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281)/ 네덜란드
싱겔 운하 내 암스테르담의 17세기 원형 운하 지역
(Seventeenth-century canal ring area of Amsterdam inside the Singelgracht; 2010)
암스테르담 운하 구역의 역사 도시 유적군은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 진행된 새로운 ‘항구 도시’ 건설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이 프로젝트는 유서 깊은 구 시가의 서쪽과 남쪽으로 뻗은 운하망, 구 시가를 둥글게 에워싼 중세 항구로 구성되었다. 더불어 암스테르담의 요새화된 경계부와 싱겔 운하[Singelgracht]의 위치를 내륙 방향으로 재조정하는 작업까지 포함한다. 이는 부채꼴 형태의 운하 체계를 이용하여 습지의 물을 빼고, 군데군데 공간을 매립하여 도시를 확장하는 장기 계획이었다. 이렇게 생겨난 공간들 덕분에 박공지붕 주택들과 다양한 기념물이 통일성을 띤 도시 유적군의 개발이 가능하였다. 이러한 도시 확장은 당시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고, 동질적인 것이었다. 또한 대규모 도시 계획의 대표적 사례로서 19세기까지 세계적으로 참고 모델이 되었다.
13세기의 암스테르담은 암스텔(Amstel) 강의 강둑 위, 자위더르(Zuyder) 해와 내륙 지류인 에이(IJ) 강이 만나는 유역에 있는 작은 어촌 마을이었다. 암스테르담이라는 이름은 ‘Amstel’과 ‘Dam’을 조합한 것으로 ‘Dam’은 해수의 침입을 막는 제방이나 댐을 의미한다. 이 둑은 교통 통행을 위해서도 이용되었는데 1306년 홀란트 백작 플로리스 5세(Floris Ⅴ)의 결정으로 무료 통행이 가능해진 암스텔 강 위의 다리 덕분에 좀 더 확장되었다. 암스테르담은 1306년 시(市)로 공포되었고, 중세 말엽 강어귀에 항구가 개발됨에 따라 홀란트 북부 지역에서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암스테르담은 1369년에 가입한 한자 동맹과 주로 거래하였지만 당시만 해도 안트베르펜(Antwerp; 앤트워프)이 네덜란드와 북해의 해상 무역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제방의 보호를 받으면서 암스테르담은 항구와 담 광장[Damplein]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습지 토양을 배수하는 것이 먼저였고, 많은 주택이 둔덕 위에 세워졌다. 당시에는 배수와 군사 방어벽의 목적으로 고안된 본래 반원형의 형태를 띠었던 싱겔 운하 안쪽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1452년에 화재가 발생하여 도시 안의 목재 건물이 거의 소실되었고, 도시를 새롭게 재건할 때에는 벽돌이 가장 흔한 건축 자재로 이용되었다. 도시는 15세기 말 싱겔 운하를 따라 요새를 구축하였다. 네덜란드는 1515년부터 카를 5세(Charles Ⅴ)의 즉위와 함께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인구의 대다수가 종교 개혁을 옹호하게 된 후, 16세기 네덜란드 사람들은 공공의 자유와 종교적 관용을 위해 봉기하였다. 일련의 전쟁과 타협의 과정을 거친 후, 북부 네덜란드의 7개 주가 모여 1581년 독립 연방[United Provinces]을 결성하였다. 그 결과, 부유한 유태계 가족들과 안트베르펜의 상인들, 그리고 프랑스의 위그노(Huguenot; 칼뱅주의를 추종한 프랑스 개신교도)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모여들었다. 암스테르담은 군왕도 없이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는 상대적으로 느슨한 연방에 속한 거대 도시였기 때문이다. 이 도시는 이내 피난처이자 자유로운 사상의 땅이 되었다. 그 후 20여 년 동안 스페인과의 군사적 상황은 특히 해군의 경우 숱한 전투를 치르며 긴장 관계를 유지하였지만 해상 무역과 창고업으로 암스테르담의 역할은 급속히 발전하고 있었다. 인도양과 아메리카 대륙에서 무역 활동을 하기 위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1602)와 네덜란드 서인도회사[WIC; 1621]가 각각 설립되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거하여 그 주권과 경제적 중요성, 문화적 독창성을 완전히 인정받은 연방 공화국에게 17세기는 특별한 번영의 시기였다. 16세기 말, 암스테르담이 급속도로 발전함에 따라 중세 시대에 정해진 싱겔 경계 안에 한정되었던 이 항구 도시는 이내 공간 부족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16세기부터 17세기에 이르기까지, 방위와 도시 성장을 목적으로 광범한 프로젝트가 시행되었다. 다니엘 스탈파에르트(Daniel Stalpaert)가 설계한 싱겔 운하를 새로운 운하 경계의 기준으로 삼은 새 방어선 덕분에 암스테르담은 약 800m 정도 외곽으로 확장되었다. 그 때부터 싱겔은 내륙 항의 모습으로 변모하였다(1601~1603). 헨드리크 야콥손 스타에츠(Hendrick Jacobszoon Staets)가 구상한 프로젝트는 항구와 무역 도시의 건설을 이끌었다. 교역용 선박을 부두에 댈 수 있게 한 신항(新港)은 세 군데의 새로운 주요 운하 연결망을 따라 세워졌다. 이 새로운 운하들도 싱겔과 나란히 부채꼴 형태를 채택하였고 동일한 수력학 형태론을 적용하였다. 아이 강에서 시작하여 남쪽 방향으로 세 개의 운하를 파는 공사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우선 첫 번째, 두 번째 구역의 공사는 방사형인 레이드세(Leidse) 운하까지 진행되어 매립과 건축을 시작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다. 