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쯤 가고 있니, 전진호
전혜원
잔잔하게 물결이 일렁이는 바다 한가운데로 하얀 물새가 낮게 날았다. 일을 쉬는 고깃배들이 한가로이 졸고 그 곁으로는 만선의 꿈을 싣고 출항하는 배가 지났다.
“봤어? 저 배 이름이 전진호네.”
동생이 눈을 반짝였다. 정말 ‘전진호’가 지나갔다.
“바다 참 좋다.”
감탄사 같은 동생의 말에 내가 물었다.
“너는 바다가 싫지 않아? 거기서 진호를 잃었는데.”
물새가 전진호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동생이 웃었다. 나는 바다를 좋아한다. 부모님은 몇십 년 동안 막냇동생을 삼킨 바다에 가지 않았지만 나는 지칠 때마다 바다를 찾았다. 바다에 가면 철썩이는 파도에 답답한 마음이 뚫리고 그리움이 몽글몽글 피어났다. 나의 어머니, 나의 남동생, 나의 안식처.
그때 진호는 초등학교 1학년, 나는 6학년이었다. 어느 날 자기가 그린 것이라며 그림 한 장을 보여주었다. 그림 속 배 이름이 ‘전진호’였다. 그림도 잘 그렸지만 자기 이름을 따서 배 이름을 지은 것도 기특했다. 진호는 아들을 간절히 원했던 우리 부모님에게 선물 같은 자식이었다. 부모님의 관심은 온통 진호에게만 쏠렸다. 용돈도 선물도 관심과 사랑도 모두 그 애 것이었다. 나와 내 여동생은 한 번도 아버지에게 용돈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용돈은커녕, ‘아빠’라고, 고작 그 당연한 두 음절조차 소리 내어 말하지 못했다. 늘 술에 취해있고 취해서 폭력을 휘두르거나 엄마와 싸우거나 엄마를 때리는 사람이었지 부모의 역할을 하는 존재는 아니었다. 나와 여동생에게는 그랬지만 진호에게는 달랐다. 그 애는 아버지와 장난을 쳤고 아버지에게 용돈을 받았으며 꾸중을 들어도 웃으며 안겼다. 아버지에게 자식은 진호뿐이었다.
우리는 무서운 아버지 대신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진호를 더 미워했다. 나와 여동생은 진호만 빼고 가끔 친척댁으로 놀러 갔다. 우리 부모님들과는 달리 친척들은 얌전하고 순한 나와 여동생을 노골적으로 예뻐했다. 장난꾸러기인 남동생은 빼고 너희 둘만 놀러 오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뿌듯함이 느껴졌다. 우리는 착하고 순한 아이들이고 진호는 나쁜 아이라는 말 같았다.
“얼른 일어나. 집에 가자.”
외삼촌이 나를 깨웠다. 창밖이 어두웠다. 새벽 두 시였다.
“진호가 아직 안 왔단다.”
달이 반짝 빛나고 있었다. 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길은 어두웠지만 별은 밝게 빛났다. 곧 돌아올 거야,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사람 하나가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좁은 골목길에 숨이 막혔다.
친구들과 물놀이를 갔던 진호가, 내 동생이 아직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남자아이들 몇이 해수욕장으로 놀러 갔고, 거기서 쌍안경 때문에 실랑이가 있었다고 했다. 실랑이 끝에 아이가 물에 빠진 건지, 놀다가 갑자기 보이지 않은 건지 아무튼 내 동생이 사라졌다고 했다. 남은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연락하지도, 신고도 하지 않고 자기네끼리 진호를 찾느라 밤늦게야 돌아왔다고 했다. 길을 잃은 걸까,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실종이 나은가, 죽은 게 나은가, 이대로 영원히 볼 수 없다면, 그건 내가 바라는 게 아니다, 그런 생각들로 밤을 지새웠다. 여동생과 둘만 있는 집으로 다음 날 오전에 연락이 왔다. 진호를 찾았다고. 막냇동생은 8년의 짧은 생을 살고 바다로 떠났다.
1987년 8월 23일, 내 동생을 바다에서 찾았고 바다에서 잃었다.
아이들은 장지에 갈 수 없다고 했다. 운구차가 집 앞에 잠시 머물렀을 때 여동생은 울며 운구차를 쫓아갔다. 나는 집에 혼자 남아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았다. 불볕더위가 이글거리던 날이었다. 나는 고통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벌을 받는 동안에도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했다. 동생을 잃고도 울지도 못하는 내가 참으로 싫었다.
