "이것이 사치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영조가 어릴 때 쓰던 감투 중에 칠보로 장식된 것을 씌우자 "사치!"라고 거부했다. 그리고 돌 때 입은 옷을 입히려 하자 역시 "사치하여 남 부끄러워 싫다."고 거부했다. 이에 세자를 모시던 나인들이 과연 세자가 알고 말하는가 모르고 말하는가 궁금하여 비단과 무명을 놓고 "어느 것이 사치고 어느 것이 사치가 아니나이까?"라고 묻자 세자는 비단을 집어들고 "이것은 사치라."라고 하더니 무명을 집고는 "무명은 사치 아니라."라고 하였다. 그러자 나인들이 "어느 것으로 옷을 지어 입으시면 좋으리이까?"라고 묻자 무명을 가리키며 "이것을 입어야 좋으리라."라고 답하였다. 이것은 한중록에 나온 이야기지만, 영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런 기록들은 과장이 아니라도 어느 정도 세뇌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고 한다.
영의정 이광좌 : 신(臣)들이 어제 동궁(東宮)을 뵈었는데 어린 나이에 예모(禮貌)가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으니, 경사스럽고 다행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3세에 주상 전하 앞에서 경서(經書)를 강독(講讀)하고 논(論)하는 것은 너무 이른 것을 면치 못하니, 오직 바라건대, 빨리 덕성(德性)을 함양해 온화(溫和)하고 문아(文雅)함이 날로 성취(成趣)되게 하소서."
영조 : "경(卿)의 말이 옳다. 근일(近日)에 문왕장(文王章)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일찍이 명주와 무명베를 보고 사치(奢侈)와 검소(儉素)를 구분하여 무명옷 입기를 직접 청했으니, 매우 기특하다. 만약 잘 인도(引導)한다면 성취(成趣)할 것을 바라겠으나, 나는 본래 학문이 없으니 오직 경(卿)들이 잘 이끌어주길 바랄 뿐이다."
영조 45권, 13년(1737, 정사년 / 청 건륭(乾隆) 2년) 9월 10일(을미) 1번째 기사
과장이 섞였을 수도 있지만 상당히 총명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영조도 어린 세자를 몹시도 귀여워하며 대신들을 불러 한번씩 직접 안아보게도 하고, 세자에게 글씨를 쓰게 하여 신하들에게 나눠주게 하는 등, 세자를 무척이나 총애했다고 한다.
하지만 영조는 이렇게 총명한 세자에게 인생에 있어 큰 화가 될 법한 결정을 하는데,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된 세자를 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와 떨어트려서 선의왕후 어씨가 살던 저승전(儲承殿)에 머물게 하고, 경종과 선의왕후 내외를 모시던 소론계 궁녀들[19]에게 세자의 시중을 들게 한 것이다. 저승전은 1730년에 선의왕후가 죽은 후 오랫동안 비어있었고, 근처에 희빈 장씨가 머물면서 인현왕후 민씨를 죽게 저주한 것으로 유명한 취선당(就善堂)이 있었다. 그런데 영조는 취선당을 소주방으로 삼아 그곳에서 세자를 위한 음식을 만들게 했다.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는 자서전 한중록에서, 이것들이 남편(사도세자)을 망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한참 부모인 영조, 영빈 이씨의 손길이 필요한 아기를 품에서 떨어트려, 불길한 곳인 저승전, 취선당에서 따로 키우게 했다.
영조 입장에서는 이복형 선왕을 모시던 소론 출신의 궁인들로 하여금 세자를 모시게 하여 세자의 권위를 세워주고 경종 독살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나름대로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데에 정당성이 있음을 증명하려고 했었던 모양이지만, 이 궁인들은 워낙에 친(親) 소론(경종 지지) 성향이었다. 원래 궁인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상전과 친한 당파와 친해진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자신이 누구를 모시는지가 권력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종을 모시던 궁인들은 숙종 말엽에 경종의 입지가 흔들리자 대놓고 노론이 지지하는 연잉군을 모시던 궁인들에 비해 기를 펴지 못했는데, 이 때문에 더더욱 소론 성향이 되었다. 그래서 영조의 뜻과는 다르게, 소론 궁인들은 동궁(東宮)에서 여러가지 크고 작은 분란을 일으켰다. 한중록에 따르면 그들의 리더격인 최 상궁과 한 상궁이 그 일의 큰 원흉인데, 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어릴 적만 생각하고 그녀를 업신여기고 헐뜯어 이간질 시키고 세자와 멀어지게 했다는 것이다.
