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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5월 17일 미 대통령 전용기 내에서 방미중 당시 신기술이었던 위성전화를 통해 서울에 있던 영애(박근혜 대통령)와 통화하는 육영수 여사와 박정희 대통령. 사진=조선일보 |
1975년 5월 17일 미 대통령 전용기 내에서 방미중 당시 신기술이었던 위성전화를 통해 서울에 있던 영애(박근혜 대통령)와 통화하는 육영수 여사와 박정희 대통령
지난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이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퍼스트레이디로서 청와대 생활을 시작한 육영수(陸英修) 여사는 ‘청와대의 야당’으로 불릴 만큼 시정의 여론을 기회 있을 때마다 박 대통령께 일일이 알렸다. 평소 한복의 멋을 좋아하여 노란빛과 옥빛
한복을 입었던 육 여사는 1963년 양지회를 설립해 많은 사회봉사 활동을 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 매년 ‘사랑의 열매 바자회 개최’, 자립농가의 성공담을 담은 〈희망의 등불〉을 매년 1회씩 발간·배포, 어린이의 학습과 교양을 위한 양지문고(1질 60권)를 벽지·낙도 등 700개 학교에 무료로 기증, 어린이의 학습·
휴식처가 됐던 어린이회관을 1971년 건립해 연 300만명의 어린이들을 참관시켰고, 어린이의 미담을 담은 교양지 〈어깨동무〉를 매월 전국 농어촌, 벽지, 낙도 어린이에게 배포했다.
1970년 5월 마지막 토요일, 육 여사가 나를 찾는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청와대 본관으로 올라가 응접실에서 육 여사를 만났다. 육 여사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최근의 민심과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솔직하게 보고해 달라고 부탁했다. 육 여사는 대통령이 있는 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대통령은 마침 식사 중이었다.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조금 전 육 여사에게 말씀드렸던 민심 상황들을 다시 대통령께 보고했다.
대통령은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반대여론이나 비판적인 의견을 보고받으면 안색이 어둡게 변하면서 안면이 경직됐다. 그러면 육 여사는 계속하라는 의미로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고, 나도 대통령의 표정에 개의치 않고 끝까지 보고했다. 그 길이 국가와 대통령을 위하는 길이라고 확신했고, 또 육 여사도 그렇게 하라고 간곡하게 당부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보고가 끝난 후에는 곧 표정을 부드럽게 풀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항상 쓴 약을 마신 것처럼 “고맙다”는 격려의 말을 잊지 않았다. 박 대통령이 18년이란 세월을 장기집권할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듣기 싫은 얘기를 크로스체크하면서 기꺼이 들었고, 육 여사가 그것을 뒷받침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청년담당 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긴 후 대통령으로부터 청년문제에 관한 지침을 받았다. 대통령은 청년문제의 중요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했다. 청년문제가 교육부, 보사부 등 각 부처별로 분산돼 있으므로 기구신설 문제 등 제도문제도 검토할 것을 지시했다. 외국의 경우엔 청년문제를 다루는 청년청(靑年廳)이 독자적으로 설치돼 있는 나라가 있었다. 그러나 독자기구를 설치하기보다 현재의 기구를 제대로 활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분석이 나와 기구 신설은 건의하지 않았다.
또한 김현옥(金玄玉) 내무부장관과 협의해 군과 검찰 등 각계에서 국가를 이끌어 나갈 차세대 인물 500명을 엄밀히 선정해 명단을 작성했다. 이때 이홍구(李洪九) 전 부총리, 오유방(吳有邦) 전 의원, 정창화(鄭昌和)전 의원, 정동성(鄭東星) 전 의원 등을 명단에 포함했고, 군에서는 정규 육사 1기(육사 11기)인 김복동
(金復東) 전 육사교장,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 최성택(崔性澤) 전 국방정보본부장(예비역 중장) 등을 명단에 넣었다.
“각하, 金大中 후보 연설이 최곱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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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3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 공고 후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가 경북 의성 중부초등학교 교정에서 청중들에게 손을 들어 답례하는 모습. 사진=조선일보 |
1971년 3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 공고 후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가 경북 의성 중부초등학교 교정에서
청중들에게 손을 들어 답례하는 모습.
1970년 5월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나는 여론분석을 위해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통령선거 유세장을 찾아다녔다. 춘천고에서 김대중(金大中) 후보의 유세가 있었다. 이철승(李哲承)씨와 김영삼(金泳三)씨 등이 보조연사로 나왔다. 김대중 후보가 연단에 오르자, 청중 사이에 긴장이 흘렀다. 김대중 후보의 연설은 청중을 완전히 휘어잡았다. 나는 평소 강원룡(姜元龍) 목사의 연설에 매료돼 있었는데, 건국 이후 두 분의 연설이 제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춘천에서 돌아온 지 이틀 후 육 여사가 나를 찾았다. 나는 급히 청와대 본관으로 올라갔다. 육 여사는 대선
분위기와 여론 흐름 등을 물었다. 나는 민심 동향을 보고하고, 김대중 후보의 연설에 많은 청중이 감명을 받고 동요했다는 말도 했다. 육 여사는 놀라면서 “어떤 대목이 그러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분석한 점들을 말했다.
