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22일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나를사랑하느냐?”
베드로가“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줄을
주님께서아십니다.”
하고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양들을 돌보아라.”
(요한21,15-19)
"Simon, son of John, do you love me?"
Simon Peter answered him,
"Yes, Lord, you know that I love you."
He
said to him, "Tend my sheep."
말씀의 초대
천인대장은
바오로를 펠릭스 총독에게 보냈는데, 펠릭스는 판결을 내리지 않고 바오로를 그대로 둔다. 그의 후임인 페스투스 총독 때에 바오로는 황제에게
상소한다. 총독은 먼저 아그리파스 2세와 그의 누이동생 베르니케 앞에서 바오로를 신문한다. 그들은 모두 바오로가 투옥이나 사형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를 황제에게 보낸다(제1독서). 요한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타나시어 당신을 사랑하는지 물으시고, 당신의
양들을 돌보라는 사명을 주신 다음 그가 겪게 될 죽음에 대해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부활 시기가
끝나 가고 있습니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부활 시기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면서 유독 눈에 들어오는 내용이 있습니다. 처음 부활 팔일 축제
동안의 전례는 “알렐루야”를 노래하면서 독서를 통하여 부활, 기쁨, 생명, 평화를 힘차게 선포하지만, 그 이후에 이어지는 사도행전과 요한
복음에서는 오히려 증언, 박해, 순교를 되풀이하여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역시 바오로 사도가 죽음을 향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는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페스투스 총독의 입으로 그가 무죄하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바오로의 죽음이 오직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했기 때문이라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페스투스의 처신과 행동은 마치 빌라도가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준 것과 비슷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 던지신 질문입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린다 하더라도 자기는 결코 주님을 떠나지 않고 언제나 사랑하겠다고 장담한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께서 수난을 당하실 때
세 번이나 그분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세 번에 걸쳐 사랑을 고백할 기회를 주심으로써 그가 부끄러운 과거를 극복할 수 있도록 이끄신 다음, “내
양들을 돌보아라.” 하고 말씀하시면서 사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사랑의 고백에 따른 사명은 그에게 십자가를 주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언제나
책임을 동반하고 커다란 희생을 요구합니다. 베드로는 원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그를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가 죽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신 말씀이 깊은 울림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였을까요? 베드로가 순교하게
되는 시점에서 오늘 복음의 장면을 회상해 봅시다. 그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대신하여 그분의 교회를 헌신적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은 순교였습니다. 그분을 사랑하고 따른 것이, 그분 양 떼를 열심히 돌본 것이 허사로 돌아가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베드로도 바오로도 그 길의 끝은 죽음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 죽음을 거쳐서 부활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도 깨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압니다. 죽지 않고서는 결코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없다는 오묘한 진리를 …… !
안식년이라고 해서
전국과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동창신부들로부터 한 번 찾아오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또한 그동안 잘 보지 못했던 친구나 지인으로부터도 한 번
만나자는 이야기를 들었지요. 저는 그때마다 자신 있게 꼭 보자는 말을 했습니다. 1년이라는 시간도 있고, 정말로 보고 싶은 그리운 얼굴들이기
때문이지요.
지금 안식년도 벌써
5달이나 지났어도 현재 만난 사람은 몇 되지 않습니다. 교육 받는 것에 바쁘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지만 사실은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는 안일한
마음과 함께 ‘만남’ 자체를 1순위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만남만큼 중요한 것도 없는데,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들을 만남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운영하는
카페의 ‘코칭신청’ 메뉴를 통해서 많은 분들과 전화로 대화를 나눕니다. 솔직히 제가 해주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단지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고,
그분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질문을 던져서 스스로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실 수 있도록 합니다. 이에 많은 분들이 참으로 큰 힘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1시간 동안 대화하면서 저 역시 큰 힘을 얻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대화만으로도 서로가 서로에게 큰 힘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만남과 대화의 힘이
이렇게 큰지를 알면서도, 저의 일을 내세우면서 하지 못했었음을 반성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네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하는지를 묻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말했던 베드로였지요. 그런 그에게 모른다고 했던 것을 야단치시기
보다는 믿음의 고백을 세 번이나 하게함으로 인해, 베드로의 지위를 다시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시는 말씀은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주님의 어린 양들인 사람들을 사랑으로 잘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우리는
얼마나 나의 이웃들에게 사랑으로 다가서고 돌보았는지를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일보다도 사람이 먼저가 되어야 하는데, 사람은 늘 뒤로 미루면서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즉, 일을 더 사랑하고, 사람은 나중에 여유가 되면 사랑하겠다면서 뒤로 미뤘던 것이 아닐까요?