"영빈(英嬪)이 비록 세자를 낳기는 했으나 사친(私親)이다. 신분상으로 군신(君臣)의 관계가 있으니 주상을 자주 만나 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주상을 뵈올 때도 반드시 빈어(嬪御)가 정전(政殿)을 배알(拜謁)할 때 쓰는 까다로운 예절로써 구제(具制)를 가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 되자 영빈은 그곳을 자주 갈 수가 없어 혹은 하루에 한 번이나 하루 걸러서, 혹은 며칠 걸러서 한번 가고 혹은 1달에 한두 번밖에 못 갈 때도 있었다.
헌륭원 지문 中
한중록만의 기록은 아니다. 정조가 쓴 헌륭원(顯隆園) 지문에도 이 내용이 나온다. 실제로 영빈 이씨는 출신이 미천해 한중록을 토대로 유추하면 6세에 궁궐에 들어와 궁녀가 되었고, 숙종의 대전에서 일하다가 영조 즉위 후에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의 눈에 들어서 영조의 후궁이 되었다. 그러니 경종을 모시던 궁녀들에겐 영빈이 하찮게 보였을 수도 있다. 실제로도 세자를 직접 낳은 어머니(생모)는 영빈 이씨라도, 세자가 되면서 영조의 정실, 즉 중전 정성왕후 서씨의 양자로 입적되었기 때문에, 세자의 법적 어머니는 정성왕후다.
혜경궁 홍씨는 궁인들에게 문제가 또 있었다고 지적했다. 세자가 공부를 게을리하게 만들고, 세자에게 병정놀이 만을 가르쳐 놀이에만 빠지게 만들었다는 것. 실제로 동궁의 궁인들이나 세자시강원의 기강에 여러 문제가 있었던 건 승정원일기에서도 나온다. 세자시강원의 조라치 '박금돌'이라는 자가 세자가 환궁할 때 술에 취해서 행패를 부리다가 취조받은 사건도 있었고, 송인명이라는 대신이 "동궁에 선량하지 않은 자나 말을 남들에게 함부로 옮기는 자가 있으면 안 되니, 궁인을 고를 때 선량한 자로 잘 골라야 하고, 궁 안의 어떤 일이든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라고 충고하는 대목이 나온다. 박문수가 "세자의 나이가 어리니 내관들이 나쁜 영향을 주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충고하고, 의관 김수규가 세자에게 유용목(愉用木)이라는 놀이기구를 바쳤다가 적발되어 문책을 당한 일도 있었다.
이 때문에 "사도세자의 성장 배경과 궁인들의 행적은, 이후 사도세자가 친소론 성향을 걷게 된 이유"라는 떡밥의 원인이 된다. 하지만 이 떡밥은 후술하겠지만 사실이 아니다.
아버지의 아동학대
아버지 영조의 사도세자를 향한 아동학대는 의외로 대단히 어릴 적부터 시작되었다. 3살 때까지는 세자를 매우매우 아끼며 하는 일마다 칭찬했지만, 겨우 4살 때부터 구박하고 혼내기 시작한 것이다. 기대가 너무 컸던 나머지 엄격하게만 키우다 보니, 세자는 이미 9살 때부터 부왕(영조)을 만나기를 두려워했다. 심지어 날씨가 흐린 것을 두고도 영조는 "세자가 덕이 없어서 그렇다"며 꾸짖었기에, 세자는 궁인에게 "오늘은 날씨가 어떤가?"라고 물으며 걱정해야 했다. 특히 10살 이후부터 영조는 세자한테 더욱더 혹독해지기 시작해 칭찬의 수가 급격히 줄었고, 엄한 질책이 많아졌다.
혜경궁 홍씨의 저서 한중록에 따르면, 4~5살까지만 해도 영조가 사도세자와 함께 자기 위해 저승전에 자주 머물렀으나, 경종을 모시던 취선당의 내인들이 영조와 영빈 이씨에게 무례하게 굴어 불쾌해 가지 않았다고 한다. 세자가 7살이 되던 해에 유모인 한 상궁을 드디어 쫓아냈다고 하는데, 세자의 입장에서는 하루 아침에 갑자기 주 양육자가 바뀌었으니 이것도 아동학대. "궁녀가 보기 싫으면 거기 있는 궁녀들을 쫓아내고 당신께서 가르치시지, 왜 사도세자를 경종의 내인들과 지내게 하고 미워하셨는가"라는 혜경궁의 원망은 덤.
