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야기 14부- 마라톤의 철학, 그들이 달리는 이유
인생은
반환점이 없는 마라톤이다.
지난 9월27일 여의도에서 열리는 바다의 날 하프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 한 시간 30분을 목표로 두고 뛰었지만 실제 기록은 2시간 4초였다. 그동안 핸드폰에 있는 앱을 사용해 연습을 했고, 출발전 목표거리를 21km로 설정하고 출발했다. 하지만 실제로 결승선을 통과한 거리를 재어보니 29km였다. 그동안 20km를 설정해 달렸던 거리가 실제로는 15km였던 셈이다. 어쩐지 내 체력으로 20km의 거리를 1시간30분에 주파한다는게 믿기지 않았었다.
15km지점에 다달았을때 부터 체력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고 페이스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17km를 지나면서 더는 달리수 없다고 몸이 거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 잠시 쉬었다가는 다시는 뛸 수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걷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지만 멈출수는 없었다.
마라톤의 중독,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이 마라톤을 끊지 못하는 이유중에 하나가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때문이라고 한다. 러너스 하이라는 용어는 1979년 미국의 심리학자 A.J 멘델이 처음 사용했는데, 달리다가 더 이상 달릴 수 없다는 지점(dead point)에 이르면 몸이 언제 그랬냐는 듯 가뿐해지는 현상을 말한다.
인간의 신체는 운동강도가 점점 높아져 몸이 필요로 하는 산소가 줄어들때 뇌하수체 전엽에서 엔돌핀(endorphin)을 분비시킨다. 엔돌핀은 인체내 몰핀이라는 뜻의 (endogeneous morphin)에서 유래한 것으로 몰핀보다 100배나 더 강한것으로 알려져 있다.
러너스 하이를 경험하고 싶은 사람은 운동의 강도를 높여 심박수가 1분에 120회 이상으로 30분 가량을 달려야 한다. 나는 평소에 운동강도를 그리 높게 유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러너스 하이를 경험하지는 못했다.
산소 부채 현상
사람의 신체는 몸속에 있는 포도당을 태워 에너지원을 얻는 방식이기 때문에 산소를 필요로 한다. 처음에는 운동강도가 높지 않아 근력이 필요로 하는 산소의 공급은 원활하다. 하지만 운동강도가 높아지면 연소에 필요한 산소를 충분히 공급받지 못하게 되고 이내 산소부족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강도높은 운동이 끝난 경우에도 숨을 헐떡이는 이유는 몸이 필요로 하는 산소를 계속하여 공급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강도높은 운동시 산소섭취량이 산소수요량보다 적어지게 되는 현상을 생리학적 용어로 '산소 부채 현상'이라 한다.
ⓒ산소부채 현상
러너스하이가 발생하는 원인도 산소부채 때문으로, 산소부족 상태로 오랫동안 운동하면서 생기는 젖산의 축적때문에 급격한 피로가 밀려오기 때문이다. 보통 신체가 감당해 낼수 있는 산소부채의 최대값은 일반인의 경우에는 5ℓ에 불과하지만 훈련된 운동선수의 경우에는 10~15ℓ나 된다. 즉 신체적으로 단련된 사람은 젖산이 높은수준까지 축적되는 것을 이겨낼 수 있는 심리적 단련이 되어 있는 사람이다.
러너스하이를 경험한 사람은 마약에 취하듯 엔돌핀에 중독되어 달리기를 계속한다고 하지만, 사실 마라톤은 운동 중에서 가장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운동이 맞다. 하지만 마라톤은 인내하며 인내하며 한 발 한 발 내딛는 삶과 같고, 달리기를 시작하면 다른 운동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운동이기도 하다.
마라톤이 주는 정신적인 즐거움은 뛴다는 자유, 고통스러운 쾌감, 살아있다는 존재감이다. 인간이 동물인 이유는 움직이기 때문인데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이 뛰는 것을 싫어하고 과거와는 달리 굳이 움직일이 그리 많지 않다. 마치 한 자리에 심어진 식물같은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나의 어린시절을 회상해보면 산으로 뛰고, 들로 뛰며 자연속으로 내달리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요즘 아이들은 불쌍하게도 뛰고 싶어도 뛸 공간이 부족하고, 도시에서는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대부분으로 층간 소음때문에 아이들보고 뛰지 말라고 한다. 왜 아이들은 왜 뛰어 노는 것을 좋아할까. 뛴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이고 유희일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볼때 마라톤은 인간의 본능을 일깨우는 진실된 스포츠다.
하지만 마라톤은 몸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정신을 위한 운동이다. 달리는 행위는 정신에 더 큰 유익이 있다.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우리의 뇌는 달리는 행위에 집중하기 위해 불안, 근심, 걱정, 우울함, 스트레스 등의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을 날려버린다. 머리 속을 어지럽게 하던 온갖 고뇌와 걱정과 근심들이 사라지면 육체가 느끼는 것보다 더 큰 상쾌함을 체험한다. 그래서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마라톤처럼 좋은 운동이 없다. 오십이 넘어 시작한 마라톤을 좀더 빨리 시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제 인생의 반환점에 도달했을 뿐이니 결코 늦은 나이는 아닐 것이다.