어린 양을 돌보라는
말씀을 하신 뒤에야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라고 하시지요. 주님을 따르는 길은 오로지 하나, 주님의 어린 양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돌보는 것입니다.
오늘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분들에게 연락 한 번 해보면 어떨까요?
어제의 하늘은,
어제의 태양은 결코 오늘의 그것이 아니다. 삶은 정반대되는 두 가지 요소를 다 포함하고 있다(오쇼 라즈니쉬).
나의 선택
어떤 잡지에서 본
글입니다.
한 여자가 대학
시절 두 명의 남자에게 열렬한 구애를 받았다. A와 결혼하면 교수 사모님, B랑 하면 사업가 아내가 될 것 같았다. 고민 끝에 사업하는 남자가
성격도 호탕할 것 같아 그를 택했다. 그런데 막상 살아 보니, 사업이 늘 잘되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거기다 남편이 허구한 날 술을 마셔
외로웠다. 문득 A가 생각났다. ‘그 남자랑 결혼했다면 우아하게 사모님 소리를 들었을 텐데.’ 그즈음 친구가 찾아와 말했다. “대학 때 너
따라다니던 그 사람 기억나? 너희 동네 산다더라.”
갑자기 그의 하얀
얼굴이 떠올랐다. 한번쯤 보고 싶기도 했다. 그 뒤부터 시장 갈 때도 신경이 쓰였다. 민얼굴로 다닐 수 없어 화장도 했다. 그러기를 한 달,
재활용 상자를 버리려는데, 골목에서 한 남자가 소변을 보고 있었다. 머리는 까치집을 하고는 옷에 음식물까지 묻어 있었다. ‘아니, 저런 얼빠진
남자를 봤나. 어디서 노상 방뇨를?’ 그런데 아뿔싸, 바로 A였다. 눈이 마주친 그는 너무 놀라 멍하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우리는 종종 과거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곤 합니다. ‘그때 그렇게만 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후회와 함께 다시 되돌아간다면 지금과 같은 삶은 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거의 선택은 절대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그때의 선택이 최고의 선택임을 굳게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생활을 통해 과거의 선택이 최고의 선택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 믿음 없이, 또 그런 노력 없이 살아간다면 계속되는 후회를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선택을
사랑하십시오. 분명히 그 선택에 믿음을 갖게 될 것이고, 최고의 선택을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 빼면 절대
이해 안 되는 분
-이기정신부-
나를 사랑하냐고 한
번 물으시고 예라 답하니 내 양들을 돌보라 하시고 나를 사랑하냐고 두 번째 물으셔서 예라 답하니 내 양들을 돌보라하시고 나를 사랑하냐고 세 번째
물으셔서 예라 답하니 답도 역시 그대로였답니다.
목장에서 주인이 양
몇 마리 맡기면서 이렇게 3번이나 목동에게 안합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끈질기게 이런 사랑고백을 세 번이나 받아 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
제창자, 사랑 전문가로 사랑 빼면 절대 이해 안 되는 분!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요한 21,17)”
< 왜
나에겐 길을 안 보여주실까? >
-전삼용신부-
옛날에
고집 센 사람과 나름 똑똑한 사람이 있었답니다.
둘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는데 고집 센 사람은 4X7=27
이라
주장하였고 똑똑한 사람은 4X7=28이라
주장했습니다.
