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끝에서 보이는 것들
삶이 끝부분으로 향하니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오십대 중반을 넘기고 다니던 직장에서 퇴직한 친구들이 많을 때였다. 형편이 괜찮은 친구는 사무실을 얻어 낮에는 거기 나가서 텔레비젼을 보면서 소일하고 있다고 했다. 여러명이 모여 당구를 치기도 하고 포커를 하기도 했다.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포커를 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돈을 잃으면 삐져서 벌컥 화를 내고 다시는 안 놀겠다는 친구가 있어. 전화를 걸어도 받지를 않아.”
당구를 치다가도 싸우고 정치 얘기를 하다가도 멱살 다툼이 일어나는 인생 후반부 초기의 풍경이었다.
중국어 공부를 하거나 마라톤을 하는 경우는 보다 건전해 보였다. 나이 육십을 넘어 마라톤을 시작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나이 육십에 마라톤에 도전했지. 대회에 나가 3시간 30분대에 완주했어. 그런데 한참을 뛰다 보니까 내가 왜 뛰지?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튀어나오더라구.”
그는 자기 인생에서 왜 그렇게 힘겹게 뛰어왔느냐고 자신에게 묻는 것 같아 보였다. 먼저 떨어진 낙엽들이 비를 맞고 초라하게 흙으로 돌아가듯이 사회의 밑바닥으로 침잠해 버린 친구들도 있었다.
금융위기때 일찍 실업자가 된 친구들이 있다. 돈을 벌지 못하니까 집안에서 투명인간이 됐다. 돈이 없으니까 친구를 만날 수도 없다. 방에만 죽치고 있으면서 죽을 때만 기다리는 상황이라고 했다.
한 친구는 어두운 방에 혼자 있다가 어느 날 집을 나가 노숙자가 됐다. 가족이 을지로역 입구에 있는 그를 찾아갔지만 그는 다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공대를 졸업하고 건설회사에 취직해 활기차게 일하던 사람이었다.
배가 침몰할 때는 삼등칸부터 물속으로 들어간다. 시간문제지 이등칸이나 일등칸의 운명도 비슷한 것 같았다....
(중략)
내 나이 육십 무렵 나머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이냐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이웃에 살고 있는 나보다 열살 가량 위인 대학 선배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나름대로 성실하게 세상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칠십이 넘게 살아보니까 사람이 사는 게 대개 비슷하고 달라도 몇 종류 되지 않는 것 같아. 솔직히 말해 쾌락을 추구하면서 사는 경우가 대부분 아닌가? 골프 치고 여자와 연애하고 그런 거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 돈이 필요한 거야. 그게 보통 사람들의 삶이야.
그 다음이 윤리적인 삶이지. 개결한 양심을 가지고 도덕적으로 살려고 하지. 그런 삶은 좀 차가와 보였어. 남에게 자기같이 살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 보였지. 자칫 잘못 건드리면 깨져버릴 유리병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었어.
마지막이 종교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지. 철저하게 자기를 절제하고 수도승 같은 삶을 살아가는 거야. 내 경우는 이제 10년 정도 살면 잘산다고 생각하고 있어. 물론 그 전에 차에 치이거나 내가 앓고 있는 당뇨로 죽을 수도 있지. 하여간 죽는다는 건 확실해.
엄 변호사 당신도 나보다 조금 더 살지는 몰라도 죽는 건 기정사실이고 문제는 얼마 안 되는 남은 기간을 어떻게 투자하냐는 거 아닐까?
나는 이제 종교적인 삶에 나를 던져 보기로 했어. 여태까지 70년이 넘게 살아왔는데 항상 의심하고 살아왔어. 믿음도 없었지. 그러니 죽음 후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왜 없느냐고 따질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죽음이 영원한 잠이거나 무(無)라도 해도 나는 할 말이 없어.
그런데 이제부터 남은 기간을 종교에 투자하고 죽었는데 만약 천국이 있고 영생이 있다면 대박아니겠어? 일종의 겜블같은 거지. 천국도 여러층으로 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나는 높은 층은 바라지도 않아. 그냥 보통사람들이 가는 제일 아래층이면 감사해. 종교적 삶이 별게 아니라고 생각해.
항상 감사하고 기뻐하고 기도하면서 성경대로 사는 게 아닐까? 그렇게 해 볼거야.”
세월이 흘러 그는 팔십대 중반 가까이 됐다. 여러 병으로 곧 꺼질 촛불 같던 그의 생명력이 더 왕성해 진 것 같다. 삶의 끝에 내가 직접 본 것을 조심스럽게 소개하고 싶다.
[출처] 삶의 끝에서 보이는 것들|작성자소소헌