육 여사는 곧바로 대통령께 보고하자고 하면서 나를 집무실로 데려갔다. 대통령은 조금 긴장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나는 육 여사의 권유로 대통령 앞에 앉아 전체적인 선거 분위기와 후보들에 대한 국민들의 시각을말했다. 김대중 후보의 춘천고 유세 상황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각하, 건국 이후 대중연설가로서는 강원룡 목사와 김대중 후보를 따를 사람이 없습니다. 두 분의 연설은 언제나 청중을 매료시키고 감동시킵니다. 이번 춘천 유세에서는 여당 지지자들까지도 김대중 후보의 연설에 감명 받는 분위기가 역력했습니다.” 그 순간, 대통령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상황을 처음 보고 받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 어떤 내용이 설득력이 있는가?” 대통령의 목소리에서 긴장감이 묻어났다. 나는 김대중 후보의 연설을 세 가지로 나누어 말하면서 특히 부정부패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이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심각하게 들은 후, “자네는 그 문제에 대한 대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각하, 부정부패 문제를 유리알처럼 일소하려면 유리판이 깨져서 부작용이 더 심각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통령 각하께서는 부정부패를 일소하겠다는 것을 선거공약으로 강력하게 표명하시고, 그 의지를 증명하는기구를 창설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럼 자네가 한번 상세히 연구해서 보고서를 만들어 봐.”
나는 지시를 받고 돌아와 10일간 밤낮으로 ‘사정담당 특별보좌관실’의 창설안을 상세히 만들어 대통령 제1부속실을 통해 대통령께 올렸다. 그 명칭은 ‘호민(護民) 담당 특별보좌관실’이 이미지상 더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대통령은 상세히 보고를 받고는 “그래, 잘 만들었다. 놓고 가라”고 했다.
그 보고서를 홍종철(洪鍾哲) 특별보좌관(초대 경호실장, 문교부장관 역임)에게 주면서 “이 보고서를 검토해 실행에 옮기도록 하시오”라고 지시했다. 홍종철 보좌관의 지시를 받고 나는 사정담당 특별보좌관실의 창설 작업을 하면서 세부 시행지침도 작성했다. 나는 대선이 끝난 후 초대 사정담당 특별보좌관실의 사정비서관으로 발령받아 사정 업무를 시작했다.
30세 시경국장, 깨지지 않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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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2월 11일, 불과 30세의 나이에 서울시경국장이 된 이건개 변호사. 사진=이건개 변호사 |
1971년 12월 11일, 불과 30세의 나이에 서울시경국장이 된
이건개 변호사. 사진=이건개 변호사
‘경찰·검찰의 중요사안 중 90% 이상은 수도경찰, 수도검찰에서 이뤄진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찰조직에 원칙적인 업무수행의 자세를 심기 위해 어떠한 인맥에도 연계되지 않은 젊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당시 김현옥 내무부장관이 추천한 3인의 젊은이 중 나를 수도경찰 총수에 임명했다.
1971년 12월 11일 나는 31세(실제는 30세)의 젊은 나이에 수도경찰 총수로 발령받았다. 지금도 깨지지 않은 기록이다. 박 대통령은 내게 “예산도 웬만한 부처보다 크고, 직원도 1만명이 넘는 자리이니 중요하다”고 했다.
마침 그 무렵에 북한 김신조(金新朝) 일당이 기습적으로 청와대 앞까지 침투해 종로경찰서장을 사살한 사태가 일어났다. 청와대와 인접한 서울 종로구 세검정에서는 경찰이 북한에서 내려온 김신조 일당에 대해 검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방첩대라는 답변만 듣고 신분도 확인하지 않은 채 통과시켰다. 박 대통령은 경찰들이 원칙적인 업무자세로 무장돼 있지 않기 때문에 그 같은 실수가 벌어진 것이라고 판단하고, 원칙적인 업무자세를 확립시키라는 뜻으로 나를 수도경찰 총수로 발령낸 것이다.
박 대통령은 “수행원 없이 허름한 잠바 차림으로 뒷골목을 다니면서 여론을 수집해 내게 보고하라”고 했다. 대통령은 큰 배를 운항하는 선장과 같아 밑바닥 여론을 모르면 배가 난파한다고 했다. 경찰 내 정보수집 기능을 수행하는 정보분실을 만들어 일선 경찰서 정보과에서 상부로 보고하게 하고, 대통령께 매일 민심을 직보하는 라인을 구축했다.
서울시 경찰 총책임자로서 나는 경찰의 원칙적인 업무집행을 고취하기 위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교통 위반자에 대해 스티커를 발부하도록 지시하고, 원칙대로 스티커를 발부한 경찰의 사기를 진작시켜 주기 위해 적발된 국회의원이나 장관들의 명단을 신문에 공개했다. 또한 과감히 스티커를 발부한 경찰관에 대해서는 별도로 금일봉을 주었다.
나는 또한 수도치안 비상조치 제1호를 발동해 서민생활 침해사범 일소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부정식품 일소와 서민생활 보호 등에 앞장섰다. 그리고 거리질서 확립을 위해 수도치안 비상조치 제2호를 발동해 교통질서와 거리질서를 철저히 잡아 나갔다. 그 당시에는 야간절도와 강력범의 발생빈도가 매우 높았다. 그래서 나는 형법 제330조(야간주거침입 절도죄 조항)에 착안해 330수사대를 창설하고 조직적인 절도범을 일소해 나갔다.
