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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5일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마태오 22,34-40
영혼의 건강 유지법
CBS,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이란 프로에 의학박사이자 의학전문기자인 홍혜걸님의 “당신의 혈관이 깨끗해야 하는 이유”란 강연을 들었습니다.
강사는 퀴즈로 듣는 이들의 의학상식을 시험하였습니다.
1. 인간이 앓고 있는 질병의 개수는 모두 몇 개일까요?
국제질병분류표에 등재된 공식질병 개수는 현재 12,420개라고 합니다.
보통 사람이 병의 개수를 아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가 걸리지 말아야 하는 병, 즉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수많은 상황에서 지켜야 하는 계명의 종류도 이 정도는 되지 않을 듯 싶습니다.
2. 그럼 가장 흔한 질병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감기라고 생각하는데 답은 잇몸질환(치주염)으로 성인 10명 중 7명이나 크고작은 잇몸질환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목숨을 잃지는 않습니다.
아마 우리가 짓고 있는 소죄들, 즉 잠시나마 남을 판단하던지, 불평하던지,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등의 병들을 가리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작은 질병도 병인 것처럼, 소죄도 나의 영혼의 질병입니다.
3. 그러면 한 번 걸리면 결코 나을 수 없는 가장 큰 질병은 무엇일까요?
에이즈라고 생각했는데, 답은 광견병이라고 합니다.
에이즈에 걸려도 잘만 관리하면 살만큼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광견병에 한 번 걸린다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고 합니다.
광견병을 다른 말로 공수병이라고 하는데 물을 두려워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물만 보면 두려워하고 물을 마시지 않으니 당연히 며칠 내에 말라 죽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도 있다고 말합니다.
이들을 위해서는 기도할 필요도 없다고 합니다.
아마도 마귀에게 물린 유다와 같은 병이 아닐까 싶습니다.
생명의 물인 성령님을 두려워한다면 무엇으로 다시 영혼의 생기를 돌려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탄에게 크게 물린다면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죄도 너무 깊어져 돌아올 수 없기 전에 회개할 수 있는 마음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4. 그렇다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장 나쁜 질병은 무엇일까요?
암이라고 대답하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 의학박사로서의 견해는 ‘혈관질환’이라고 합니다.
혈관이 막히거나 터지는 것으로 뇌졸중, 심장병, 중풍 등입니다.
말기 암이라고 하더라도 인생을 정리할 여유가 있지만 혈관질환은 갑작스럽게 모든 것을 변하게 한다고 합니다.
또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식물인간이 되기도 하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몇 년을 기약 없이 누워있기만 해야 합니다.
이는 본인은 물론 주변사람들에게도 큰 고통을 줍니다.
혈류(피의 흐름)는 혈관 직경의 네제곱에 비례한다고 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찌꺼기로 혈관이 1/2이 막히면 피의 흐름은 1/16로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피를 맑게 하는 것이 비록 혈관질환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질환에도 도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역시 전문가는 다르다는 것이, 그는 혈관을 맑게 하고 병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해 단 하나만을 권합니다.
바로 ‘운동’입니다.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운동이 이 혈관질환의 세 가지 요인인 혈압, 혈당, 콜레스테롤을 동시에 낮춘다고 합니다.
사실 꾸준히 운동하며 자신을 관리하는 사람이 폭식, 폭음 등으로 몸을 망치겠습니까?
하나만 잘 하면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도 영적 건강을 위해 지켜야 하는 그 많은 계명 가운데 ‘사랑’을 추천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운동만 하면 다른 것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사랑의 계명만 명심하고 실천하면 다른 계명들도 저절로 따라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 운동 중에서도 장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저강도의 것을 하라고 합니다.
30분 이상 하는 것이 좋은데, 그 중에서도 걷는 운동이 제일 좋다고 합니다.
사랑도 평상시에는 잘 못하다가 한 번 크게 무언가 해 주려고 해선 안 됩니다.
작은 것이지만 꾸준하게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
온 영혼의 신체리듬이 아무런 질병 없이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큰 기도를 하려하지 말고 화살기도라도 자주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나중에 돈 많이 벌어 이웃에게 큰 도움을 주려하지 말고 지금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미소를 보내십시오.
이런 작은 것이 나를 지치게 하지 않으면서도 내 피를 맑게 하고 잔 근육이 생성되게 하며 나를 건강하게 지켜줄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25일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마태오 22,34-40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닙니다!
한 멋진 수도 공동체 형제들의 연피정 동반을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형제들이 나이나 직무 상관없이 형제적 친교를 나누고,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해주는 모습, 참으로 보기 좋았습니다.
잠시나마 천국의 한 조각을 맛보는 분위기였습니다.
사실 우리 수도 공동체는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형제의 허물과 실수 앞에 왜 그랬냐고 꼬치꼬치 따지지 않고,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 용서하며, 서로가 서로를 깊이 보듬어 주는 그런 공동체!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 공동체를 보고, 가슴을 치고 회심을 하며,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서도 그런 따뜻하고 훈훈한 모습을 실현시키게 하는 모델 공동체...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금권과 타락으로 얼룩진 성전 정화작업을 실시하십니다.
