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방은 조약이 만료되는 즉시 중국을 재침공하였다.
중국과의 전쟁이 시작된지 얼마 안되 맹방군은 산둥반도를 포위하였다.
약 30만명의 중국군이 갇혔고 옌타이에서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거의 다 승리하는 듯 했으나, 적이 갑자기 칭다오를 점령하여 30개의 사단 중 12사단만이 살아서 칭다오로 도망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도 부질없었다. 재빨리 린이를 점령하여 바로 포위시키고 칭다오에서 다시 전투가 벌어졌다. 적은 롱스트리트 장군의 화력 앞에서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결국 모든 사단이 전멸하였다.
이 전투 이후 롱스트리트 휘하의 9개사단은 재빨리 베이징을 점령하였고, 땅 3개와 배상금을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었다.
중국과의 전쟁이 끝난 후 사회주의 정당이 집권하였다.
남북전쟁이 끝난 이후 미국과의 공업력차는 약 6배였다.
미국이 1200 : 맹방이 200
사회정당 정당이 집권한 후,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직물 등의 경공업 위주에서 제철, 조선 등의 중공업 위주로 공업 구조를 바꾸기 시작하였다. 버지니아에 있는 소형 제철소를 거대하게 확장하고, 텍사스에 새로운 제철소를 짓고, 앨라배마에 소총공장, 미시시피에 있던 기성복 공장을 확장하고, 미시시피에 있는 범선 조선소를 파괴하고 그 자리에 기선 조선소를 세웠다.이 5년이 국가자본주의 정당이 지배한 유일한 시기이기에 맹방은 빚을 내서라도 공장을 확장, 철도 확장 등을 하여 빚이 4만파운드를 넘겼다. 중국에서의 이민도 한몫 하여, 버지니아의 제철소에는 중국인이 노동력의 약 10%를 차지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5년 후 선거에서 사회주의 정당(국가자본주의, 완전한 시민권)은 패하고 민주당(시민권 제한, 개입주의)이 압도적인 지지(97%)를 받아 결국 공장의 신설은 물건너가게 되었다.
남북전쟁 후반에 활약한 스튜어트 장군이 사망하였다. 참으로 안타까웠다.
프랑스에 식민지 두 곳을 내주고 기술3개과 3만파운드 그리고 멕시코 지역의 일부와 거래하였다.
이 3만파운드는 빚을 갚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중국을 재침공하기로 하였다. 결국 평화조약이 만료되고 얼마 안되어 선전포고를 하였다.
속전속결로 지난 톈진을 거쳐 베이징을 바로 점령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베이징에서 난관에 부딪혔다. 적의 장군 또한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주변 지역에서 지원이 와 적군은 총 30만명까지 불어났었다. 그러나 적장의 사망으로 인하여 간신히 이기게 되었다.
승리를 하였으나 승리한 것 같지 않았다. 비정규군에게 이렇게 심한 타격을 받을줄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4개사단은 거의 사단이라고 하기 무색할 정도로 인원이 부족했고 모든 사단이 반 이상 인원이 줄어있었다.
옌타이를 방어하고 있던 1개 사단은 30개 사단에 포위되어 수장될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다행히도 5월 24일, 맹방의 주력함대가 발해만에서 적의 함대를 수장시키고 옌타이에서 위기에 몰린 군대를 빼내었다.
결국 중국과 평화협정을 맺었다. 톈진 하나로 끝나서 뭔가 시원치 않았다.
나일강 지류 발견을 하자는 여론이 일어 정부는 4만 파운드의 빚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5만파운드를 지원하였다. 이 빚 덕에 빚갚느라 골이 빠지게 된다.
석유가 나는 두바이 땅을 먹고 휴전을 받았다. 이로 인해 아부다비는 곧 파산하였고, 맹방은 중동에 새로운 거점을 마련했다.
잔지바르를 합병한 후 잔지바르를 독립시켜주었다. 잔지바르를 합병한 이유는 단 하나
아프리카의 식민지 때문이었다. 서서히 동아프리카에 맹방의 손길이 닿기 시작하였다.
첫댓글 ㄷㄷ 남부가 참 끈질기게.
투닥투닥 -ㅅ-
중국에 저런 뛰어난 장군이,,,,
무슨일로 미국과 친할까요??
남북전쟁 이후 미국과의 관계에 거의 올인했다시피 했죠 ㄱ-;; 운좋게 매우 성공적인 개선 두어번 떠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