한참을
다투던 둘은 답답한 나머지 마을 원님께 찾아가 시비를 가려줄 것을 요청 하였답니다.
원님이
한심스런 표정으로 둘 을 쳐다본 뒤 고집 센 사람에게 말을 하였답니다.
“4x7=27이라
말하였느냐?”
“네,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게 말했는데,
글쎄
이놈이 28이라고
우기지 뭡니까?”
그러자
고을 원님은 다음과 같이 선고하였답니다.
“27이라
답한 놈은 풀어주고,
28이라
답한 놈은 곤장을 열대 쳐라!”
고집
센 사람은 똑똑한 사람을 놀리면서 그 자리를 떠났고 똑똑한 사람은 억울하게 곤장을 맞았답니다.
곤장을
맞은 똑똑한 사람이 원님께 억울함을 하소연하자 원님의 대답은 “4x7=27이라고
말하는 아둔한 놈이랑 싸운 네놈이 더 어리석은 놈 이니라!”
사제로
살다보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의 신자들을 자주 만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의견을 달라고 합니다.
저는
나름대로 주님의 뜻이 무엇일지 묵상하여 제 생각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저조차도 말해주기 어려운 상황들이 있습니다.
괜히
말했다가는 책임을 져야하는 상황도 발생합니다.
이런
경우를 보다가 바오로의 삶을 들여다보면 바오로는 두 갈래의 길에서 고민한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매순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미 다 알고 그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바오로가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끝낼 수도 있는데도 로마에 항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는
이 사건을 어떻게 심리해야 할지 몰라서,
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 그곳에서 이 사건에 관하여 재판을 받기를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바오로는
그대로 갇혀 있다가 폐하의 판결을 받겠다고 상소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황제께 보낼 때까지 가두어 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재판을 이기려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길로 향합니다.
만약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겠다고 했다면 이미 바리사이들이 자신의 편이 되었기 때문에 쉽게 무죄로 풀려날 수도 있었겠지만 주님께서 로마로 가라고
하시니 가차 없이 로마로 가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날
밤에 주님께서 바오로 앞에 서시어 그에게 이르셨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그렇게
주저하지 않고 로마로 가는 길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잠에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그의 길을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왜 바오로나 다른 사도들에게 하신 것처럼 바로바로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주시지 않을까요?
하느님은
요셉에게 천사를 보내시어 결혼을 하라,
이집트로
피난가라,
다시
나자렛으로 돌아오라 등을 지시하셨습니다.
왜
우리가 힘들 때는 천사를 보내주시지 않는 것일까요?
그건
이렇게 생각하면 쉬울 것입니다.
주님은
알려주고 계신데 그 말씀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일부러 듣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이
어떤 결정을 내리시건 온전히 따를 수 있는 마음가짐이 있으면 주님께서 안 알려주실 리가 없습니다.
다만
4X7=27이라고
고집부리는 이에게 4X7=28이라며
아무리 말해주어도 듣지 않습니다.
그냥
그렇게 알고 살라고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고집 부리니 말씀을 해 주셔봐야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결혼을 하고 싶었습니다.
만약
저를 불러주시는 것이라면 확실한 표징을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 표징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많은 표징이 있었겠지만 인정하려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결혼하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지 않은 채 답을 달라고 청하였기 때문입니다.
너무
지쳐 어떤 길이든 말만 하시면 따를 상황이 되었을 때는 결정적인 표징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주파수에 맞추기 위해서는 다른 주파수는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당장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매순간 어떤 결정을 내려야하는지 알려주셔서 삶의 방향에 대하여 고민하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사랑으로 관계
회복을
-반영억신부-
인간은 연약합니다.
