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22:17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개역개정판)
이사야 22:22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개역개정판)
토요일 오후에 지하철 편으로 장례식장으로 갔다.
무더운 여름에 정장, 아니 상복차림에 땀은 비오듯 흘렀고
애써 슬픔과 분노를 품고 있던 눈에서는 눈물도 흘러서
외국인들마저 내 모습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직 엄마의 부재를 실감하지 못한 아이는 휴대폰에 몰두하고 있었고
(불가피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딸의 부재를 절감하고 계실 집사님은 조문객들에게 음료수와 반찬을 돌리고 계셨다.
더 많은 돈을 부조금에 넣었어야 했으나,
이미 너무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남의 슬픔을 나누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나의 슬픔을 전파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그 가족의 일 외에도
내 가족의 일만해도 슬픈 일들은 파도처럼 밀려들었고,
무심한 세월과 가혹한 날씨는 여전히 기승을 부렸다.
생각과 마음을 정리할 때는 문화회관으로 가곤 했다.
UN공원과 문화회관, 부산박물관은
복잡한 마음과 생각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도심 속의 조용한 공간이다.
백희나 작가의 알사탕이랑 뮤지컬이 공연 중에 있었다.
그 탄탄한 동화적 구성은 물론
음악성도 훌륭하다고 해서 찾는 이들이 매우 많았다.
어쩌면 그 성도님도 아이와 이 공연장을 찾았을 수도 있었을텐데...
그러나, 그런 슬픔이 나를 삼키도록 하는 것은 부질 없는 일이다.
백희나 작가는 장수탕 선녀님이나 연이와 버들도령 같은 무속신앙에 바탕한 책들을 많이 써서, 별로 선호하는 작가가 아니었다. (달라이 라마의 종교관과 비슷한 인간적 따뜻함이 본인의 종교관과 비슷하다고 했다던가?)
그러나, 알사탕에서는 아빠의 사랑을 그려냈다.
따뜻하게...
전작 ‘이상한 엄마’에서는 워킹맘을 등장시켜서 아빠를 부재하게 만들었더니
이번 ‘알사탕’에선 아빠의 사랑을 극대화시키는 대신 엄마를 부재하게 만들었다.
아빠, 혹은 엄마의 부재가 잠깐인 건지, 아니면 고정적인 것인지 암시하는 힌트는 없다.
백 작가의 천재성이 여기서 돋보인다.
“읽는 사람의 상황이 다 다르기 때문에 그 상황을 모호하게 해두는 게 감정이입을 돕는데 더 낫다 생각했다.”
아빠가, 혹은 엄마가 없는 슬픈 집일 수도 있고,
너무 단란하고 화목한데 그 때만 잠시 어디 출장을 갔을 수도,
슈퍼에 갔을 수도 있다.
묘하게 이 상황과 맞아떨어졌다.
그녀는 천재니까,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본인의 일을 하는 것이고
나는, 내 자리에서
그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가장 값진 일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은
좌절과 슬픔 속에서 인생을 허비해버리거나
이사야 22장 13절 같은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것일테다.
사 22:13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도다 (개역개정판)
사 22:13 그런데 너희가 어떻게 하였느냐? 너희는 오히려 흥청망청 소를 잡고 양을 잡고,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내일 죽을 것이니, 오늘은 먹고 마시자" 하였다. (표준새번역)
이런 정신 나간 선택에 대한 심판이 14절에 바로 나온다.
사 22:14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이르시되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개역개정판)
충격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될대로 되라지 뭐..
인생 뭐 있나? 즐기자 그냥...
이런 카르페디엠 같은 마음의 동기는
인생의 난이도가 극심해질 때 나타나는 허무주의와 괴로움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 말씀이다.
사랑한다 말하시는 그 음성에 대한
의도치 않은 무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의도하지 않았어도
그런 태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한다.
백희나의 알사탕에서는
아빠가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이 장면은
수많은 사람들이 백희나 작가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는 장면이다.
잔소리 뒤에 숨겨진 아빠의 사랑이 점층적으로 표현된다.
말로는 숨 가쁘게 잔소리를 퍼붓지만,
마음속에는 온통 주인공 동동이를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찬 아빠의 반전 모습을 담아낸다.
귀를 기울여야 아버지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잠 22:17)
우리네 아버지들...
성실하고 묵묵하게 살아왔던 그들...
이사야 22장 11절 말씀처럼
전쟁 같은 삶 속에서도
저수지를 만들었던
가공할 만한 성실함으로
가장 가난한 나라를
제법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데 일조했다.
사 22:11 너희가 또 옛 못의 물을 위하여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이를 행하신 이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이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개역개정판)
우리의 문제는 나태함이 아니다.
성벽의 틈을 세고, 무너진 집을 헐어 방어벽을 보강하고,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까지 만들었던 성실함은
느헤미야 시절 성벽 재건에서도 반복된다.
앗수르의 시대에
이 정도로 전쟁 대비를 잘했던 민족은 많지 않았다.
그건 우리 민족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무능도 나태도 아니라
방향이었다.
성 밖의 위협에 대해서는 철저히, 성실히 대비했으나
그 위협을 허락하신 분을 향해서는 성실히 나가지 않았다.
위기의 원인을 자기의 죄악과 허물이 아니라
외부의 적에게서 찾을 때,
가공할만한 부지런함과 능력조차도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유일한 해결책은 다윗의 열쇠(사 22:22)이다.
심판의 현장을 열 수 있고
우리 삶이 허무와 자포자기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
이 열쇠의 상징은 훗날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께 돌려진다.(계 3:7)
그 열쇠는
그냥 문제의 해결책일 뿐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소중한 흔적이며
심판이 향하는 최종 목적은 소멸이 아니라 회복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는
가장 귀한 증거가 된다.
봉수대에 올랐다.
토요일 밤은 이제 외지인들과 외국인들의 차지가 되었다.
아무려면 어떤가?
급격하게 떨어지는 늦여름은 바람은
잠시라도 슬픔과 아픔으로 지친 마음을 달래주었다.
알사탕처럼
아버지의 사랑이 귀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세미한 음성조차 들리지 않는 것 같지만
다윗의 열쇠를 기억하기는 했다.
회복은 거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먹고 죽자'는 마음으로 흘러가지 않았던 것조차 은혜이다.
작은 슬픔부터 큰 슬픔까지
쉴새 없이 밀려오면
나는 그저 무너질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열쇠를 통해 회복의 문을 여신다.
회복을 의심할 때조차
다른 길이 있음 또한 믿지 않음은
이미 다윗의 열쇠를 통해 회복의 문을 여시는
하나님이
여전히
사랑한다 말하시며
거기 계시기 때문이다.
첫댓글 https://youtu.be/A_SEQKpeHVw?si=iJ31tCYZDu94saH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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