영조의 정서적 학대가 얼마나 심했는가 하면, 정성왕후 서씨가 병환이 깊어지자 병수발을 직접 들러온 세자가 정성왕후가 피를 토한 그릇을 붙들고 통곡하던 와중에도 영조가 온 것을 보자마자 울음이 뚝 그치고 겁에 질려 방 한구석에 웅크려 벌벌 떨었을 정도다. 지속적으로 아동학대에 노출되어 아버지를 두려워한 사도세자는 아는 것도 우물쭈물해서 잘 대답하지 못했다. 이에 영조는 세자에게 더 실망해 매우 거친 질책과 비난만 자주 했다. 아버지를 두려워한 세자는 대답을 우물쭈물 잘 못하고, 그런 모습을 아버지는 정녕 이해하거나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고 갈구기만 하니 악순환이 계속된 것이다. 사도세자는 10대 초중반에 이미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는데, 우울증 증상 중에 이해력과 기억력 감퇴도 있다. 이런 엄격한 막장 훈육까지 학문과 서연에 대한 흥미, 관심, 의욕을 크게 저하시켰을 것이다. 아버지가 질문하기에 자신의 생각을 답했는데, 아버지의 예상과 달랐단 이유로 구박받는 처지니...
영조가 세자를 늦게 본 것도 조급증에 한몫 했을 것이다. 조선의 역대 임금들은 격무(激務)에 시달려 환갑을 넘기기 힘들었고 평균 사망 나이가 47.1세였는데, 영조는 세자를 보았을 때 이미 42세였다. 선대 왕들을 보면, 영조는 이미 곧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노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영조 입장에선 죽기 전에 최대한 세자를 준비시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영조가 결과적으로는 매우 장수(83세)했고, 지나치게 엄격한 교육은 세자가 아들을 낳아 세손(뒷날의 정조)을 보고도 끝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세자가 영조에 대한 애정이 싹틀 리가 없다. 이 때문에 세자는 정말로 건강이 나쁘긴 했지만, 이를 핑계로 영조와의 진현(進見)을 계속해서 거르게 되었다. 왕의 불효가 쿠데타의 정당한 명분이 되는 유교 국가인 조선의 왕실에서, 왕세자가 그리한 것은 큰 문제이다. 실제로 영조가 "왕세자가 진현을 몇 달째 하지 않았다"고 언급하자 당시 좌의정인 김상로가 "신(臣)들이 밖에 있어서 이러한 줄을 몰랐습니다. 마땅히 입대(入對)하여 조심하도록 아뢰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손으로 땅을 치며 눈물을 흘렸을 정도였다. (영조실록 90권, 영조 33년) (1757년 음11월 8일 병신 6번째 기사)
혜경궁 홍씨의 주장에 따르면 둘의 성격이 너무나 극명히 달랐기 때문에 충돌이 잦았다고 한다. 특히 영조는 많은 신하들 앞에서 어린 사도세자를 세워 놓고는 조금이라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화를 내고 흉을 보며 "이게 다 세자 때문이다"라고 망신주길 자주 했는데, 저렇게 한 일은 이렇게 하지 않았다고 꾸중하고 이렇게 한 일은 저렇게 하지 않았다고 크게 꾸중하였다. 심지어 비가 와도, 천둥이 쳐도, 가뭄이 들어도, 한재(寒災)가 나도 "세자에게 덕이 없어 그렇다"고 하였다.
1742년 9월 19일자 승정원일기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8세의 세자 앞에서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읽어보라고 시켰는데, 세자가 책을 다 읽고 영조에게 달려와 "간신히 한 권을 다 읽었어요"라고 말한다. 당시 동몽선습은 조선에서 천자문을 다 읽고 시작하는 아동용 교과서인데, 간신히 읽었다고 대답한 것이다. 1744년, 영조는 세자에게 "글을 읽는 것이 좋으냐, 싫으냐?"라고 묻는다. 세자는 선뜻 대답을 못하다가 "싫을 때가 많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영조는 "네가 진실하게 말을 했으니 마음이 기쁘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필사적이라 할 정도로 공부에 열중하여 신하들도 압도하곤 했던 영조로서는, 이런 세자의 성격과 학문 성취의 미흡함이 당연히 불만족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