나는 절도범이 절취한 장물의 처리 루트를 근원적으로 수사해 조직적인 절도범의 뿌리를 뽑도록 330수사대에 지시했다. 그렇게 ‘문 열고 잘 수 있는 수도치안’의 캐치프레이즈에 전력을 다한 결과 시민이 안심할 수있는 치안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당시까지 백차(白車)로 불리는 순찰차는 하얀색이었고, 수사 차량은 흑색 계통이었다. 나는 그것이 시민생활을 명랑하게 조성하는 데 지장이 있다고 생각해서 오늘날 볼 수 있는 파란색을 곁들인 차로 바꿨다. 또 교통경찰의 복장도 하늘색 색상으로 산뜻하게 바꿨다. 그리고 시민들이 횡단보도를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교통사고를 줄이기 위해 시내 횡단보도의 폭을 오늘날과 같이 대폭 확대했다. 또한 영장 없는 불법연행을 금지시키는 등 파격적인 시책을 추진했다. 박 대통령도 내 시책을 적극 지원했는데, 그때 생긴
‘서민생활 침해사범 단속’이라는 용어가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이후락 중정부장과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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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1월 4일 2박3일간의 평양방문을 마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판문점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
1972년 11월 4일 2박3일간의 평양방문을 마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판문점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1972년 2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공업용 방부제가 검출된환만식초(丸萬食醋) 사건이 터졌다. 서민생활에 각별히
신경을 쓰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서민생활 침해사범 일소’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고 서민생활을 해치는 부정식품 단속을 위해 특명반을 만들던 때였다.
그런데 당시 실력자였던 이후락(李厚洛) 정보부장과 울산 동향으로 가까운 사람이 환만식초의 오너였다. 김현옥 장관도 압력을 받자 “웬만하면 돌려보내라”며 수사중단을 지시했다. 나는 수사과장으로부터 관련 서류를 받은 뒤 상황파악에 들어갔다. 평소 박 대통령께 보고하면, 박 대통령은 “다른 곳에 얘기하지 말라”고 하셔서 그리했고, 이것에 대해 이후락 부장은 심기가 불편했던 것이다.
그러자 이후락 부장은 새파란 젊은 국장이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고 화를 내며 수사과장 이하 말단 직원까지 30여 명을 모두 잡아가 버렸다. 서민생활을 위해 수사했던 것인데, 원칙을 어기고 횡포를 부린 것이었다.박 대통령과의 관계가 아니었다면 당장 사표를 내고 야당에 들어가 투쟁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경찰의 지휘관으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었고, 분노가 치밀어 그 기관 책임자에게 항의하러 갔다. 광화문 네거리 이순신 장군 동상을 통과하고 있는데 자동차로 연락이 왔다. 육 여사가 나를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육 여사는 나를 보더니 대통령에 대한 잘못된 여론을 보고하라고 했다. 내가 보고를 빨리 끝내고 갈 데가 있다며 일어섰더니 육 여사는 어디를 그렇게 급히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항의할 데가 있어서 가야 한다”는 정도로만 말했다.
그러자 육 여사는 “왜 정보부에서 경찰수사에 관여하냐”며 그 내용을 대통령에게 보고하라고 했다. 내가
“싸움 붙이기 싫습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라고 했지만, 육 여사는 내 팔을 끌고 점심식사를 하는 대통령께 나를 데려갔다. 박 대통령이 “무슨 얘기야, 해 봐”라고 하셨다.
내 보고를 받자마자 대통령은 화를 벌컥 냈다.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 네가 총책임자인데. 앞으로 정보기관의 그런 나쁜 버릇은 고쳐야 한다. 네가 가서 말을 안 들으면 대통령 특명이라고 하고 처리해. 필요하다면 구속도 해라”라고 말했다. 그러고서는 당장 중앙정보부 국장에게 전화를 해 “젊은 청장이 일하는 데 왜 방해하느냐”고 소리를 쳤다.
나는 명을 받고 경찰 책임자 50명으로 특명반을 구성해 중정 앞에 대기시켰다. 중정 국장은 박 대통령의 전화를 받고 사색이 돼 있었고, 자신의 보스는 행방이 묘연하다는 말만 했다. 15분 후 박 대통령이 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다그치자, 국장은 “알겠습니다”만 연발하더니 내게 “경찰 직원을 모두 데리고 나가라”고 했다. 몇 달 후 이후락 부장은 전격적으로 경질 당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서민생활 침해사범 수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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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7월 7일 이철희·장영자 부부가 거액 어음사기 사건으로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으로 가고 있다. |
1982년 7월 7일 이철희·장영자 부부가 거액 어음사기 사건으로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으로 가고 있다.
나의 백부(伯父)인 이용운(李龍雲) 전 해군참모총장은 한때
외국에서 반정부 활동을 했다. 백부는 해군참모총장 예편 후에 베트남 등 해외에서 열심히 고철사업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김형욱 중정부장과 감정이 악화됐다. 그러자 김 부장은 해외에서 백부를 납치해 와 백부의 집에 연금하고 말았다.
그 당시 김영관(金榮寬) 해군참모총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백부의 억울함을 보고하여 즉각 풀려날 수 있었다. 백부는 연금 보름 만에 풀려나서 일본으로 출국했다. 그곳에서 백부는 정권퇴진 운동을 펼쳐 반정부 활동 해외 주도자 4인 중 한 명으로 지목됐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나는 동부 보스턴에 있었고, 반정부 인사로 낙인 찍힌 백부는 서부 로스앤젤레스에 있었다. 그런데 보스턴 교민들이 “서울시경 국장까지 지낸 사람이 무엇 하러 미국에 왔느냐”며 나를 중정(KCIA) 현지 책임자로 보는 것이었다. 보스턴 언론에서도 “교민들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KCIA가 왔다”고 보도했다. 그렇지만 서부 로스앤젤레스 지역 교민들 사이에 백부가 만드는 반정부 신문에 내가 많은 협조를 하고있는 것처럼 소문이 났다.