다음으로 행하신 일은 유다 지도자들과의 치열한 논쟁이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점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당시 가난한 백성들, 세리들과 죄인들, 고아와 과부들은 기쁘게 예수님을 환대했고, 그분을 메시아로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당대 나름 잘 나가던 지도층 인사들, 바리사이, 사두가이, 율법학자, 헤로데 당원들은 끝끝내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을 넘어, 그분에게 난감한 질문들을 던지면서, 그분을 옴짝달싹할 수 없는 올가미 속으로 밀어 넣으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마태오 복음 22장에서는 예수님과 유다 지도자들 사이에서 치열하게 펼쳐진 이른바 마지막 논쟁’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은 존경하는 랍비, 메시아로 오신 주님께 겸손하게 여쭈어보는 질문이 아니라, 그분을 시험하고 곤경에 빠트리려는 야비한 의도의 질문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세금 문제, 부활 문제, 다윗 자손 메시아 문제, 그리고 오늘 복음에 소개되고 있는
‘가장 큰 계명’ 문제였습니다.
난감한 질문을 던지면서 계속 예수님께 태클을 걸었지만, 결과는 예수님의 연전연승이었습니다.
계속되는 논쟁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한 적대자들은 또 다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 한 가지를 던집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 22,36)
그 어떤 질문에도 거침없으셨던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또 다시 촌철살인의 말씀으로 그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습니다.
복잡하게 말씀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요약과 종합의 명수이신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구약 성경 신명기를 인용하시면서, 구약 성경 전체를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요약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게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오 복음 22장 37~40절)
예수님께서는 못 배우고 가난한 백성들도 쉽게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신앙의 진리를 아주 간단히 종합해서 설명하십니다.
이 또한 그분께서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느님 사랑, 인간 사랑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아주 쉽게 가르치십니다.
한 인간 존재가 하느님을 깊이 사랑해야 그 사랑을 바탕으로 이웃 사랑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사심없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동일한 중요성을 부여함을 통해, 두 사랑이 지닌 불가분의 관계를
부각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이 실천하던 이웃 사랑은 상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이웃 사랑의 실천은 동족 유다인들에게만 적용시켰고,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이방인들은 사랑의 실천 대상에서 제외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대한 개념을 크게 확장시키셨습니다.
사랑은 국경이나 인종을 넘어서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뿐 아니라 이방인들, 원수까지도 사랑의 대상에 포함시킬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냥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오랫동안 제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사랑 안에 얼마나 진심, 진정성, 정성이 포함되어있는지 성찰하며, 큰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저 습관적으로, 아니면 의무적으로, 마지못해 그분을 대해온 것을 크게 뉘우칩니다.
그분께서 가장 우리에게 바라시는 사랑은 그냥 사랑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 불같은 사랑, 순수한 사랑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강론>
(2023. 8. 25. 금)(마태 22,34-40)
<계명 자체가 하느님의 사랑>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5-40)”
여기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라는 말은, “예수님과 논쟁을 하려고” 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 율법학자들은 무엇이 가장 중요한 계명인지에 관해서 자기들끼리 자주 논쟁했습니다.
<‘가장 큰’이라는 말은, ‘가장 중요한’이라는 뜻입니다.>
그 문제에 관해서,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미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8-19).”
모든 계명들은 전부 다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계명들을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분류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라는 말씀은, 지금 당신의 답변은, “계명들의 근본정신은 사랑이다.” 라는 뜻으로 하신 답변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율법학자는 ‘가장 중요한 계명은 무엇인가?’ 라고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냐고 묻지 마라.
계명들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바탕으로 해서 모든 계명들은 전부 다 똑같이 중요하다.” 라고 답변하신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라는 말씀은, 신명기 6장 5절에서 온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주 하느님께서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너희를 사랑하시니 너희도 그렇게 사랑으로 응답해야 한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8-10).”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 내주신 일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뒤에 물러나 계시고 아들 예수님만 희생시키신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은 곧 하느님의 희생이고, 예수님의 사랑은 곧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요한 10,30).>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계명들은 ‘생명을 얻는 방법들’입니다.
죽음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서
‘사는 방법’으로 계명들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살기를 바라시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이고,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신 것이 바로 계명들입니다.
따라서 계명들 자체가 곧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나는 내가 살기 위해서 계명들을 실천하지만, 사실 그것은 내가 살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과 사랑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응답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과 사랑에 응답하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하는 것”, 바로 그 순종이 응답하는 방법입니다.
사랑 실천과 계명 실천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잘 실천하게 됩니다.
반대로 표현하면, 계명 실천을 잘하는 것은 사랑 실천을 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점을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요한 14,21; 15,10).
요한 사도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1요한 5,3).”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에 계명 실천은 하지 않으면서, “나는 사랑 실천은 잘한다.” 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또 계명 실천은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원래 신앙인으로서 하는 일들은, 그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1코린 13,1-3).
“둘째도 이와 같다.” 라는 말씀에서, ‘둘째’ 라는 말은 순서를 나타내는 말이고, “이와 같다.” 라는 말은, “두 사랑은 같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서 실현되고,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이웃은 곧 너 자신이기 때문에 당연히 사랑해야 한다.”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몸의 지체들이고, 하나입니다(1코린 12,13).
“그런데,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 라고 근본적인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즉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다 주는 것이 곧 사랑 실천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