내가 기억하는 막냇동생의 모습은 물을 많이 먹어 배만 볼록했다던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그 애는 언제나 티 없이 밝고 명랑했다. 여덟 살밖에 안 된 꼬마는 늘 자신만만하고 당당했다. 친구들이랑 해수욕장에 가겠다며 생긋 웃던 얼굴, 그게 내가 기억하는 진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기다리면 동생은 곧 돌아올 것 같았다. 엄마는 진호가 놀러 간다는 걸 몰랐다고 했지만 나는 미리 들어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 외삼촌 댁에 데려가지 않아, 보호자도 없이 아이들끼리 간다고 엄마에게 말하지 않아, 그 어린아이가 바다에 놀러 가도록 그냥 두었다. 그리고 그렇게 진호가 아팠을 그 시각, 나는 친척 집에서 웃고 있었다.
언젠가 진호가 찾아온 적이 있었다.
“왜 나만 두고 갔어? 얼마나 찾았는데”
진호를 바다에 떠나보내고 우리는 도망치듯 이사를 했다. 함께 바다에 갔던 아이들 무리를 보기만 해도 극도의 분노심에 사로잡혀 술을 마시고 폭력을 휘두르는 아빠 때문이라도 동네를 떠야 했다.
“나도 너 한참 찾아 헤맸어. 우리가 이사를 해서 집을 못 찾았던 거였구나. 살아있을 줄 알았어.”
여덟 살,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진호는 나를 찾아왔다. 나는 동생을 떠나보내고 처음으로 울었다. 그렇게 진호를 안아준 이후 다시는 꿈에서도 그 애를 만날 수 없었다.
고깃배가 흰 깃발을 휘날리며 항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등대지기가 떠난 등대에 불이 깜빡였다. 내 동생, 등대가 있었다면 좀 더 빨리 우리에게 돌아왔을 텐데,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새삼 미안했고 많이 보고 싶었다. 이제는 미안하지 않다. 그저 가끔 보고 싶다. 내 동생, 우리 전진호, 지금은 어디쯤 항해하고 있을까.
“나도 사실 바다가 좋아. 너는 왜 좋아?”
“예전에는 진호를 빼앗아 간 곳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바다가 좋아. 바다에 가면 진호를 만나니까.”
하얀 물결을 일렁이며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간다.
언제나 곁을 지켜주는 소중한 이들,
나의 백만 송이 장미에게
당선 연락을 받았을 때 저는 명예퇴직 신청서를 쓰던 중이었습니다. 1년 넘게 휴직했고 긴 휴직이 끝나면 당연히 학교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마무리를 해야 할 시간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글을 써보지, 그래?”
치병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하던 내게 친구가 말했습니다. 한 번도 내 글을 읽어보지 않은 그 친구가 저에게 글을 써보라 권했습니다.
스무 살 무렵에는 또래 친구들과 단편소설을, 7년 전 발병 후에는 투병기를 쓰기도 했습니다. 최근 20년 동안은 학생들의 생활기록부만 열심히 썼습니다. 그런 내가 과연 글을 쓸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습니다. 하지만 ‘나같이 책 안 읽는 사람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을 써달라는 친구의 말에 저는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늘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글짓기 대상을 받은 친구가 전교생 앞에서 글을 읽는 모습을 볼 때는 나도 언젠가 저 자리에 서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했습니다. 재능도 없고 글 쓰는 방법도 몰랐지만 ‘잘’ 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상상 속의 누군가가 아닌 현실 속 나의 이야기를, 내 인생을 책으로 쓰면 소설책 열권은 나온다며 하소연하던 엄마 이야기를, 그리고 지금도 어느 바다를 힘차게 항해하고 있을 내 동생 진호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20년간 말로 먹고 살아놓고도 말주변이 없어 늘 쭈뼛거리고, 화가 나도 화를 내지 못하고 눈물만 글썽이던, 아직 덜 자란 어른아이인 저는 글을 쓰면서 비로소 편안해짐을 느낍니다.
이름보다 많이 들어온 ‘선생님’이라는 호칭 대신 ‘작가’라는 호칭을 설레게 받아드리려 합니다.
수원역에 모셔 드릴 때마다 ‘건강하라’며 사십이 넘은 딸에게 용돈을 쥐여주시는 아버지와 아픈 언니보다 더 아파하는, 늘 고마운 동생 윤정에게도 감사합니다. 언제나 내 곁을 지켜주는 친구들과 동료 선생님들, 그리고 나의 백만 송이 장미, 제자들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꽃 피는 봄에 사랑하는 많은 이들을 떠나보냈습니다. 힘을 낼 수 있도록 길을 내어주신 심사위원님들, 『시와산문』 이사장님과 편집장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