일각에서는 한국에서 시경국장까지 지낸 사람이 미국에 와서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몰아붙였다. 경찰국장
재직시절 나와 경쟁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그런 오해를 사실처럼 꾸며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혹시 내가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면 요직에 중용될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고 음해한 것이었다.
나는 과거 나의 부하들이 ‘빨리 해명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와 비로소 국내사정을 알게 됐다. 한쪽에선 KCIA라 오해하고, 다른 쪽에선 반정부 활동을 한다고 모함하면서 사람들이 나를 몰아붙였으니, 그때정신적 고통은 말할 수가 없었다. 공부를 마치고 검사로 복귀한 후에도 백부의 반정부 활동으로 청와대 및법무부와 불편한 관계가 계속됐다.
1977년 나는 박 대통령에게 백부를 모셔오겠다고 했고, 대통령은 허락했다. 그러나 당시 중정 차장이던
이철희(李哲熙)씨가 반대했다. 나는 반대를 무릅쓰고 백부를 설득해 미국과 일본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귀국해 박 대통령과 만나 오해를 풀도록 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그 이철희씨를 1982년에 다시 만났다.
이철희·장영자(李哲熙·張玲子) 사건 수사에서 검사와 피의자의 관계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육 여사와 박 대통령의 죽음을 두 차례 모두 확인해야 하는 숙명적인 입장에 서기도 했다. 육 여사가
피살되기 한 달 전 청와대에 가서 육 여사를 만났다. 육 여사는 헤어질 때 현관까지 나와 내 손을 꼭 잡고
열심히 하라고 당부했다. 육 여사는 그때 은빛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마지막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도장처럼 찍혀 있다.
문세광 저격 방송테이프를 수거해 간 朴鍾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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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월 21일 청와대 기습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김신조가 1969년 1월20일 현장을 돌아보며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기습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김신조가
1969년 1월20일 현장을 돌아보며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나는 1974년 8·15사건 당일에 현장수사를 지휘했다. 나는 저격 순간의 필름을 되풀이하면서 문세광(文世光)의 흉탄에 육 여사가 돌아가시는 참혹한 장면을 봐야 했다.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를 조금 넘은 시각, 내무부 공안담당관이었던 나는 광복절 기념식 직후 홍성철 내무부장관과 회의가 약속돼 있어서 현장에서 가까운 정부종합청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오전 10시23분경, 박정희 대통령은 막 “통일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이란 대목을 읽고 있었다. 이때 “탕” 하는 소리가 났고, 곧이어 TV 화면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처음엔 단순한 방송사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현장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판단하고 현장으로 차를 몰았다.국경일이어서 종합청사에서 국립극장까지 3분여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후 나는 합수부 부본부장이 돼 역사적 사건의 수사에 관여하게 된다. 현장에 도착하니 시경국장, 치안국장 등은 얼이 빠진 모습이었다. 나는 즉시 공항과 항만에 검문검색 강화를 지시하고, 전국 수사공조 체제를 구성했다. 동시에 사고현장에 대한 보존조치를 지시했다.
사고 직후 영부인은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고, 나도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해 놓고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다. 서울대병원에 도착해 보니 육영수 여사는 이미 서거했다. 나는 침통한 마음으로 경찰 수사체제를 점검했다. 합수본부장은 김일두(金一斗) 서울지검장이 맡았고, 부본부장은 나와 중정 이용택(李龍澤) 국장이 맡았다.
텅 빈 극장에서 그날 날아다닌 총알을 찾아내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문세광이 맨 처음에 쏜 탄두가 보이지 않아 그것을 찾아내느라 애를 먹었다. 범인이 왼쪽 대퇴부에 관통상을 입고 있음을 염두에 둔 나는 범인이 앉았던 좌석 주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첫 번째 탄도는 의자 다리에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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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2월 25일 165명의 생명을 앗아간 대연각 호텔 화재현장에 나온 박정희 대통령이 김현옥 시장으로부터 상황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
1971년 12월 25일 165명의 생명을 앗아간 대연각 호텔 화재현장에
나온 박정희 대통령이 김현옥 시장으로부터 상황설명을 듣고 있다.
나는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으므로 영부인이 어떻게 해서 총에 맞게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각 방송사가 행사를 중계하면서 녹화해 두었는데, 그 테이프의 행방이 묘연했다. 조사결과, 박종규(朴鍾圭) 당시 경호실장이 그 테이프들을 모두 수거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경호실의 권위가 대단해 아무도 시비를 걸 수 없는 시대였다.
합수부에서 회의를 했지만 어느 누구도 감히 “내가 경호실장으로부터 테이프를 받아 오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정보국장조차 나서지 않아 결국 내가 경호실장을 대면하기로 했다.
나는 박 실장을 찾아가 단도직입적으로 “제가 합수부의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테이프를 주십시오. 그게 있어야 수사가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한참 동안 머뭇거리더니 결국 할 수 없다는 듯 테이프를 내주었다. 나는 테이프를 챙기면서 “왜 경호실장께서는 총을 쏘지 않았습니까”라고 감정 섞인 질문을 던졌다. 경호실장은 충격을 받은 듯 찔끔한 표정으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뒤에 서 있었소. 갑자기 그놈이 달려오면서 총을 쏘기에 나도 총을 뽑으려는데 오른손에 행사 안내서를 쥐고 있었소. 그것을 왼손으로 옮겨 잡고 총을 뽑으며 연단으로 튀어나갔지. 그런데 갑자기 천장의 조명 때문에 눈이 부셔서 앞이 안 보이는 거요. 조명을 피하려고 걸음을 옮겼는데 그게 그만 영부인 쪽이었던 거요. 놈이 나를 보며 갈긴 총알이….”