세 번째 구역은 1620년 무렵 공사를 암스텔 강까지 확대하였다. 정확하게 똑같은 원칙에 따라 네 번째 구역의 공사가 강을 넘어 17세기 중기의 ‘동쪽 섬[eastern islands]’을 향하여 진행되었다. 하지만 고리 형태를 만들어 가던 운하들을 따라 구성한 정규 계획은 세 개의 운하 중 가장 바깥쪽인 프린센(Prinsen) 운하에서 중단되었다. 그 서쪽 구역, 즉 프린센 운하와 새롭게 형성된 싱겔 운하 방어선 사이의 요르단(Jordaan) 구역이 애초의 도안에서 구상했던 직선 패턴을 깨뜨리면서 이름이 같은 공원의 옛 경계선을 따르게 되었다. 근로 계층과 이민자들이 주로 거주하는 요르단 구역은 등재된 문화 구역 가운데 프린센 운하의 경계선에 있는 유일한 곳이다. 이와 같은 암스테르담의 계획적 확장은 도시를 움직이는 중산층 상인의 작품이었다. 이들 중산층이 재정적으로 프로젝트를 관리하고, 설계 도안을 감리하고, 공사를 조율하고, 건축 관련 규정을 제정하고 그것이 적용될 수 있도록 감독하였다. 무역이라는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데 있어서 현실적인 기능성과 수리학적, 군사적 안전은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원동력이었다. 17세기에 도시와 그 거주민이 부를 축적한 덕분에 도시와 항구를 확장한다는 야심에 찬 계획이 애초의 구상대로 완성될 수 있었다. 암스테르담의 성장으로 이 도시는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수도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그 항구는 국제 해상 무역에서 꼭 필요하고 가장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1685년 암스테르담 시민의 1인당 소득은 파리 시민의 소득보다 네 배 많았기에 17세기 내내 운하를 따라 양적・질적으로 부동산 개발 사업을 진행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암스테르담은 상업 도시, 중산층의 도시, 인문주의 도시, 관용의 도시로서의 전통을 계속 이어 나갔다. 이민자는 언제나 환영하였는데 낭트 칙령이 폐지된 후의 프랑스 위그노들, 좀 더 일반적으로는 유럽의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대표적인 이민자였다. 이런 방식으로 암스테르담의 경제적・예술적 엘리트층이 두터워졌고, 매우 솜씨 좋은 일단의 장인들의 등장으로 전문적인 기술 수준 또한 높아졌다. 당시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문화 수도 가운데 하나였으며, 전 세계를 무대로 생산품을 판매하는 가장 지적이고 역동적인 도시에도 속하였다. 운하를 따라 질서 정연하게 성장하는 암스테르담의 새로운 구역들은 꼭 참고해야 할 도시 모델이 되었고, 이상적인 도시를 구현했다는 이미지는 18세기 내내 유럽에서 채택되고 반복되었다.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운하와 제방・갑문을 세워 스스로 보호하여 전체 도시 역사를 통틀어 단 한 번도 범람하지 않은 암스테르담의 사례는 당시 명망 높은 모든 유럽 건축가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암스테르담은 영국과 스웨덴, 그리고 러시아의 토목 공학과 도시 계획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에서는 표트르 대제가 암스테르담과 유사하게 강 하구 쪽 둑 위의 습지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기 위해 장인과 기술자를 대규모로 모집하기도 하였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 사이에 암스테르담은 번영하였으나 그 항구는 쇠락을 경험하였다. 프랑스와 영국에 맞서 잇달아 전쟁을 치르면서 해상 무역의 기반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들어 여러 운하의 개통으로 항구가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 1825년 개통된 북부 홀란트 운하는 1876년 북해와 직접 연결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그 교통량은 라인 강과 뫼즈 강 하구에서 가까운 로테르담보다는 적은 편이다. 18세기에 시작된 창고를 아파트로 개조하는 추세는 도시 인구의 증가에 발맞추어, 그리고 수도로서의 암스테르담에 보다 큰 역할을 요구하는 데 대응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가속되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규모와 건축, 자재의 사용에서 구시가와 조화를 이루며 사무용 빌딩들이 들어섰다. 하지만 철로가 놓이고 에이 강 강둑에 중앙역이 들어서면서 암스테르담에서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물길은 끊기게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 암스테르담은 행정 및 금융 중심지로 변모하였다. 아울러 헤이그와 함께 네덜란드 왕국의 정치 수도로서의 역할도 분담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암스테르담에 거주하던 100,000여 명의 유태인들이 강제 추방되었는데 그들 중 대다수는 운하 구역에서 사는 이들이었다. 전쟁이 초래한 물질적 피해는 상대적으로 경미하였다. 소매 점포와 성장하는 관광산업이 20세기 후반 암스테르담의 변모하는 모습 속에 반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