인간의 지구력
인간은 근력, 민첩성, 순발력, 균형감각 등과 같은 신체 능력만을 가지고 비교했을때에는 자연계에서 가장 열등한 동물이다. 하지만 인간은 첨단문명을 창조해내었고 자연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일등공신은 인간의 지능이다. 그런데 인간의 최대 장점은 지능만 있는것이 아니다. 또 다른 하나의 장점이 있는데 그것은 지구력이다. 자연계에서 오래 달리는 능력, 즉 지구력만을 따지면 인간이 단연 최고이다. 지구력의 의미는 '오랫동안 버티며 견디는 힘'이지만, 내가 얼마나 오래버틸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몸이 아닌 뇌이다. 그래서 지구력을 다시 정의한다면 그만두고 싶은 충동과 계속해서 싸워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힘이라고 할수 있다.
말도 오래 달릴수 있는 동물이긴 하지만 인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영국 웨일스에는 매년 인간과 말의 35km 마라톤 경주대회가 열린다. 10km이내의 거리에서는 말이 인간과 비교도 안되게 빠르지만 30km가 넘어가면 말의 지구력은 급격히 떨어지고 인간에게 따라잡히기 시작한다. 실제로 인간이 우승하는 경우도 있다. 거리를 50km로 늘리면 100% 인간이 말을 이긴다. 물론 지구력이 좋기로 유명한 몽골말과 같이 50km를 달려도 인간에게 뒤지지 않는 종도 있다. 아무리 열등한 체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도 몇 달만 연습하면 30km정도는 달릴 수 있다. 또한 물공급만 충분하다면 하루 100km까지도 이동할 수 있는게 인간이다. 자연계에 속하는 동물 중에서 이러한 생물체는 인간이 유일하다.
인간에게 이러한 지구력이 가능했던 이유는 몸에서 털이 사라지고 2족 보행을 하면서 부터이다. 인간의 2족 보행은 4족에 비해 에너지 소모가 적어 연비가 좋다. 또한 대부분의 동물들은 몸에 털이 나있기 때문에 쉽게 몸에서 발생하는 열을 방출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은 몸에서 털을 없앤 결과, 땀샘을 통해 체온을 발산시켜 몸의 체온을 유지하고, 항상성을 지킬수 있게 된다. 땀의 배출을 통한 체온의 발산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최고시속 120km로 달릴수 있다는 치타도 고작 200m정도를 고작 20초 정도만 달릴 뿐이다. 치타가 그 이상을 달릴다면 체온이 급격히 올라가고 사망에 이를 것이다.
대부분의 육식동물들은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헤메지 않는다. 지근거리에만 어슬렁거리며 발견하는 먹잇감을 노릴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사냥을 위해서라면 매우 먼 거리까지도 이동한다. 신체능력이 약한 인간이 사냥에 성공할수 있었던 이유도 먼거리를 이동할수 있는 지구력 때문이다. 지금도 수렵생활을 하는 부족들은 사냥감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지속적으로 추격하여 지쳐 쓰러지게 만드는 방법으로 사냥을 한다. 인간은 사냥을 통해 고기와 같은 고단백질을 섭취하기 시작하면서 뇌가 커지게 되었고 지능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산모가 아기를 임신하여 10개월 동안 품은 다음에 출산을 하는 것은 아기의 뇌의 크기를 고려할때 10개월이 최적의 타이밍이기 때문이다. 그 이상을 넘어가면 아기의 뇌가 급속히 커서 출산시 산모가 아기 모두가 위험해진다.
뛰어난 인간의 지구력에도 한계는 있다. 생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지구력은 휴식대사량(RMR=resting metabolic rate)의 2.5배 수준이라고 하지만, 마라톤에 있어 인간의 한계는 계속하여 깨져 왔다. 최근에는 마의 벽이라고 불리는 2시간벽이 케냐의 마라토너 킵초게에 의해서 깨졌다. 킵초게는 2016년 오스트리아에서 1시간 59분 40초의 기록을 세웠다. 세계육상연맹이 인정하는 공식적인 마라톤 대회는 아니었고 41명의 페이스메이커를 동원해 바람의 저항을 줄인 대회였기 때문에 공식적인 세계기록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마의 2시간 벽을 허물었다면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인간의 정신력
마라톤에 있어 정신력의 중요성은 모든 선수들이 느끼는 것이다. 마라톤은 신체와의 싸움이 아니라 정신과의 싸움이다. 킵초게는 "인간에게 한계는 없다"라고 하면서 자신을 계속하여 담금질하며 운동을 해 왔다. 손기정 선수도 "인간의 몸이 할수 있는 일은 어느 정도까지 뿐이다. 그 다음은 마음과 정신의 영역이다".라고 했다. 손기정 선수의 말처럼 육체의 한계는 정신력의 한계일지 모른다. 달리기를 시작하는 것도, 힘든 과정을 견디는 것도 모두 정신력이다. 물론 그 정신력을 담을수 있는 육체도 필요하지만 정신력이 먼저다. 일단 정신력이 커지면 그 정신을 담는 육체라는 그릇도 커진다.
달리기의 본질은 고통과 마주하며 인내하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 중도에 포기하지는 않는다. 마라톤에서 1등하는 선수들은 그냥 그 고통을 참는다고 한다. 체력에 한계에서 고통스럽게 밀려오는 그 고통을 온몸으로 마주하며 묵묵히 참는 것이다. 그 인내가 그동안 각성되지 않았던 잠재능력까지 끌어올린다. 달리기의 본질이 참는 것이라면 인생의 본질 역시 인내이다.
인생을 살면서 늘 좋은일 하고 싶은 일, 재미있는 일만 하며 살 수는 없다. 하기 싫은 힘들고 어려운 일도 해봐야 한다. 참고 견딜줄 알아야 육체적,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그 성장을 해야 인생을 수월하게 잘 살아갈 수 있다.
인생은 반환점이 없는 마라톤이다.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을
후회 없이 마무리하기 위해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 손기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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