나는 녹화테이프를 무려 30번이나 돌려 보았다. 그것도 초저속으로. 범인 문세광은 무대 앞으로 달려나오는 경호실장을 향해 서너 발을 발사했고, 경호실장이 육 여사 앞으로 움직이는 바람에 총알이 육 여사의 두부를 관통하는 것이 보였다.
30번이나 반복해서 보다 보니 당시 J 국회의장이 육 여사 우측에 앉아 있다가 문세광의 제2탄이 발사된 직후 곧바로 영부인 뒤로 몸을 숨겼다. 그때 그분이 조금이라도 육 여사를 밀쳐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보면 볼수록 대조적인 사람은 육 여사였다. 육 여사는 약 6초 동안 머리를 3cm 정도 움직여 앞을 보려는 듯한 모습을 보인 것을 제외하고는 마지막까지 결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 남산 국립극장에서 피격당한 육영수 여사에게 요인들이 다가가는 가운데
대통령 경호실 수행계장 박상범이 권총을 들고 박 대통령이 숨어 있는 연단을 호위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 임희순 기자의 특종
8·15 저격사건의 현장사진을 보면 문세광이 연단 앞까지 7발의 총을 쏘면서 달려 나갔는데, 아무도 저지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통로 양쪽 의자에 당시 300여 명의 중부경찰서 경관들이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그를 저지하지 않았고, 결국 총을 다 쏜 후 맨 앞에 있던 세무서 직원이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그것은 전형적인 ‘복지부동’의 현장이었다.
1974년 당시 유신이 선포돼 강력한 대통령중심제가 구축되면서 경호실 권력이 비대해졌다. 모든 사람이 경호실과의 마찰을 꺼렸다. 행사 직전에 경호원들은 경찰들에게 “우리의 지시 없이는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하면서 300여 명의 경찰들을 완전히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렸다.
암살범이 설치면 누구든 당연히 즉각 조치를 취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경호실의 명령을 의식한 나머지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못했던 것이다.행사 2개월 전에 신임 내무부장관이 취임했다. 나는 장관에게 “1·21 김신조사태도 있었기 때문에 북의 습공격, 요인암살 등이 예상되니 8·15 행사 전에 공항부터 행사장까지 검색조치를 철저히 강화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장관은 미온적이었다.
장관이 새로 취임하면 대개 장관의 스타일로 인사이동을 하는 것이 해방 이후 한국 정치의 관례였다. 그러나 신임 장관은 인사이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나는 두어 차례 인사이동을 건의했으나, 그때마다 반대에 부딪혔다. 심지어 문제 있는 경찰관들의 인사이동조차 없었다. 풀어진 기강이 사건현장에서 경찰들을 허수아비로만든 것이다.
나는 육 여사 저격사건 수사를 직접 지휘하면서 현장에서 7발의 탄환도 찾아내고, 경찰·검찰·정보부 합동수사팀 회의에 참석해 수사진행을 독려하고, 문세광을 직접 신문하기도 했다. 그 후 박 대통령 시해사건 때도 수사에 직접 관여했다. 그렇게 두 분과 나의 인연은 매우 깊었다.
“全斗煥, 10·26 직후엔 대통령 욕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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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사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에 관해 국방부 제1회의실에서 중간발표를 하고 있다. 왼쪽이 백동림 당시 합동수사본부 수사국장 |
계엄사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에 관해 국방부 제1회의실에서 중간발표를 하고 있다. 왼쪽이 백동림 당시 합동수사본부 수사국장, 오른쪽이 이건개 검사다.
육 여사 사건은 박 대통령의 평상심을 깨뜨렸다. 경호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차지철(車智澈)의 등장을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10·26 사건을 촉발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나는 하버드 유학을 마치고 검찰에 평검사로 복귀했다. 복귀하자마자 박 대통령께 당시 정국의 심각성을 보고하기로 했다.
우선 ‘정국개혁방안’을 만들어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전달했고, 전 사령관은 ‘문고리 권력’인 차지철 실장에게는 ‘국군 복제개혁방안’이란 제목으로 감춰 보고하겠다고 해 승인을 얻어 박 대통령께 정국개혁방안을 전달하려 했으나 차 실장이 시간을 만들지 않고 차일피일하는 중이었다.
고심하고 있던 중 1979년 10월 17일 부마사태가 발생하자 차 실장이 나를 불러 “정국을 어떻게 보느냐”고
묻길래 “사태의 심각성과 대책을 대통령께 보고 드려야 한다”고 했다. 차 실장은 자신에게 먼저 보고를 하라고 했고, 나는 차 실장에게 보고하고 대통령 면담을 확정 받았으나 다음주 10·26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미리 보고해 정보부장을 교체했더라면 10·26 사건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내 기억으로 청와대 무역확대진흥회의를 하기 위해 차지철 실장이 박 대통령을 경호해 엘리베이터를 타면 함께 타려는 김계원(金桂元) 비서실장에게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라”고 할 정도였다. 김계원 실장과 김재규(金載圭) 중정부장이 차지철에게 쌓인 원한은 일반인들이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다.