그래서 다짐과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철석같이 믿었는데
네가 그럴 줄 몰랐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배신을 당하면 큰 상처를 받게 되고 좌절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를 쳐다보기도 싫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립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옛말이 있듯이
크게 놀라면 매사에 겁을 내게 됩니다. 이러한 상처를 치유 받고 여기에서 일어서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21,15)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맺기 전의 이름으로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한번만
물으신 것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세 번이나 반복해서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마르14,29).라고
하였던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던 옛 상처에서 벗어나 주님과의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상처입고 좌절한 마음을 회복시켜 주시고 그리하여 베드로는 배반을 하고도 제자공동체로 다시 돌아와 그들 사이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베드로 또한 그분의 마음을 알기에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21,16)
하고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고 예수님처럼 파견하신 분의 뜻을 헤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세 번의 사랑고백이 우리 교회의 시작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슬퍼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21,17).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은 ‘제가 당신께 잘못을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을 당신이 아십니다. 당신과의 관계를 이제 당신이 판단하십시오.’ 하고 주님께
의탁한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야말로 세 번이나 배반하였던 베드로를 당신의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관계를
회복시켜 주심으로써 베드로 뿐 아니라 그를 알고 함께 지내는 사람들에게 관계를 지속시켜가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결국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은 사랑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서로 간에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을 보면 아직 갈 길이 멀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용서는 배신을 당한 사람이 하는 것이요, 상처를 받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처럼 품이 큰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요한21,19)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입니다. 혹 관계가 소원해진 사람이 있다면 주님의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신부-
‘당신만을
사랑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극중에서
오 말수라는 여자가 등장합니다.
집안이
가난해서 부잣집에 도우미로 들어갔습니다.
드라마가
그렇듯이 주인집 아들이 가난한 소녀를 좋아하게 되었고 둘은 서로 사랑하였습니다.
사랑의
결과 둘 사이에는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비극은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주인집에서는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여자를 며느리로 맞이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아이
엄마에게는 병이 든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부잣집에서는
수술비를 주면서 아이를 포기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이의 남편에게는 아이 엄마가 바람이 나서 도망갔다고 합니다.
엄마의
장례를 치루고 찾아온 아이 엄마에게는 아이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바람난 여자가 되었고,
사랑하는
아이를 먼저 보낸 슬픔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드라마와
같은 이야기가 우리 주변에도 있습니다.
1991년에
있었던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입니다.
사람의
필체는 사람의 지문처럼 각기 다르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강기훈 씨는 유서를 대필했다는 누명을 쓰고 3년간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
유서의 필적을 감정한 기관은 ‘국립
과학 수사 연구소’였습니다.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거짓말처럼 국립 과학 수사 연구소의 거짓 판정은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강기훈
씨는 재심청구를 하였고,
24년이
지난 2015년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드라마와
현실에서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욕심이 거짓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둘째는
거짓을 만들어내는 이들이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힘과 권력을 이용해서 억울한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럼에도 진실은 드러난 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알고 계시고,
거짓을
만들어낸 당사자들이 알고 있고,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드라마와
현실에서 몇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드라마에서는
잘못한 사람이 결국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청한다는 것입니다.
억울한
사람도 지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용서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모두에게 화해와 치유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결말이 쉽지 않습니다.
여전히
가해자는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감을 표현할 수는 있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하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일삼기 마련입니다.
왜
우리 사회는 이와 같은 일들이 계속될까요?
쓰레기통을
비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는
나치에 협력한 이들을 심판했습니다.
독일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했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그래서
이 두 나라는 드라마와 같은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질문하십니다.
‘예
주님,
사랑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이야기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 주변의 억울한 이들,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병든
이들을 사랑으로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사명입니다.
세례를
받아 교회의 일원이 된 모든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기쁘게 신앙생활 할
수 있기를(마르코16,15-20. 05.17.)
-희망신부-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오르시면서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음을 선포 하여라"하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노력하는가? 적어도 일 년에 한 명씩은 입교를 시키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령의 은사를 청해야 합니다.
나약했던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나서부터 달라집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죽었던 이를 살리고, 하루에 삼 천 명이나 되는 사람에게 세례를 줍니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의 힘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신앙생활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저도 기회가 좋든
나쁘던지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합니다. 핸드폰을 바꿀 때가 되어, 예비자교리에 몇 번 실패한 자매님 가게를 찾아가 힘든 점들을 들으며, 다시
나오기로 약속을 받았습니다.