1979년 10월 27일 아침 일찍 당시 대검찰청 연구관이었던 나의 집으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전화를 걸어 왔다. 전 사령관과는 그의 특전사와 공수여단장 시절 안면이 있었다. 급히 좀 만나자는 것이었다. 이미 나는여러 경로를 통해 박 대통령이 전날 밤 서거한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종로구 소격동 보안사를 찾아가 전사령관을 만났다. 전 사령관은 “김재규 중정부장이 범인”이라며 내게 도움을 요청하고, 그 자리에서
검찰총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수사방향을 물었더니 두서없이 이야기를 했다. 내가 단계별로 수사를 진행하라고 하니, 전 사령관이 “수사 끝날 때까지 도와달라”고 했다. 전두환은 내게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나”라고 묻길래, “김종필(金鍾泌)씨가 순리 아니냐”고 했다. 아무튼 허 모씨가 대통령을 권하기까지 전두환은 대통령에 대한 권력욕이 없었던 것으로 보였다.
경기고 33회(崔圭夏 대통령, 閔寬植 국회의장, 李英燮 대법원장)가 입법·사법·행정을 꽉 잡고 있었음에도,
대통령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육군 중장에게 무기력하게 뺐겼다고 경기고 출신들은 농담한다. 나는 전두환 합수본부장의 특보가 돼 12·12 사태 전날까지 숙식을 함께했다. 합수부장 특보로서 10월 27일 오후 궁정동 현장을 확인 답사했다. 나는 이학봉(李鶴捧), 허삼수(許三守), 허화평(許和平), 백동림(白東林) 등이 작성한합수부 수사발표문을 최종적으로 손질했고, 이를 갖고 노재현(盧載鉉) 국방부장관(육사 3기),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협의를 했다.
밤새 수사 발표문을 손질해 아침 일찍 전 사령관에게 넘기고 전 사령관은 노재현 장관에게 갔다. 내가 삼청동 공중목욕탕에 누워 있는데, 아침 8시30분쯤 국방부장관실에서 “빨리 들어오라”고 연락이 왔다. 노재현 장관이 전두환 사령관에게 수사결과에 대해 물었는데, 전 사령관이 내용을 자세히 몰라 답변을 제대로 못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답변했더니 전 사령관이 그제서야 끼어들었고, 노 국방이 “야, 넌 알지도 못하니 가만히 있어라”고 했다. 아무튼 노 국방이 나의 설명을 다 듣더니, “좋아, 발표해”라고 했다.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수사결과를 발표하는 그 유명한 사진에, 나는 본부장 왼쪽, 백동림 수사단장은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전 사령관이 나를 왼쪽에 앉게 한 것은 혹시 모르는 질문이 나오면 내게 대답하라는 의도라고 추측했다.
12·12 사태의 경우도 10·26 사건 이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협조요청에 따라 내가 당시 수사검사로서 보안사에 파견근무를 하게 됐다. 이학봉 수사과장 등 수사요원들이 조서를 써 올리면 내가 최종 검증했다. 하루는 서빙고분실에 가보니 이학봉이 수사를 하지 않고 있고, 조사를 받던 김재규 정보부장이 “정승화(鄭昇和)총장(육사 5기)도 함께 있었다”며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수사관들이 보기에 박 대통령과 보안사령관은 외톨이고, 중정과 군이 합작한 것 아니냐는 생각에 보안사 수사관들이 수사진행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내가 새벽 2시경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깨워 “수사가 안 되고 있으니 수사관들을 독려하라”며 즉각 정 총장의 연행 조사를 촉구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상사에 대한 충성심은 강했지만, 대가 약했다. 그가 “알겠다, 알겠다” 하면서 일주일간 연행을 미루는 사이 정 총장 측에서 신군부 세력을 축출하려는 기도를 한 것이다. 이에 전두환 사령관은12·12 사태를 일으켰다. 정 총장에 대한 즉각적인 수사가 있었더라면, 12·12 사태라는 것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합수부에 파견 나갔던 나는 12·12 사건 후 검찰로 돌아왔다. 내가 육 여사 피살사건 수사에 이어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수사에 관여하게 된 것도 박정희·육영수 대통령 내외분들과의 오랜 인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두 사건은 대통령의 권한이 비대해질 수밖에 없는 대통령제의 폐단에서 비롯됐다.
大檢 중수부 창설 아이디어 제공
1992~1993년 수도검찰 총수인 서울지검장 시절에는 수도권 전체와 대한민국 전체의 범죄현장을 심층 분석해 기획수사의 방향으로 수도검찰을 지휘했다. 국가경제사범 수사에 있어서도 다음과 같은 기준을 지킬 것을 원칙으로 했다.
첫째, 국가경제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 수사시기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라. 둘째, 포퓰리즘에 빠져서
마녀사냥 식으로 수사하지 말라. 셋째, 수사 시작부터 피의사실을 공표해 여론에 선입견을 주어 여론에 쫓기는 수사를 하지 말라 이와 같은 수사원칙은 임기 중 철저히 지켜 나갔고, 피의사실을 공표한 검사나 수사공무원의 징계를 원칙으로 했다.
또한 ‘믿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사기사범 등 반 신뢰사범 일소를 위한 기획수사를 단행했고, 공정한 대통령선거가 이뤄질 수 있도록 검찰권을 행사했다. 그 시절, 당시 청와대의 불필요한 간섭과 P 의원 등 부당한 인신구속의 특명들이 여러 건 있었으나, 전부 거절하고 검사동일체(檢事同一體)의 원칙에 따른 원칙적인 검찰권 행사를 단행했기 때문에 청와대의 심기에 반하는 검찰권 행사를 이유로 정치탄압의 굴레를 쓰기도 했다.
법률가로서의 소신과 원칙을 갖고 직분사명 수행에 힘썼던 수도경찰과 검찰 총수 시절은 국가의 모든 법과 행정이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 소중한 경험이 됐다. 1980년대 후반 오탁근(吳鐸根) 법무부장관(검찰총장 역임)이 전국부장검사회의를 하다 “검찰을 개혁할 것이 없느냐”고 해 용감하게 손을 들고 “대검 특별수사부를 전국단위의 수사기관으로 만들어야 하고, 이름을 대검 중앙수사부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내가 경찰의 정보기능을 만든 것을 계기로 범죄정보 수집기능과 수사관 교육기능, 거짓말탐지기 등 과학수사장비를 갖췄다. 수집된 정보를 청와대에 보고하도록 틀을 만들었다. 법률구조공단도 검찰 재직 시절의 작품이다. 박 대통령이 “오늘 법무부 초도순시를 가는데 무슨 지시를 할까” 하길래, “돈 없는 사람들은 민사사건에서 변호사를 선임할 수 없으니,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법률구조를 지시하시는 것이 어떨까요”라고 했더니, 신직수(申稙秀) 법무부장관(검찰총장, 중앙정보부장 역임)에게 공단 설립을 지시했다.
1989년 대검 공안부장 시절, 부산에서 근로자들이 사장을 드럼통에 가둬 굴리고 린치한 사건이 발생했다.
치안확보를 위해 경찰력으로는 한계를 느꼈다. 나는 치안확보를 위해 경찰, 검찰, 중앙정보부를 합쳐서
공안합동수사본부를 만들자고 제의했다.
초대 수장은 내가 맡았다. 6개월 동안 한 건의 시위도 발생하지 않을 정도로 ‘예방경찰기능’을 강화했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은 정치인들의 수사본부 해체 요구를 받아들여 반 년 만에 해체하고 말았다. 그 뒤 문민정부는 민족우선을 내세워 1993년 3월 미전향장기수 이인모(李仁模)를 북으로 돌려보내고, 검찰, 경찰, 중앙정보부의 공안기능을 흩뜨려 버렸다.
朴대통령, 구속남발 피해
국가원수가 인신구속의 특명을 남발하고 과도하게 감사권을 발동할 때는 수사권과 감사권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강제력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법치에 의한 수사가 피괴된다. 이승만(李承晩) 정권 시절, 조봉암(曺奉岩) 사건은 대표적 ‘사법살인’이다.
선진국일수록 구속조치의 목적이 응보가 아니라 교화와 선도에 있다. 인신구속의 남용을 방지하자는 것이
사법권 독립의 취지다. 특히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을 검찰에서 불기소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법을 만들어국가변란 혐의로 소급해 다시 법정에 세우는 것은 법치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1965년 서울대에서 〈대통령중심제〉로 석사학위를 받고 하버드대학원에서 각국의 권력구조와 운영 실태를 연구할 정도로 이상적 대통령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행 대통령중심제에서는 대통령의 권한이 워낙 막강하다 보니 대통령의 의중이나 사안에 따라 인권침해가 발생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YS 정권 시절인 1994년, 롯데그룹 신격호(辛格浩) 회장의 조카 S씨 등 재벌2세들이 그랜저 승용차를 타고
가다 프라이드가 끼어든다며 운전자를 폭행한 혐의로 구속됐다.
사건 당일 신문에는 단순폭행으로 보도됐으나, 다음 날 신문에는 청와대에서 엄벌에 처하라는 특명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폭행사건은 그 동기와 원인, 폭행과정, 피해와 가해 등을 따져 실체적 진실을 밝힌 후 형사가검사와 의논해 처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체적 진실이 발견되기 전에 다음 날 즉각 엄벌 지시가내려진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대기업 회장 조카는 그 후 사회 적응을 못하고 2005년 방콕에서 우울증으로 자살했다.
지금 ‘유신정권’을 인권의 암흑기로 부르지만 정작 박정희 대통령은 인권을 가장 소중하게 여긴 대통령이었다. 수사부서의 책임자로 있을 때의 일이다. 사무실에서 업무보고를 받던 중 나는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급히 청와대로 들어갔다. 대통령은 집무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박종규 경호실장이 있었다.
경북 월성 지역구의 심모 의원이 전날 새벽 1시30분 만취한 상태로 청와대 앞에서 대통령께 불충한 언동을 하며 대통령 면회를 신청한 일 때문이었다. 대통령은 화가 나면 얼굴이 검게 변하면서 미세하게 떨리는데, 그날에 그랬다. 대통령은 “당장 심 의원을 구속하라”고 했다.
나는 우선 대통령께 전날 밤 사건에 대해 상세히 보고하고, “어젯밤 심 의원의 행위는 법률적으로 죄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래? 그 같은 행위가 구성요건에 해당되지 않는다고?”라고 톤을 낮추더니 “그렇다면 자네가 알아서 잘 좀 해 봐”라고 했다.
법집행을 할 때는 부엉이가 황혼에 천천히 나타나듯 중용적이고 신중한 자세가 필요하다. 이것을 법조인들은 ‘미네르바의 부엉이’라고 한다. 죄가 안 되는 것도 죄로 만드는 검사가 있는 반면, 죄가 안 된다고 소신 있게 이야기하는 검사가 있다. 신직수씨가 대표적이다. 실체적 진실은 법집행을 빨리 한다고 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삼민투 사건은 청와대의 오버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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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0월 14일 열린 통일외무위 국정감사에서 이건개 의원(자민련)이 해외공관의 기밀사항 지침서의 작성경위에 대해 질의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
1997년 10월 14일 열린 통일외무위 국정감사에서 이건개 의원
(자민련)이 해외공관의 기밀사항 지침서의 작성경위에 대해
질의하고 있다.