몇 달 전에
접촉사고가 있었는데, 하늘의 문 성당 신부라고 말하며 안수기도를 해드리고, 성당에 나오시기를 초대한 적이 있습니다.
또 얼마 전에는
술집에서 시어머니가 신자인 자매님을 만나 “세례를 받으면 어머님이 참 좋아 하시겠네요.” 하며 약속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때그때 성령께서 지혜를 주시는 대로 하다보면, 강요하지 않고 편안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열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은사를 받게 되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깨우쳐주십니다. 인위적으로 하면 힘이 드는데 은사로 복음을 전하면 힘이 있고, 용기가 있고,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성직자 수도자를
위한 성령 묵상회를 자주 가면서 그 때마다 성령께서 새로운 은사주심을 체험합니다. 하느님은 정말 무한대 이십니다. 갈 때마다 매번 새로운 것을
주십니다.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쫒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하는 것을 성경에 있는 말씀으로만 생각했지, 내
삶 안에서 똑 같이 일어나리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세미나를
하면서 그런 믿음이 생겼습니다. 암환자의 암세포가 없어지고, 미사 중에 40년 동안 두통약을 먹던 분이 치유되어 약을 끊게 되고, 불임자가
임신을 합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성령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열렬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자 모두가 성령세미나에 나와서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 은사를 체험하면서 기쁘게 신앙생활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너
나를 사랑하느냐?
-양승국신부-
연인(戀人)들
사이에 오고가는 사랑 안에는 한 가지 일반적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을 향한 상대방의 사랑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심리적인 경향입니다. 틈만 나면
사랑에 대한 확인을 되풀이합니다. “오직 나만 사랑하는 것 맞지?”
혹시라도
나를 향한 그의 사랑이 식어가는 것은 아닌지? 혹시라도 나 말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마음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에 걱정을
거듭합니다.
사랑의
‘강도’ 면에서 그 어떤 대단한 인간적 사랑도 초월하고 능가하는 하느님의 사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도 끊임없이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인하십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복음 21장 15절)
사랑이라는
것, 참 묘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소풍 온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인연을 만나 사랑을 하고 각자는 그 사랑에 대한 사랑의 역사를
써내려갑니다. 한때 열렬히 사랑합니다. 마치 눈에 콩깍지라도 낀 듯이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그 사랑이
식어갑니다. 그것을 못견뎌하고 괴로워합니다. 분노하고 떠나갑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닙니다. 좋았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옛사랑을 그리워하고 후회를 시작합니다. 그 사랑에 대한 측은지심이 생겨나고 용서가 되고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부족하고 불완전했던 사랑이 일종의 정화과정을 거쳐 성장하고 쇄신되는 것입니다. 더 완전한 사랑, 더 충만한 사랑, 그야말로
사랑다운 사랑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수제자 베드로 사이에서도 동일한 사랑의 정화과정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과의 첫 만남 이후 베드로는 스승님의 말씀과 인품, 가치관과 삶에 완전히
매료되고 정신없이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인간적인 한계와 나약함으로 인해 그 첫사랑이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고백했지만 마음은 점점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그렇게 스승님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은 점점 퇴색되어갔습니다. 둘 사이에 오고갔던 불같던 사랑은 배신, 낙담, 후회, 눈물을 거쳐
다시금 깨달음, 용기, 희망, 진정한 사랑의 단계를 밟으며 성장을 거듭한 것입니다.
이렇게 진정한
사랑은 멈춰있지 않습니다. 참된 사랑은 역동적입니다 정지되어 있지 않고 움직이는 사랑, 정체되어 있지 않고 성장하는 사랑이야말로 참된
사랑입니다.