1985년 서울지검 공안부장 시절 삼민투(三民鬪, 민족통일·민주쟁취·민주해방 투쟁위) 사건이 발생했다. 5월 23일 운동권 학생들이 미 문화원을 나흘 동안 점거하고 미국에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밝힐 것을 요구하며 벌인 농성사건이다. 삼민투 관련 유인물이 대학가에서 발견되자 공안검사 20명을 대폭 보강해 다음 날 내용을 분석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날 석간에 삼민투는 용공(容共)이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민정당의 발표가 보도됐다. 당에서 먼저 정치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나는 민정당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어 도대체 그와 같은 성명이 어떻게 나갔느냐고 물었다. 그는 모 행정부처 담당 비서가 자료를 보내 주었다고 했다. 즉시 그 비서를 찾았으나 퇴근하고 없었다. 그의 사무실 직원에게 자료를 받아 와 검토해 보았다. 확인 결과, 삼민투가 용공이라는 것을 미리 분석해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료에는 법률가 출신이 아닌 전두환 대통령을 비롯해 몇몇 관계 인사의 결재 서명까지 있었다.국회의원들은 법무부장관에게 “삼민투가 용공이냐”고 질의했다. 나는 김석휘(金錫輝) 법무부장관에게 사건의 실체를 설명하며 “청와대 참모가 기소 요건도 안 되는 것을 국보법 위반이라고 오버액션한 사건이기 때문에 국회에서 답변하실 때 ‘수사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다’고 절충답변 하시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김석휘 장관은 내 말대로 국회에서 청와대와 반대되는 답변을 했고, 이튿날 미국 출장을 떠나는 출장신고를 전두환 대통령께 했다. 전 대통령이 “잘 다녀오시오”라고 하고 나간 다음, 참모들이 “이 양반 소신이 없다”고 해 하루 만에 교체됐다. 명목상 법정소란에 대한 인책(引責)이었다. 신임 김성기(金聖基) 장관은 부임 이튿날 나를 공안부장 직에서 서울고검 검사로 전보했다. 장관 부임 이후 업무파악을 한 다음 인사를 하는 것이 통례인데, 청와대 참모에게 오버액션했다고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선진국은 중요사건의 경우 6개월, 1년 혹은 2년 동안 수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공안사범의 구속은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1986년 10월 28일부터 나흘간 농성을 벌인 건국대 사태처럼 26개
대학 1289명에 달하는 대량 인원을 구속하면, 군중심리에 따라 영웅심리가 발동하게 되는 법이다.박 대통령은 “사람을 구속하는 것은 국가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며 “구속할 일이 있다면 뒤로 경고하고 시정하는 편이 더 낫다”고 했다. 박 대통령은 국가를 도약시키는 동력으로 공무원과 기업인의 사명의식을 국가운영의 ‘쌍칼’로 인식하고, 공권력 행사를 자제했다.
검찰신우회도 만들어
나는 15대 국회의원으로서 28명의 여야 의원을 규합해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한 협력제도 연구모임’의 대표 국회의원으로 국가운영의 사각지대에서 고통 받고 있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의정활동을 폈다. 또한 입법활동에서 107건의 민생 및 인권법안 제출과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의원 연구모임 활동으로 국회의장이 시상하는 우수 연구모임상과 주요 언론에서 선정하는 최우수 국회의원에 매년 선정됐다.
국회의원 4년 동안 ‘경제청문회’, ‘조폐공사 파업유도 국정조사 특위’, ‘언론문건 국정조사’ 등 세 차례의 청문회에 각각 청문회 위원으로 선발돼 국회 개원 이래 초유의 일로 평가된 ‘청문회 3관 위원’과 언론사가 평가하는 가장 일문일답을 잘한 ‘청문회 스타’로 보도됐다.
많은 사람이 공직에 있을 때만 국가에 대해 주인의식을 강조하고 공직을 떠나는 순간 주인의식을 내던지고있다. 나는 1995년 8월 15일 올바른 나라의 틀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국가경영의 방향을 국가안보와 국가경제 도약에 맞춰야 한다는 취지로 ‘나라미래 준비모임’을 창립해 지금까지 20년간을 운영해 오고 있다.
특히 내가 주장하는 ‘횃불사명주의’는 석사학위논문 〈대통령중심제〉에서 밝힌 것처럼, 신대통령중심제를 표방해 향후 우리나라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축소한 분권제로 가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인권침해, 권력독점 질서가 아닌 분권과 균형의 국가권력 질서를 한반도 통일국가의 기본정책으로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원래 목회자가 꿈이었다. 그런 인연 때문인지 경찰에서 경목제(警牧制)를 만든 데 이어, 검찰에서도 ‘검찰신우회’를 만들었다. 지금 그 모임은 공안검찰 후배인 황교안(黃敎安) 총리가 이끌고 있다. 서울 수복이 되던 날, 총탄이 쏟아지는 만리동 고갯길을 아버지와 함께 넘으며 “이 총탄에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나도 아버지처럼 대한민국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통일의 길목에 선 대한민국을 향해 외친다. 대한민국 ‘국가정신’ 긴급수배!
대한민국 ‘국가정신’ 긴급수배!
● 박정희가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도 없다.
선진한국은 박정희 비전과
결단으로 실현되었다.
▶ 가보셨습니까,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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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rotcguguk/DK3V/203
군사혁명위원회의 부의장 초임시('61.5.22.)◇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
경부고속도로 개통식
풍년들녘에서
한미연합 팀스피리드훈련 참관 (1979.3.10.)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시 미국 케네디대통령을 방문(1961.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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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미래준비모임 / 대한민국구국안보연합/대한민국ROTC救國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