사랑의 부르심
-기경호신부-
삶이 힘들고
외로워도 우리가 찾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회상하자. 누구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핵심인 사랑을 중요시 여기며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 앞에 있는 모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실제로 사랑하고 있는 그만큼 사랑의 존재일 수
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성실한 분이시며,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고 계명을 지키기만 한다면 한없는 사랑이 주어진다. 이렇게 주어지는 사랑은 사랑을 살아가도록 부르시는
하느님의 초대이다. 사랑은 사랑을 부르고, 그 사랑에 불타 우리는 약속한 바를 지켜나갈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사랑이 아무리 빈약하다고
해도 그것은 일치의 생활을 위해서 필요하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 품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회상해보자.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막중한 책임을 맡기기 전에 사랑을 그의 마음에 심어주시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세 차례에 걸쳐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묻는다. 우리말로 모두 ‘사랑하다’로 옮긴 이 동사는 성서 언어로는 구별 없이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해서
성서주석학에서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행간을 헤아려 묵상해볼 수 있겠다.
예수님께서 두 번에
걸쳐 베드로에게 ‘아가파스 메?’(너는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신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답한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아가파오’란 단어로 물으시는데, 베드로는‘필레오’란 동사로 답변한다. ‘아가파오’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우위성’, ‘하느님 편에서 그리워하다’, ‘사랑을 표출하다’는 뜻을 가진다. 반면에 ‘필레오’란 동사는 ‘사랑하다’, ‘좋아하다’,
‘간절한 느낌을 갖다’는 뜻으로 우정관계에서의 사랑을 말한다.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베드로가 감히 그분과 같은 사랑을 하겠다고 답변을
하지 못했으리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두 번이나 당신이 묻는 단어로 답을 하지 못하자 마지막으로 ‘아가파오’가 아닌 베드로가 사용한 ‘필레오’ 동사를 쓰신다. 이 변화는
예수께서 베드로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그의 처지로 내려가신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마침내 베드로는 영혼의 평화를 느끼며 답한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21,17) 이렇듯 죽기까지 낮추시고 순종하시어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도 똑같이 낮은 곳으로 내려오시어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는 왜 무엇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는가? 우리는 사랑 때문에 사랑을 위하여 부름 받았다. 그런데 사랑하지 않고 그분의 사랑을 잊은 채 살아간다면 살아가는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 어떻게 이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해야 할까? 모든 순간에 사랑을 실천해야 하며, 모든 것에 사랑이 배어있어야
하리라. 생각, 말, 행동, 기도, 받아들임, 기쁨, 고통 등 생활 전체가 사랑에 젖어들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비움과 낮춤을 통해
살아내야 할 성소다.
우리는 늘 연약하고
잘못에 떨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감싸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마음껏 자신을 내맡기자. 모든 것을 맡겨드리면서 앞만 보며 그분께 모든
것을 기쁘게 봉헌하여야겠다. 사랑을 체험하도록 베드로를 부르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사랑을 거듭 확인하신 다음 양떼를 돌볼 소명을 주시며,
다시 ‘나를 따라라’(21,19) 하고 초대하신다. 오늘도 매순간 기억하자! 우리의 소명은 사랑을 사는 것임을!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사랑
안에서가 아니라면 무의미하며 주님께도 이웃들에게도 기쁨이 되지 못함을! 저 낮은데서 시작해야 하는
사랑임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7)
-이영근수사-
주님!
당신께서는 아침상을
차려
사랑을 먹이시고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닭이 울기 전 세
번이나
배신할 줄을 빤히
아셨듯이,
오늘도 세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당신의 사랑을
배신할 줄을
빤히 아시면서도
여전히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심을 깨우쳐
주십니다.
아담이 어디에 있는
줄을 몰라서
찾으신 것이
아니듯,
저의 사랑을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제가 모르기에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한상우신부-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과
마주한다는
것은 사랑의
물음에 마주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물음
앞에 언제나 떨리고
놀라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우리를 끝까지
끌어안고 걸어오신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우리자신을
다시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을 다시
보게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우리자신을
정직하게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바로
사랑임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을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사랑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사랑은
다시
지고가는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십자가로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베드로를
아름답게 변화시켰던
십자가는 우리가 걸어가야
할 사랑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을
다시 보게됩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뜨겁게 만납니다.
우리의
삶에서 십자가는 뺄 수 없는
진심어린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십자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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